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양 미 술 자 료

[스크랩] 우리 그림 한국화 이야기2

bizmoll 2009. 2. 3. 17:14

쌍송도 - 정수영
금슬 좋은 부부처럼 다정한 소나무 한 쌍



 

 

 

정수영, 쌍송도, 18ㆍ19세기, 종이에 수묵 담채, 24.8 cm × 16.3 cm,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소나무는 언제나 우리에게 친근한 나무입니다. 옛 사람들의 일생은 소나무에서 시작해서 소나무로 끝날 정도였습니다. 이를 테면 아기는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한옥은 대개 소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소나무와 흙으로 지은 한옥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합니다. 재질이 튼튼하여 수명이 길고, 벌레나 습기를 막아 주었습니다. 좋은 나뭇결과 향기는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대문에 금줄을 쳐서 아무나 함부로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아들은 새끼줄에 붉은 고추를 매달았고, 딸은 솔가지를 끼웠습니다.

솔잎과 송홧가루, 솔방울 등은 여러 가지 음식이나 약의 재료로 쓰였습니다. 흉년이 들어 식량이 떨어지면, 가난한 백성들은 산에 올라가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먹었습니다. 봄에 나는 새순의 속껍질은 송기라고 하는데, 그냥 꺾어 먹거나 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추석 무렵 솔밭에서 나는 송이는 예로부터 버섯 중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땔감도 소나무 장작이나 솔잎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소나무 관에 넣어서 소나무로 둘러싸인 무덤에 묻혔습니다. 소나무가 이렇듯 다양한 용도로 쓰이다 보니, 솔숲은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를 하여 보호하기도 하였습니다.

‘쌍송도’는 한 쌍의 소나무 그림입니다. 마치 부부처럼 서로 의지하고 사이 좋게 서 있습니다. 얼핏 보면, 마치 한 그루처럼 보입니다. 둥치와 가지는 구불구불 휘어졌는데, 솔잎은 푸르고 싱싱합니다.

솔잎은 한 잎자루에서 두 개씩 나서, 2 년 후 낙엽이 되어 함께 떨어집니다. 이렇듯 일생을 함께하는 모습은 금슬 좋은 부부간의 사랑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이 그림은 그러므로 한 쌍의 보기 좋은 소나무를 통해서 부부애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편 소나무는 언제나 푸른빛을 띠고 있어, 옳은 일을 지켜 뜻을 굽히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어린 조카를 쫓아내고 임금 자리를 차지한 세조에 맞서,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충신 성삼문은 이런 시조를 남겼습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 할 때 독야청청 하리라.

 

성삼문은 죽은 다음 높은 산봉우리의 가지가 늘어진 큰 소나무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차가운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어도 홀로 푸르리라 하였습니다. 푸른 절개를 변함없이 지키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억울한 충신들을 잇달아 죽인 세조는 하늘의 벌을 받았는지 심함 피부병을 앓았습니다. 용한 의원들을 불러 치료했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세조는 물 좋은 온천이나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였습니다. 때로는 절에 가서 부처님께 빌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은 충청도 보은에 있는 속리산 법주사로 향했습니다. 왕의 행렬은 산골짜기와 고개를 넘어 절 어귀에 이르렀습니다. 아름드리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잠시 쉬었다 일어날 때였습니다.

“연 걸린다!”

왕은 수레를 메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연(輦)’이란 왕을 태운 수레를 말합니다. 수레는 소나무 가지를 피해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이때였습니다.

늘어진 가지 하나가 저절로 하늘로 올라가며 수레가 잘 빠져나갈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왕과 신하들은 이 놀라운 모습을 한참 지켜 보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왕은 또 그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습니다.

“참으로 기특하도다. 올 때는 신기하게 길을 비켜 주더니, 이제 비까지 막아 주다니!”

왕은 이 소나무에게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장관쯤에 해당하는 높은 벼슬이었습니다. 1464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정이품송은 지금도 그 자리를 의연히 지키고 있습니다. 600 살도 넘은 할아버지 나무입니? 큰 바람에 가지가 부러져 제 모습을 잃었다고 하지만, 한결같이 푸른 솔잎은 역시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쌍치도 - 심사정
보리밭 속 단란한 꿩 가족


 

 

 

심사정, 쌍치도, 18세기, 비단에 수묵 담채, 19.3 cm × 21.7 cm, 개인 소장

보리밭 사잇길에 꿩 일가족이 모여 있습니다. 수컷인 장끼는 화려한 무늬에 멋진 꼬리를 하늘로 향하고 있습니다. 암컷인 까투리는 사이좋게 수컷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아래쪽에는 먹이를 찾는 세 마리의 꿩 새끼가 있습니다. 꿩의 새끼는 ‘꺼병이’라고 하지요. 이들은 잰 걸음으로 땅 위를 걸어다니며 나무 열매나 풀 씨, 또는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습니다.

 

어미들은 새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어미들도 주로 걸어다니며 생활하기 때문에, 날개가 있지만 짧아서 멀리 날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천적이나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면, 있는 힘을 다해 날아오르며 요란하게 울어댑니다. 이 소리는 무리에게 경계 신호가 됩니다.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보리가 패거나 익을 무렵이면 유난히 자주 들을 수 있는 게 이 꿩 울음소리입니다.

조상들은 날아오르는 꿩을 활로 쏘거나, 길들인 매를 이용해 잡았습니다. ‘전어지’라는 책에는 재미있는 꿩 사냥법이 적혀 있습니다. 봄 풀이 무성할 때 사냥꾼은 숲에 숨어 있다 장끼 소리를 흉내냅니다. 이 소리는 입으로 그냥 내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만든 피리 모양의 악기를 이용합니다.

 

이것은 동물의 뼈나 뿔을 이용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장끼는 대개 이 소리를 들으면 아주 가까이 다가온다고 합니다. 아마 자신의 구역 내에 들어온 다른 수컷을 쫓아 내기 위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사냥꾼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쏘게 되는데, 목표물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대개 백발백중으로 맞힌다고 합니다.

이렇게 잡은 꿩의 고기는 고급 음식 재료로 쓰였습니다. 고기를 구워 먹거나 국을 끓이는 것은 물론, 김치와 장아찌를 만들거나 만두로 빚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꿩은 한자로 ‘치(雉)’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쌍치도(雙雉圖)’는 한 쌍의 꿩을 그린 그림입니다. 쌍치도는 화목한 꿩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보기 좋게 표현한 그림입니다. 특히 장끼의 늠름하고 의젓한 모습과 까투리의 다정하고 인자한 모습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녀야 할 좋은 품성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꿩 그림을 대하는 특별한 뜻이 따로 있었습니다. 꿩은 원래 경계심이 많고 급한 동물입니다. 이런 급한 성격은 때로 약삭빠른 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반면 판단력이 빠르고 옳은 일에 주저하지 않는 강한 개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꿩의 이런 좋은 면을 부각시켰습니다. 꿩을 통해 청렴하고 결백한 선비의 모습을 보고자 한 것입니다.

꿩은 옛 이야기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강원도 치악산(雉岳山)에 전해 오는 꿩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구렁이로부터 잡아먹힐 위험에 처한 꿩을 살려 주었더니 나중에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사냥꾼에게 쫓기는 꿩을 구해 주었는데, 나중에 좋은 묘자리를 알려 주어 후손이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옛 이야기 속의 꿩은 한결같이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의리 있는 동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장끼의 볼에 왜 흰 얼룩점이 있을까요? 우리 옛 이야기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배고파 지친 장끼 한 마리가 생쥐네 집을 찾았습니다.

“생쥐야, 이 추운 겨울에 어떻게 지내니?”

장끼는 자존심 때문에 배고프다는 말은 않고, 어설프게 인사를 했습니다. 생쥐는 장끼를 집안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창고에는 낱알들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장끼는 먹을 것을 보자 그만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생쥐는 장끼를 따뜻한 안방으로 맞이하였습니다. 보송보송한 볏짚 위에는 통통한 새끼들이 달콤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손님이 왔으니 맛난 음식을 만들어야지.”

생쥐는 새끼들이 깰 새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장끼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그만 생쥐 새끼들 위로 나자빠져버렸습니다. 곤히 자고 있던 새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비명을 지르며 장끼 몸에 깔려 죽어 버렸습니다.

흰 가潁?손에 묻힌 채 음식을 만들던 생쥐는 이 소리를 듣고 급히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생쥐는 새끼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 나쁜 놈!”

생쥐는 장끼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어쩔 줄 몰라 붉게 물든 볼에 흰 얼룩점이 생겼습니다. 장끼는 집에 돌아가 뺨을 물로 자꾸 씻었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도성도
새 둥우리 같은 조선 도읍지가 '한눈에'



 

 

필자미상, 도성도, 19세기, 47 cm × 66 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도성도’는 서울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데 다른 그림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이 그림에는 산과 강ㆍ길ㆍ고개ㆍ다리ㆍ마을ㆍ건물 등이 이름과 함께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길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서울 한복판의 길은 비교적 반듯하나 산과 강을 건너면서 구부러집니다. 길과 물길이 만나는 곳에는 네모난 다리가 있습니다.

둘째, 몇 가지 통일된 색으로 그림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길은 붉고, 물길은 푸릅니다. 건물은 세 가지 색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붉은 색은 관공서입니다. 푸른색은 기와집이고, 노란색은 초가입니다.

셋째, 실제의 크기를 그대로 그림에 반영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산과 강, 건물 등이 사실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냇가에는 크고 작은 다리가 있는데 비해, 큰 강에는 다리가 없는 대신 나루터 이름만 적혀 있습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도성도’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지도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지도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지표면의 어느 부분을 일정한 축척에 따라 평면 위에 나타낸 그림’을 지도라고 할 때, 이 그림은 오늘날의 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지도가 기호ㆍ문자ㆍ색으로 이루어진 데 비해, 실제 모양을 그대로 그린 점이 다릅니다. 이를 테면 오늘날 지도에서 산은 등고선으로 표시됩니다. 높이와 굴곡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나지요. 하지만 이 그림에서 산은 보이는 그대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서울이 마치 아늑한 새 둥우리처럼 묘사되었다는 점입니다. 맨 위 중앙에는 커다란 산이 있고, 그 주변에 이어진 산맥이 좌우로 펼쳐지며 도심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둥우리 모양의 중심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안쪽에 성을 쌓았고, 군데군데 문을 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지어진 대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자연과 삶터를 보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수도로 잡은 옛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런 시각을 이해하게 됩니다.

 

고려 말, 이성계는 사망한 부친 환조를 어디다 묻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나무꾼이 산길을 가다가 어떤 스님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스님은 위아래의 땅을 가리키며, “여기는 재상이 날 자리이고, 저기는 왕이 날 자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꾼은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바로 알렸습니다. 이성계는 곧장 달려가 두 스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스님들을 극진히 대접한 다음, 부친의 묘지 쓸 자리를 골라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두 스님은 이성계를 데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더니, 재상이 날 자리와 왕이 날 자리 중에서 한 곳을 고르라고 하였습니다.이성계는 곧 왕이 날 자리를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한 스님이, “욕심이 좀 지나치지 않는가?”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성계는, “사람의 일은 가장 나은 것을 추구해야 그 다음 바른 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유명한, 나옹 스님과 무학 스님이었습니다.

나중에 조선을 개국하게 된 태조 이성계는 경기도ㆍ황해도ㆍ평안도 세 지방의 관찰사들에게 명하여 무학 스님을 찾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세 사람은 사람을 풀어 온 산골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깊은 산중에 한 고승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침내 그 산 입구에 이르러 사람들을 대기시켜 놓고는, 관찰사 세 사람만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암자 입구의 소나무에 관찰사임을 증명하는 인장을 걸어 놓고는 평상복 차림으로 걸어서 암자로 갔습니다.

과연 암자에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왜 이런 외딴 곳에 자리하고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바로 저 삼인봉(三印峰) 탓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세 사람은 삼인봉이 무엇인지 되물었습니다.

스님은, “여기 있으면 세 명의 관찰사가 와서 인장 세 개를 나무에 걸어 놓는단 말씀이지.”라고 태연히 말하였습니다. 삼인봉이란 세 개의 인장 모양의 봉우리란 뜻이었으니, 이미 이들이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관찰사들은 무학 스님을 모셔다 태조를 만나게 하였습니다. 태조는 몹시 기뻐하면서 도읍지를 물었습니다. 무학 스님은 서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왕산과 백악과 남산으로 둘러싸인 자리가 으뜸이다.”

이렇게 해서 서울이 조선 오백 년의 도읍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옛 기록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애련도 - 최북
높은 인품 갖춘 선비를 닮은 연꽃


 

 

최북, 애련도, 18세기, 종이에 수묵 담채, 55 cm × 32.5 cm, 개인 소장

길다란 지팡이를 짚은 선비 한 사람이 동자를 데리고 뜰에 나와 있습니다. 바위 곁의 동그란 연못에는 연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최북은 그림 오른쪽 가운데에 이런 글을 써넣었습니다.

‘나처럼 연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글은 화가처럼 정말로 연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원래 이 글은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인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에 나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애련설’은 연꽃을 예찬한 글로, 이후 많은 문인들의 글과 화가들의 그림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주돈이는 연꽃의 여러 가지 모습에서 다섯 가지 훌륭한 점을 찾아 냈습니다. 첫째, 연꽃은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습니다. 대개 연꽃은 지저분한 논이나 연못에서 잘 자라지요. 뿌리는 진흙탕 속에 있지만, 거기서 피어난 꽃은 참으로 깨끗합니다. 둘째, 출렁이는 물에 씻겼으나 야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색깔의 다른 꽃들에 비하면 얌전하고 단정한 꽃이지요. 셋째, 올곧은 줄기의 속은 비었으나 밖은 곧습니다. 이 말은 마치 대나무의 덕을 칭송하는 말과 비슷합니다. 속이 비었다는 것은 욕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욕심이 없으니 당연히 곧고 바르지요. 넷째, 덩굴을 뻗거나 가지를 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의 꽃대에 하나의 꽃을 의연히 피우지요. 다섯째, 그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습니다. 가까이 진한 향기를 내뿜는 꽃들에 비해 은은하고 오래 갑니다.

이런 연꽃의 특징은 마치 선비들이 바라는 인간상과 같습니다. 세상과 쉽게 타협하거나 물들지 않는 사람, 겸손하고 검소한 사람,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나 신념에 굽히지 않는 사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그 인품이 은은하여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품위를 지닌 사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애련도(愛蓮圖)는 이렇듯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그림입니다. 연못가에 서서 연꽃을 바라보는 선비는 어쩌면 연꽃 그 자체보다 연꽃과 같이 빼어난 사람을 꿈꾸는지 모를 일입니다. 연꽃 앞에서 자신의 인품을 돌아보거나, 그런 훌륭한 인품을 가진 어진 선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도 할 것입니다.

연꽃은 이렇듯 옛날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연꽃을 태양의 상징으로 여겨 왔고, 동양의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세계, 곧 극락 세계에 비유되었습니다.

 

한편 우리 조상들은 연꽃 그림을 통해 많은 자식을 얻고자 하는 바람을 담기도 하였습니다. 꽃과 함께 많은 열매가 동시에 자라나는 연꽃처럼 튼튼하고 잘 생긴 자식을 많이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는 연꽃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고려의 충선왕은 임금이 되기 전에 원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지내는 동안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충선왕은 임금이 되기 위해 귀국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떠나려 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연꽃 한 송이를 건네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을 건네 줌으로써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고려로 돌아오는 도중에도 충선왕은 발길이 무거웠습니다. 마침 함께 돌아오던 충직한 신하인 이제현을 보내 그녀를 찾게 하였습니다. 이제현이 급히 말을 되돌려 그녀에게 가 보니, 놀랍게도 며칠 째 아무것도 먹지 않고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이제현은 돌아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가 가 보니, 그녀는 술집에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노느라 정신이 없었고, 만나 주지도 않았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충선왕은 너무 기가 막혀 침을 ‘탁’ 뱉고 그녀를 잊기로 하였습니다.

이듬해 왕의 생일 때 일이었습니다. 이제현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비로소 사실대로 고백하였습니다. 왕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 바로 이 시를 보았더라면, 나는 당장 그녀 곁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대가 나와 나라를 걱정한 나머지 거짓으로 말했릿? 오히려 그 충성이 갸륵하다 하겠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 사이에 있었던 아름다운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산 경치 도깨비 무늬 전돌
나쁜 귀신 막아 주는 도깨비의 익살스런 표정


 

 

산경치 도깨비 무늬 전돌, 백제 시대, 29 cm × 29 cm, 두께 4 c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전돌은 건물의 벽이나 바닥을 만들 때 쓰이는 건축재입니다. 벽돌이나 타일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되지요.

이 전돌은 백제의 한 도읍지였던 부여의 한 건물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때 몇 개의 각기 다른 무늬를 담고 있는 다른 전돌들도 함께 나왔습니다. 용이나 봉황 같은 상상의 동물, 연꽃이나 구름 무늬, 그리고 산 경치를 담은 것 등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백제 사람들의 훌륭한 솜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무늬들은 본격적인 그림이라 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지만, 백제 사람들의 그림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써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전돌에는 산 경치를 배경으로 도깨비가 그려져 있습니다. 서 있는 바닥은 뾰족뾰족한 바위산들로 둘러싸여 움푹 팬 곳입니다. 도깨비는 마치 산중의 제왕처럼 떡 버티고 서 있습니다.

눈동자가 다 드러나도록 부릅뜬 두 눈과 하늘로 치켜 올라간 눈초리, 뭉툭한 코와 커다랗게 벌린 입, 날카로운 송곳니, 떡 벌어진 어깨와 가슴, 두툼한 뱃가죽, 주렁주렁 고리 달린 허리띠, 동물처럼 긴 손톱과 발톱, 얼굴과 어깨 위의 불꽃 무늬 갈기 등 얼핏 보기에도 야무지고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얼굴 부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금방 장난이라도 걸어올 듯 표정이 익살스럽기도 합니다.

이 전돌 이름에 도깨비가 들어가 있지만, 사실 이것이 진짜 도깨비의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도깨비는 상상의 산물이고, 또한 사람마다 생각하는 경우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는 머리에 뿔 달리고, 원시인 복장을 하고 있으며, 울퉁불퉁한 요술 방망이를 들고 있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근래 만들어진 이야기나 만화에 등장하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우리 옛 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는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돌의 도깨비는 다소 과장되었거나, 도깨비가 아닌 다른 수호신을 그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도깨비 모양의 무늬를 전돌에 새겨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민족에게 도깨비는 나쁜 귀신을 물리치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조상들은 건축물의 일부나 생활 용구 등에 무서우면서도 익살스러운 도깨비 문양을 그려 넣었습니다. 도깨비가 병이나 귀신 등 사람을 해치는 나쁜 것들을 막거나 내쫓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그러므로 도깨비는 생활 속에서 늘 친근한 대상이었습니다. 도깨비가 등장하는 옛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람들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바보 같은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의 논을 망치기 위해 밤새 자갈을 쏟아 붓는 도깨비를 속여, “자갈이 많아서 참 다행이다. 개똥을 쏟았더라면 큰일날 뻔했다.”라고 말하자, 개똥을 잔뜩 쏟은 일이 그것입니다. 또, “나는 돈이 가장 무섭다.”라는 말에 마당 가득 돈을 날라 놓아 부자가 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럴 때 도깨비는 참 순진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비형’ 이야기는 우리 민족이 도깨비를 신봉하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신라 26대 진평왕의 아버지인 진지왕은 생전에 도화녀라는 여인을 좋아하였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진지왕은 죽은 후에 귀신이 되어 도화녀를 찾아가 일 주일간 함께 지냈습니다. 왕이 다녀간 후 도화녀에게 태기가 있었고, 마침내 천지가 진동하더니 ‘비형’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진평왕은 이 사연을 듣고 아이를 궁중으로 불렀습니다. 비형이 열다섯 살이 되자, ‘집사’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궁궐 밖으로 나가 귀신들과 어울려 논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왕은 어느 날 비형을 불러 이렇게 분부하였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나는 다 알고 있느니라. 그러니 함께 어울리는 귀신의 힘을 모아 신원사 북쪽에 다리를 놓도록 하여라.”

비형은 귀신을 모아 하룻밤 사이에 절 북쪽에 뚝?다리 하나?만들었습니다. 왕은 감탄하여 귀신들 중에 나라 일을 도울 자를 추천하라고 하였습니다. 비형은 ‘길달’이라는 귀신이 적합하다고 하고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길달은 사람 모습을 하고 며칠 궁궐에서 지내다 여우로 변하여 도망가 버렸습니다. 비형은 다른 귀신들을 시켜 길달을 잡아 죽였습니다. 이 일로 귀신들은 비형을 몹시 무서워하였습니다. 비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고 달아날 지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비형에 관한 노래를 부르거나, 비형이 귀신을 혼내는 글을 여기저기 붙여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 등장하는 도깨비 그림들은 아마 이 비형의 모습을 그린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작란도 - 김정희
나만의 향기와 개성 담아 난을 치다


 

 

김정희, 부작란도, 19세기, 종이에 수묵, 55 cm × 30.6 cm, 개인 소장

김정희(1786-1857)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명필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쓴 글씨를 흔히 ‘추사체’라고 합니다. 추사는 그의 호이니, 그만의 독창적인 글씨체를 이루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빼어난 글씨를 바탕으로 그림에서도 독특한 개성을 선보였습니다.

 

‘부작란도’도 그 중 하나입니다. ‘부작란(不作蘭)’이라는 제목은 그림 속에 쓰인 글의 첫머리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말은, ‘난초를 그리지 않았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난초를 그리지 않은 세월이 이십 년이다.”라는 문장으로 글이 시작되는데, 그 첫머리 세 자만 끊어서 제목으로 붙이니, 이렇듯 재미있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이 그림에서 보듯 틀림없이 그리긴 그렸는데, ‘난초를 그리지 않았다’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난초를 가운데 두고, 그 옆과 위는 흔히 추사체로 불리는 글씨가 가득 쓰여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림보다 글씨가 더 많은 작품입니다. 또한 그림 여기저기에 도장이 무려 열다섯 개나 찍혀있습니다. 글씨는 검고, 도장은 붉은색입니다. 그러니 흐린 먹색의 난초 그림보다 글씨와 도장이 더 잘 보입니다.

우선 그림에 찍힌 도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개는 둥글고, 나머지는 네모났습니다. 글씨 부분을 칼로 새긴 음각이 일곱 개, 글씨만 남기고 바탕을 새긴 양각이 여덟 개입니다. 그림 속의 도장은 흔히 화가가 직접 찍은 것도 있고, 나중에 그림을 지닌 사람이 찍은 것도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이 두 가지가 다 섞여 있습니다. 도장의 내용은 이름과 호를 새기는 것부터 좋은 글귀를 새긴 것 등 다양합니다. 이와 같이 그림에 글씨를 쓰고 도장을 찍는 일을 ‘낙관(落款)’이라고 합니다. 낙관은 그림에 비해 대개 간단한 편이지만, 이 그림처럼 복잡한 것도 간혹 있습니다.

 

화가는 난초 하나로 못다한 말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의 글을 그림 속에 써 넣었습니다.

‘난초를 안 그린 지 이십 년, 문득 붓을 들어 한 포기를 쓱 그려 내었다. 문 닫아 걸고 마음속의 향기를 찾아 나서니, 내 어찌 난초 그린 뜻을 말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한 마디 말로 난초 그린 뜻을 다 드러내기 어렵다고 합니다. 난초를 난초답게 그리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 것일까요?

 

김정희에게 난초 그리기는 정신적인 수양과 같았습니다. 그는 맑고 드높은 성품을 난초에 비유하였고,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그린 난초 그림이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깊고 자유로운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니 생긴 모양대로 똑같이 그리는 일은 김정희에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또한 남이 하는 대로 그럴싸하게 흉내 내는 일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나만의 향기를 지닌 난초, 나의 성격을 드러내는 난초, 나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는 난초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난초 그림에 ‘난초를 그리지 않았다’는 제목을 붙일 만하지요. 한갓 식물인 난초를 그린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를 난초를 빌어 나타내었습니다.

 

김정희는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난초 잘 그리는 법을 적었습니다. 우선, 늘 글을 가까이 해야 한답니다. 옛 사람들은 글을 눈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외울 수 있도록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붓으로 여러 번 써서 손이 그 모양을 기억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런 공부를 통해서 선인의 말씀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해야 비로소 인격이 갖춰지고 인품이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갖춰진 내 모습이 난초를 통해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무엇이든 한 가지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생각 없이 같은 것을 반복하거나, 특히 남이 하는 대로 분별없이 따라 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상우가 아버지의 난초 그림을 얻기 위해 많은 종이를 구해 왔습니다.

그는 “이걸 보니 너는 아직도 난초 치는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이처럼 많은 종이에 그려 달라고 하지만, 사실 제대로 그리려면 서너 장을 넘瘦竪?어렵단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하는 것은 대개의 그림이 다 같지만, 유독 난초 그림은 더 어렵단 말이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집중해서 그리라는 뜻이지 연습을 게을리 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김정희 스스로 쓴 글에 이르기를, “나는 평생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냈고, 천 자루의 붓을 몽땅하게 만들었다.”고 하였으니까요.

 

 

 

 

 

 

약리도
물살을 거슬러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잉어


 

 

 

작자 미상, 약리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54 cm × 98 cm, 개인 소장

물고기 한 마리가 물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꽉 다문 입에 힘을 잔뜩 주어 두 눈이 튀어나올 지경입니다. 온몸으로 물살을 이겨 내느라 지느러미는 바짝 곤두섰습니다. 오른쪽 위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왼쪽의 수평선 끝에서는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멋진 수염, 길고 날씬한 몸매, 가지런하고 굵은 비늘을 보니 이 물고기는 잉어가 틀림없습니다.

‘약리도(躍鯉圖)’는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잉어 그림입니다. 잉어 한 마리를 떠오르는 해와 함께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국 황하의 상류에 용문(龍門)이라는 급류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풀어 보면, ‘용이 지나는 문’이라는 뜻이지요. 이곳은 워낙 높은 곳에서 물이 떨어지므로, 물소리가 마치 천둥 소리 같았습니다.

봄이 되면 하류에 있던 물고기들이 산란과 부화를 위해 상류로 올라오는데, 이 길목에서 그만 주춤거리게 됩니다. 떼를 지어 물을 거슬러 올라오던 수천 마리의 물고기들은 너무 커다란 난관 앞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이 물고기들 중에서 힘이 세고 용감한 잉어들이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타고 오르기 시작합니다. 자칫 방심하면 돌부리에 이마를 찧고 쓰러지기 쉽습니다. 옛 기록에 따르면, 꼬리로 물살을 가르며 있는 힘을 다해 용문을 오르는 잉어는 한 해에 겨우 칠십 마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용문에 오른 잉어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용문을 오른다.’라는 의미의 ‘등용문(登龍門)’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습니다. 바로 성공하기 위해 마침내 통과해야 하는 어려운 관문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공부하는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얻는 것을 등용문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서 잉어는 공부하는 사람이고, 용문을 지나는 일은 시험에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이 된다는 의미는 곧 벼슬을 얻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요. 붉은 아침 해는 어려운 난관을 뚫고 얻은 새 희망을 말하지요.

물고기 그림은 물고기 숫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위와 같이 한 마리가 용문으로 도약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한 차례의 관문을, 두 마리의 물고기는 두 차례의 관문을 통과하라는 의미랍니다. 조선 시대 문신이 되는 시험은 크게 소과(小科)와 대과(大科)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두 차례의 시험을 통과해야 급제할 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세 마리는 어떤 의미일까요? 세 마리 물고기는 한자말로 삼어(三魚)가 됩니다. 이 말은 삼여(三餘)와 음이 비슷하지요. 삼여란 세 가지 한가한 시간을 말합니다. 밤과 비 오는 날, 겨울이 바로 이 때입니다.

이런 여가마저 쉬지 않고 공부하는 데 힘쓴다면 어떤 어려운 관문도 뚫고 나갈 수 있겠지요. 이렇듯 우리 조상들은 물고기 그림 하나에도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답니다.

 

조상들은 물고기 중에서 특히 잉어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림은 물론 재미난 이야기도 많습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행복한 미소를 짓는 이 할아버지를 부러워하였습니다. 나라일로 고민이 많던 임금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는 궁궐로 할아버지를 초대하여 이렇게 물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런 걱정이 없다니, 과연 그게 사실이오?”

할아버지는 역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들 5 형제 모두 장가를 가서 잘 살고 있을 뿐더러 손자들도 모두 건강하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금님은 이 할아버지를 한 번 시험하고 싶었습니다.

“좋소. 그러면 나랑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임금님은 바둑을 한 판 두고 나서 바둑알이 든 주머니를 할아버지에게 맡기며 다음에 부를 때까지 잘 보관하라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주머니를 품에 안고 궁궐을 나섰습니다. 강을 막 건너려는 순간 어떤 이가 주머니를 빼앗아 강물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집에 돌틸?생전 냅?끙끙 앓아 누웠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는 시아버지 병환을 다스리기 위해 잉어를 사 왔습니다. 놀랍게도 잉어 배를 가르자 바둑돌이 든 주머니가 나타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몹시 기뻐 춤을 추었습니다.

임금님은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신하를 시켜 주머니를 빼앗게 하였지만, 마침내 잉어가 도와 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태평하고 만족하는 마음이면 하늘도 도와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조도
부인의 빛바랜 치마폭에 그린 애틋한 부정(父情)

 

 

정약용, 매조도, 1818년, 비단에 수묵 담채, 45 cm × 19 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이 그림을 그린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입니다. 어려서부터 줄곧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힘을 기울였고, 여러 분야에 걸쳐 무려 500 권이 넘는 책을 펴냈습니다. 정조 때 암행어사나 승지(承旨)와 같은 벼슬을 지냈으나,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는 전라도 강진의 유배지에서 글을 읽고 쓰며, 제자를 기르고,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쓸쓸함을 달래었습니다. 하지만 멀리 가족들을 두고 외딴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마음은 늘 착잡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는 15세에 한 살 위인 홍씨 부인과 결혼하여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일찍 결혼하여 늘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한 아내도 걱정이었지만, 죄인인 아버지를 두어 벼슬길이 막힌 자식들이 더 염려되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이 생각날 때마다 시를 쓰고, 편지를 썼습니다. 유배 첫 해, 아직 어린 딸이 못내 그리워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내 어린 딸 아이 단옷날이면 깨끗이 새 단장하고,

푸른 창포 꽂은 머리에 붉은 모시 치마를 입었지.

절하는 자태며 술잔 올리는 모습 예쁘기도 하였는데,

오늘 같은 단옷날에는 누가 있어 손에 쥔 구슬처럼 사랑해 줄까.


유배 생활이 10 년째 접어든 어느 해에는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보고 싶은 아이들아, 이 아비는 논밭을 물려 줄 만큼 재산이 풍족하지 않구나. 다만 평생을 두고 쓸 수 있는 부적이 있으니, 이것을 소중히 여기기 바란다.

 

그가 ‘부적’이라고 말한 것은 ‘근검’이라는 두 글자였습니다. 근(勤)은 부지런함이고, 검(儉)은 검소함입니다. 그는 편지에, 집안 식구들 중 한 사람이라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일렀습니다.

또한 옷 한 벌을 지을 때도 얼마나 오래 입을 수 있는지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단지 멋을 부리기 위해 얇은 천을 쓰기보다는, 튼튼한 천으로 견고하게 만들어 오래 입어야 한다고 당부하였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그의 가족들은 늘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였습니다.

한번은 홍씨 부인이 장롱을 정리하다 오래된 다홍 치마를 하나 찾아 냈습니다. 시집 올 때 가져온 그 여섯 폭짜리 치마는 해가 묵어 낡고 빛이 바랬습니다.

‘이 치마를 그이에게 보내야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홍씨 부인은 치마를 잘 손질하여 강진으로 보냈습니다. 부인의 낡은 치마를 받아든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시집 올 때 고왔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한동안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숙연해지고 말았습니다. 고생을 많이 한 지금의 아내는 빛 바랜 치마처럼 초라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 따뜻한 마음은 여전히 변치 않았을 것이라 여기니 다소 위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치마를 꺼내 가위로 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두 아들을 위해서는 교훈이 될만한 글을 써서 간단한 책으로 엮었습니다. 하나뿐인 딸에게는 그림을 한 점 그려 주기로 하였습니다.

매화와 새를 그린 ‘매조도(梅鳥圖)’는 이렇게 해서 태어난 그림입니다.

매화는 이른 봄에 피어납니다. 춥고 지루한 겨울을 참고 이겨 내어 가장 먼저 향기로운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입니다. 매화 향기를 따라 새가 날아들었습니다. 두 마리의 새는 한 자리에 사이 좋게 앉아 있습니다. 딸이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그림 아래는 또 시를 한 편 썼습니다.

 

새들이 우리 집 마당 매화 가지에 날아들었네.

그 진한 향기를 따라 찾아왔겠지.

여기 깃들고 머물러 즐거운 가정을 꾸려다오.

꽃이 이렇게 좋으니, 그 열매도 가득하겠지.

 

 

 

 

 

 

인왕제색도
비 온 뒤 말끔해진 인왕산 힘찬 붓질로 표현


 

 

인왕제색도(정선), 1751년, 종이에 수묵, 79.2 cm × 138.2 cm, 호암미술관 소장

 

 

인왕(仁王)은 서울에 있는 인왕산을 말합니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바위 모습이 야무지고 웅장합니다. 제색(霽色)이란 비 온 뒤 맑게 개인 모습을 말하지요.

이 그림과 같이 먹으로만 그린 그림을 수묵화라고 하는데, 대개 붓에 물기를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축축하고 건조한 느낌이 달라집니다.

이 그림을 그릴 때는 붓에 물을 흠뻑 적셔서 그렸기 때문에, 촉촉하고 습기 많은 산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화강암 바위들은 햇빛이 좋은 맑은 날 대개 흰빛을 띕니다.

그러나 비에 흠뻑 젖으면 거무스름해지지요. 이 그림을 그린 정선은 비 온 뒤 화강암 바위들이 검은빛을 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평생 인왕산 아래 살면서 늘 변화하는 산의 모습을 지켜 보았기 때문입니다.

검은 산봉우리는 마치 빗질을 하듯 쓱쓱 쓸어 내린 붓질로 당당하고 힘차 보입니다. 비가 개고 나서 군데군데 장쾌한 물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가 생겼습니다. 물론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풍경입니다.

산허리는 안개로 띠를 둘렀고, 아래쪽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는 집이 한 채 있습니다. 안개에 쌓인 산은 더 높아 보이고, 숲과 집은 신비한 느낌을 줍니다.

이런 느낌은 대개 화가가 산을 보고 느낀 감정이 그림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같은 산을 보더라도 그리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림이 사진이나 지도와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정선은 평생 써서 닳은 붓이 무덤을 이루었다고 알려질 정도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만년의 나이인 일흔여섯에 그렸지만, 청년이 그린 것처럼 활달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정선의 산수화는 우리 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비싼 값으로 팔렸습니다.

한번은 정선이 어떤 집에 갔더니, 그 집 주인이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비단 치마에 고기 국물을 흘려서 못 쓰게 되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이오!”

정선은 치마를 가져오게 하여 물로 대강 씻어 말린 다음, 얼룩 진 자리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금강산의 가을 풍경을 한 점, 봄 풍경을 두 점이나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곁에서 감탄하며 지켜 보는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마침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마땅히 그릴 데가 없어 여기 그렸으니 양해해 주시오.”

집 주인은 너무나 기뻐서 정선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가을 풍경 한 폭은 가보로 소장하기로 하고, 봄 풍경 두 폭은 중국에 가지고 갔습니다. 그림을 본 한 스님이 은 일백 냥을 꺼내며 팔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받고 그림을 막 건네 주려 하는데, 마침 곁에 있던 한 선비가 스무 냥을 더 주겠으니 자신에게 팔도록 하였습니다. 스님은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점잖은 선비 체면에 남이 흥정한 것을 가로채려 하다니! 내가 서른 냥을 더 낼 테니 이리 주시오.”

그러고는 그림을 빼앗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림 주인은 쉰 냥만 받고 나머지는 스님에게 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영조 때 기록에 나오는데, 역시 정선의 그림이 너무 유명해서 생긴 일입니다.

 

 

 

 

 

 

날쌘 매가 꿩 잡는 광경 생동감 넘쳐
매 사냥 - 김홍도


 

 

김홍도, 매 사냥, 18세기, 종이에 수묵 담채, 34.2 cm × 28.0 cm, 간송미술관 소장

 

어느 맑은 겨울이었습니다. 나리는 아침 일찍 집안 하인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그 동안 길들인 보라매를 시험하러 가야겠다.”

보라매는 집에서 키워 길들인 매를 말합니다. 날지 못하는 어린 새끼를 거둬들여 사냥을 할 수 있게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킵니다.

매 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매를 부리는 사람을 매꾼이라고 하는데, 이 매꾼은 매가 언제 가장 활발하게 사냥을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냥을 나가기 전에 먹이를 적게 주거나 아예 굶겨 놓습니다. 배가 고픈 매는 아주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혹시 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염려가 있으니, 매의 꽁지에 꼬리표를 달고 주인의 이름과 주소를 적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걸 ‘시치미’라고 하는데, ‘시치미를 뗀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남이 길들인 매의 시치미를 떼고 자기 것을 붙이는 얌체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겼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짐짓 알고도 모르는 체하거나, 하고도 안 한체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지요.

시치미 끝에는 맑은 소리를 내는 청동 방울도 매달아야 합니다. 먹이를 향해 순식간에 날아간 매를 찾기 위한 것이지요.

매꾼은 소매 끝에 두툼한 천으로 만든 토시를 끼고 그 위에 매를 앉힙니다. 날카로운 매 발톱에 상처를 입지 않아야 하니까요. 몰이꾼들은 큰 소리를 내며 꿩이나 산토끼를 매꾼 쪽으로 몰아 줍니다.

매꾼은 사방이 잘 보이는 곳에 올라가 있다 매가 먹이를 보는 즉시 손으로 잡고 있던 짧은 줄을 놓으며 소리를 지릅니다.

“매 나간다~.”

배가 고픈 매는 순식간에 날아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먹이를 덮친 다음 매서운 부리로 살점을 쪼아 대기 시작합니다. 이 때에 나는 방울 소리를 듣고 매꾼과 몰이꾼은 쏜살같이 매 곁에 당도해야 합니다.

너무 늦게 이르면, 먹이를 충분히 먹은 매가 마음대로 날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금방 매 곁에 이르면, 조심스럽게 먹이를 빼앗는 대신 준비해 간 닭다리 살을 아주 조금 뜯게 해 줍니다.

꿩 대신 닭.’이란 말이 또한 여기서 나왔습니다. ‘바로 적당한 사람이나 물건이 없을 경우 그만은 못하나 그와 비슷한 정도의 것으로 대신 쓰게 됨’을 이르는 말이지요.

 

김홍도의 매 사냥 그림에는 모두 여덟 사람이 등장합니다. 검은 말을 탄 풍채 좋은 이가 바로 나리입니다. 운 좋게도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매 사냥 광경을 보느라 윗몸을 앞으로 굽히고 있습니다.

나리 바로 앞에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길다란 일산을 받쳐 든 일산잡이가 있고, 그 곁에 고삐를 잡은 말구종이 있습니다. 말 뒤에는 오늘날의 비서쯤 되는 집사가 따르고 있습니다.

여자 하인들은 술과 안주 등 먹을 거리를 이고 지고 따라 나섰습니다. 매꾼의 손을 벗어난 매가 커다란 꿩을 막 덮치는 순간, 사냥개 두 마리가 컹컹 짖어 댑니다. 이미 몇 마리 꿩을 짊어진 사람이 다급히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매 곁으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화가는 자신이 실제로 보았던 매 사냥의 광경을 실감나게 그렸습니다. 매가 꿩을 덮치는 가장 극적인 장면을 포착하였기 때문에 그림은 한층 생동감이 있습니다.

 

보라매는 우리 나라 동북 지방에서 나는 매로, 흔히 해동청(海東靑)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해동청은 다른 매에 비해 몸집은 작은 편이나, 아주 용맹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옛날에 커다란 구렁이가 벼랑을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벼랑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살던 매는 깜짝 놀라 구렁이를 공격하였습니다. 커다란 날개로 치고, 날카로운 부리로 쪼고, 발톱으로 할퀴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큰 구렁이는 끄떡도 하지 않고 서서히 집으로 다가와서 어린 새끼들을 다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화가 난 매는 하늘을 빙빙 돌며 다른 매들을 불러모아 한꺼번에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구렁이가 워낙 커서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 때 무리 중의 하나가 급히 어디론가 날아가 작은 새 한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푸른빛이 나는 새로, 비둘기보다 조금 작았습니다. 이 새는 놀랍게도 커다란 구렁이의 머리에 태연히 앉아 정확하게 구렁이의 눈을 쪼아 버렸습니다.

구렁이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축 늘어졌습니다. 커다란 매들이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작은 새는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이 새가 바로 그 유명한 우리 나라 해동청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박영대 (광주교육대학교 교수·화가)

출처: 소년한국일보 http://kids.hankooki.com/edu/culture_symbol.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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