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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朝鮮 後期의 繪畵 傾向과 實學

bizmoll 2013. 11. 1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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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계화 시대의 실학과 문화예술』 (경기문화재단, 2003 )에 실려 있음.

 

朝鮮 後期의 繪畵 傾向과 實學

-人物性同論․實事求是․法古創新을 중심으로

 

李泰浩(明知大學校 人文大學 美術史學科 敎授)

 

 

<차례>
 시작하며
 1. 실학과 회화의 관련성을 찾기 위한 변명
 2. 人物性同論: 眞景山水畵․風俗畵의 이념과 형식
   1) 전문 예능인의 타고남에 대한 배려
   2) 겸재와 단원의 동질성과 차이
   3) 天․人․物을 아우르는 구도법
 3. 實事求是와 法古創新: 사실주의의 발달과 퇴조
   1) 사실주의 회화의 진전과 寫眞論
   2) 서양화법의 인식과 수용
   3) 茶山과 秋史, 사실주의의 퇴조
 마치며

 

 

시작하며

 

조선 후기 회화는 동시기의 문학이나 음악 등 다른 문예동향과 마찬가지로 이전의 전통적 구태를 벗고 새로운 경향을 뚜렷히 보인다.1] 18세기 眞景山水畵와 風俗畵, 그리고 사실주의적 표현력이 크게 증진된 肖像畵나 動物畵 등의 작품에 잘 드러난다. 이들은 민족회화로서 고전적 전형을 완성해 놓은 것이라 평가되며, 그런 업적의 조선 후기는 한국미술사를 통틀어 어느 때보다 사실주의적 기량이 높은 작가를 많이 배출한 시기로 꼽힌다.2] 또 회화의 ‘신경향’은 잘 아다시피 조선 후기 문화사, 특히 시․소설․음악 등 문예사를 언급할 적이면 단골처럼 따라 다니는 ‘새로운…’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만큼 조선 후기 회화의 신경향은 당대의 새로운 사상적 조류인 實學의 부상과 어깨를 겨룬다고 볼 수 있겠다.

조선 후기 회화에 나타난 신사조의 사실정신은 흔히 實學의 學風과 연관지어 거론된다. 더불어서 性理學을 기반으로 한 사회구조의 변동에 따라 부상한 實學에 관한 연구에서도 문학이나 음악사와 더불어 미술사 등과의 공동 작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실학과 문학 관련 연구 업적은 그런 대로 쌓여온 편이다. 실학파 문인의 문학적 소양이 그 어느 영역보다 뛰어났음을 반증하는 결과일 것이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실학과 회화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묶어보는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또한 회화뿐만이 아니라 실학과 문예동향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연구도 본격적으로 시도해 본적이 없다. 이번 경기문화재단의 실학 학술회의가 그 첫 시발인 셈이다.

 

1] 安輝濬, 「朝鮮王朝後期繪畫의 新傾向」, ?考古美術? 134호, 한국미술사학회, 1977.

2] 이태호,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 학고재, 1996.

 

 

1. 실학과 회화의 관련성을 찾기 위한 변명

 

필자는 20년 전 ‘茶山 丁若鏞의 繪畵와 繪畵觀’을 정리해 보며 조선 후기 회화와 실학의 관계를 찾으려 시도한 경험이 있다.3] 그런데 정약용(1762~1836)의 학문적 성과에 비해 회화나 회화관은 기대 이하여서, 그를 통해 조선 후기 회화의 역동성을 접목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뒤로 실학과 회화의 관련성을 찾는 일은 멀리했었다. 어쨌든 근래 들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회화론 관련 논문들이 드문드문 쌓여 왔다.4] 필자는 또한 2002년 11월 ‘21세기 다시 읽는 實學’이라는 주제의 대동문화연구원 동양학 학술대회에서 유홍준 교수의 「실학자들 畵論의 예술론적 접근」이라는 발표의 토론자로 참여하여 다시 한번 실학자들의 회화론을 읽는 기회를 가졌다.5]

 

하지만 거기서도 실학자들의 회화 관련 정보나 인식 수준이 교양인의 입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구나 하는 것을 음미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실학자들의 현실적 문학론이나 음악론의 깊이에 비하여, 회화관은 대상의 사실묘사를 중시한 形似論과 작가의 내적 감정을 드러내는 寫意論의 절충 내지 조화를 모색한 소박한 리얼리즘론에 머무른 편이다. 토론 과정에서 재확인하였지만, 역시 철학 사상이나 예술이론이 창작에 적극적인 영향을 주거나 창작을 규정할 수 없는 터이다. 조선 후기 회화론도 실학파보다 실제 그림을 그렸거나 화가와 가까이서 교류한 (비실학계) 문인에게서 나온다고 결론지었다. 李瀷, 朴趾源, 丁若鏞 등보다 姜世晃, 趙榮祏, 李夏坤, 趙龜命, 李奎象 등이 더욱 체계적인 화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6] 조선 후기 회화론은 실학파의 몫만이 아니라 당대 화가와 문인 지식인의 전모를 통해서 살펴야 할 것이다.

실학과 회화의 관계는 ‘새로운’ 혹은 ‘역동성’이 큰 시기라는 조선 후기 사회의 횡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실학 내지 당시 어떤 사상의 영향으로 회화가 발전했다기보다 동시대의 사회현상으로서 문화적 위상에서 실학과 회화가 어떻게 관련짓고 있는가, 혹은 어떤 동질성 내지 시대정신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사상계에서 실학이 그러했듯이, 眞景山水畵나 風俗畵風의 새로운 회화사조가 근대를 앞둔 조선 후기의 경제력 성장을 토대로 한 현실과 사회변동을 가장 적절하게 시각화해 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의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는 중국을 이상으로 삼은 관념적 산수화에서 벗어난 것으로, 내 땅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국토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조선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는 내 삶에 대한 긍정과 현실 풍자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肖像畵나 動物畵 등 사실주의적 묘사의 진전은 내 모습과 주변 사물에 대한 애정과 회화예술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3] 李泰浩, 「茶山 丁若鏞의 繪畫와 繪畵觀」, ?茶山學報? 4집, 茶山學會, 1982 ; 同著, 앞의 책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에 재수록.

4]李成美, 「?林園經濟志?에 나타난 徐有榘의 中國繪畵 및 畵論에 대한 關心 - 朝鮮時代 後期 繪畵史에 미친 中國의 影響」, ?미술사학연구? 193호, 한국미술사학회, 1992 ; 이암, 「연암 박지원의 화론과 문학진실관」, ?민족문화사연구? 7호, 1995 ; 이태호, 「추사 김정희의 예술론과 회화세계」 - 제주전통문화연구소 학술세미나 자료집, 2000 ; 金順愛, 「楚亭 朴齊家의 繪畵觀」,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 ; 文善周, 「徐有榘(1764-1845)의 ≪畵筌≫과 ≪藝翫鑑賞≫ 硏究」,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 박은순, 「서유구의 서화감상학과 ≪임원경제지≫」, 한국학연구소 편,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문화의식?,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1.

5]유홍준, 「실학자들 화론(畵論)의 예술론적 접근 - 성호․연암․다산의 리얼리즘에 대하여」,?21세기 다시 읽는 실학?,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大東文化硏究院, 2002.

6]유홍준, ?조선시대 화론 연구?, 학고재, 1998.

 

 

나는 實學에 대하여 잘 모른다. 실학 관련 연구자도 아니고, 실학파의 사상이나 문학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읽어본 기억도 없는 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연세대학교 한국학연구원의 의뢰로 ‘실학과 회화’에 대한 글을 요청받고, 원고 마감을 넘긴 지 1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근 1년 반 동안 조선 후기 회화와 관련하여 實學을 읽어온 셈이다. 200여 편이 넘는 실학 관련 논저들을 독파하면서도 손에 쥐어지는 대목이 마뜩치 않아 고민만 해온 것이다. 지금까지 쌓여온 實學 관련 역사와 철학, 그리고 문학쪽의 연구 업적들이 엄청나서 필자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점도 글을 못 쓴 이유이다. 그러던 차에 경기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실학 관련 학술회의에서 발표해 달라는 주문에 덜컥 응하게 되었다. 겨우 한 달의 말미를 준 재단측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시간을 갖고 공부해 보고 싶은 과제인데…’하는 아쉬움이 일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따라서 이 글은 ‘조선 후기 회화 경향과 실학’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에 대한 거친 試論일 따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 후기 실학파의 회화관은 소박한 수준이다. 그림과 걸맞지 않는 화평이나 표현의 미숙, 그리고 정보의 오류 등이 적지 않다. 단지 形似와 寫意의 조화, 곧 神寫나 寫眞論, 形神論 등에 따라 잘 그린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지론을 살려 낼 수 있다. 여기서 ‘잘 그린 그림’이란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精深하게 묘사한 것을 말한다. 더욱이 文․思․哲을 고루 갖춘 지성을 대거 배출한 실학파의 문학과 문학론에는 현실을 치열하게 바라본 비판적 인식이 뚜렷한 데 비해 그들의 회화론은 보통 사람들의 교양적 안목에 불과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또한 실학파의 음악이나 음악론도 회화론보다는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7] 역시 문학과 회화, 음악과 회화가 유사성이 많은 예술영역이면서도, 문학이나 음악적 소양이 회화로 쉽게 전이되지 못함을 시사한다.

 

조선 후기 실학파들의 회화관이 그처럼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피력한 ‘잘 그린 그림’의 사실주의론은 나름대로 회화적 의미와 시대성이 깔려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어쩌면 실학파의 사실주의 관점은 오늘날에도 일반 교양인이 가질 수 있는 회화의 인식태도이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載道論的 공리를 강조한 성리학적 예술론을 벗은, 바로 실학파의 근대지향적 성향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 특히 실학파 문인들의 현실과 조우한 시문학 작품이나 문학론, 나아가 그들의 철학 사상을 포괄하면 우리식 리얼리즘 예술론을 충분히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회화를 비롯한 조선 후기 문예는 무엇보다 신사조의 등장이 중요하지만, 다양한 성향들이 공존하였다는 데서도 그 의미를 찾아야 된다고 본다. 그리고 18~19세기 근 2백 년 간 문예사조의 변화가 적지 않았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회화의 경우만 들더라도, 18세기 전반의 謙齋 鄭敾과 18세기 후반의 檀園 金弘道가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더욱이 이들과 19세기 전반의 秋史 金正喜는 간격이 크며, 秋史와 19세기 후반의 吾園 張承業을 같은 배에 태울 수는 없다. 實學의 사례도 마찬가지여서 星湖와 茶山, 北學派, 개화파 등이 단선으로 꿰지지 않는다.

 

한편 연구의 폭이 넓어지면서 조선 후기 실학이나 문예의 새 경향에 대한 해석에서 ‘근대 지향성’에 대응하는 ‘보수성’의 의미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는 것 같다.8] ‘실학’을 읽을수록 혼돈이 가중되면서 어쩌면 21세기를 맞은 오늘에 다시 읽는 실학의 시대적 의미를 상실해 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오히려 1920~30년대나 1960~70년대에 제기된 초기 실학 연구자들의 논점이 크게 보일 뿐이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조선 후기 회화에 대한 최근의 연구가 ‘새로운’보다 明․淸朝의 영향 찾기에 관심을 쏟는 경향성도 그와 유사한 것 같다. 심지어 우리의 땅과 삶을 담은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마저 중국의 영향을 강조하거나, 동 시기 중국이나 일본의 유사 조류와 함께 동아시아 전체에서 바라보는 조선 문화(회화)의 거시적 위상 찾기가 제기되어 있기도 하다.9] 이들의 논의를 일정하게 인정하더라도, 韓․中․日 세 나라의 18~19세기 문화는 근현대사가 각기 다른 길을 갔던 것처럼 유사성보다 ‘다름'이 더 뚜렷하다고 생각된다.

이런저런 점들이 머리속을 맴도니까 조선 후기 실학과 회화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새로운’ 회화 유형의 부침과 양식의 변화, 그리고 그 예술론의 정립과 관련하여 ‘실학’이 한눈에 잡히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떠오른 생각이 실학의 주요 관점으로 지목되는 人物性同論, 實事求是와 法古創新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 논점으로 조선 후기 회화의 신경향과 그 변동을 일단 살펴보기로 마음먹고 그 지론을 전개해 본 것이다.

 

7]임형택, 「18세기 예술사의 시각 - 유우춘전의 분석」, ?雨田 辛鎬烈 先生 고희기념논총?, 1983.

8]한국사연구회 편, ?한국실학의 새로운 모색?, 경인문화사, 2001 ; 강만길 엮음, ?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 비평사, 2000.

9]鄭炳模, 「朝鮮時代 後半期 風俗畵의 硏究」, 東國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1 ; 홍선표, 「진경산수화 연구 시각의 비판적 검토: 진경산수는 조선 중화주의의 소산인가」, ?가나아트? 34, 1994. 7․8 ; 한정희, ?한국과 중국의 회화 - 관계성과 비교론?, 학고재, 1999 ; 高蓮姬, 「조선후기 山水紀行文學과 紀遊圖의 비교연구 - 農淵그룹과 鄭敾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0.

 

 

2. 人物性同論: 眞景山水畵․風俗畵의 이념과 형식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초두부터 人性과 物性에 대한 논쟁이 심화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老論系 내부에서 湖論과 洛論系의 논쟁으로 시작된 것으로, ‘人과 物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同異의 논쟁이었다. 이는 16세기 중엽의 四端七情에 대한 理氣論에 이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시대 학계의 양대 논쟁으로 꼽힐 정도이다. 이들의 논쟁 성향은 곧 유학의 뿌리 깊은 전통이기도 하지만, 心性論을 중심으로 한 조선적인 학풍의 특색으로 거론되기도 한다.10]

 

조선 후기 회화의 신경향과 유관한 논점은 人物性同論이다. 眞景山水畵와 風俗畵의 이념적 배경이나 형식적 특징, 그리고 양식의 변모와 관련하여 그러하다. 인물성동론은 湖洛에서 農巖 金昌協(1651~1708), 渼湖 金元行(1702~1772) 등 洛論系 성리학자의 주장으로부터 湛軒 洪大容(1731~1783), 燕巖 朴趾源(1737~1805) 등 北學派로 이어진 것으로 본다.11] 인물성동론의 人과 物을 동일시한 관점은 자연 혹은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는 대상인 事物을 상대적으로 인간 못지 않게 중요시 여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인물성동론은 사회변동기 현실인식에 관심을 쏟은 북학파의 실학으로 확대된다. 人과 物의 동일시는 나아가 貴賤이 엄격했던 신분사회의 士와 民, 중국과 조선의 관계로 설정된 華와 夷에 대한 회의론에까지 미친 것이다. 따라서 북학파의 대상을 객관화시키고 상대적으로 보는 관점, 곧 ‘관점의 상대화와 객관화’는 “중세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부정하고 근대적인 사회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는 주장을 가능케 한다.12]

 

10]송갑준, 「人性․物性의 同異論辯에 대한 연구」, 한국사상사연구회, ?人性物性論?, 한길사,1994.

11]유봉학, 「북학사상의 형성과 그 성격-湛軒 洪大容과 燕巖 朴趾源을 중심으로」, ?韓國史論? 8 집,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2 ; 김문용, 「北學派의 人物性同論」, 한국사상사연구회, 앞의 책.

12]김문용, 앞의 글.

 

 

1) 전문 예능인의 타고남에 대한 배려

 

북학파의 人物性同論에 관련한 이 해석은 당대의 문화주도층인 문인 사대부는 물론 中庶層에서 뛰어난 예술인이 배출되도록 열어 놓았다는 점과 맞닿아 있다. 당대 위항문학의 시문학과 관련하여 “위항인은 과거시험을 염두에 둔 마음의 부담이 없어 천성을 온전히 하고 천기를 밝힐 수 있다”13]라며, 중서층도 사대부보다 뛰어난 문학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갖게 된 것이다.14] 심지어 농부의 순수한 심성이 좋은 시를 지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미치기도 하였다.

 

이런 양상은 문학인만이 아니라 음악인이나 화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畵員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고, 일정하게 자신의 개성을 도출시켜 내었다. 문인화가의 경우도 그림은 완물상지라며 폄하했던 성향을 벗고 수준급의 회화기량을 펼치거나, 아마추어리즘에 머물면서도 餘技的 畵興을 펼쳐내었다. 士人이나 中庶層을 막론하고 그 전문적인 기량이 걸출하면 예능인으로 자기세계에 천착할 수 있었고, 서로 교유했던 점은 문학예술의 꽃이 만개한 조선 후기의 사정을 짐작케 해준다. 15]

 

화가로 득세한 謙齋 鄭敾(1676~1759)이 양천 현령 시절, 경기도 관찰사 洪景輔, 연천군수 申維翰과 함께 蘇東坡의 「後赤壁賦」에 빗댄 詩會에 참여하여 ≪連江壬戌帖≫의 <羽化登舡圖>와 <熊淵繫纜圖>(1742년 작, 개인 소장)를 제작한 일은 관료사회의 위계와는 거리가 있다. 더욱이 畵員 출신인 壇園 金弘道(1745~1806)가 안기찰방 시절(1784년), 경상도 관찰사 李秉模를 주축으로 봉화현감 沈公著, 흥해군수 成大中 등이 청량산에서 가진 雅會에 詩․畵․樂으로 참여한 일은 班常의 신분을 뛰어넘은 형태이다.16] 김홍도는 당대의 문인 豹菴 姜世晃(1713~1791)에게서 그림을 배웠는데, 강세황은 32년 연하인 김홍도를 ‘나이와 지위를 잊은 교우’ 내지는 ‘예림의 知己’라 불렀을 정도이다.17] 이런 현상은 19세기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모여든 畵員과 中庶層의 서화가 모임인 ‘藝林甲乙錄’에까지 이어졌다.18]

 

조선 후기에는 그같이 예술적 기량이 뛰어난 인재들이 자신의 천부적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귀천을 따지지 않는 ‘타고남’에 대한 배려는 性理에 의해 고정된 신분사회의 틈이 벌어지면서 나타난 근대지향적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13]吳光運, ?昭代風謠? 序.

14]박명희, ?18세기 문학비평론?, 경인문화사, 2002.

15]강명관, 『조선시대 문학 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출판, 1999.

16]吳柱錫, ?壇園 金弘道 -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 悅話堂, 1998 ; 진준현, ?단원 김 홍도 연구?, 일지사, 1999.

17]姜世晃, ?豹菴遺稿?, 「檀園記」.

18]이우성, 「김추사 및 중인층의 성령론」, ?한국한문학연구? 5집, 한국한문학연구회, 1981 ; 유홍준, ?완당평전? 1, 학고재, 2002.

 

 

2) 겸재와 단원의 동질성과 차이

 

북학파의 人物性同論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종속적 의미를 담은 崇明意識 내지 華夷論을 수정하게 하였다.19] 홍대용의 “하늘에서 보면 內(중국) 外(四夷)의 구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각기 사람과 친숙하고, 각기 君王을 숭배하고, 각기 나라를 지키고, 각기 習俗에 만족하는 것이다. 華와 夷는 하나이다”에서 그 연원을 찾는다.20] 이는 앞서 거론했듯이 귀천의 관념을 떨어내는 것이면서, 동 시기 조선 사회를 지탱한 명분론의 하나였던 華夷論마저 부정한 것이다.21] 이 점에서도 당시 노론계의 북벌론에서 淸에서 배울 게 있다는 북학파의 의식전환을 엿볼 수 있다.

 

북학파의 바로 이 실학정신은 조선 후기 회화의 진수로 꼽을 수 있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과 맞물려 있다. 조선의 땅과 삶을 긍정하게 된 현실이 그렇다. 18세기의 진경산수화는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재인식하는 국토관의 변화를 보여준다. 또 풍속화는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삶과 일상, 그리고 유흥 장면 등 그야말로 俗된 인간사를 회화의 소재, 곧 예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특히 진경산수화는 18세기 人物性同論의 사상적 조류와 함께 유행하였고, 시기에 따른 양식적인 변모를 같이 하였다.

 

18세기 낙론계와 북학파의 인물성동론은 그 승계와 차별성에 대한 논쟁도 제기되어 있다. 그 하나는 ‘낙론계의 인물성동론에서 物性의 중시가 북학파의 새로운 학문 형성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22] 또 다른 관점은 ‘낙론계가 성리학적 세계관에 머물렀기 때문에 북학파의 실학사상은 그와 다른 면모를 지녔다’는 것으로, 북학파의 ‘華夷論 부정은 근대적인 민족의식의 형성과 연계’를 강조해 보고 있다.23] 홍대용이 18세기 노론 집권층을 형성한 낙론학계의 종주 김원행의 제자이고 북학파가 노론계에서 배출되었지만, 사회 실천적 의미에서 낙론계와 북학파도 같지 않다는 것이다. 18세기 진경산수화가 정선에서 김홍도로 계승되면서 두 주장과 유사하게 형식상의 동질성과 차별을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다.

 

18세기 전반 진경산수화의 완성자인 겸재 정선은 노론 金昌集의 후원으로 立身했고, 그 동생들인 낙론계 文士 농암 김창협과 三淵 金昌翕(1653~1722)의 제자격으로서 槎川 李秉淵(1671~1751), 觀我齋 趙榮祏(1686~1761) 등과 함께 이른바 ‘白岳詞壇’의 일원이었다.24] 따라서 정선 진경산수화의 이념과 형식은 바로 그 영향으로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朱子學의 종주국인 중국 땅에 오랑캐로 인식했던 만주족의 淸朝가 들어서자 西人-老論系를 중심으로 北伐論이 제기되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小中華’ 내지 ‘朱子宗本主義’를 진경산수화 발생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25] 성현을 배출한 중국을 성리학의 이상으로 생각했던 문인들이 눈을 돌려 조선 땅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게 된 점과 진경산수화의 출현을 같이 볼 수 있는 시각이다. 그 까닭에 정선은 조선의 절경과 명승에 대해 道學적 이상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뚜렷히 보인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닮지 않았다. <仁王霽色圖>(1751년 작, 호암 미술관 소장)를 제외하고 한양 名所나 금강산 경치를 담은 진경 작품을 보면 실경과 거리가 멀다. 대상을 변형 내지 과장법으로 집약하거나 철저히 재해석한 것이다.26] 정선과 동시기의 문인들도 그의 실경화 현장을 다녀온 뒤 곧잘 실경과 다름을 지적하였고, 심지어 ‘바위와 산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도술을 부리는 화가’로 지칭했을 정도이다.27] 또는 ‘操縱殺活’의 능력으로 상찬받기도 했다.28] 그처럼 정선은 실경 현장을 사생한 게 아니라 실경 현장을 다녀온 뒤 기억에 의존하여 진경화를 그렸다.

 

이런 정선에 대하여, 그와 도타운 우정을 나누고 금강산을 동행하기도 했던 시인 이병연은 “내 벗 鄭 元伯은 주머니에 畵筆도 없어 / 때때로 畵興이 일면 내 손에서 뺏어 간다네 / 금강산을 들어갔다 나온 뒤로는 휘둘러 그리는 것 너무 방자해…”라고 증언한 바 있다.29] 과장과 변형으로 일관한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엄밀한 의미의 實景寫生畵라기보다 ‘仙景’으로서의 ‘眞景’을 이상화시켜 재창조한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30]

 

정선 진경산수화의 이념은 그 자신이 노론 낙론계 문사들과 어울렸듯이 신흥 실학의 학풍보다는 기존 성리학의 전통에 머물렀던 것이다. 정선인 仙景으로 변형하는 방식은 농암과 삼연이 文道合一을 주장하며 性情과 감정 표현을 강조한 ‘興과 神’, 곧 神情과 興會의 文學美와 연계되어 있다.31] 그리고 ‘유가적 類比를 벗고 癖과 趣를 추구하여 심미적 경향과 작가의 주관적 서정성이 강화’ 되는 18세기의 문인들이 국토를 유람하면서 쓴 山水遊記의 새로운 경향과도 같이 한다.32] 이는 또 18세기의 음악이 장단과 고저, 음역의 폭을 넓혀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음과도 통하는 경향성이랄 수 있다.33] 다시 말해서 정선은 외형의 닮음을 떠나, 과장법으로 대상에서 느낀 감명을 극대화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이다

 

朴淵瀑圖>(1750년대 작, 개인 소장)는 실제 폭포보다 두 배 가량 길게 늘이고 진한 積墨의 암벽과 흰 폭포를 대조시켜 그야말로 박연폭포의 물 떨어지는 굉음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걸작이다.34] 또한 부채 위에 일만이천 皆骨巖峰을 속도감 넘치는 필치로 죽죽 내려그은 扇面 <金剛山圖>(1740~50년대 작, 간송미술관 소장)에서는 봉우리 사이를 감도는 바람 소리가 느껴지는 듯하다. 약간 산만한 구도에 같은 필치를 가한 <萬瀑洞圖>(1740년대 작,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는 만폭동 계곡의 바위를 감돌아 떨어지는 소란스런 물소리를 묘사한 것이다. 필자는 1998년 8월 내금강산을 답사하며 그 바람 소리와 물소리의 생생한 현실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35]

 

정선은 그같이 실경에서 받은 인상과 감동을 강조한 것이다. 구도나 외형은 닮지 않았지만, 그 현장에서 직감적으로 느낀 소리의 리얼리티를 화면에 구현해 놓았다. 이러한 점이 정선 진경산수화를 한국미술사 최고의 회화예술로 끌어올린 것이다. 또 중국 산수화풍을 염두에 두던 기존의 관념적 구태에서 벗어나 우리 땅을 그렸다는 평가를 뛰어넘어,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었음을 인정하게 한다.

 

 

19]김문용, 앞의 글.

20]洪大容, ?毉山問答?.

21]강재언, 이규수 옮김, ?서양과 조선?, 학고재, 1998.

22]유봉학, 앞의 글

23]김문용, 앞의 글.

24]崔完秀, ?謙齋 鄭敾 眞景山水畵?, 범우사, 1993.

25]崔完秀, 위의 책.

26]이태호, 「한국산수화의 모태, 조선 후기 금강산 그림」, ?조선미술사기행 - 금강산․천 년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1, 다른세상, 1999.

27]李德壽, ?西堂私載?.

28]李夏坤, ?頭陀草? 卷14. 題一源所藏海岳傳神帖.

29] 李秉淵, ?槎川詩抄? 卷上 ; 최완수, 앞의 책에서 재인용.

30]李泰浩, 「朝鮮後期의 眞景山水畵 硏究 - 鄭敾 眞景山水畵風의 계승과 변모를 中心으로」, ?한국미술사논문집? 1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同著, 앞의 책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에 재수록.

31]박명희, 앞의 책.

32]정민, 「18세기 山水遊記의 새로운 경향」, ?18세기 연구? 4호, 태학사, 2001.

33]백대웅, 「18세기 전통음악사에 나타난 음악 양식의 변화」, ?전통음악의 랑그와 빠롤?, 통나무, 2003.

34]李泰浩, 「謙齋 鄭敾의 眞景山水畵에 나타난 實景의 表現方式 考察 - 1750년 경 작품 < 朴淵瀑圖>를 중심으로」, ?방법론의 설립: 한국미술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LACMA), 2001.

35]이태호, 「옛 화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조선미술사기행 - 금강산․천년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1, 다른세상, 1999.

 

 

정선에 비하여 북학파 시대와 평행한 18세기 후반 壇園 金弘道의 진경산수화는 철저히 현장사생에 기초한 그림이다. 김홍도의 진경 작품은 실경 현장에 서 본 대상의 형상이 그림과 닮아 있을 뿐 아니라, 그림과 유사한 구도가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잡힌다.36] 김홍도의 진경화는 그야말로 ‘實景山水畵’라 이를 만하다. <明鏡臺圖>와 <萬瀑洞圖>(1790년대 작, 개인 소장), <九龍瀑圖>(1790년대 작,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叢石亭圖>(1795년 작, 乙卯年畵帖, 개인 소장), <玉筍峰圖>(1796년 작, 丙辰年畵帖, 호암미술관 소장) 등이 그 좋은 사례이다. 현장을 닮게 사생하는 태도는 정선의 그것과 크게 다른데, 玄齋 沈師正(1707~1769)이나 豹菴 姜世晃 등 문인화가들의 紀行寫景 전통을 배운 것이다.37]

 

또한 정선이나 당대의 화가들이 절경이나 명소에서 대상을 구했던 데 비하여 김홍도는 ≪丙辰年畵帖≫의 <疏林明月圖> 같은 평범한 생활 주변의 풍경을 담아내기도 했다. <소림명월도>는 시골집 담장 너머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터밭 개울가의 봄물이 오른 잡목 사이로 떠오른 보름달을 포착한 산수도이다. 잡목과 개울을 묘사한 단필의 濃淡 처리가 리드미컬하고, 옅은 안개 내리 깔리는 듯한 하늘에 淡墨의 연한 바림이 청정하다. 보름달이 휘황한 봄날 밤풍정의 달디 단 공기감을 느끼게 해준다. 水墨을 다루는 솜씨, 특히 淡墨 구사는 섬세함의 극치를 이룬다.

 

김홍도는 풍속화가로 명성을 얻었듯이 진경산수화에서도 삶의 일상풍경까지 포괄하여 리얼한 수묵산수로 회화적 세련미를 완성하였다. 사대부가 출신의 정선이 性理學의 道學的 이상을 따르면서 기세 넘치는 형식미를 창출한 데 비하여, 畵員으로 정확하고 숙련된 필치의 김홍도 진경화는 근대적 사생화에 근접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는 19세기 마네나 모네, 반 고흐나 세잔느 등 유럽 인상주의 풍경화의 사생방식과 근사하기 때문이다.38]

 

정선과 김홍도를 빗대어 人物性同論을 편 낙론계와 북학파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 보자. 18세기 전반 낙론계의 영향권에 있었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조선 성리학의 성숙 위에 세운 것으로 道學的 이상인 仙景을 재창조한 것이랄 수 있다. 정선은 그것을 예술적 감동으로 극대화하여, 진경산수화를 조선 후기의 ‘새로운’ 예술사조로 끌어올렸다. 이를 승계한 18세기 후반의 단원 김홍도는 절경부터 일상의 주변까지 보이는 대로의 실경을 사생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선이 실경의 기억을 토대로 仙景의 이상을 쫓았다면, 김홍도는 눈 앞에 마주한 실경을 곧 仙景이라 인식했던 것 같다.

 

한편 구도를 잡는 방식도 다르다. 정선은 원형구도나 수직과 수평구도로 산수자연의 엄정함을 드러낸 반면, 김홍도는 사선이나 대각선 구도로 눈에 보이는 대로의 산수 형상을 여유있게 풀어내었다. 이런 차별성은 김홍도의 진경산수화가 정선보다 근대적 사생의 풍경화와 가까워졌음을 의미하며, 당시 地圖學의 과학화와 더불어 국토관의 변화와 함께 하는 것이다. 39]

 

36]이태호, 「한국산수화의 모태, 조선후기 금강산 그림」, 앞의 책, 1999.

37]李泰浩, 「文人畵家들의 紀行寫景」, 安輝濬 편, ?國寶? 10권 - 繪畵, 예경산업사, 1984 ; 同著, 앞의 책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에 재수록.

38]이태호, 「자연을 대하는 같은 감명, 다른 시선 - 겸재 정선과 Paul Cézanne」, ?월간미 술? 2002년 1월.

39]배우성,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국토관과 지역인식」, ?한국사연구? 180집, 한국사연구회, 2000.

 

 

3) 天․人․物을 아우르는 구도법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는 일관되게 양식화된 화면의 운영방식을 보여준다. 위(하늘)에서 굽어본 듯 정경을 포착하는 半鳥瞰圖式 俯瞰法을 즐겨 쓰고 있다. 그리고 근경에 작가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근경을 화면의 하단에 낮게 설정한다. 그리고 근경에 뒷 모습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구성법이 눈에 띈다.
이러한 양식의 이념적 근거 역시 北學派의 人物性同論에서 찾을 수 있다.

담헌 홍대용이 “사람의 처지에서 물상을 보면, 人이 귀하고 物이 천하지만, 물상의 처지에서 사람을 보면 物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人과 物이 균등하다(以人視物 人貴而物賤, 以物視人 物貴而人賤. 自天而視之 人與物均也)”고 한 주장이나40] 연암 박지원의 “물상의 입장에서 나를 보면 나 역시 物의 하나이다(卽物而視我 則我亦物之一也)”라는 인식이 그 단서이다.41] ‘人과 物’, ‘物과 我’의 상대주의적 관점, 또는 天으로부터 내려다보아 人과 物을 객관화시킨 논지는 북학파가 근대사회를 바라보는 시기인 조선 후기의 사회현실에 대해 정확히 진단하려는 실천적 철학사상, 그에 따른 비판의식을 표출한 문학세계, 그리고 세계 속의 淸과 조선이라는 위상을 재정립한 시각 등에 관철되어 있다. 42]

 

정선의 <金剛全圖>(1734년 작, 호암미술관 소장)는 부감법을 활용한 전형적인 예이다. 원형구도로 內金剛의 土山과 皆骨巖峰을 한 화면에 담았는데, 각 봉우리들은 측면에서 본 대로 그리고, 토산과 암산을 하나로 부감한 모습으로 상상하여 배치한 방식이 눈길을 끈다. 뜯어 보면 어색한데도 금강산의 전모를 감상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화법이기 때문이다. 당시 시인들이 흔히 읊었듯이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 금강산 전체를 한눈에 보고 싶어하던 열망을 성취시켜 주는 형식미인 셈이다. <금강전도>에는 아예 사람을 그려 넣지 않았지만, ‘天에서 부감하여 物象을 본’ 시각과 각 ‘物象의 개성’ 을 존중한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한편 진경산수 작품은 흔히 제목에 등장하듯이 ‘望’의 시점을 갖는다. 정선의 <斷髮領望金剛>(1720~30년대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인물성동론에 대비해 볼때, 그 적절한 사례로 꼽을 수 있겠다. 근경에 米點의 土山 단발령을 그러넣고 그 너머로 수정처럼 솟은 巖山의 금강산경을 늘어놓은, 정선이 흔히 활용하는 포치 방식의 그림이다. 특히 <단발령망금강>에는 단발령 고개마루의 개미같이 작게 그려진 인물들 중 세 사람이 주목을 끈다. 갓과 도포 차림을 한 세 사람의 서있는 뒷모습은 정선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듯한 장면으로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화폭을 들고 있고 그 가운데서 정선이 단발령에서 본 금강산, 곧 이 작품 <단발령망금강>을 그리는 자태이다. 단발령에서 본 금강산을 그리면서 근경에 자신의 위치인 단발령을 배치한 구성은 단발령과 금강산을 한꺼번에 조망하는 제3의 시점을 설정해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상상하여 시점을 잡은 것이다. 이는 홍대용의 ‘自天而視之 人與物均也’와 상통하여 흥미롭다. 그림 속의 단발령은 곧 ‘人’ 혹은 ‘我’이며, 금강산은 ‘物’이 되고, 양자를 포괄하는 제 3의 시점은 ‘天’이 되는 셈이다.


정선의 위 그림과 유사한 작품으로 강세황의 <太宗臺圖>(1757년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들 수 있다. 강세황이 송도를 여행하며 사생한 서화첩인 ≪松都紀行帖≫ 중의 한 작품으로, 근경 너럭바위에 화폭을 펼쳐놓고 태종대를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가 자신과 대상을 한 화면에 담는 방식은 서구의 근대 풍경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자연에 대한 철학과 우리식 풍경화법을 적절히 대변해준다.43] 나아가 우리의 자연을 가장 우리의 자연답게 그리는, 우리가 서구식 풍경화의 영향으로 잃어버린 구도법이다.

 

근경에 화가 자신의 위치나 모습을 배치하는 방식은 강세황의 제자인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로 계승되었다. 예를 들어 <玉筍峰圖>를 보면, 옥순봉 기슭 의 강물 오른쪽에 사람들이 탄 배가 자리하고 있다. 그림의 실경 현장에 서보면 그 배가 바로 김홍도가 옥순봉을 그린 위치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김홍도의 실경 사생이 당시 성리학 사회의 예술이념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진경산수화’의 틀을 완연히 벗은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일치한다. 조선 후기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 그리고 실학의 중심을 이룬 북학파의 근대지향적 성과와 보수적 한계가 역시 정선과 김홍도의 진경산수화에도 그대로 관철되어 있다.44] 그것은 진경산수화를 포함하여 풍속화 등에 나타난 화면 운영방식을 통해서도 더욱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이처럼 제 3의 시점을 설정하여 나와 내 위치, 그리고 내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한 화면에 담는 것은 북학파의 상대주의적 관점과 유관하다고 본다. 또한 자연을 대상으로 한 ‘나’ 혹은 ‘人物均’을 반추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본 서양인의 자연관과 달리, 자연과 인간을 한 덩어리로 파악하며 조화로운 순리를 표방한 동양사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부감하거나 제 3의 시점을 설정하는 형식은 18세기 풍속화에도 적용된다. 먼저 풍속화의 전통을 세운 18세기 초의 선비화가 恭齋 尹斗緖(1668~1715)의 <나물 캐는 두 여인>(1710년대 작, 해남 녹우당 소장)과 그의 손자 靑皐 尹忄容(1708~1740)의 <挾籠採春>(1730년대 작, 간송미술관 소장)을 보면, 뒷모습의 인물을 포착한 점이 눈에 띈다. 윤두서의 <나물 캐는 두 여인>에는 산비탈에서 한 여인이 허리를 굽히고, 또 한 여인은 옆을 돌아보는 뒷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윤용의 <협롱채춘>은 망태기를 어깨에 매고 호미를 들고 봄을 캐러 나선 농촌 아낙네의 뒷모습만을 묘사한 단독상이다. 우리가 인간을 그린다고 생각할 때, 앞모습이나 옆모습을 통해 그 사람의 얼굴 표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마련인데, 역설적으로 그 상식을 벗어나 있다. 인간의 전면과 마찬가지로 뒷모습도 회화의 소재, 곧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음이 괄목할 만하다.

 

뒷모습의 인간을 근경에 배치하는 방식은 그 이후 생활상이나 행사장면을 담은 기록화나 군상의 풍속화로 이어진다. 강세황의 <玄亭勝集圖>(1747년 작, 개인 소장)나 淡拙 姜熙彦(1738~1784 이전)의 ≪士人三景圖≫ 중에서 <士人詩吟>(1760년대 작, 개인 소장) 등을 들 수 있다. 또 김홍도의 ≪行旅風俗圖屛≫의 <나루터>(1778년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風俗畵帖≫에 포함된 <무동> <서당> <씨름> <행상> (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蕙園 申潤福(18세기 중엽~19세기 초반)의 ≪蕙園傳神帖≫(1810년대 작, 간송미술관 소장) 중의 <酒肆擧盃> <雙劍對舞> 등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도에는 그 사례가 적지 않다. 뒷모습의 사람들을 근경에 낮게 배치하는 방식의 전형화를 이루어 낸 것이다. 근경 인물들의 뒷모습을 통해서 행사장면을 부감하여 바라보게 하는 구성법이다.

 

김홍도의 <서당>은 원형구도로 맨 아래 가운데 댕기머리의 작은 아이 너머로 정면 중앙의 훈장과 빙 둘러앉은 아이들의 표정을 살필 수 있게 그렸다. 신윤복의 <쌍검대무>는 수평구도로 근경에 일렬의 삼현육각을 연주하는 악사들 위로 검무를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악사들의 자세에 변화를 준 연출력이 돋보인다. 이들은 화가 자신이 제 3의 시점을 설정하여 그림 안의 행사장면을 관망한 방식이면서, 동시에 그림을 감상하는 觀者를 화면 안에 끌어들이는 수법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 기록화 중 <戶曹郎官契會圖>(1550년 경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宣祖朝耆英會圖>(1585년 작,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에서 근경에 뒷모습의 인물들을 배치하는 방식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단독이거나 두세 명의 인물의 뒷모습을 포착한 인물 그림에서 시작된 조선 후기 풍속화의 의미와는 다르다.

 

조선 후기 풍속화에 나타난 뒷모습의 인간을 배치하는 근경처리 방식은 13~14세기 지옷토나 마사치오 등 유럽의 르네상스 회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관심을 끈다. 르네상스 회화에 나타난 근경 인물의 뒷모습은 화면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동일한 선상에서 어느 장면의 한순간을 포착하여 연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배치법은 르네상스가 휴머니즘이라는 人本主義를 표방하면서 생성된 방식이다.

 

유럽과 우리 그림이 시대적인 차이가 4~5세기나 되지만, 조선 후기 풍속화에서 르네상스와 유사한 방식의 人本主義 의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조선 후기에 유입된 서양화가 르네상스를 계승한 17~18세기의 화풍이었을 것인즉, 그 영향도 받았는지는 좀더 검토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조선후기 서화 수장가로 유명한 石農 金光國(1727~1797)의 소장품 가운데 있는 서양 동판화를 보면, 근경에 뒷모습의 인물들이 나열되어 있어 주목된다.45] 그런데 당시 중국의 풍속화적 그림이나 판화에서 근경에 옆모습의 인물이 등장하는 예는 많으나 조선 후기 풍속화 같은 배치 방식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조선 후기 풍속화가 인본주의를 띤 형식의 면에서 진경산수보다 근대성에 근접했음을 알 수 있다.46]

 

40]洪大容, ?湛軒書? 上, 「醫山問答」.

41]朴趾源, ?燕岩集?, 「答任亨五論原道書」.

42] 김문용, 앞의 글 및 이종주, ?북학파의 인식과 문학 - 상대주의적 시각과 역설의 미학, 태학사, 2001.

43]이태호, 앞의 글 「자연을 대하는 같은 감명, 다른 시선」.

44] 윤사순, ?한국의 성리학과 실학?, 삼인, 1998 ; 한국사연구회 편, ?한국 실학의 새로운 모색?, 경인문화사, 2001.

45] 「18세기 서양화풍 국내 유입 첫 확인」, 조선일보, 2002. 12. 28.

46]이태호, ?풍속화? 하나, 대원사, 1995 ; 同著, 앞의 책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에 재수록.

 

 

3. 實事求是와 法古創新: 사실주의의 발달과 퇴조

 

조선 후기를 설명하거나 실학의 성격을 규정할 때면, 맨 먼저 제기되는 이념이 곧 實事求是이다. 기존 性理學을 토대로 공리에 빠진 관념론적 학문풍토에서 벗어나 事實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모순된 사회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실천적 학문태도를 말한다. 따라서 실사구시의 열린 자세는 과학기술의 강조와 西學의 수용, 그리고 博學정신을 표방하였다. 또한 실사구시는 경험과 실질을 중시한 반면에, 옛 전통에서 그 모범적 대안을 모색하는 考古를 지향하기도 한다.47] 후자가 訓詁의 法古創新論과 만나는 지점일 것이다.

실사구시를 현실에 대응하는 실질과 訓詁로 보자면, 대체로 18세기 星湖 李瀷의 學風이나 北學派는 前者쪽이고, 19세기의 秋史 金正喜 一派는 後者에 가깝다. 이 변화는 18세기에 확립된 사실주의 회화가 19세기에 급격히 퇴조하는 양상과 맞물려 있기도 하다.

 

47]임형택, 「실사구시의 학적 전통과 개화사상」,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작과 비평사, 2000.

 

 

1) 사실주의 회화의 진전과 寫眞論

 

2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 후기 실학파의 회화론이 소박하나마 사실주의론을 전개하였다. 18세기 실학파의 실사구시 철학은 ‘지금(今)’ 과 ‘나(我)’, 내가 있는 곳의 자연과 풍속, 그리고 주변 物象에 대한 관심과 묘사의 진실성 추구였다. 이는 진경산수화나 풍속화에도 적용되지만, 동시기의 초상화나 동물화 등에 표출된 사실정신의 진전으로 잘 드러난다.48] 사실주의 회화론은 이익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星湖 李瀷은 退溪학풍을 계승한 南人系 近畿學派를 이끌었는데, 人物性論에서는 노론 낙론계와 북학파의 인물성동론과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면서 氣의 大小論에 따라 사물의 각기 다른 차별상을 전개하였고, ?星湖僿說?에 ‘萬物門’편을 둔 것같이 구체적인 개별 사물을 객관화하여 중시하는 다원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49]

 

이익의 회화론은 “눈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은 形을 주로 하고, 形은 사물의 方圓․曲直․大小․長短의 類이다”라는 대상인식에서 그 전거를 찾을 수 있다.50] 눈에 보이는 대로의 ‘見物以形’으로 대상의 모양을 정확히 그려내야 한다는 形似의 중요성을 간파한 것이다. “정신이란 形안에 있는데, 우선 形이 닮아야 정신을 제대로 전달한다” 는 ‘寫眞論’론이 그것이다.51]

 

형사를 강조한 이익의 사진론은 尹斗緖․李夏坤․趙榮祏․姜世晃․趙龜命․權헌․李奎象․朴齊家․朴趾源 등의 ‘寫生論’이나 ‘傳神論’ 같은 18세기의 사실주의 회화론과 어깨를 겨룬다.52] 寫意를 강조한 문인(박지원 등)도 없지 않으나, 그 역시 회화의 일차적 가치는 대상의 ‘닮음’에 두었다. 이는 동양회화의 전통적인 사실주의론인 고개지의 ‘以形寫神’ 論을 따른 것이다. 또한 18세기에는 그 형사의 중요성이 제기되었기에, 淸朝에서 유입된 서양화법의 장점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사실주의 화론과 회화가 발전하는 데 있어 그 문을 연 화가는 恭齋 尹斗緖(1668~1715)이다. 윤두서의 <自畵像>(1710년경 작, 해남 녹우당 소장)은 18세기의 사실주의 화론이 가능토록 해준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윤두서는 남인계 문인으로 이익의 집안과 교분이 두터웠고, 성호의 형 李潛․ 李漵(1662~1723)와 막역하였다. 윤두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익이 그의 박학정신을 칭송하는 祭文을 지어 올리기도 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정면 두상이다. 탕건의 윗부분을 잘라내고 하단에 수염을 늘어뜨린 대담한 구도로,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감동적인 인물초상화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머리카락 같이 가는 極細筆의 수염과 눈썹 표현은 ‘寫眞畵’ 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목구비가 반듯한 얼굴에 강렬한 눈동자 표현은 그야말로 傳神의 백미이자 사실주의 회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전신의 눈빛에 윤두서의 처지에서 겪은 시대의 우울 혹은 분노까지 담은 듯하다. 정계에서 소외당한 재야 지식인으로서 윤두서가 당대의 모순된 현실을 꿰뚫어 보는 듯한 표정이라 하겠다.

 

이처럼 眞形을 통해 정신을 표출한 윤두서는 <자화상>뿐만 아니라 말 그림에서도 사실주의적 묘사기량을 뽐내었고, <나물 캐는 두 여인> <목기 깎기> <석공도> 등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선구적 면모도 보여준다.

문인화가로서 민중의 삶에 눈길을 돌려 자신의 예술세계로 끌어들이고, 사실묘사의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으니 윤두서가 한국적 리얼리즘 회화의 선구라 할 만하다.53]

 

그의 아들인 蓮翁 尹德熙(1685~1766)는 윤두서가 “諸家의 서적을 정심히 연구 조사하여 의미를 파악하고 몸으로 체험하였다면서 배운 바를 모두 ‘實得’함이 있었다” 라고 쓰고 있다.54] 회화에서도 그러하였다. 윤두서는 ?顧氏歷代名人畵譜?나 ?唐詩畵譜? 등 중국에서 들어온 明代 화보를 참조하여 그림을 공부했는데, 그 ‘실득’의 자세로 자기화시켜 낸 것이다. 현재 해남의 종가 綠雨堂에 전하는 윤두서의 화첩 가운데 산수화나 산수인물, 화조화 등이 윤두서의 창작태도를 잘 보여준다.

 

윤두서의 ‘실득’ 태도에 대해 仙舟 南泰膺(1687~1740)도 ‘말을 그릴 때면 오랫동안 관찰하여 그 모양과 의태를 눈으로 꿰뚫어 보고 털끝만큼도 비슷함에 의심이 없어야 붓을 들었고, 그런 연후에도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았으면 찢어 버리고 참모습이 나와야 붓을 놓았다’고 증언하고 있다.55] 이어서 윤두서는 ‘어린 아이를 그릴 때면 머슴아이를 세워놓고서 돌아보고 움직이게 하면서 그 참모습을 얻은 뒤에야 붓을 들었다’ 고 한다.56] 지금으로 말하자면 모델을 써서 인물화를 그린 셈이다.


윤두서의 창작태도는 觀我齋 趙榮祏으로 이어졌다. 조영석은 겸재 정선과 가까이서 교우하면서 ‘겸재가 산수화의 대가이지만, 인물화에서는 양보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인물풍속화에서 회화적 기량을 발휘했던 문인화가이다.57] 물론 조영석의 회화는 윤두서에 비해 사실 묘사력은 떨어지지만, 현장사생을 통해 담백하고 날코기 같은 맛을 살려내었다. 그 좋은 사례로 조영석의 화첩 ≪麝臍帖≫(1730~40년대 작, 개인 소장) 에 표함된 <바느질하는 세 모녀> <마구간> <외양간> <어미소와 송아지> 등 수묵소묘풍의 풍속화를 들 수 있다.58] 이들은 홍계능이 조영석 行狀에 밝혀 놓았듯이, “그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사물을 직접 마주 대하여 그 眞을 그려야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以畵傳畵 所以非也 卽物寫眞 乃爲活畵)”라고 했다는 조영석의 傳言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조영석의 ‘卽物寫眞’은 지금의 현장 스케치에 해당되는데, 寫生畫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나 풍속화의 발전은 바로 그 같은 윤두서의 ‘實得’ 정신과 조영석의 ‘卽物寫眞’ 태도를 공감한 화가들이 실천한 결과이다. 18세기 화단에서 인간과 사물의 형상미를 완벽하게 구사해낸 화가가 壇園 金弘道이다. 김홍도는 山水, 人物, 風俗, 肖像, 花鳥, 翎毛 등 모든 화역을 뛰어난 묘사력으로 섭렵하여, 명실공히 한국 회화의 고전적 전형을 완성해 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스승격인 문인화가 강세황은 김홍도의 사실주의적 회화성에 대하여 ‘無所不能 皆入妙品’의 ‘曲盡物態’를 이루었다고 표현하고 있다.59] 바로 實得과 卽物寫眞의 曲盡物態는 회화의 실사구시적 완성체로서 근대지향의 사실주의 회화론의 핵심이라고 생각된다.60]

48]李泰浩, 「朝鮮時代의 肖像畵」, ?空間? 152호, 1981. 2 ; 同著, 「朝鮮時代 動物畵의 寫實精 神」, ?花鳥․四君子? - 韓國의 美 18, 중앙일보․계간미술, 1985 ; 同著, ?조선후기 회화 의 사실정신?에 재수록.

49]송갑준, 「성호학파의 인물성론」, 한국사상사연구회 편, 앞의 책 ?인성물성론? ; 이내옥, 「조선후기 사실주의 회화의 사상적 배경」, ?擇窩 許善道先生 停年紀念 韓國史論叢?, 일 조각, 1992.

50]李瀷, ?星湖全書?, 「易經疾書」 繫辭(上) 제6장.

51]李瀷, ?星湖僿說? 卷5, 「萬物門」 論畵形似 ; 金南馨, 「朝鮮後期 近畿實學派의 藝術論 硏 究 - 李萬敷․李瀷․丁若鏞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 유홍 준, 앞의 글 「실학자들 화론의 예술론적 접근」.

52]유홍준, 앞의 책 ?조선시대 화론 연구?.

53]李泰浩, 「恭齋 尹斗緖-그의 繪畵論에 대한 硏究」, ?全南(湖南)地方의 人物史硏究?, 전남 지역개발협의회, 1983 ; 同著, 앞의 책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에 재수록.

54]尹德熙, 「恭齋公行狀」, ?해남윤씨문헌? 권16 ; 이을호, 「윤두서행장」, ?미술자료? 14호, 국립중앙박물관, 1970.

55]南泰膺, ?聽竹畵史? ; 兪弘濬, 「南泰膺 ?聽竹畵史?의 解題 및 번역」, 李泰浩․兪弘濬 編, ?조선후기 그림과 글씨?, 학고재, 1992.

56] 南泰膺, 위의 글.

57]유홍준, 「선비정신과 사실정신의 만남 - 관아재 조영석」, ?역사비평? 1993년 봄호 ; 同 著, ?화인열전?, 역사비평사, 2001.

58] 兪弘濬․李泰浩, 「觀我齋 趙榮祏의 繪畫 - 作品槪觀 및 解說」, ?觀我齋稿?, 韓國精神文 化硏究院, 1984.

59]姜世晃, ?豹菴遺稿?, 「壇園記」.

60]이태호, 「18~19세기 회화의 조선풍․독창성․사실정신」, ?역사비평? 1993년 겨울 ; 同 著, 앞의 책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에 재수록.

 

 

18세기 寫眞論의 실제적 근거는 초상화에서 찾아진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외모의 완벽한 닮음에 인물의 정신세계를 드러내야 한다는 傳神畵論을 구현한 것으로, 아마도 세계회화사에서 당당하게 내세울 한국적 사실주의 회화의 중요 영역이다.61] 초상화는 절대적으로 圖畵署 畵員들의 몫이지만, 묘사 기량이 있는 윤두서․조영석․강세황 등 문인화가들도 초상화를 통해 격조를 드러내었다.

 

61]李泰浩, 「조선시대의 초상화」, ?미술사연구? 제12호, 미술사연구회, 1998.

 

조선 후기는 초상화에서도 양식적인 변화가 뚜렷히 나타난다. 먼저 관복의 형태가 달라졌다. 烏紗帽의 크기가 커졌고, 단령이 늘어지면서 문관의 흉배가 학으로 전면 바뀌었다. 특히 학흉배는 明朝의 一品官을 상징했기에 17세기까지 조선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었다. 후기에 와서 당상관은 쌍학, 당하관은 단학으로 1품부터 9품까지 전체 문관이 학을 주제로 삼은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다. 明이 망하고 淸朝가 들어선 이후 조선사회에 팽배했던 小中華 의식의 표징이기도 하다. 한편 18세기에는 그러한 官服 功臣肖像이나 儒服 文人肖像의 전통적인 격식이 유지되면서도, 평상복 차림의 立像이나 坐像 등 문인초상화들이 다양해진다. 딱딱한 격식을 벗어나 좀더 자연스러운 자태로 대상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게 된 점은 역시 실사구시 정신의 소산이고, 당시의 새로운 문예동향과 함께 하는 것이다.

 

顔面이나 衣褶 표현 방식도 달라진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얼굴 표현을 볼 때, 15~16세기의 짙은 채색법에서 17세기에는 淡彩화법으로 변화되었고, 18세기에 들어서면 얼굴의 굴곡을 따라 음영을 가미하면서 극세필의 肉理文이 활용되었다. 입체감을 살려 그 인물의 傳神을 표출한 것이다. 또 옷주름의 묘사도 17세기까지는 수묵 선묘만으로 간결하게 처리하였던 데 비하여, 18세기의 초상화에서는 옷주름 선이 복잡해졌고, 그 선을 따라 보태진 음영으로 실감을 내었다. 17세기 초상화의 간결미가 문인 관료의 권위나 위엄을 보여주는데 비하여, 18~19세기의 음영을 살린 초상화는 약간 풀이 죽은 듯한 느낌도 준다.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가 흐트러지는 사회변동 가운데 맥빠진 사대부층을 시사해주는 스타일의 변화이다.

조선 후기 초상화의 양식적 변모는 윤두서에게서 비롯되었다. <자화상>과 함께 <沈得經像>(1710년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그 좋은 사례이다. 등받이가 없는 네모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와 도포의 복잡한 의습, 가벼운 음영처리를 볼 때 그러하다. 윤두서의 대상의 정확한 관찰태도와 음영표현에서 소극적이나마 서양화풍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겠다. 윤두서가 西學을 조선에 처음 들어온 芝峯 李晬光(1563~1628)의 증손녀와 결혼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가능성도 없지 않겠다. 또 윤두서의 증손자 윤지충이 西敎 순교자이고,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자인데, 당시 해남윤씨 집안에 西學․西敎 관련 전통이 뿌리를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윤두서 이후 18세기 중반 초상화에서 뛰어난 도화서 화가로는 金斗樑(1696~1763), 卞相璧(18세기), 秦再奚(1691~1769) 등이 활동하였다. 초상화에는 화원들이 落款하는 경우가 드물어 이들의 개별 솜씨와 개성미를 구분하기는 어려우나, 김두량의 개그림이나 변상벽의 고양이․닭 그림을 보면 이들이 쌓은 묘사력 훈련의 강도와 形似의 傳神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화가를 밝혀 놓은 대표적인 초상작품으로는 변상벽의 <尹鳳九像>(1750년 작, L.A.C.M.A 소장)을 꼽을 수 있다. 程子冠에 옥색 深衣차림으로 편안하게 앉아 있는 儒服坐像인데, 선선한 느낌을 주는 초상화이다. 얼굴의 깊은 음영처리에 비해, 옷주름은 음영이 얕다. 영조때까지는 윤두서의 <심득경상>처럼 얕은 음영의 옷주름 묘사방식이 유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정조 시절 초상화의 대가로는 역시 김홍도를 들 수 있고, 당시 御眞제작에 申漢枰(1726~?), 李命基(18세기) 등의 화원이 동원되었다. 김홍도가 신체와 의상을 그리고 이명기가 얼굴을 그린 <徐直修像>(1796년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조선후기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말한다.

 

<서직수상>은 당대의 두 대가가 합작한 만큼 뛰어난 묘사기량을 보여주고, 돗자리 위에 버선발로 서 있는 새로운 모델인 점이 눈에 뛴다. 왼발을 앞으로 오른발을 오른쪽으로 향하고 선 입상의 모습은 마치 그렇게 포즈를 취한 듯한 자태이다. 하단에 화면의 ⅓가량을 할애한 돗자리 표현도 공간감을 주는 초상화의 새로운 시도이다. 정자관을 쓴 준수한 용모에 어울리는 도포의 표현이 돋보인다. 풀먹여 다림질한 비단 옷을 방금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살려낸 점은 김홍도다운 솜씨이다. 옷주름과 음영의 실감나는 묘사가 그렇다. 윤두서의 <심득경상>이나 변상벽의 <윤봉구상>에 드러난 도식화된 의습 묘사에 비하면, 한층 진전된 사실묘사의 성공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서양식 입체화법을 충분히 소화하여 조선의 몸에 맞는 김홍도 화풍을 자연스레 창출해낸 것이다.

 

18세기 중엽 이후의 초상화는 앞의 <서직수상>을 제외하고는 음영 표현이 한층 강해져 오히려 번잡스러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명기의 <姜世晃像>(1783년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보면, 18세기 후반의 형식 변화와 음영법의 구사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紗帽冠帶의 大禮服을 갖춘 倚坐像으로 바닥 화문석의 처리와 오른손을 내민 모습이 그 이전의 초상화법에서 크게 달라진 점이다. 바닥에 그린 강화도 화문석은 17세기 공신초상화의 화려한 중국 카페트를 대신한 것으로, 18세기 조선의 주체적인 문화의식을 엿 볼 수 있게 해 준다. 17세기에는 카페트를 위에서 본 평면도식으로 그렸던데 비해서, 이 <강세황 상>의 화문석 그림은 인물의 자세에 맞추어 비스듬이 그려 넣었다. 시점을 통일시켜 낸 것은 서양화의 원근법을 배운 방식으로 보인다. 또한 검은 색 관복의 양 팔 옷 주름에 표현된 짙은 먹의 음영과 양 무릎에서 배쪽으로 칠한 濃墨의 원근감 표현도 서양화의 입체화법을 고스란히 적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강세황 자신도 그 당시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왔었고, ≪송도기행첩≫에서 어색한 대로 원근법과 입체적 양감을 살려보려는 시도를 했던 장본인이다. 그러니 강세황이 이명기를 통해 그런 서양화법을 전수했을 법하고, 서양화 기법을 초상화에 적절히 구현해낸 작품이 <강세황상>이라 할 수 있다.


 

2) 서양화법의 인식과 수용

 

서양화법의 수용은 조선 후기 실학파들의 西學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회화와 실학과의 관계를 잘 드러내 준다. 서양화법이 실사구시의 사실주의적 회화와 화론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특히 앞의 <서직수상> 이나 <강세황상>의 경우처럼, 서양화법의 장점은 조선 후기 회화와 사실정신을 한 단계 높여준 셈이다. 서양화의 원근법과 입체화법은 당시 화가에게 시각체험의 확대에 따라 관찰력을 증진 시켰고, 대상의 정확한 묘사력을 강화시켜 주었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에는 서양화풍의 영향이 증대되었다.62] 17세기 宣祖 때부터 중국을 왕래한 사신들에 의해 西學과 함께 들어온 서양화는 조선 후기 문화에 새로운 자극이었다. 성호 이익을 비롯한 근기실학파가 당시 서울에 유입된 서양화에 대해 호기심을 표현하거나 북학파나 연경을 다녀온 문사들의 서양화를 직접 대하고 물상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는 감동에 찬 화평을 보면, 서양화는 조선사회에 미친 西學의 충격 그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학 가운데 西敎에 대하여 당시 사회나 문인들이 거부감을 가졌던 실정에 비하면 더욱 그러하다.63]

 

서양화는 르네상스 이후 발달한 원근법과 입체감, 즉 평면 위에 3차원의 공간을 이루게 하였다는 점에서 그 장점을 찾을 수 있다. 시각적으로 현실에서 보는 것과 가장 유사한 물상과 공간의 실제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화의 정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익․박지원․홍대용․李德懋(1741~1793) 등 실학파 문인들이 본 서양화 관련 자료는 17~18세기 조선에 유입된 기독교 관련 서적의 삽화나 銅版畵였고, 연경에서 실견한 교회당의 벽화 정도였다.64]

 

당시에 유입된 서양화 작품으로는 石農 金光國(1727~1797)이 소장했던 동판화 한 점이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예이다.65] 그림 옆에 김광국의 맏아들 金宗建(1746~1811)이 받아 쓴 跋文이 딸려 있다. “서양화법은 唐宋이 아닌 別體인데, 작은 화폭에 千里의 遠勢을 담았고, 그 刻法이 神巧하기가 비교할게 없다” 는 발문의 내용(泰西畵法 非唐非宋 自是別體. 尺寸之幅 能作千里遠勢. 且其刻法 神巧無比. 爲收一紙 以備一格.)은 조선 후기 문인들에게 미친 서양화법의 감명과 영향을 짐작케 한다. 가로 25.7센티미터, 세로 21센티미터의 소품으로 이 동판화에는 멀리 우뚝우뚝 솟은 바위산 아래에 모스크 사원과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근경 언덕 좌우에 그 이슬람의 도시를 향하는 기마병들과 두 인물의 뒷모습이 보인다. 특히 뒷모습의 인물을 통해 뾰족하게 솟은 산과 도시를 보게 하는 근경처리가 낯설지 않다. 앞장에서 지적했듯이, 이는 르네상스 회화에 등장하기 시작한 배치법으로 조선 후기 풍속화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한편 이 동판화는 서아시아지역 여행기의 삽화이거나 순례자와 관련된 내용으로 기독교 서적의 삽화인 듯하다. 근경을 짙게, 원경을 연하게 원근감을 살리고 神巧의 철필로 긁은 에칭수법은 전형적인 유럽의 17~18세기 화풍을 보여준다. 화면화단에는 “술타니에, (솟아있는) 타우루스산 기슭에 (타르티아 지역) 이라크의 (아라크) 오래된 도시” 라는 의미의 네덜란드어와 라틴어로 각각 그림 설명을 새겨 놓았다.66] 그리고 설명 좌우에는 작은 글씨의 ot. Schenk와 amst. C. P. 가 보인다. Schenk는 작가 이름 같고, amst. C. P. 는 암스테르담의 인쇄소 이름인 듯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동판화는 네덜란드의 匠人 Schenk가 새기고 암스테르담에서 프린트한 <술타니에 풍경> 이라 할 수 있겠다.

 

서양화의 진수인 油畵를 직접 본 사례는 19세기 李圭景의 「罨畵藥水辨證說」에서 확인된다. ‘거울에 비친 듯 분명하게 그려 실제상과 꼭 닮아 살아 움직이는 듯한데, 그림 위에 바른 藥水(Vanish 기름인 듯)는 영롱하고 맑게 비쳐 그림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듯하다’ 는 설명이 그 내용이다.67]

 

서양화법 중 원근법은 幾何學․算學․地圖學․天文學 같은 西學의 과학기술이나 자연과학으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멀리 보이는 것의 표현이 공교로운데, 裁割의 비례법이 산술에서 나왔다’는 홍대용의 설명이나68], 북학파의 서양화 감상문 가운데 누각들의 투시도법에 의한 정확한 作圖에 관심을 쏟았던 점이 그러하다. 원근법은 그처럼 西器의 하나로 실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측량법의 활용은 근대적인 지도 제작 발달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8세기 鄭尙驥(1678~1752)나 19세기 金正浩의 조선지도가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막상 18~19세기 회화에는 소실점을 활용한 서양화식 투시도법의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도화서의 그림에 서양의 四面尺量畫法이 모방되기 시작하였는데, 김홍도가 이를 적용한 冊架圖를 잘 그렸다’고 전해오고,69] 실제 그런 원근법을 구사한 병풍그림도 전한다. 또 강세황이 그린 ≪송도기행첩≫ 중 <松都全景圖> 나, 그 영향을 받은 강희언의 <北闕朝霧圖>(18세기 중후반 작, 개인 소장) 등 원근법을 적용한 그림들이 없지는 않다. 또 ≪華城城域儀軌≫의 도면 판화(1801년 작)나 <東闕圖>(1830년대 작, 고려대학교박물관․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등도 투시도법을 염두에 두고 새롭게 시도한 圖法을 보여준다.

 

김홍도․강세황․강희언 작품의 경우는 대상이나 풍경을 정면에서 보아 멀리 좁아지는 단순한 묘사 방식이고, 후자는 사선식 도법의 사용으로 시각적인 실제감을 살려내고 있다. 그렇지만 서양화식 투시도법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응용하지는 못한 상태이다. 그런 양상은 구한말까지도 여전하였다. 국내에서 발간한 기독교 서적 ?텬로력뎡?(1895년)의 金俊根 삽화나 1904년 덕수궁 중수 때 그려진 儀軌의 건물 도면 등을 보더라도 투시원근법이 완벽하게 적용되어 있지는 않다.

 

원근법에 비하여 입체감 표현은 비교적 널리 확산되었다. 形似를 강조한 사실주의의 발전에 따라, 쉽게 서양화의 입체화법이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전반 윤두서의 <자화상>이나 변상벽의 <윤봉구상>에 비하여 18세기 후반 이명기의 <강세황상>에 음영법의 뚜렷한 표현이 그 수용의 실제를 잘 보여준다. 또한 입체화법을 구사한 예로는 <猛犬圖>(18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나 申光絢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招狗圖>(1847년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조선 후기 회화에 나타난 입체화법은 서양화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다. 초상화나 동물화에 음영을 또렷하게 쓴 양감 표현이 있지만, 빛을 한쪽에서 주는 서양식의 입체화법을 적용한 작품은 본 적이 없다. 서양식 입체화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은 19세기말~20세기 초반 石芝 蔡龍臣(1850~1941)이다. <郭東元像>(1918년 작, 개인 소장)의 눈동자에 하이라이트 흰 점을 찍어 안구의 둥근 형태를 살려낸 점이 그러하다.

 

이처럼 입체감 수용은 투시원근법의 이해 수준보다는 한층 나은 편이다. 특히 투시도법에 대한 몰이해는 성호 이익의「畵像坳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익이 당시 서울에 유입된 서양화를 보고 쓴 글인데, 이마두(마태오 리치)의 ?幾何原本?의 서문을 재인용하면서 ‘오목한 곳과 우뚝한 坳突(입체감)은 알겠는데, 視大視遠 등의 방법은 모르겠다’ 라고 말한 설명이 그것이다.70] ‘평판 위에 원근과 바르고 기움(正邪), 그리고 고하를 재서 그리는’ 원근법의 설명이 애매해서, 視大視遠의 방법에 대한 구절의 해석이 번역자마다 다르다.71] 그만큼 漢譯된 西學의 수용에 이해의 어려움이 따르고, 성호 자신도 ?기하원본?의 투시도법을 명쾌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를 보면, 성호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투시원근법’은 우리 회화에서 숙제로 남게 되었다. 서양화에 대한 정확한 독해는 20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20세기 서양화의 본격적인 유입 이후 전통회화의 붕괴를 떠올리면, 18~19세기 회화에 활용된 서양화법은 오히려 부정확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전통화법을 풍부히 하고 사실묘사 기량을 개선시키는 데 공헌하였다고 본다. 따라서 서양화법을 적절히 조선 것으로 소화해낸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英祖․正祖 시기 회화가 ‘東道西器’ 의 모범적인 선례이지 않을까 싶다.

 

62]李成美, ?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법?, 대원사, 2000.

63]이원순, ?조선서학사 연구?, 일지사, 1986.

64] 李成美, 앞의 책.

65]조선일보, 2002. 12. 28. 앞 기사.

66]‘술타니에’는 현재 이란의 서북부 지역을 말한다. 터키와 접경지역으로 카스피해 아래 ‘타우루스’ 산맥 남쪽이다. 설명문 속의 ‘아라크’ 라는 도시 명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67]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卷38, 「罨畵藥水辨證說」

68]洪大容, ?湛軒書? 外集 「劉鮑問答」.

69]李圭象, 『一夢稿』, 「畵廚錄」

70]李瀷, ?星湖僿說? 卷4, 「萬物門」 ‘畵像坳突’.

71]이성미의 앞의 책 ?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법?과 유홍준의 앞의 책 ?조선시대 화론 연구?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고, 각각 그 의미도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18세기 영조․정조 시기는 실사구시 정신을 드러낸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그리고 실사구시를 실현한 形似 중시의 寫眞論과 西洋畫法의 수용으로 사실주의 회화가 크게 발달했다. 이들은 당대의 문예를 선도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18세기 전반기 영조 시절에서 후반기 정조 시절로 이행하는 사회상과 그에 대응하는 실학사상의 변모를 시각적으로 확인케 해준다.

 

그런데 19세기로 넘어 가면, 18세기에 부상했던 회화의 신경향은 급격히 퇴조하였다. 이 역시 조선말 봉건사회의 몰락기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18세기 회화가 지녔던 성격도 일부 읽을 수 있다. 18세기 회화가 당대 실학운동과 함께 분명 근대지향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조선문예의 꽃으로 머문 것 같다. 19세기 조선사회의 붕괴와 함께 쇠퇴했기 때문이다.

 

 

3) 茶山과 秋史, 사실주의의 퇴조

 

19세기에는 18세기 신경향의 회화 자리에 書卷氣․文字香을 강조한 南宗畵 이념과 형식이 들어선다. 회화의 예술적 가치 선택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秋史 金正喜가 우뚝하였다. 잘 아다시피 김정희는 조선 후기 실사구시설의 장본인이다.72] 이 장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현실의 실질을 강조한 것과 考古의 실사구시 중에서 김정희는 후자에 속한다. 淸朝의 金石學, 곧 考證學을 토대로 하였기에 김정희의 실사구시는 法古創新論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김정희는 法古創新으로 중국의 金石文을 탐구하여 隸書體를 기저로 한 자신의 개성적인 ‘秋史體’를 완성했고, 신라 진흥왕순수비 등 우리의 옛 비문을 고증해내면서 실증적 실사구시의 학문적 성과를 이룩해 놓았다.73] 또한 19세기 중엽 <歲寒圖>나 <不二禪蘭圖>를 통하여 자신이 주장한 서권기와 문자향의 南宗文人畵風의 전형을 창출했고, 그 영향력을 19세기 화단에 과시했다. 김정희의 서화와 예술론은 性靈論을 내세우며 ‘怪’를 강조한 개성주의의 기치를 내세웠다. 이 점이 고증학의 실증주의와 더불어 근대지향적인 김정희의 실학정신이랄 수 있겠다.

 

그런데 김정희가 내세운 실사구시의 법고창신론은 18세기 실학과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북학파 가운데 寫意를 강조한 점에서 연계되는, 박지원의 법고창신론과 잘 비교된다. 박지원은 그의 문학과 예술론이 보여 주듯이 당대 현실문제와 함께 창신을 고민한 경우이다.74] 반면에 김정희는 시대현실보다 古法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사의적 남종화풍의 수용에서도 18세기 심사정, 강세황, 이인상 등 문인화가들이 조선 땅을 寫景하면서 자기화했던 자세와 사뭇 다르다. 그렇다보니 김정희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당대 동아시아 예술전체를 통 털어서 높은 경지를 쌓았다는 명성을 갖기도 하지만, 한편 사대주의적 보수화의 경향으로 흐른 점도 없지 않다.

 

김정희가 24세 때 친아버지 金魯敬의 子弟軍官으로 중국을 경험한 시점도 문제이기는 하다. 북학파들이 경험한 18세기 중국은 서학의 수용 등 康熙․雍正․乾隆 연간 청조문화가 융성했던 시기였다. 그에 비하여, 김정희가 직접 체험하거나 교류한 19세기는 嘉慶․道光 연간 이후로 청조문화의 퇴락기였다. 따라서 김정희는 청조문예를 부흥시킨 번듯한 문인이나 서화가를 만날 수 없었고, 그 퇴락기 문예의 체험을 기준으로 기울어 가는 조선사회의 創新을 생각했던 것이다. 노론의 명문 사대부가 출신인 김정희의 실사구시설이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역사의 진보쪽보다 몰락해 가는 사대부층의 정체성 확립에 기운 이유도 그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서권기와 문자향을 강조한 남종화 인식도 본시 남북종화론에서 形似의 북종화를 폄하하고 寫意의 남종화를 우월시 하는 지배층 문인의 계급성을 표방한 데서 나온 것이다.

 

김정희는 강한 개성미의 서화예술을 완성했고 19세기 문예계에 미친 영향이 컸기에, ‘완당 바람’은 18세기 회화의 신경향에 대하여 반작용을 일으켰다.75] 예컨대 18세기 서예계에서 조선적 서풍을 일으킨 圓嶠 李匡師(1705~1777)의 書風과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정선 같은 화가의 그림을 낮추어 본 일이나, 아예 그들을 배워서는 안 될 것이라고 못박을 정도였다.76] 그 바람에 又峰 趙熙龍(1789~1866), 小痴 許鍊(1809~1892), 古藍 田琦(1825~1854), 蕙山 劉淑(1827~1873), 小塘 李在寬 등 문인화가는 물론 화원이나 중서층 서화가에까지 김정희식 서권기․문자향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들의 남종화풍은 간결하고 감각적인 筆意와 水墨 구사로 회화적인 맛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는 北山 金秀哲, 石窓 洪世燮(1832~1884) 등 ‘奇怪’론에 어울리는 독특한 개성주의 작가들이 부상하기도 했다.

 

‘완당바람’ 이후 19세기에는 사실주의 회화가 크게 퇴조했다. 하지만, 현실사회와 민중의 삶을 관류하는 실학 정신을 표방한, 다산 정약용이 사실주의 회화론을 전개하였다. 차세대인 김정희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정약용의 아들이 김정희에게 ?與猶堂集?의 편찬을 부탁했을 때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거절했다는 일화도 흥미를 끄는데, 김정희는 정약용에게 “자기 견해를 세우고 자기 說을 만들어 내는 것은 說經에 있어 감히 해서는 안 된다”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고 한다.77]

 

정약용은 회화의 사실성만을 인정하였다. 그림을 손수 그리기도 했지만, 여기적 수준의 남종화풍을 따른 것이다. 반면에 사실주의 회화론은 확고했다. 변상벽의 닭 그림과 윤용의 영모화에 대하여 그 사실미를 상찬한 ‘題卞相璧母鷄領子圖’와 ‘跋翠羽帖’, 그리고 카메라의 옵스큐라 원리와 유사한 실험을 기술한 ‘漆室觀畵說’ 등에 사생을 중시하고 사실묘사의 극진해야 함을 내세운 정약용의 회화관이 잘 드러나 있다.78]

 

‘칠실관화설’은 “방을 어둡게 한 뒤 벽 구멍에 안경 한 알을 설치해 놓고 수 척의 거리에 지판을 설치하여 像을 받으면, 밖의 풍경이 거꾸로 비치는 데, 그 실물 그대로의 영상” 수준으로 그림이 그려졌으면 좋겠다고 피력할 정도였다.79] 나아가 정약용은 당시 남종화풍의 산수화에 대하여 ‘못된 화가들이 산수를 그린다며(麤師畵山水)’ 거친 필치만 보여주네(狼藉手勢濶)‘라며 신랄하게 나무라고 있다.80] 또한 “서툰 화가들이 奇怪를 부리면서 뜻을 그리지 형을 그리지 않는다(畵意不畵形)는 것을 자처한다”라며81] 당시 寫意에 만연된 풍조를 비판했다. 김정희가 정약용의 ?여유당집? 편찬을 거부할 만한 대목들이다.

 

비록 정약용의 사실주의 회화관은 19세기의 사회적 여건상 당대 화단에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하였지만, ‘화의불화형’에 대한 비판의식은 서권기․문자향이 풍미하던 시절 朴珪壽 등 개화파 문인들의 예술론으로 계승되었다. 이처럼 실학파에서 개화파로 사실주의론이 이어졌음은 18세기 회화의 근대지향적 성향을 재검토할 수 있게 해주어 다행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이 19세기 화단에 미친 그 영향력이 너무 미미했다. 이런 점이 바로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 조선 봉건사회 말기의 역사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또한 19세기 후반에는 화원인 오원 장승업의 등장으로 수묵화의 전통이 근대로 계승되었다. 장승업은 중국적인 故事人物圖나 器皿折枝, 花鳥․翎毛畵 등을 즐겨 그렸기에, 그 주제가 근대정신이나 18세기 조선풍의 회화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筆墨의 기량을 갖추었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장승업이 쌓은 필묵의 역량은 제자인 心田 安中植과 小琳 趙錫晋에게 전수되어 20세기 전통회화의 기반이 되게 하였다.

 

72]유자후,「추사 김정희 선생의 실사구시설」,『춘추』, 조선춘추사, 1942 ; 이선경, 「완당 김정희의 실사구시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73] 유홍준, ?완당평전? 1,2권, 학고재, 2002.

74]이암, 「연암 박지원의 화론과 문학진실관」, 『민족문학사연구』 7호, 1995.

75]이동주, 「완당바람」, ?우리 나라의 옛 그림?, 박영사, 1975.

76]이태호, 「추사 김정희의 예술론과 회화세계」, ?추사 김정희의 예술세계?, 제주전통문화 연구소․제주교육청, 2000.

77]임형택, 앞의 글에서 재인용.

78]丁若鏞, ?與猶堂全書? ; 李泰浩, 앞의 글 「茶山 丁若鏞의 繪畵와 繪畵觀」.

79]丁若鏞, ?與猶堂全書? ; 필자는 앞의 글에서 ‘一雙’을 볼록렌즈 ‘한 쌍’으로 잘못 해석했는데, 李成美 교수가 바로잡아 주었다 ; 이성미, 앞의 책 ?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 법? 참조.

80]丁若鏞, ?與猶堂全書? 卷1, 「題卞相璧母鷄領子圖」.

81]丁若鏞, 위의 책, 「跋翠羽帖」.

 

 

마치며

 

지금까지 조선 후기 회화의 새로운 경향이 성장하고 변모하는 과정과 형식미에 대하여, 사실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동시대의 실학과 연계시켜 살펴보았다. 문예부흥기라 일컬어지는 영조․정조 시절은 18세기 전반의 ‘성호 이익/공재 윤두서’ 와 ‘노론 낙론계/겸재 정선’, 후반의 ‘북학파/단원 김홍도’로 잘 어울려 있다. 이에 비하여 19세기는 전반의 ‘다산 정약용/추사 김정희’, 후반의 ‘개화파/오원 장승업’으로 그 맥락이 어그러져 있다. 특히 19세기가 지향할 사회사상과 회화의 엇박자는 우리 근대사의 성격을 드러내주는 단서일 것이다. 이를 중국과 일본 동아시아 삼국과 비교해 볼 때, 그 차이가 선명하지 않나 싶다.

 

이 試論이 타당한지, 정확히 당대의 실학과 회화의 맥을 짚는 것인지에 대한 불안도 없지 않다. 그러나 人物性同論, 특히 實事求是說과 法古創新論은 조선 후기 회화가 그러했듯이, 오늘 혹은 내일의 ‘새로운’ 창조에도 충분히 유효한 지침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20세기 회화가 지난한 시대상황에서도 민족적 서정을 짙게 풍기는 전통회화의 靑田 李象範과 小亭 卞寬植, 그리고 신회화의 李仲燮, 朴壽根, 金煥基 같은 작가를 배출했던 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선적 고전이나 감수성을 기반으로 한 창작정신이 무엇보다 돋보이기 때문이다.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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