서 양 미 술 자 료

[스크랩] 우리 그림 한국화 이야기3

bizmoll 2009. 2. 3. 17:14

동자견려도

끙끙대며 고삐 당기는 아이와 고집 부리는 당나귀


 

 

동자견려도, 김시, 16세기, 비단에 채색, 111 cm × 46 cm, 호암미술관 소장

이 그림은 어느 계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까요? 하늘은 높고 말은 통통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바로 가을입니다. 가지가 멋지게 휘어진 소나무 아래, 여기저기 고운 단풍이 들었습니다. 먼 구비 산골을 돌아온 맑고 차가운 개울물이 졸졸 소리내며 흐르고 있습니다.

통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당나귀와 아이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습니다.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란, 동자가 당나귀를 끌고 있는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오히려 당나귀가 아이를 끄는 그림 같습니다.

양 손에 바짝 쥔 고삐는 팽팽한데, 옴짝달싹하지 않는 모양이 우습기만 합니다. 당나귀는 네 발이고 아이는 두 발입니다. 당나귀는 평평한 곳에 딱 버티고 있고, 아이는 통나무 다리 위에 엉거주춤 서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당나귀는 말보다 몸집은 작지만, 귀가 큽니다. 말보다 빠르지는 않지만 체력은 강해서 병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소나 말처럼 물을 많이 마시지 않고도 오래 버틸 수 있는 점도 당나귀의 특징입니다.

말은 주로 무신들이 탔고, 당나귀는 주로 문신들이 탔습니다. 키가 낮아 타기에 편리하고, 빠르지 않으니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천천히 산책을 하거나, 무거운 짐을 싣고 이동하기가 쉽습니다.

 

이 그림 속에 당나귀 주인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당나귀 등에서 내려 산기슭을 걷고 있거나, 친구들과 모여 시를 읊고 있는지 모릅니다.

“얘야,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 저 나무 아래 매어 둔 당나귀를 이리 데려오너라.”

아마 주인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나귀가 콧바람을 킁킁 일으키며 고집을 부리고 서 있는 바람에 아이는 그만 조바심이 납니다.

당나귀가 요지부동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경치 좋은 곳에서 더 있고 싶어서? 아니면 미끄러운 통나무 다리가 위험해 보여서? 글쎄요. 당나귀는 보기에 만만한 상대 앞에서는 간혹 이렇게 심술을 부릴 때가 있답니다.

우리 속담 중에, ‘당나귀 못된 것은 생원님만 업신여긴다.’라는 말이 있지요. 자기보다 못났다고 여기는 사람을 함부로 대할 때 흔히 쓰는 말입니다. 귀를 바짝 뒤로 세운 걸 보니 당나귀가 쉽게 움직일 성싶지 않습니다. 아마 주인이 기다리다 못해 쫓아와야 실랑이는 끝날 듯합니다.

 

이 당나귀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옛날에 한 어리석은 남편이 시장에 가서 수박을 한 덩이 사 왔습니다. 가난한 아내는 화가 나서 소리 질렀습니다.

“당장 나가서 그 수박을 양식으로 바꿔와요!”

남편은 다시 장으로 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나귀 알 사려! 잘 생기고 늠름한 당나귀 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어느 바보 여자가 그걸 샀습니다.

바보 여자는 집에 돌아와 당나귀 알을 부화시키려고 따뜻한 이불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온 바보 아내의 남편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건 도대체 무슨 냄새야?”

바보 아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불을 확 들췄습니다. 마침 길 잃은 산토끼 한 마리가 이불 속에 숨어 있다 잽싸게 문 밖으로 내뺐습니다. 바보 아내는 산토끼를 쫓아갔습니다.

산토끼는 문이 열려 있는 집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바보 아내는 산토끼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 집의 당나귀가 새끼를 낳고 있었습니다. 바보 아내는 곁에 서 있는 주인에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 새끼는 내 차지요!”

당나귀 주인은 영문을 몰라 바보 아내를 쳐다보기만 하였습니다.

“내가 시장에서 당나귀 알을 산 적이 있지요. 거기서 작은 새끼가 나왔는데, 그만 당신네 당나귀 입으로 쏙 들어가 버렸지 뭐요. 지금 그 녀석이 이렇게 다시 나타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당나귀 주인은 바보 여자의 황당한 주장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때를 놓칠 세라 바보 여자는 갓 태어난 아기 당나귀를 안고 한숨에 자기 집막?달려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지기로회도

오래 사귀어 온 벗들의 즐거운 만남


 

 

남지기로회도(이기룡), 1629년, 비단에 채색, 116.6 cm × 72.4 cm,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무슨 잔치가 있는 벌어졌을까요? 반듯한 기와집 안에 여러 사람이 빙 둘러앉아 있습니다. 한 사람 앞에 상이 하나씩 놓여있고,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맛있는 술과 음식을 나르고 있습니다.

기와집 앞은 네모난 연못이 있고, 연못 안에는 연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동그란 잎과 다양한 모양의 연꽃이 언뜻 무대 아래 앉아 있는 관중들처럼 보입니다. 머리를 풀어헤친 듯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안개 자욱한 저편으로 푸른 숲이 살짝 보입니다.

 

이 그림은 조선 시대 선비들의 계 모임을 담았습니다. 이런 그림을 ‘계회도’라고 하는데, 그 중 벼슬이 높고 나이가 일흔이 넘은 사람들의 계 모임을 ‘기로회’라고 하였습니다. 남지(南池)는 앞마당의 연못을 말하니, 이 그림은 연못가의 기로회 모임을 담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계 모임은 뜻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만남이 쉽지는 않기 때문에, 대개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서 화가를 초청하여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그림은 모두 열두 명의 회원이 참가하였으니, 그림 또한 열두 장이 그려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마 각자 모임이 끝난 다음 집으로 가져가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했겠지요.

직업 화가인 이기룡은 다정한 친구간의 즐거운 만남을 깔끔한 짜임새와 색깔로 표현하였습니다.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앉아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참 품위 있게 느껴집니다.

 

우리 조상들은 친구간의 의리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 만남도 이 그림처럼 멋이 있었습니다. 술잔을 나누고 기분이 좋으면 돌아가며 노래를 하거나, 시를 짓고 붓글씨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오랜 우정은 소중한 것입니다.

 

조선 태종 때에 친한 친구 네 명이 있었습니다. 어느 봄날 네 친구는 함께 과거를 보러 갔는데, 그만 모두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수원에 있는 한 연못의 정자에 함께 모였습니다.

“오늘은 참 운이 없는 날일세.”

한 친구가 힘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곁에 앉은 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습니다.

“맞는 말일세. 문제가 너무 까다롭더란 말이지.”

사실 문제가 까다롭다 해 봐야 어렵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실력이 없으면 대개 남의 탓을 하거나 운수 타령을 하게 되지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한 친구가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수는 무슨! 실력이 부족한 거지. 더 노력해서 다음에 합격할 생각을 해야지.”

이 친구 말이 맞습니다. 그동안 공부한 데서 문제가 나오지 않았다고 원망할 게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더 보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현명합니다. 썰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친구들아! 지금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을 것이 아니라, 다음에 과거에 합격해서 또 이 자리에 모일 궁리를 하는 게 어때?”

이 말을 들은 나머지 셋은 모두 귀가 솔깃하였습니다.

“오늘의 슬픔은 나중에 좋은 안주거리가 될 거야. 그런 의미에서 내가 다시 모인 것을 상상해서 시 한 수 읊어 보지!”

넉살 좋은 이 친구는 눈을 지긋이 감고 시를 읊기 시작했습니다.

 

가랑비가 보슬보슬

눈발은 펄펄 날릴 때

밝은 달빛이 비치며

연꽃 향기 가득한데

우리 넷이 여기 모여

술 마시고 노래 부르네

 

노래를 듣고 있던 친구들 중 하나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아! 가랑비와 눈발이 함께 내릴 수 있는 거야?”

곁에 있던 친구도 맞장구를 치며 말했습니다.

“눈 내리는 데 달빛과 연꽃은 또 무엇이고?”

그러고 보니 시라고 해 놓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맥이 빠진 친구들을 웃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모두들 한바탕 웃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뒤에 과거에 합격한 후, 이 날의 일을 회상하며 다시 그 자리에 모여 시를 짓고 즐겼다고 합니다.

 

 

 

 

 

 

초충도

세밀한 풀벌레 그림에 닭도 속아 '콕콕'


 

 

초충도(신사임당) 16세기, 종이에 채색, 각 33.2 cm × 28.5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풀벌레가 그림에 가득합니다. 붉은 꽃을 달고 있는 식물은 여뀌입니다. 보랏빛 메꽃은 여뀌 줄기를 타고 올라 나팔 같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화면 위에는 잠자리가 한 마리 있는데, 온통 까만색입니다.

날개가 가늘고 몸이 날씬한 모양으로 보아 물잠자리이지요. 땅 위에는 거만하게 생긴 사마귀가 앞발을 들고 무언가 노리고 있는 표정입니다. 이제 보니 꽃에서 꿀을 구하던 벌이 사마귀에 놀라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또 다른 그림 역시 등장하는 대상은 좀 다르지만 비슷한 구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뀌 대신에 조가 탐스런 이삭을 달고 있습니다. 키가 낮아 어찌 보면 강아지풀 같기도 한데, 메꽃 대신에 줄기를 차고 오르는 것은 오이입니다.

역시 다른 나무나 식물을 감고 올라가기 좋아하는 덩굴풀이지요. 아래쪽에 먹음직스런 오이가 매달려 있고, 위쪽에는 노란 꽃이 피어 있습니다. 꽃을 찾아 날아드는 벌의 잽싼 날개짓이 그럴 듯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땅 위에는 개구리 한 마리가 엉큼한 동작과 표정으로 땅강아지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풀벌레를 그린 그림을 ‘초충도(草蟲圖)’라고 합니다. 초충도를 그릴 때는 먼저 세밀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이 그림을 보면 거의 눈높이가 땅바닥과 맞춰져 있습니다.

사마귀와 개구리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사실 이들의 동작을 잘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몸을 낮추고 엎드려 들여다보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신사임당은 이처럼 섬세한 눈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생활 주변의 흔한 대상을 진지하게 관찰한 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사실을 바탕으로 그렸기 때문에 꾸밈이 없고 진실합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중에 한 점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름철 눅눅한 습기를 없애려고, 햇볕 드는 날 그림을 잠깐 마당에 내놓았습니다.

마침 집에서 기르던 닭이 와서 그림 속의 풀벌레를 쪼아 댔습니다. 주인은 얼른 마당으로 나가 그림을 살펴보았는데, 그만 벌레가 그려진 부분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그는 닭의 눈을 속일 만큼 살아 있는 듯이 그릴 수 있었던 신사임당의 정성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예술가로서 신사임당의 이런 마음 가짐은 자녀 교육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직접 자녀들에게 글공부와 그림, 글씨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고 검소한 태도를 늘 강조하였습니다. 이율곡과 같은 큰 선비 뒤에는 역시 신사임당 같은 어진 어머니가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검소하게 생활하며 자식 교육에 엄격했던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우리 역사에 많습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정구의 부인도 그 중 한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두 아들인 백주와 현주가 학교에 다녀오다 길에서 은 한 봉지를 발견했습니다. 형 백주가 이걸 집어서 소매 속에 넣었습니다.

“아니, 형! 남의 물건을 그냥 가져가면 어떡해!”

현주는 이렇게 말하며 물건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힘으로 형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화가 난 현주는 먼저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나중에 돌아온 백주는 대문 앞에 “은을 잃어버린 사람은 찾아가도록 하시오”라고 써 붙였습니다. 어머니는 모르는 일인 듯이 가만히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 은을 잃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은의 포장 상태를 설명해 보시오.”

백주는 이 사람이 정말 주인인지 확인해 본 후에 은을 돌려 주었습니다. 은을 되찾은 사람은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돌아갔습니다. 어머니는 백주를 불러 놓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백주야, 기왕 돌려 줄 물건이라면 그 자리에서 주면 되었지, 왜 집에까지 들고 와서 소란을 피우느냐?”

백주는 침착하게 말하였습니다.

“물건을 그냥 두면 누군가 함부로 집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비가 길에서 물건을 우두커니 들고 서 있는 것도 더욱 이상한 일입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두 형제를 다 칭찬하였습니다. 자녀들을 늘 신뢰하고, 끝까지 지켜 보며 의견을 경청했던 이런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 덕분에, 두 형제는 바르고 신망 있는 선비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설송도

눈 덮인 소나무… 고난 속 꿋꿋함의 상징


 

 

설송도 (이인상), 18세기, 종이에 수묵, 117.4 cm x 52.7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설송(雪松)은 눈 덮인 소나무를 말합니다. 공자의 말씀을 담은 책 ‘논어’에 이르기를, ‘날이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푸름을 알게 된다.’고 하였지요. 겨울이 되면 나무들은 대개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 서 있지요. 그러나 소나무나 잣나무와 같이 늘 푸른 나무들은 여전히 푸른 잎을 매달고 겨울을 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필 날이 추워진 다음에야 그 푸름을 알게 된다고 하였을까요? 따뜻한 계절에는 모든 나무들이 다 푸른 잎을 매달고 있으니 특별히 소나무나 잣나무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면 대개의 나무들은 그 푸르던 잎을 죄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기게 되지요. 이 때에 소나무ㆍ잣나무의 푸른빛은 유독 돋보입니다. 더군다나 눈이라도 내렸을 때, 흰 눈 속의 푸른빛은 더 짙고 분명하지요.

공자가 소나무ㆍ잣나무의 푸름을 빌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나무의 성질을 통해 사람이 본받을 점이 무엇인지 일깨우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행운과 불행을 두루 겪게 됩니다. 따뜻한 봄날은 마치 사람에게 다가오는 행운과 같습니다. 행복은 봄날에 핀 꽃처럼 달콤하니까요.

 

그러나 봄은 언제나 겨울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혹독한 겨울을 참지 못하면 봄 또한 그렇게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 때 혹독한 겨울 추위는 마치 사람에게 닥친 시련과 같습니다.

그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은 마치 소나무ㆍ잣나무가 잎을 떨구지 않고 추위를 이겨 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공자는 이런 나무의 변함 없는 푸름이야말로 사람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도리와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인상의 설송도 역시 이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척박한 바위틈에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습니다. 기름진 땅이 아니라서 나무 뿌리는 앙상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도 화면 가운데 소나무는 더욱 꼿꼿하게 서 있습니다. 화가는 흰 눈을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주변을 어둡게 하여 그리지 않은 부분을 희게 남겨 두었습니다. 커다란 나무도 다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무의 올곧은 둥치만 화면 가운데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반듯한 나무 뒤에는 기울어진 나무를 배치하여 너무 단조롭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인상은 강직한 선비였습니다. 그는 조선 후기에 이름 있는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벼슬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바르고, 학문과 예술에 뛰어나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은 역시 가난하지만 꿋꿋한 그의 정신을 말해 주는 듯 높고 맑은 기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이처럼 고난 속에서도 신의를 잃지 않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설씨녀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신라 진평왕 때 일입니다. 경주에 ‘설씨’라는 늙은 홀아비가 딸과 살고 있었습니다. 설씨의 딸, 곧 ‘설씨녀’는 슬기롭고 예뻤습니다. 그런 어느 날 늙은 아버지에게 세금을 내듯이 일정 기간 동안 병사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설씨녀는 병들고 늙은 아버지 대신 자기가 나가고 싶었지만, 여자라서 그럴 수도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웃에 마침 설씨녀를 좋아하는 ‘가실’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가실은 자기가 설씨 대신 군대에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설씨 부녀는 놀라는 한편 반갑기도 하였습니다. 설씨는 가실에게 고마워하며, 무사히 돌아오면 딸과 혼인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가실은 매우 기뻤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먼저 꺼내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설씨녀는 작은 손거울 하나를 깨뜨려, 한 조각은 가실에게, 또 한 조각은 자기 몸에 간직하였습니다.

약속한 3 년이 지나도 가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기다리다 지쳐 딸에게 다른 신랑감을 찾아 보도록 하였습니다. 설씨녀는 눈물로 호소하였습니다.

“아버지, 사람으로서 어찌 한 번 맺은 약속을 저버릴 수 있岷楮?”

그러나 아버지는 몰래 이웃 청년을 만나 결혼 날짜를 잡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가실이 돌아왔습니다. 거지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어, 아무도 미처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실은 거울 한 조각을 꺼내 보였습니다.

설씨녀는 자신의 거울 한쪽과 맞춰 보았습니다. 설씨녀는 틀림없이 가실이 돌아온 것을 알고 정말 기뻤습니다. 가실도 끝까지 변치 않고 기다려 준 설씨녀가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둘은 정식으로 혼인하여 잘 살았습니다.

 

 

 

 

 

 

세한도

쓸쓸한 풍경화, 그러나 깃든 뜻은 깊고 따뜻하기만


 

 

세한도(김정희) 1844년, 23 cm * 69.2 cm 종이에 수묵, 개인소장

 

 

세한도는 간단한 그림입니다. 아무런 장식이 없이 소박한 집이 한 채, 나무 네 그루가 전부입니다. 사람은커녕 그림자 하나도 없고, 나무 이외에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기가 없는 붓질은 건조하고 삭막합니다. 마당과 하늘은 텅 비어 있고, 집은 겨우 몇 개의 선으로 윤곽만 그렸습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쓸쓸한 풍경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림 오른쪽 위 빈 공간에는 가로로 이 그림의 제목에 해당되는 세한도(歲寒圖)라는 글이 있습니다. 세한은 추운 시절을 말합니다. 세한도란 그러므로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제목 옆에는 세로 글씨로,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우선이, 이 그림을 보게.’라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완당(阮堂)’이라고 적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완당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던 김정희(1786년~1856년)의 호입니다. 독특한 글씨체인 추사체의 장본인이지요. 추사나 완당은 그가 즐겨 쓴 여러 가지 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들입니다.

 

그는 명문가의 자손으로 높은 벼슬을 지냈던 아버지를 따라 젊은 시절부터 중국을 왕래하며 그곳의 학자들과 교류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유명한 학자들은 김정희의 학문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였고, 특히 그의 글씨와 문장을 칭찬하였습니다.

김정희는 30대 초반에 과거에 급제한 후로 순탄한 벼슬살이가 이어지는 듯했으나,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먼 섬과 변방에서 유배 생활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특히 제주도에서 무려 8 년을 지내는 동안 몹시 쓸쓸하고 외로운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고 그림 그리는 일로 허전하고 괴로운 마음을 달랬습니다. 벼슬이 높은 시절에는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대개는 등을 돌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배객을 가까이하게 되면, 자신도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도 늘 김정희를 가까이한 사람은 제자인 이상적(李尙迪, 1804년~1865년)이었습니다. 그는 공무로 중국을 드나들며 어렵게 구한 책을 두 번씩이나 보내 오곤 하였습니다. 김정희는 제자의 그 따뜻한 마음과 변함 없는 의리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어느 날은 이 제자를 위해 그림을 한 점 그렸습니다. 세한도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림 속의 ‘우선’은 바로 이상적의 호입니다. 세한도의 쓸쓸한 풍경은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 김정희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집 오른쪽에는 소나무가 두 그루, 왼쪽에는 잣나무가 두 그루 있습니다. 그런데 왼쪽의 비슷하게 생긴 잣나무와 달리, 오른쪽 소나무 두 그루는 그 모양이 좀 다릅니다. 한 그루는 둥치가 굵고 가지가 굽었습니다. 그 곁에 반듯하게 선 나무가 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스승과 제자가 나란히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늙은 스승 김정희를 곁에서 지키는 젊은 제자 이상적 말입니다.

김정희는 이 사연을 글로 써서 그림에 이어 붙였습니다. 추운 날에 소나무와 잣나무을 그린 까닭도 적었습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둘 다 늘 푸른 나무입니다. 날이 좋고 따뜻할 때는 늘 푸른 나무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모든 나무들이 푸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울이 돼서 뭇 나무들의 잎이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을 때면 비로소 소나무나 잣나무가 얼마나 의연한지 알 수 있습니다. 김정희는 소나무의 의연함을 빌어 제자의 한결같은 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잣나무를 통해, 어려움 속에도 희망이 가까이 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상적은 멀리 유배지에서 인편으로 보낸 스승의 그림과 글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동안 그림을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중국에 갈 때도 이 그림을 가져갔습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 그림에 깃든 사연을 읽고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다투어 그림 끝에 시를 써서 붙이니, 그림은 한없이 길어졌습니다. 10 m가 넘는 두루마리가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

세한도의 그림 부분은 간단하지만, 그림에 깃든 마음은 깊고 따뜻합니다. 그림을 보고 느낌을 이어?쓴 뮌?사람들의 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암탉과 병아리

병아리 위하는 암탉의 따뜻한 모성애 화폭에 가득


 

 

변상벽, 암탉과 병아리, 17세기, 비단에 수묵 담채,
94.4 X 44.3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병아리 위한 암탉의 따뜻한 마음 그림에 가득

따뜻한 봄날입니다. 마당가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괴석이 놓여 있고, 그 곁에 흰 꽃이 피어 있습니다. 꽃을 따라 벌과 나비가 모여듭니다.

마당에는 파릇한 새싹이 돋아 있고, 갓 태어난 병아리들이 암탉을 따라 나왔습니다. 풍성한 털이 탐스러운 암탉은 먹이를 발견하면 구구 소리를 내며 병아리를 부릅니다. 병아리들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쪼르르 달려와 어미의 부리에 있는 먹이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툽니다.

 

남이 차지한 지렁이를 물고 빼앗으려는 놈, 끝내 놓지 않으려고 물고 늘어지는 놈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러다 목이 마르면, 깨진 접시 위로 올라가 물을 마십니다.

화가 변상벽은 고양이뿐만 아니라 이런 닭 그림도 잘 그려 변계(卞鷄)라는 별명을 하나 더 얻었습니다. ‘계’라는 한자는 닭을 나타내지요. 그림에서 보듯 변상벽의 닭 그림은 아주 치밀한 관찰에 의해 그려졌습니다. 닭의 생김새는 물론 털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자세히 묘사하였지요. 겉 모습뿐만 아니라 병아리들을 위한 암탉의 따뜻한 마음도 잘 나타내었습니다. 암탉의 눈을 보면, 새끼를 위한 마음이 잘 느껴집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정약용은 이런 암탉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하여 시를 썼습니다.

 

곤두선 목털은 고슴도치를 닮아

제 새끼 건드리면 꼬꼬댁 쪼아대지.

낟알을 얻으면 살짝 쪼는 체 하고

새끼 위한 마음으로 배고픔을 참아내지.

 

‘암탉과 병아리’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암탉의 따뜻한 모성애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닭의 특징과 성품에서 다섯 가지 배울 점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첫째, 문(文)입니다. 닭은 글공부를 잘 하지요. 공부를 많이 해야 시험을 잘 치르고 높은 벼슬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닭의 붉은 벼슬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무(武)입니다. 닭은 무술을 익혔습니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이 이를 증명합니다. 특히 발가락은 삼지창처럼 날카롭지요. 셋째, 용(勇)입니다. 닭은 용감합니다. 싸우면 물러서지 않고 기어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넷째, 인(仁)입니다. 닭은 인자합니다. 모이를 보면 서로 부르고, 함부로 다투지 않습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신(信)입니다. 닭은 믿음과 의리를 지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항상 새벽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닭의 훌륭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닭은 무서운 해충을 퇴치하여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 주었습니다.

 

옛날에 황해도 땅에 계림사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이 절에는 스님이 여럿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하룻밤에 한 명씩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언제 자신도 누군가에게 잡혀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남아 있는 스님들도 늘 걱정이 컸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고승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허, 별거 아니야. 내 말만 들으면 돼.”

스님들은 고승에게 비결을 알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절 마당에 닭을 1000 마리만 키워 봐.”

고승은 이렇게 말하고 조용히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계림사의 스님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천 마리의 닭을 구해 절 마당에 풀어 놓았습니다. 닭들은 모이를 주지 않아도 절 구석구석을 뒤져 곤충을 잡아먹고 잘 자랐습니다. 닭이 들어온 이후 스님이 사라지는 일도 없었습니다. 스님들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한 스님이 닭 부리에 피가 묻어 있는 걸 알았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닭이 가는 곳을 끝까지 따라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한 발이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지네가 축 늘어진 채 죽어 있었습니다. 이 지네는 그 동안 절로 기어들어와 스님들을 잡아먹었는데, 닭 1000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죽인 것이었습니다. 스님들은 그제서야 닭 부리에 피가 묻은 이유를 알았고, 사람을 잡아먹은 그 큰 지네를 이긴 닭들이 고마워 정성껏 보살폈다고 합니다.

 

 

 

 

 

 

 

묘작도
장난스런 표정의 고양이와 밝고 명랑한 참새


 

 

묘작도- 생생한 표정과 부드러운 털까지 세밀한 묘사 돋보여

묘작도(猫雀圖)는 고양이와 참새를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누구에게 선물하면 좋을까요? 고양이를 특히 귀여워하는 친구에게 선물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옛날부터 개와 함께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온 애완 동물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 그림을 칠순을 맞은 분에게 선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목의 한자는 고양이 '묘(猫)'에 참새 '작(雀)'이지요. 고양이를 나타내는 한자 '묘(猫)'는 칠십을 나타내는 '모(耄)'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칠순을 축하하는 그림으로 많이 그려졌습니다.

 

그럼 참새는 또 어떤 의미일까요? 참새는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새입니다. 사람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노래하며 먹이를 구하는 참새를 보고 참 밝고 명랑한 새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참새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쁜 일이 있을 걸로 알았습니다. 이런 선물을 받으면 틀림없이 기쁘고 행복하겠지요.

 

이제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몸 아래쪽은 하얗고, 위쪽에 검은 줄 무늬가 있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있습니다. 몸 색깔이 진한 고양이는 땅 위에 앉아 나무 둥치를 붙잡고 있는 고양이를 올려다봅니다. 마치 재롱을 부리는 아기 고양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듯합니다. 나뭇가지 위에는 여섯 마리의 참새가 있습니다. 갓 돋아난 나뭇잎들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닙니다. 따뜻한 봄날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화면에 가득합니다.

이 그림은 조선 시대의 화가 변상벽이 그렸습니다. 그는 고양이를 잘 그리기로 소문이 나서 별명이 '변고양이'였습니다.

 

그 별명답게 그림 속의 고양이는 마치 살아 있는 듯 표정과 동작이 자연스럽습니다.

등과 꼬리의 부드러운 곡선은 고양이의 유연함을 잘 나타냅니다. 수없이 가느다란 선으로 치밀하게 그린 고양이의 털은 역시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줍니다. 말랑말랑한 발바닥과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무 둥치를 껴안은 고양이의 자태와 금방 뛰어내릴 듯 장난기가 가득한 고양이의 눈도 재미있습니다. 고양이의 치밀한 묘사와 달리 나무의 표현은 한결 거칠고 시원합니다.

 

화가는 화면 속의 대상을 요령 있게 잘 배치하였습니다. 화면을 1 : 3 정도 좌우로 나눈 나무는 아래쪽 끝을 구부려 그림이 딱딱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를 화면 중앙에 놓아 중심을 잡되, 아래쪽 고양이를 크게 하여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화면의 오른쪽 가운데는 시원하게 비워 놓아 따뜻한 봄 기운이 충만하게 하였고, 그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그림 위쪽은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는 가벼운 참새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와 같이 보기에 자연스러운 그림들은 사실 화가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양이하면 떠오르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원도 오대산에는 상원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조선 때 임금인 세조는 이 절에 예배하러 갔습니다. 법당으로 가는데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와 임금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원, 이런 고약한 녀석을 보았나."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하도 끈질기게 옷을 놓지 않자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필시 사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세조는 밖으로 나와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봐라. 법당 안을 샅샅이 뒤져라!"

놀랍게도 부처님을 모신 탁자 아래 자객이 있었습니다. 세조를 해치려고 칼을 품고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병사들은 자객을 끌어 내 꽁꽁 묶었습니다.

"놀라운 일이로구나."

세조는 그제야 자신의 목숨을 구한 고양이를 찾았으나, 이미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습니다. 세조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묘전(猫田)을 절에 내려 주었습니다. 묘전이란 '고양이의 밭'이란 뜻입니다.

또한 한 쌍의 고양이를 돌로 새겨 절에 세우게 하였는데, 지금도 이 절에 가면 법당 돌 계단 곁에 의젓한 고양이 석상이 놓여 있습니다.

 

 

 

 

 

 

 

오륜행실도

바른 예절 일깨우는 그림 도덕 책


 

 

오륜행실도, 전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채색, 21.7 cm × 14.7 cm,
호암미술관 소장.

오륜(五倫)이란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떳떳한 도리를 말합니다.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지켜 온 소중한 가치입니다.

오륜은 원래 중국의 고전인 ‘맹자’ 속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부자유친(父子有親)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친함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둘째 군신유의(君臣有義)입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의리란 서로 믿음으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지요. 셋째는 부부유별(夫婦有別)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하는 일이 다르듯이, 남편과 아내도 각기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넷째는 장유유서(長幼有序)입니다. 찬 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붕우유신(朋友有信)입니다. 친구 사이는 서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평소 이 다섯 가지 덕목을 줄줄 외우면서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좀 바뀌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대적인 차이일 뿐 그 가치가 아주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 사랑하고, 부부간에 각자 의견을 존중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를 믿음으로 사귀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는 오륜을 잘 따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 이름이자 이 책 속에 나오는 그림을 말합니다. 이 책은 조선 정조 때 제작된 것으로, 150여 명이나 되는 인물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사람, 임금에게 충성스러운 신하, 절개를 굳게 지킨 여인, 우애 깊은 형제와 친구 등이 그 내용입니다.

이 책은 글과 그림을 함께 실어 누구나 쉽게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나무 판에 새기고 종이에 찍어서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도덕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한 셈입니다. 이 그림은 그 중 한 장면으로, 판화가 아닌 실제 붓으로 그린 것입니다. 정조 때에 활동했던 뛰어난 화가인 김홍도가 그렸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림입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한 소년이 도끼를 들고 있고 그 아래 커다란 호랑이가 납작 엎드려 있는 광경이 보입니다. 폭포가 떨어지는 깊은 산중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려 시대에 효자로 유명한 최루백을 다루고 있습니다.

 

루백이 열다섯 되던 해일입니다. 루백의 아버지 최상저는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역시 사냥을 나갔다 호랑이에게 물려갔습니다. 루백은 어머니께 울며 호소하였습니다.

“어머니, 제가 아버지를 물고 간 호랑이를 기필코 잡아 오고야 말겠어요.”

루백의 어머니는 아들의 효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일이 결코 쉽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애야, 네 아버지도 잡지 못한 호랑이를 네가 어찌 대적할 수 있겠느냐?”

루백은 이런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쉽게 꺾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어찌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억울하게 잃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호랑이를 잡고야 말겠습니다.”

루백은 마침내 도끼를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온종일 산을 헤매어도 호랑이는커녕 그 발자국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목이 마르면 개울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숲 속에서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하였습니다. 루백은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하고 호랑이가 간 길을 쫓았습니다.

소나무가 간신히 뿌리를 내린 절벽 아래 계곡에는 시원한 물줄기가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마당같이 평평한 너럭 바위 위에 어마어마하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낮잠을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물소리가 커서 루백이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루백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도 감동하였던 모양입니다. 루백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단숨에 도끼로 호랑이를 내리쳤습니다.

배를 갈라 보니 역시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틀림없었습니다. 뱃속에 사람 뼈가 가득 들어 있該?때문입니다. 루백은 아버지의 뼈를 모아서 장례를 잘 치루고, 호랑이 고기는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버렸습니다.

이후 최루백은 백 살이 넘도록 장수하며 높은 벼슬을 두루 지내,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초문답도
가난하지만 욕심 없는 사람들의 정겨운 대화


 

 

이명욱, 어초문답도, 17세기, 173.0 cm ×94.0 cm, 간송미술관 소장

‘어부와 나무꾼은 서로에게 무얼 물을까?’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는 어부와 초부가 묻고 답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어부는 고기잡이이고, 초부는 나무꾼이지요.

그림 속에서 누가 고기잡이일까요? 당연히 낚싯대와 고기 꾸러미를 들고 있는 사람이지요. 고기잡이는 커다란 머리에 테만 있는 갓을 썼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은 깎지 않고 내버려 두어 삐죽삐죽 뻗어나 있고, 허리춤에 그러모은 바지 아래로는 맨발이 드러나 있습니다.

고기잡이는 갈대가 무성한 강변 길에서 나무꾼을 만났습니다.

“어디 오늘은 재미 좀 보았나?”

나무꾼은 고기잡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허허, 재미는 무슨? 그저 바람이나 쐴 뿐이라네.”

고기잡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에 쥔 붕어 두 마리를 들어 보였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저기 강변에서 하루 종일 앉아 겨우 이뿐이란 말인가!”

나무꾼은 고기잡이가 낚시하던 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고기잡이는 대답 대신 웃기만 하였습니다.

“그 놈들 참 실하기도 하네. 오늘은 자네가 안주거리를 구했으니 술은 내가 내겠네.”

고기잡이와 나무꾼은 사이좋게 주막이 있는 마을로 향했습니다.

바람이 불자 나무꾼의 치렁한 옷자락이 펄럭였습니다. 허리춤에 찬 손도끼와 어깨에 멘 막대가 흔들렸습니다. 군데군데 꿰맨 옷자락은 남루했지만 표정은 무척 밝았습니다.

 

이 그림은 조선 시대 화가 이명욱이 그렸습니다. 궁중에서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직업 화가로,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습니다. 임금님도 그 실력을 인정하여 도장을 선물로 내려 줄 정도였습니다.

화면은 나무꾼의 막대와 고기잡이의 낚싯대로 나뉘어졌습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 길과 갈대의 방향은 반대로 기울어지게 하였습니다. 갈대 잎과 길가 잡풀의 세밀한 묘사와는 달리 옷 주름은 아주 시원하고 경쾌한 선을 썼습니다. 가난하지만 욕심 없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마음을 잘 나타내는 듯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듯 욕심 없이 자유로운 마음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관직에 나가 높은 벼슬을 얻으면 부와 명예가 저절로 따라왔지만, 자칫 재앙을 입는 일도 많았습니다.

 

신라 효성왕이 왕으로 등극하기 직전의 일입니다. 하루는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궁중의 뜰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왕이 되면 그대를 잊지 않겠노라.”

왕자는 뜰의 잣나무를 보며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왕위에 오른 효성왕은 신충에게 아무런 벼슬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충은 왕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예전에 왕과 바둑을 두었던 잣나무 그늘로 갔습니다. 잣나무는 그 약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푸르기만 하였습니다.

신충은 그 자리에서 ‘원망하는 노래’를 지었습니다.

 

잣나무 푸른 잎은

가을에도 지지 않은 법인데

너를 어찌 잊겠느냐 하신 말씀

우러러 믿고 있었더니

이제 그 마음 변해 버렸구나.

연못에 비친 달 그림자가

물결이 일면 사라져 버리듯

작은 일에도 마음 흔들리니

이 세상이 모두 그렇단 말인가.

 

신충은 시를 종이에 써서 잣나무에 붙여 두었습니다. 놀랍게도 잣나무는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시들어 버렸습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신충에게 벼슬을 내리니 비로소 잣나무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신충은 다음 임금인 경덕왕 때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에 들어갔습니다. 임금이 두 번이나 사람을 보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산골에서 나무꾼처럼 욕심 없이 사는 게 벼슬살이보다 더 행복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몽유도원도

복숭아꽃잎 흩날리는 꿈 같은 낙원


 

 

 

옛날 중국 땅 ‘무릉’이라는 곳에 한 고기잡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배를 타고 물가를 따라가다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이곳은 어디쯤일까?’

고기잡이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습니다. 어디선가 기분 좋은 향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고기잡이는 향기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물가 양쪽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하였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은 나비처럼 흩날렸습니다. 복숭아밭이 끝나자 이번에는 산이 가로막았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였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가느다란 불빛이 흘러나왔습니다. 굴이었습니다. 산 아래에 작은 굴이 뚫려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고기잡이는 배에서 내려 굴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겨우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입구가 비좁았습니다. 희미한 불빛을 따라가니 갈수록 길은 넓어졌습니다. 한참 들어가니 굴이 확 뚫리며 밝은 세상이 나타났습니다.

“꼬끼오…….”

어디서 닭 울음소리가 났습니다. 넓고 기름진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티 없이 맑은 웃음소리를 내고, 노인들은 나무 그늘에서 편안히 쉬고 있었습니다. 모두 밝고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낯선 사람이 마을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몰려와 물었습니다. 고기잡이는 그 동안 겪은 일을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닭을 잡고, 술을 빚어 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난리를 피해서 이곳으로 들어왔답니다. 살기 좋은 곳이니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지요. 그래서 바깥 세상과 아주 멀어지게 되었답니다.”

고기잡이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 세상인지요?”

누군가 바깥 세상이 궁금한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부는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나라가 갈리고 임금이 바뀐 사실을 듣고 모두 신기해하였습니다.

“나중에 돌아가더라도 이곳 이야기는 비밀로 해 주세요.”

누군가 걱정이 된 듯 이렇게 고기잡이에게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기잡이는 돌아오는 길 곳곳에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 표시를 찾아 길을 나섰지만 다시는 그곳에 이르지 못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 동진 때 시인인 도연명(365년~427년)이 쓴 ‘도화원기’라는 글에 나옵니다. 세종의 셋째 아드님인 안평 대군은 이 글을 좋아하였습니다.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안평 대군은 늘 이런 생각에 골똘하였습니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글에서만 보던 그 복숭아꽃 핀 낙원을 보게 되었습니다. 황홀하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꿈에서 깨었을 때는 너무 아쉬웠습니다.

‘아, 나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한 폭의 그림이었어!’

안평 대군은 늘 가까이 하던 화가 안견을 불렀습니다. 안견이라면 꿈 속의 그림 같은 풍경을 살려 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안견은 역시 안평 대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였습니다.

 

그림은 왼쪽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지막한 산과 들이 있습니다. 물길 끝에서 갑자기 깎아지른 벼랑이 나타납니다. 그 벼랑의 굽을 길들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아득한 복숭아 꽃밭이 펼쳐집니다.

‘복숭아꽃 핀 동산을 꿈에 본 그림’이라는 뜻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안평 대군은 그림을 여러 신하들에게 자랑하였습니다. 집현전의 학사들과 문인들이 그림을 보고 다투어 감상문을 썼습니다. 그림에 이어 긴 글이 덧붙여졌습니다. 안평 대군 또한 시를 한 편 써서 그림에 덧붙였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 이런 꿈 같은 낙원이 있단 말인가.

숨어 사는 사람들의 옷 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림으로 그려 놓으니 얼마나 좋은가.

천 년을 이대로 전하여 보아야겠네.

 

 

 

 

 

 

 

총석정도

                                사실적 묘사와 과감한 생략…같은 풍경 다른 느낌



 

파도가 부딪는 기묘한 바위와 정자 ‘총석정’

총석정(叢石亭)은 북한 지역 동해안에 있습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강원도 통천군에 속해 있지요. 이곳에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기둥 모양으로 솟아오른 바위들이 신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육각형의 바위 기둥은 현무암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일부러 깎아 세운 듯 크기나 높이가 비슷한 탑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바위 기둥은 똑바로 서 있는 것,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것, 주저앉은 것 등 여러 가지입니다.

 

 

 

총석정, 정선, 1711년, 비단에 수묵 담채, 36.0 cm ×37.4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석정은 원래 정자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이 일대의 바위들을 일컫는 말로도 통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경치는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넓은 바다, 수평선 끝에서 떠오르는 해, 바위 기둥들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들은 보고 듣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습니다.

 

옛날 신라 시대에는 화랑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술랑ㆍ남랑ㆍ영랑ㆍ안상이 이곳에 와서 놀았으므로, 이곳의 바위 기둥들을 일컬어 사선봉(四仙峰)이라 하였습니다. 화랑들은 이곳에 와서 놀았던 일을 글로 써서 정자 옆 비석에 새겨 놓았으나, 지금은 비문이 닳아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정선(1676년~1759년)은 여러 점의 총석정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중 왼편 그림은 그의 나이 서른여섯에, 오른편 그림은 여든에 그린 것입니다. 왼쪽 그림은 젊은 시절 그림답게 비교적 꼼꼼하게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절벽을 때리는 파도는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집니다. 벼랑 끝의 정자와 비석, 앞바다의 섬은 그 이름까지 친절하게 써 놓았습니다. 네 개의 바위 기둥은 원래 비슷하지만 조금씩 그 높이를 달리하였습니다. 답답하지 않게 변화를 준 것이지요. 이와 달리 오른쪽 그림은 과감한 생략이 돋보입니다. 복잡한 바위 기둥들을 다 그리지 않고 딱 세 개만 그렸습니다. 크고 작고, 굵고 가는 변화가 분명합니다. 여기저기 늘어선 섬들도 보이지 않고, 기울어진 돌기둥들 대신에 솔숲을 그려 넣었습니다.

 

 

 

 

총석정, 정선, 1755년, 비단에 수묵 담채, 18.0 cm ×12.8 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한 화가가 그린 똑같은 풍경 그림인데, 그 바위 기둥이 하나는 넷이고, 하나는 셋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이는 그대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린다고 해서 좋은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화가가 어떤 대상을 본 순간, 그 느낌을 소중히 살려 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림 속 대상의 갯수나 크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에서, 바위 기둥을 다 그리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된 그림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자, 이제 총석정에 전해 오는 이야기 하나 들어 볼까요?

 

총석정 근처 외딴집에 부부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만날 싸우기만 하더니 마침내 아주 헤어지기로 하였습니다. 제각기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섰습니다. 두 사람이 총석정 언덕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만 서지 못 할까!”

갑자기 들리는 호통소리에 두 사람은 돌아섰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때, 바닷가에 서 있던 돌기둥 두 개가 움직이며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들 둘이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다니, 이제부터 우리랑 사는 게 어떨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두 개의 돌기둥은 멋진 미남과 미녀로 바뀌었습니다. 부부는 기뻐하며 각기 새 짝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새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아침에 깨어난 부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새 짝과 새 집이어서 기뻐했는데, 깨어 보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다 실망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또 호통소리가 났습니다.

“잘 듣거라. 하늘이 정해 준 배필이니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

부부는 이 일이 있고 나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총석정 아래에는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바위 기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돌기둥을 부부바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이좋은 부부처럼 나란히 서서 천년만년 변함 없는 금실을 자랑하고 있답니다.

 

 

 

 

 

 

 

금강전도

하늘서 내려다본 일만 이천봉 '탄성절로'


 

 

금강전도(정선) 1734년, 종이에 수묵 담채, 130.7 cm ×94.1 cm
호암미술관 소장

그림을 보니 이런 노래가 떠오릅니다. 강소천 선생님이 노랫말을 쓴 동요, ‘금강산’입니다. 그림 속 금강산은 노래처럼 많은 봉우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림 맨 위 꼭대기에 자리한 봉우리 이름은 ‘비로봉’이지요. 그 정상은 해발 1638 m입니다. 비로봉 아래 수많은 봉우리들이 다투어 하늘을 찌르는 듯 빼어난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일만 이천 개의 봉우리일까요? 그림 속의 봉우리들을 헤아려보니, 커다란 것만 오륙십 개 됩니다. 이건 1000 m가 넘는 봉우리이지요. 작은 것은 일일이 다 그리지 못 했습니다. 보이는 대로 다 그리면 그림이 너무 답답하니까요. 일만 이천이라는 수는 이렇게 하나하나 세어서 붙인 게 아닙니다. 화엄경이라는 불교 경전에, ‘바다 가운데 있는 금강산에는 일만 이천이나 되는 보살들이 모여 산다.’고 적혀 있습니다. 보살이란 스스로 부처님이 되고자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이들이지요.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라는 말은 이 경전에서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잘 생긴 바위들이 마치 보살처럼 의젓하고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하늘에서 내려본 듯 신비로운 1만 2000 봉우리 한눈에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금강산 보고 싶다 다시 또 한 번

맑은 물 굽이쳐 폭포 이루고

갖가지 옛 이야기 가득 지닌 산

이름도 찬란하여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철 따라 고운 옷을 갈아입는다고 했듯이, 금강산은 계절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선명하고 깨끗한 봄에는 금강(金剛), 숲이 무성한 여름에는 봉래(蓬萊), 단풍 든 가을에는 풍악(楓岳), 바위가 날씬한 뼈대를 드러내는 겨울에는 개골(皆骨)이라 하였습니다.

 

금강산에는 수많은 옛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큰 봉우리는 물론 골짜기의 작은 바위 하나에도 말입니다.

 

곰바위 전설은 이렇습니다. 비로봉 높은 꼭대기에 살던 곰이 봄이 되자 배가 고파 아래쪽으로 슬슬 내려왔습니다.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는 못이 있었습니다. 물 속의 조약돌들이 반짝거리자 배고픈 곰은 도토리인줄 알고 허겁지겁 달려 내려오다 바위 틈에 발이 빠지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 굳은 채 바위가 되어 버렸답니다.

한편, 금강산 구경을 온 동해 용왕의 아들인 거북이는 금강산 골짜기에서 약수를 마시고 살이 통통 쪘습니다. 어느 날 바다로 돌아가려고 처음에 들어왔던 바위 구멍으로 나가려 했으나 몸이 빠지지 않자 죽어서 바위가 되었답니다.

조선 시대 화가인 정선(1676년~1759년)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러 차례 금강산을 찾아 나섰습니다. 평생 그린 금강산 그림이 몇 장인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은 집에 누워 그 동안 다녔던 금강산 구석구석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우람한 봉우리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골짜기들이 훤하게 떠올랐습니다.

‘이 그림을 벽에 붙여 놓으면 언제든지 금강산을 신나게 유람할 수 있겠군.’

화가는 마음 속의 금강산을 불러 내 화폭에 옮겼습니다.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폭포와 계곡, 절들을 차례로 그렸습니다. 나무 숲은 하늘 빛을 닮게 하고, 큰 바위 봉우리들은 신선처럼 신비한 모습으로 우뚝우뚝 세웠습니다. 바위 봉우리를 그릴 때는 마치 서릿발을 치듯 날카롭게 단숨에 쭉쭉 내려 그었습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마음은 시원하고 통쾌하였습니다.

마침내 ‘금강전도’가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 거대한 산 전체가 서서히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푸르스름한 기운이 산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화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림 속 하늘 위에 다음과 같은 시를 한편 적어 넣었습니다. 그 글씨도 그림처럼 산 모양을 이루었습니다.

일만 이천 봉의 개골산, 누가 그 참모습을 그릴 수 있을까?

향기는 무리 지어 동해로 떠오르니, 그 기운 온 누리에 서리네.

몇 떨기 연꽃은 해맑게 피어 오르고, 소나무 잣나무 절간을 가리네.

다리품 팔아 찾아간다 한들, 머리맡에 두고 실컷 보는 것과 같으랴.

 

 

 

 

 

 

'황현' 초상
강직한 조선 선비 모습 담은 '황현' 초상


 

 

채용신이 그린 황현 초상.(1911년, 비단에 채색,
95 cm ×66 cm, 구례 매천사 소장)

선비이자 애국 지사의 강직함 붓끝에 되살려

한 선비가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머리 위에는 선비들이 평상시 집에서 쓰던 모자인 정자관을 썼습니다.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인 말총으로 만들어서 빳빳한 느낌이 드는데, 산 모양의 세 봉우리가 두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자 꼭대기는 투명하고, 머리에 가까운 쪽은 검은색이어서 깨끗한 이마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단아한 얼굴은 진지한 표정을 지녔습니다. 동그란 안경테 속의 두 눈은 신중하고 차분합니다. 오른쪽 눈동자가 약간 한쪽으로 쏠려서 눈빛은 더 예리하게 보입니다.

목 부분의 흰 동정 위에는 구불구불하고 굵은 수염이 내려와 강직한 성품을 더해 줍니다. 왼손에는 책을 들고 있으니 이 사람은 글공부하는 선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손은 부채를 거머쥐고 있는데, 손의 모습에서 뭔가 결연한 의지를 읽게 됩니다.

 

이 선비는 누구입니까?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울분을 참지 못 하고 음독 자결한 시인이자 역사가인 황현(1855년~1910년)입니다.

황현 선생은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 번 듣고 본 것은 잊지 않아서, 총명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글을 잘 써서 어른들의 칭찬도 많이 들었습니다. 황현 선생의 선조 중에는 황희 정승 같은 훌륭한 위인이 많았습니다. 소년 황현은 이 선조들처럼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큰 학자가 될 것이다.”

소년 황현을 가르친 선생님은 이렇게 장담하였습니다.

황현은 24 세에 처음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글공부하는 친구들을 사귀면서 그의 글 솜씨가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스물아홉에는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습니다. 응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이었으나, 시골 출신이어서 둘째로 밀려났습니다.

“이렇게 공정하지 못한 세상에 무슨 관리를 한단 말인가!”

화가 난 황현은 그 길로 보따리를 싸서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자식에 대해 걱정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시험을 보도록 자주 타일렀습니다. 서른셋이 되어서야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을 차지하였습니다. 하지만 관리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세상에 온통 썩은 관료뿐이군!”

황현은 관리들이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쁜 것을 보고 실망이 컸습니다. 이런 곳에서 참다운 뜻을 펴는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했습니다. 이후 글을 써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

56 세 때는 일본에 의해 주권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 머리털 희게 겪고

몇 번 죽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했네.

이제는 참으로 어쩔 수 없으니

찬란한 촛불 하나 푸른 하늘을 비치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 자리 옮겨지니

궁궐은 어둠침침하고 시간은 멈춰 섰네.

조칙 또한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니

종이 위에 눈물만 흘러내리네.

새와 짐승도 울고 온 산천 찡그리니

무궁화 화려 강산 기어이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생각해 보니

글 배운 사람 제 구실하기 참 어렵기만 하네.

일찍이 나라 위해 작은 공도 세우지 못 했으니

내 몸 하나 희생될지언정 애국이라 할 수도 없네.

겨우 송나라 윤곡처럼 자결할 뿐이니

진동처럼 기개를 펴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만 하네.

 

선생은 이와 같은 절명시 네 수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윤곡은 송나라 사람으로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온 가족이 자결하였고, 역시 송나라 충신 진동은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했다가 죽음을 당한 인물입니다.

이 그림은 황현 선생이 순국한 이후, 뛰어난 초상화가인 채용신(1848년~1941년)이 그렸습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애국 지사의 모습을 담아 내기 위해 화가는 역시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화가의 붓끝에서 마침내 선생의 올곧은 뜻이 되살아났습니다.

 

 

 박영대 광주교육대학교 교수·화가

출처: 소년한국일보 http://kids.hankooki.com/edu/culture_symbol.htm

출처 : 산그늘솔바람
글쓴이 : 산그늘솔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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