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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세기 초 名勝遊衍과 李昉運의 <四郡江山參僊水石>書畵帖 / 박은순

bizmoll 2013. 11. 1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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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名勝遊衍과 李昉運의 <四郡江山參僊水石>書畵帖

 

박은순*

* 근역문화연구소 소장 (미술사)

** <사군강산참선수석>의 제발과 시문을 해독하는 것을 도와 주신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조남권 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목 차>

 

1. 머리말
2. 四郡山水와 端陽八景
3. <四郡江山參僊水石>서화첩의 내용과 화풍
 1) 작품의 내용과 제작경위
  2) 李昉運과 <四郡江山參僊水石>서화첩의 화풍
4. 맺음말

 

 

1. 머리말

 

<四郡江山參僊水石>書畵帖은 19세기 초에 한 문인이 단양, 청풍, 제천, 영춘 등 충청북도의 네 지역에 흩어져 있던 명승지를 유람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한 서화첩이다. 安叔이라고 하는, 당시 청풍의 부사는 1802년 가을이 한창인 9월 9일에 공무가 한가한 틈을 내어 주변의 명승을 탐방하였고, 그 탐승의 견문을 당시 활동하였던 유명한 화가인 李昉運(1761-1815 이후)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후 그의 오랜 지기였던 金養之라는 문인은 다음 해인 1803년 정월에 이 서화첩을 보고 발문을 썼다. 안숙은 좋은 경치를 만나면 오언절구, 칠언절구, 고시체 등 다양한 문체로 자신의 감흥과 견문을 표현하였고 이후 楷, 行, 草, 隸書등의 서체로 써서 시서화 삼절의 서화첩을 꾸몄다. 이렇게 탐승을 즐기고, 그 견문을 시서화로 표현하는 것은 18세기 이래로 문인문화의 중요한 국면이 되었다. ‘名勝遊衍’은 19세기 초까지도 선비가 여가를 즐기는 중요한 관습으로 인식되었는데 1], 그 결과 기행사경 서화첩이 꾸준히 제작되었고 이를 통해 진경산수화의 전통이 이어져갔다.

 

이 작품에 그림을 그린 箕埜 李昉運은 조선시대 후기에 활동한 화가로 그의 생애와 출신에 관하여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상당 수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고, 개성적인 화풍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2] 특히 최근에는 <金剛全圖>와 <關東八景圖> 등 본격적인 진경산수화가 알려졌을 뿐 아니라3], 새롭게 공개된 초충도과 화조화를 통하여 이방운이 이제까지의 평가에 비하여 훨씬 세련된 화풍을 구사하였음이 밝혀지고 있다.4]

 

이 글에서는 <사군강산참선수석>서화첩을 중심으로 19세기 초 진경산수화의 양상과 이방운이 구사한 진경산수화풍의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箕埜 李昉運이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도 다시 한번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1] 徐有榘, ?林園經濟志?怡雲志, 卷第8, 名勝遊衍條 (保景文化社, 1983), 415-425쪽 참조.

2]이방운에 대하여는 변영섭, 「18세기 畵家 李昉運과 그의 畵風」 ?梨花史學硏究?13․14 (1983. 6), 95-115쪽 참조.

3]?특별전 아름다운 금강산?(국립중앙박물관,1999), 도73, 99, 100 참조.

4]선문대학교 박물관에는 이방운의 초충, 화조도가 두 점 소장되어 있다. 이 두 작품은 2000년 1월경 발간될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품 도록에 수록될 예정이다.

 

 

2. 四郡山水와 端陽八景

 

<사군강산참선수석>서화첩의 표제에서 거론된 四郡은 단양(현재 단양군), 청풍(현재 제천시 청풍면), 제천(현재 제천시), 영춘(현재 단양군 영춘면) 등 충청북도에 있던 네 개의 지역이며, ‘四郡山水’란 이곳에 흩어져 있는 여러 명승들을 가리킨다. 이 작품에서 그림으로 표현되거나 畵題와 題詩 또는 跋文에서 언급된 대상은 청풍의 도화동, 수렴폭, 한벽루, 금병산, 옥순봉 아래의 부용벽, 단양의 도담, 석문, 귀담, 사인암, 제천의 의림지, 영춘의 북벽 등인데, 지금 알려진 대로라면 단양팔경에 속하는 것들이 다섯 곳이나 된다.

현재 알려진 단양팔경은 1. 하선암, 2. 중선암, 3. 상선암, 4. 사인암, 5. 귀담봉, 6. 옥순봉, 7. 도담삼봉, 8. 석문 등인데5], 이 중 상, 중, 하선암을 제외한 5개의 경물이 담겨졌다. 그림에서 畵題로 다루어진 ‘평등석’은 아직까지 해당 지역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단양, 청풍, 제천, 영춘 등은 16세기 중엽에 완성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나타나지만, 이 책에는 청풍의 한벽루와 도화촌, 단양의 도담, 제천의 의림지 만이 기록되었다6]. 그러나 1757년에서 1764년 사이에 제작된 ?輿地圖書?에는 단양의 귀담, 강선대, 상, 중, 하선암, 사인암이 기록되어 있고7], 청풍군에도 옥순봉, 부용벽, 도화동 등이 기록되어서 그 사이에 사군의 수려한 경치와 경물들이 문인들 간에 완상의 대상으로 부상한 것을 알 수 있다8]. 이곳의 경치와 경물들이 문인들의 산수를 애호하는 성향을 토대로 고상한 遊樂의 대상이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였다. 예컨대 단양의 옥순봉은 퇴계 이황(1501~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즐겨 왕래한 곳으로 그 암석의 생김새를 빗대어 옥순봉이라 이름하였다 하는데 이황에 대한 문인들의 존경심과 함께 점점 더 중요한 명소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황이 단양의 산수 중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곳들을 직접 방문하고 그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 평가한 글로서 후배 문인들에게 회자되었던 「端陽山水可遊者續記」는 단양이 명승으로 떠오르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글에는 사인암, 도담, 석문, 단구협, 귀담, 옥순봉 등 <사군강산참선수석>서화첩에 그림으로 재현되거나 글로써 거론된 명승들이 열거되어 있으나 이들을 八景이라 부르지는 않았다.9]

 

18세기에는 李胤英(1714-1759)이란 문인이 단양에 은거하면서 그의 친구인 李麟祥(1710-1760) 등과 같이 노닐었고10], 단양 근처의 연풍에서 현감으로 봉직하였던 18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직업화가인 金弘道(1745-1802이후)가 <옥순봉도>, <사인암도>, <도담도>를 그렸으며, 말년에 사용한 丹丘와 丹老라는 호는 그의 단양에 대한 애호심을 시사한다11]. 그 이후 청풍에 군수로 봉직하였던 尹濟弘(1764-1840이후)은 특히 이인상을 존경하여 이인상이 그렸다고 하는 <옥순봉도>를 방작하고 한벽루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인들의 풍류가 시와 그림을 낳는 영감의 근원으로 작용하면서 四郡山水는 점점 중요한 명승으로 부상한 듯하다12]. 이러한 과정에서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여행하고 이를 시서화로 기록했던 문인문화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13]

 

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108-109쪽 참조

6]盧思愼 外 編著,?新增東國輿地勝覽?(明文堂, 1994), 241-242쪽(한벽루), 242쪽(도화촌), 243쪽(도담), 250쪽(의림지) 참조.

7]?輿地圖書?上, 端陽條 (國史編纂委員會), 274쪽(귀담), 275쪽(강선대), 275쪽(하, 중, 상선암), 275쪽(사인암) 참조.

8]?邑誌?7 , 忠淸道(1), (亞細亞文化社, 1985), 24-25쪽(옥순봉), 25쪽(부용벽), 25쪽(도화동) 참조.

9]李滉, ?退溪集? 卷42, 韓國文集叢刊30, 「端陽山水可遊者續記」(경인문화사, 1996), 438-440쪽 참조.

10]兪弘濬, 「李麟祥 繪畫의 形成과 變遷」, ?考古美術?161호 (1984.3) 참조.

11]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일지사, 1999), 304-305쪽 참조.

12]權倫慶, ?尹濟弘(1764-1840以後)의 繪畫?(서울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6), 24-25쪽 참조.

13]拙著, ?金剛山圖 연구?(一志社, 1997) 참조.

 

 

조선 후기의 중요한 문인 중 한 사람인 成海應(1760-1839)이 지은?東國名山記?중 「記湖中山水」에는 단양읍촌으로부터 시작하여,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사인암, 귀담, 옥순봉, 강선대, 도담, 석문, 금병산, 한벽루, 도화동 등 <사군강산참선수석>화첩에 재현되거나 언급된 대개의 경물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14]. 이 책에는 금강 내외산의 경물도 다른 산들에 비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었는데, 문인들이 探勝 중 애호한 대상들을 더 많이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비슷한 연배인 徐有榘가 명승유연을 문인들의 아취있는 생활의 하나로 거론한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15]. 18세기 이후 명승을 기행하고 그를 사경하는 관습의 결과 나타난 진경산수화는 이 시대 문화와 예술의 특이한 면모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19세기에도 관서지역, 관북지역, 관동지역, 단양을 중심으로 한 四郡지역은 문인들의 기행과 사경관습을 통하여 꾸준히 문학과 서화로 표현되면서 한국적인 문화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기행서화첩들 중 필자나 제작배경이 확실한 대표적인 작품들을 꼽아보면 사대부 문인인 李光文(1778-1838)이 후원하고 궁중화가인 金夏鍾(1793?-1875이후)이 그린 <海山圖帖>, 鄭遂榮(1743-1831)이 제작한 <漢臨江名勝遊覽寫景圖卷>, 李豊翼(1804-1887)의 <東遊帖>, 林得明(1767~1822)의 <西行一千里>장권, 李義聲(1775-1833)의 <海山圖帖>, 그리고 李昉運의 <四郡江山參僊水石>서화첩 등 그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오히려 기행사경의 풍류가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16]. 오랫동안 지속된 이러한 문인적 관습은 결국 서민층으로 저변화되어 19세기의 민화에서도 실경산수가 주요한 畵題 중의 하나로 정착되는 배경이 되었다.

 

14] 成海應, ?東國名山記?(규장각 소장 도서) 참조.

15] 徐有榘, 앞 책, 415-425쪽 참조.

16]여기에 거론된 작품들 중 김하종, 이풍익, 이의성의 작품 도판은 拙著, 앞 책, 도104, 105, 106에 실려 있다.

 

 

3. <四郡江山參僊水石>서화첩의 내용과 화풍

 

1) 작품의 내용과 제작경위

 

이 작품은 19세기 초에 제작된 진경산수화 중의 하나로서 당시 문인들이 산수를 유람하고 그 견문을 서화로 제작하는 관습이 여전하였던 것을 방증하는 자료일 뿐 아니라 관동팔경, 또는 금강산과 그 주변 경치를 그린 영동사군에 비견되는 충청도의 사군산수, 단양팔경의 일부를 연작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회화사적인 의의가 주목된다.

 

이 화첩은 모두 15면으로 꾸며져 있다. 그림이 모두 8면이고, 글씨가 모두 10면인데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과 글씨가 한 면에 두 작품씩 실린 경우도 있다.

 

1. 표제:‘四郡江山參僊水石’ (도1)
2. <桃花洞> (도2)
3. 도화동 관련 시문(도3)
4. <平登石>(도4)
5. 사군산수 관련 시문(도5)
6. <錦屛山>(도6)
7. 그림 관련 시문(도7)
8. 도담 관련 시문(도8)
9. <島潭>(도9)
10. <龜潭>(도10)
11. 도담과 석문, 귀담 관련 시문(도13)
12-좌. <水簾>(도14)과 관련 시문(도16)
12-우. <義林池>(도15)와 관련 시문(도17)
13. <舍人巖>(도18)
14. 사인암 관련 시문(도21)
15. 金養之의 발문: 1803년 정월 상순(도22)

 

 

 

- 사군강산삼선수석 (화첩의 제목) -

 

 

김양지 발문 

 

이 서화첩의 제작 경위는 가장 마지막 면에 있는 김양지의 발문과 제5면에 있는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늙은 벗 안숙은 음관의 길에 빠져 굽히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쇠하지 않아 문장짓는 솜씨가 더욱 힘차졌다. 비록 수령일로 번거로운 환경에서도 시짓고 노니는 일을 여전히 초연하게 하여서, 죽루에서 깨끗한 여가를 보내며 날마다 동헌의 두 그루 소나무를 읊으며, 사슴을 길들이고 학을 조율하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갔다. 사군을 향해 감에 미쳐서는 군수로서 나아갔는데, 경치를 쓴 여러 작품들이 山水를 애호하는 어질고 지혜로운 자의 즐거움을 이루어서, 관리로서의 일을 다버리고 자연을 애호하여 노닐며 감상한 것을 이 첩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산골짜기에 사는 백성들로서 의리를 지향하는 자들은 그가 떠난 뒤에도 그리워함이 많았다고 한다.

계해(1803년) 정월상순 우어거사 김양지.

 

老友安叔沉屈陰途, 而志氣不衰, 詞華益壯,

雖以黃崗應接之繁, 超然自在於翰墨間, 竹樓淸暇日哦二松, 馴鹿調鶴, 興盡而返,

及去四郡五馬之行, 寫景諸作, 得於山水仁智之樂, 其遺外吏事, 愛好遊賞, 可見於是帖,

而峽民之向義者, 亦多有去思云爾.

癸亥元月上澣寓於居士金養之

 

 

요컨대 이 글(도22)은 군수로 재직하는 늙은 벗인 安叔이 공무 여가에 자연을 벗하며 문장을 짓는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다가 마침내 四郡을 돌아보고 경물을 읊으며 寫景하였는데, 그 작품이 ‘山水仁知之樂’을 이루었고, 이 첩을 보면 그 성과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 글의 끝에는 ‘癸亥元月上澣寓於居士金養之’라고 쓰여 있어서 이 서화첩이 계해년, 1803년 정월 상순까지는 완성된 것을 시사한다. 음관의 길에 빠져 있다는 발문의 내용으로 보면, 안숙이 陰補로 관직에 나아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숙과 그의 친구 金養之란 인물의 자세한 행적은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어 <평등석도> 다음 면에 있는 안숙의 글(도5)에는 안숙이 당시 청풍의 府使였고, 가을이 깊은 9월 9일 公事가 한가한 틈을 내어 출발하여 여러 날에 걸쳐 사군의 명승을 돌아보았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평등석

 

사군산수가 묵은 빚 되어 꿈 속에 보인지도 오래 되었네. 수령의 행장으로 갑자기 동으로 가서, 청풍으로 나아가 벼슬하게 되었네.

한벽루에 높직이 누웠나니, 가을이 여물어서 백성 다스릴 일 없네.

9월 초아흐렛날에 지필묵을 채비하여 떠났네. 제천현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십리되는 큰 못이 있었네.

義林이 무엇하는 것인고. 농경지에 물댄 공이 이와 같았네. 하룻 밤을 머물고 영춘으로 향하니, 새벽닭이 어제처럼 우네. …

四郡爲宿債, 久矣來夢惠. 五馬忽東之, 淸風出而仕.

臥高寒碧樓, 秋熟無民事.

九月初九日, 行裝筆墨紙. 午飯堤川縣, 十里大池水.

義林何爲者, 灌漑功若是. 一宿向永春, 曉鷄如昨日. …

 

 

이 작품에 쓰여진 글들은 오언절구, 칠언절구, 칠언율시, 고시체 등 여러 文體와 書體로 쓰였는데, 위에 인용한 글들을 제외하면 대개 돌아본 경물을 간단히 묘사하고 그에 대한 감흥을 표현한 것들로 사실적 묘사보다는 흥취와 우의를 담고 있다.

 

 

2) 李昉運과 <四郡江山參僊水石>서화첩의 화풍

 

이 작품의 그림을 李昉運이 그린 것은 그 畵風과 款署, 圖印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림의 다음 면에는 그려진 장면과 관련되어 안숙이 지은 시문들이 해서, 행서, 초서, 예서 등 각기 다른 書體로 쓰여져 있다. 이 글씨를 누가 썼는가 하는 점은 서화첩의 제작 경위를 고려한다면 김양지나 이방운의 서체와 다르므로 ‘翰墨之事’에 관심이 많았던 안숙 자신이 쓴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자료를 통해서는 안숙의 행적이나 서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림을 살펴보기에 앞서 화가인 이방운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李昉運은 咸平 李氏로 初名은 邦韻이고 자는 明考, 호는 箕埜(혹은 箕野), 心齋, 四明, 華下, 喜雪, 淳齋, 月陰, 心翁, 淳翁, 韻韶, 箕老, 遊蓮, 蓮翁 등 다양하다17].

이방운은 1761년에 태어났고 1791년까지의 행적이 확인되었으나 이 서화첩을 보면 1802년까지는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1815년에 간행된 南公轍의 문집인 ?金陵集?에는 「春山欲雨亭觀箕埜村家四景圖」라는 글이 실려 있고, 1822년에 간행된?潁翁再續藁?에도 「秋日與傲齋尹生鶴柱遊湖上約箕埜李生昉運不至」라는 칠언율시가 실려 있다18]. 이로 보면 이방운은 1815년 이후까지 생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방운은 沈師正(1707-1769)과 사돈이 되는 인척으로 밝혀졌는데19],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는 심사정과 마찬가지로 몰락한 양반가 출신이었고 직업화가와 비슷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공철의 ?영옹재속고?의 기록 중에 이방운을 ‘生’이라고 부른 것이 있는데, 당시 이방운의 나이가 55세가 넘었는데도 그와 비슷한 연배의 남공철이 그를 보통 젊은이나 관직에 오르지 않은 젊은 문인을 부르는 호칭인 ‘生’으로 부른 것도 그의 신분을 짐작하는 단서가 된다.20]

 

이방운의 작품에는 심사정 화풍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우선 그가 심사정과 인척 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산수와 인물을 잘 그렸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남종화풍의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전해지는 작품들 역시 대부분 산수화이고, 그 이외에 인물화(풍속화, 고사인물화, 신선도), 화조화, 초충도가 전해진다. 그러나 인물화도 대개는 산수를 배경으로 하는 것들이어서 그의 장기가 산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이방운에 대한 연구로는 변영섭, 앞 글, ?梨花史學硏究?; 아호 중에서 ‘遊蓮’과 ‘蓮翁’은 필자가 처음 발견한 것으로 ‘遊蓮’은 <四郡江山參僊水石>서화첩에서 확인되며 ‘蓮翁’은 선문대학교 소장의 화조도에서 사용되었다.

18]文德熙, ?南公轍(1760-1840)의 書畵觀?(弘益大學校 碩士學位 論文, 1994), 39-40쪽 참조.

19]심사정의 고모부인 이창진은 이방운의 조부인 이창우의 동생이고, 따라서 심사정은 이방운의 종조부의 조카이다. 李禮成, ?玄齋 沈師正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8), 156쪽 참조.

20]성대중도 이방운을 ‘李生’이라고 호칭하였다. 成大中, 「李箕野琴畵記」, ?靑城集?(변영섭, 앞 논문에서 재인용) 참조.

 

 

이방운의 풍속과 인물화는 중국의 고사가 주된 소재이며, 산수표현은 당시 유행한 남종화풍을 보여준다. 산수화의 주제도 고사에 근거한 것이거나 문인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망천도>, <포금방우도>, <무계정사도>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화풍(도23)에는 구도와 필묵법, 색채에 이르기까지 심사정(1707-1769) (도24)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때로는 姜世晃(1713-1791) (도25)의 영향이 나타나기도 한다21]. 심사정과 강세황은 남종문인화풍을 새롭게 해석하고 한국적인 방식으로 정착시키는데 기여한 문인화가들로서 이들의 화풍은 19세기 초에도 이상적인 문인화풍의 전형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이방운은 또한 심사정, 강세황과 마찬가지로 진경산수화를 여러 점 남기고 있는데, <금강전도>병풍과 <관동팔경도>, 개별 작품으로 <삼일포>, <경포대> 등이 알려져 있었다. 진경을 그릴 때에 이방운은 관념산수화와 달리 鄭敾(1676-1759)의 화법(도26, 27)을 많이 참조하였으며, 이 서화첩에 나타난 界畵法을 보면 西洋畵法(도28, 29)에 대한 이해도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림의 내용과 구성을 살펴보면서 화풍의 특징과 회화사적 의의를 정리하려고 한다. 전체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여러 경물에 따라 화법을 다양하게 조절하여 對境의 인상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데 힘썼다는 점이다. 이는 진경산수를 그릴 때 흔히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이방운의 경우에는 특히 여러 선배화가들의 畵法을 對境에 따라 응용하며 절충적인 화풍을 구사한 것이 발견된다.

 

 

- 도화동 -

 

우선 첫번째 그림인 <도화동도>(도2)는 굽이굽이 펼쳐진 산들과 그 안에 깃들인 평화로운 산촌 마을의 정경을 담고 있는데, 이방운 화풍의 특징과 그 화풍의 연원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도화동은 청풍에 위치한 승경으로 청풍관아로부터 동쪽으로 7, 8리 되는 곳에 있었고, 강변으로부터 800 여보 떨어진 곳이었다. 이 근처의 풍경이 그러하듯 험준한 산은 아니지만 나즈막한 구릉형의 산들이 첩첩이 쌓인 곳으로 정인지가 “도화촌의 길은 신선경이네. ⋯⋯”라고 읊은 적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였다22]. 산의 표현(도23)을 보면, 비수의 변화가 있는 윤곽선으로 산의 형태를 잡고, 그 안에 느슨한 피마준같은 선을 그어 질감을 표현한 뒤 담묵을 쓰거나 청색과 녹색을 담채로 선염하며23], 그 다음에 능선을 따라 짙고 윤택한 側筆米點을 촘촘하게 찍어서 표현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거의 水平에 가까운 시점에서 담백하게 경물을 묘사하고, 경물의 특징을 반영하였는데, 그 화법은 이방운이 관념산수화나 고사인물화의 배경으로 사용한 화법을 그대로 적용한 까닭인지 왠지 실경감이 떨어지며 마치 한 폭의 남종산수화처럼 느껴진다. 근경에 서 있는 여러 나무들은 樹種에 따라 서로 다른 표현기법을 사용하였는데, 길쭉하게 솟아오른 소나무의 묘법이 운치가 있다.

 

이 장면에서 잘 나타나듯이 이방운은 청색, 녹색, 주색 등 다양한 채색을 진하게 사용하였다. 이것은 이 화첩에서 이방운이 그의 여러 그림들과 달리 강한 필묘와 윤택한 먹색을 사용한 것과도 통하는 요소로 무엇보다도 實景의 인상과 특징을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한 방안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방운은 <금강전도>나 <관동팔경도> 등 실경을 그릴 때에는 대체적으로 비슷한 면모를 보여 주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그의 독특한 실경화풍이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언급된 여러 기법은 또한 심사정과 강세황의 화법(도24, 25)과도 관계가 있다. 이 점에 대하여는 작품을 살펴보면서 계속 검토하기로 한다. 화면 위쪽에 ‘桃花洞’이라 쓰고, ‘羲皇聖世’라는 내용의 주문타원인을 그려 놓았다(참고자료 1).

 

21]심사정에 대하여는 이예성의 논문이 가장 참고가 되며 강세황에 대하여는 邊英燮, ?豹菴 姜世晃 硏究?(一志社, 1988) 참조.

22]?新增東國輿地勝覽?, 242쪽 참조

23]여기에 사용된 청색은 식물성 안료인 花靑이나 광물성 안료인 석청 중 한 가지일 것이며, 녹색은 식물성 안료인 등황과 화청을 섞어 사용하였거나 광물성 안료인 석록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안료의 종류와 색깔의 명칭에 관하여는 체계적으로 정리된 바가 없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그림의 이론과 기법 면에서 조선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친 ?芥子園畵傳?중의 「設色各法」條가 참고된다. ?芥子園畵傳?(旲浩出版社, 1981) 참조.

 

 

 

 

 

이 장면 뒤에는 “流下芙蓉璧, 通明水氣多, 鳥衣飛鶴鶴, 人髮照皤皤, 赤壁蘇翁賦, 靑山謝子歌, 幽深長自送, 評品巽初過”라는 오언절구가 유려한 초서체로 쓰여 있다(도3). 그 뒤에는 또 다른 오언절구가 좀더 단정한 행서로 쓰여 있으며 맨 마지막에는 ‘煙霞泉石膏肓’ 이란 내용의 도인이 있다.

이 도인은 刻字된 것이 아니라 주색 물감으로 그려진 것이어서 이채로우며, 이 서화첩의 도인들은 거의 그려진 것들로 시귀나 운치있는 구절을 인용한 것들이다.

 

 

- 평등석 -

 

 

두 번째 그림인 <平登石圖>(도4)는 시원하게 펼쳐진 강의 한가운데 솟은 펼쳐진 넓은 암반, 아마도 평등석이라 불리운 곳에서 아취있는 모임을 즐기는 선비들과 이에 소용되는 물자를 나르는 나룻배를 묘사한 것이다. 멀리 보이는 遠山의 표현은 앞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강물의 표현은 넓은 붓으로 청색을 엷게 풀어 대범하게 칠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선묘를 배제한 이러한 표현은 18세기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화법으로 예컨대 직업화가인 李聖麟이 1748년에 그린 것으로 전하는 <槎路勝區圖>卷 중 물의 표현과 비교된다24]. 하늘과 산을 표현할 때 청색을 담채로 풀어 붓 자국을 남기지 않고 칠하는 것은 18세기 중엽경 정선의 <금강전도>, 강희언의 <인왕산도> 등에서 사용된 기법으로 대개 서양화법의 도입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25]. 물을 표현할 때 파란 색을 칠하는 기법은 일찍이 강희언의 <결성범주도>에서 사용되었다26]. 본래 이방운은 아담하고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화가로만 알려져 왔는데, 이처럼 표현적인 물의 묘법을 구사한 것은 이채로운 일로서 새로운 화법에 대한 관심을 시사한다.

 

이 장면에는 ‘平登石’이라 화제를 쓰고 그 옆에 ‘遊蓮’이란 아호를 도인처럼 그려 놓았다(참고자료 2). ‘遊蓮’이란 호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호로서 이 화첩에서 3번 사용되었고,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화조도에서도 ‘蓮翁’이란 호와 함께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그가 중년 이후 사용한 아호로 볼 수 있겠다.

 

 

- 금병산 -

 

 

세 번째 그림인 <錦屛山圖>(도6)는 이방운 화풍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 주는 동시에 특이한 界畵法을 구사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근경에 웅장한 한벽루와 청풍 관아의 경관을 그리고, 중경에는 강물을, 그 건너 원경에는 병풍처럼 솟은 금병산을 평행으로 펼쳐서 그렸다. 이 장면은 가을의 정취를 한껏 드러내기 위해 붉은 색과 녹색을 많이 사용하여 매우 화사해 보인다27]. 안숙이 청풍의 부사로 한벽루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니 청풍의 대표적인 명소인 한벽루와 강건너 앞에 병풍처럼 솟아있는 금병산, 그 이전에는 屛風山으로 불리었던 산을 표현한 것이다. 누각에서는 선비들이 담소하고, 강에서는 한껏 부풀은 노란 돛을 올린 배가 떠가며 건너 강변에는 소를 모는 목동과 나무를 나르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평화로운 시절을 구가하는 牧民官의 심사를 담고 있는 듯하다. 이 장면의 구도는 정선의 <한벽루도>(도26)와 비교되는데, 나중에 살펴보게 될 귀담이나 사인암 장면과 달리 한벽루를 표현할 때는 정선의 화법을 크게 참고하지 않았다.

 

24]<사로승구도>권의 도판은 ?朝鮮時代 通信使?(國立中央博物館, 1986), 도14 참조.

25]<금강산도>와 <인왕산도>의 도판은 安輝濬 監修, ?山水畵?(下), 韓國의 美2(中央日報社, 1995), 도14와 도18 참조.

26]<결성범주도>의 도판은 安輝濬 監修, 앞 책, 도110 참조. 이 책에서는 강세황作으로 되어 있으나 나중에 강희언의 작품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27]“淸風府治, 背江而面鳳嶺, 衙舍及村家緣岸布列, 而錦屛山隔江而立, 韞藉秀麗, 橫遮江外之峭險, 樓當錦屛之正面, 此所以奇也, 灘聲常如風雨至 …”, 成海應, 앞 책, 寒碧樓條 참조.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한벽루를 표현한 방식이다(도28, 29). 전각을 그리면서 이방운은 좌우로 나누어진 부감시점을 사용하였으며 전각들은 하나의 중심점을 향해 포치된 것처럼 보인다. 또 전각 아래의 기둥들이 일관된 방향으로 놓여져 공간의 깊이를 전달하고 있고, 기둥의 좌우 윤곽 부분은 紅色으로 칠하고 가운데 돌출된 부분은 희게 남겨 놓아 입체감이 들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 기법은 결국 이방운이 서양의 투시도법을 토대로 정립된 계화법을 시도한 것임을 시사한다. 19세기초의 궁중회화에서는 계화법으로써 평행사선투시도법이 선호되었고28], 때로는 소실점을 의식한 일점투시법에 가까운 기법이 사용되기도 하였다29]. 이방운의 계화법은 이 두 계화법이 절충된 방식으로 그가 세련된 기량을 가진 화가였음을 방증하는 면모로서 주목된다. 이 장면에는 ‘錦屛山’이라 쓰고, ‘閒雲埜崖’라 쓰인 도인을 그려 두었다.

 

 

- 도담 -

 

 

다음 그림인 <島潭圖>(도9)는 남한강 상류 가운데에 있는 세 개의 봉우리인 도담 삼봉과 석문(도11)을 표현하였다. 이 장면은 이방운이 구사한 진경의 시점과 표현 방식을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다. 화면은 역시 근, 중, 원경의 삼단구도를 기본으로 하여 각 경물군을 꺾어지는 대각선을 따라 포치하였으며, 산에는 녹색을, 물에는 청색을 짙게 선염하여 다소 들뜬 인상을 준다. 그런데 도담삼봉과 석문은 서로 다른 지점에 위치하고, 석문은 특히 수풀에 감싸인 언덕 위에 감추어진 채로 있어서 그림에 묘사된 것과 다르며, 석문과 도담을 함께 담을 만한 실제적인 시점은 없다. 따라서 이 장면은 비슷한 장소에 있는 두 명승을 한 화면에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재구성된 화면인 것이다. 양편의 두 기둥과 그를 이어주는 대들보같은 돌로 표현된 석문의 모습 또한 실제 석문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장면에서 보면 이방운이 실경의 모습과 시점을 감안하되 그리는 이의 의도에 따라 공간과 시점, 형태를 조절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은 대체로 금강산도를 그릴 때에도 사용되었다30]. 따라서 우리 나라의 실경 또는 진경산수화는 시각적인 현상을 재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실경을 감안하되 그 대상의 전체적인 면모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전달하는데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에는 ‘島潭’이라 화제를 쓰고 ‘雲韶’란 호를 종모양으로 그려 넣었다(참고자료 4).

 

 

 

 

 

다음의 <귀담도>(도10, 12)는 이방운 화풍의 또 다른 배경을 시사해 준다. 단구협을 따라 흐르는 남한강을 선유하다 만나게 되는 귀담은 물가 위에 바로 솟아 오른 커다란 절벽으로 그 형태가 거북과 같다고 하여 귀담으로 불리는데, 형세가 워낙 장엄하고 푸른 강물과 어울려 명승을 이루어 시인묵객들의 애호를 받았다. 이황도 귀담을 방문하기 이전에 본 사인암과 도담을 귀담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치라고 하였을 정도이다31]. 정선도 단양지역을 여행하고 <귀담>(도27)을 그렸는데, 그 작품의 구도와 필묵법, 형세가 이방운의 작품과 비교된다. 이 장면은 앞의 장면들과 달리 귀담을 무척 강조하여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도록 포치하였다. 또한 강안 이편에서는 누각과 바위에 앉아 이 명승을 감상하는 인물들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명승을 그리면서 근경과 원경을 강조하는 평행구도로 포치하고 근경에 명승이 바라다 보이는 정자나 누각을 두는 구성은 조선 중기의 실경산수화에서도 발견되는 전통적인 구성법이다.32]

 

28]19세기초에 그려진 동궐도의 투시도법은 안휘준에 의하여 평행사선투시도법으로 명명되었다. 安輝濬, 「韓國의 宮闕圖」, ?東闕圖?(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92), 21-62쪽 참조.

29]필자는 19세기 궁중회화의 투시법을 평행사선투시도법과 일점투시법이 때에 따라 적용된 것으로 보았다. 拙稿, 「朝鮮後期 進饌儀軌와 進饌儀軌圖」, ?民族音樂學? (서울大 東洋音樂硏究所,1995) 참조.

30]정선의 금강산도들은 그 한 예가 된다. 拙著, 앞 책, 167-206쪽 참조.

31]李滉, 앞 글, ?退溪集?참조.

32]李源福, 「李楨의 두 傳稱畵帖에 대한 試考」(上)?美術資料?34호 (1984.6.), 1-20쪽 참조.

 

 

이 장면에서 이방운은 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강한 形勢와 표현적인 筆勢 및 墨法을 구사하였다. 특히 육중한 바위 덩어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짙은 먹의 힘찬 필선을 수직으로 그려 내리고 반복적으로 덧칠하여 강렬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는 분명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鄭敾의 화법과 관계가 있다. 이방운은 각 경물의 특징을 강조하려는 원칙 아래에서 가장 적합한 화법을 경우에 따라 적용하였는데 이처럼 강인한 岩勢를 표현하는 데에는 역시 정선의 양식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이로 보면 이방운은 심사정과 강세황 뿐 아니라 정선까지도 연구하여 화법의 폭을 넓힌 것을 알 수 있다. 이방운 화풍의 특징은 결국 이전의 대가들이 이룩한 전통화풍을 철저히 연구하여 절충적인 화풍을 이루어낸 것이며, 이는 또한 19세기 초 화단의 한 양상을 시사하는 면모이다.

 

 

 

 

<귀담도> 뒤에는 도담과 석문, 귀담과 관련된 시문이 실려 있다. 먼저 “山上有山水外水”로 시작되는, 이 경치를 읊은 칠언절구가 행서체로 쓰여 있는데(도13), 그 중 “蒼霞小亭大管嶺 … 元靈鐫墨胤之詩”란 구절이 있다. 이 창하정은 李麟祥(1710-1760)이 귀담 건너편 언덕에 짓고 우거했던 정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33], ‘원령’은 이인상의 호이고 ‘전묵’은 그의 그림 솜씨를 가리킨다. ‘胤之’는 이인상의 친구로 역시 단양에 우거한 李胤永(1714-1759)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의 풍류는 사군과 단양이 시인묵객들 사이에 유명해지는데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사인암의 암벽에는 이들이 새긴 刻字들이 있으며 이들의 풍류는 문인들 간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 수렴 -

 

 

이어 다음 면에는 <수렴도>(도14)와 관련 시문(도16)이 반쪽에34], <의림지도>(도15)와 관련 시문(도17)이 나머지 반쪽에 실려 있다. 수렴폭포는 청풍부에 있던 명승으로 청풍관아에서 동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 석벽이며, 물이 마치 발처럼 쏟아져 내리는 곳으로 유명하였다35]. 또 조선 문인들이 운치높은 산으로 선망하던 중국의 廬山에도 유명한 수렴폭이 있다고 한다. 제천에 있는 의림지는 고려 충숙왕 때 만들어진 이후 꾸준히 경영된 유서깊은 저수지였다. 이 두 경물은 모두 화면에 중요한 대상을 꽉 차게 구성하였는데, 이러한 구성은 정선의 화풍과 관계가 있다.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와 근경에 나타나는 길쭉한 소나무의 표현이 잘 어울려 운치를 돋우며, 절벽의 岩勢는 귀담과 달리 윤곽선과 부드러운 필묘 위주의 준법, 맑고 고운 담채선염으로 표현되었다. 이 표현에서는 沈師正의 화법이 연상되는데, 이는 이 장면의 특징인 詩的인 情趣를 표현하기 위하여 선택된 화법인 것이다. 화면 위쪽에 ‘水簾’이라 쓰고 그 옆에 작은 병모양의 도인을 그렸는데 ‘氷壺’라고 쓰여 있다(참고자료 6).

 

33] “蒼霞亭 在府西三里 元蒼霞(李麟祥: 필자 주)所建 今有址”, 「湖西邑誌」, ?邑誌?(亞細亞文化社, 1985), 563쪽; 이 읍지는 1871년에 제작된 것인데 당시에 창하정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구지만 남아 있었다.

34] 수렴폭의 시문은 다음과 같이 판독된다. “水蘭山菊惜香衰, 小棹沿洄百頃遲, 自有渚涯成器局, 誰云澇旱被盈虧, 雲端不識源窮處, 壑底惟看瀑始垂, 高唱大堤歌一曲, 跳魚飛鴨各天姿

35]淸風條, 「湖西邑誌」, 앞 책, 564쪽 참조.

 

 

- 의림지 -

水蘭山菊惜香衰, 小棹沿洄百頃遲, 自有渚涯成器局, 誰云澇旱被盈虧, 雲端不識源窮處, 壑底惟看瀑始垂, 高唱大堤歌一曲, 跳魚飛鴨各天姿

 

시적인 운치를 강조한 것은 의림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의림지의 실경 자체가 탁 트인 못의 풍경이니 그러하지만, 의림지 위쪽으로 나타나는 산과 못 주변의 소나무와 버드나무 등도 평담한 雅趣를 전달해 준다. 또한 주색 계통의 색을 자제하고 청색과 녹색을 주조로 한 담채의 사용도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한 요소이다. 그림에서 의림지는 실경과 달리 方池로 재구성되어 표현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朱子의 싯귀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주자의 시는 문인들이 애송한 것이었고, 여기서 읊어진 方塘의 개념은 도학적 자연관과 문학관으로 연결되어 마침내 方池形의 표현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36]. 이처럼 이방운은 문인적인 취향을 전달하는데 관심이 컸음을 알게 된다. <의림지도>에는 ‘義林池’라고 쓰고 이어 ‘遊’와 ‘蓮’이란 도인을 역시 그려 넣었다(참고자료 7).

 

36] 주자의 시는 「觀書有感二首」로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聞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이 시는 자연의 풍광에서 시작하여 그 근원의 추구로 귀결지은 것으로서 도학적 추구에 대한 은유로서 인정되어 조선 문인들 간에 애송되었다. 여기에서 인용된 ‘方塘’의 개념이 의림지를 실제와 달리 네모난 연못으로 표현되게 한 것으로 보인다. 張世厚, ?朱子詩 索引?(以會文化社, 1996), 92쪽 참조.

 

 

- 사인암 -

 

 

다음의 <舍人巖圖>(도18)는 귀담과 함께 정선화풍의 영향과 이방운 특유의 시점과 표현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인암은 단양팔경의 하나로 이인상, 이윤영이 노닌 곳으로 유명하였고 문인들이 매우 선호한 곳이었다. 사인암은 시냇가에 치솟은 큰 덩어리의 기암절벽인데(도19, 20), 그 전체의 모습을 보려면 시내 건너편에서 바라다 보아야 한다. 또 사인암에 접근하려면 시내를 건너가게 되는데, 그러면 사인암의 뒷면과 그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에 다다른다. 그러나 이렇게 접근하면 사인암의 전모가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에 표현된 사인암은 앞쪽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시내는 사인암 뒤로 흐르고 있어서 실경과 다르게 재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시내 건너 연운을 두고 나타나는 중첩된 먼산들은 실제로 사인암 앞 쪽에서 볼 수 있는 산들이며(그림19), 그림의 시점에서 볼 수 있는 산들이 아니다. 成海應은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모습의 사인암을 묘사하면서 石靑, 石綠, 朱砂, 珊瑚, 雄黃, 浮金 등 여러 채색이 섞여 이루어진 모습이라고 형용하였고37], 김홍도는 사인암(도32)을 그리면서 사인암의 형태를 세밀한 선묘로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을 뿐 아니라 성해응이 서술하였듯이 암석의 다양한 색조와 분위기를 미묘한 선염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방운은 김홍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인암을 표현하였다. 이 장면에서 이방운은 심사정의 산수화법과 강세황의 설채법, 정선의 岩勢 표현을 절충하여 적용하였고 그 결과 김홍도의 작품과는 상당히 다른 사인암이 되었다. 이렇게 전통적인 화풍을 근거로 형성된 절충적인 화풍은 19세기초의 진경산수화에서 애용되었는데, 예컨대 김하종의 <해산도첩>과 임득명의 <서행일천리>권, 이풍익의 < 동유첩>에서 그러한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장면에는 ‘舍人巖’이라 쓰고 ‘遊蓮’이란 주문방인을 그려 넣었다(참고자료 8).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작품은 이방운이 구사한 진경산수화풍의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방운의 화풍에서 시사되는 전통적 화풍의 요소들, 예컨대 심사정과 강세황, 정선과 원체화풍에서 유래된 표현기법들은 필요에 따라 선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절충적인 성향이 이방운 화풍의 큰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만의 독특한 필묵법과 설채법, 아기자기하고 장식적인 성향은 그가 다만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가를 이루었음을 보여 준다. 전반적으로 그의 화풍에 나타나는 특징은 그가 정통적인 문인화를 추구하였다기 보다 직업적인 화가에 가까운 성향을 지닌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18세기에 이루어진 여러 화가들의 화풍을 절충적으로 구사하며, 기교를 중시한 장식적인 화풍은 19세기 전반 경의 문인화가들, 예컨대 신위, 윤제홍, 김정희 등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면모이기 때문이다.

 

37]成海應, 앞 책, 舍人巖條; 이 채색의 명칭은 浮金을 빼면 모두 ?芥子園畵傳?에 실려 있다. ?芥子園畵傳 ?「設色各法」참조.

 

 

4. 맺음말

 

이제까지 청풍부사 安叔이 1802년 가을에 청풍, 영춘, 단양, 제천 등에 있는 명승을 탐방한 뒤 지은 글을 다양한 서체로 쓰고, 화가인 李昉運(1761-1815 이후)이 그림을 그린 <사군강산참선수석> 서화첩을 살펴보았다. 이 화첩은 명승을 여행하고 그 견문과 감흥을 시․서․화로 제작하는 관습이 지속되면서 진경산수화가 꾸준히 그려지게 된 상황을 보여 준다.

 

이 서화첩이 꾸며진 19세기 초에는 李光文이 후원하고 金夏鍾이 그린 <海山圖帖>, 鄭遂榮의 <海山圖帖>과 <漢臨江遊覽寫景圖>卷, 李豊翼의 <東遊帖>, 林得明의 <西行一千里>卷, 尹濟弘의 진경산수화 등이 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 서화첩은 단양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사군산수를 연속된 장면으로 나누어 담았고, 다양한 문체의 詩와 書體를 함께 갖춘 작품이어서 19세기 초의 진경산수화와 문인문화의 또 다른 양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箕埜 李昉運(1761-1815이후)은 심사정과 사돈되는 인척간이었음이 밝혀졌고, 따라서 양반가 출신일 가능성이 확인되었지만 그 신분에 관하여 단언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畵院에서 활동한 적이 없고 화원 집안 출신도 아니므로 직업화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운이 구사한 화풍과 화제를 통해서 보면 그가 정통적인 문인화를 추구한 문인화가라기 보다는 심사정과 마찬가지로 몰락한 양반가 출신으로 거의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린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그는 산수화와 고사인물화를 가장 잘, 그리고 많이 그렸고, 다음으로 진경산수화, 풍속화와 화조화를 약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에 공개된 <금강전도>, <관동팔경도>, <사군강산참선수석>화첩을 통해서 그가 진경산수화에도 상당히 관심을 둔 것이 밝혀 졌다. 또한 기왕에 알려진 아호 외에도 ‘遊蓮’, ‘蓮翁’이란 호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선배화가의 화풍을 필요에 따라 추종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심사정과 강세황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진경을 그릴 때만큼은 정선의 화풍을 많이 참작하였다. 그대신 19세기 초까지 진경산수화에 큰 영향을 미쳤던 金弘道의 화풍은 거의 추종하지 않은 점이 이채롭다. 이 작품은 18세기에 이루어진 예술적 전범과 양식이 19세기 초까지 존중되었고, 그 결과 전통적인 화법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절충적인 화풍이 형성된 것을 보여 준다.

 

 

 

 

<四郡江山參僊水石>첩 중 圖印과 畵題

 

 

 


1. 李昉運, <四郡江山參僊水石>서화첩, 제1면 1802년~1803년 경
   지본담채, 32.5×26㎝, 국민대학교 박물관 소장
 2. 李昉運, <桃花洞圖>,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2면
 3. 李昉運,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3면
 4. 李昉運, <平登石圖>,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4면
 5. 李昉運,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5면
 6. 李昉運, <錦屛山圖>,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6면
 7. 李昉運,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7면
 8. 李昉運,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8면
 9. 李昉運, <島潭圖>,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9면
10. 李昉運, <龜潭圖>,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0면
11. 도담 옆의 석문 실경
12. 귀담 실경
13. 李昉運,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1면
14. 李昉運, <水簾圖>,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2면
15. 李昉運, <義林池圖>,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2면
16. 李昉運,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2면
17. 李昉運,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2면
18. 李昉運, <舍人巖圖>,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3면
19. 단양 사인암 앞산 실경
20. 단양 사인암 실경
21. 李昉運,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4면
22. 李昉運,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5면
23. 李昉運, <桃花洞圖> 부분,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2면
24. 沈師正, <望都城圖> 京口八景帖 중
    지본담채, 24.0×13.5㎝, 서울 개인 소장
25. 姜世晃, <山水對聯> 중 한 면
    지본담채, 87.2×38.5㎝, 서울 개인 소장
26. 鄭敾, <寒碧樓圖>
   견본담채, 25.7×20.5㎝, 간송미술관 소장
27. 鄭敾, <龜潭圖>
   견본담채, 26.8×20.3㎝,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28. 청풍 문화재단지 내 한벽루 실경
29. 李昉運, <錦屛山圖> 중 한벽루,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6면
30. 李昉運, <舍人巖圖> 부분,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3면
31. 李昉運, <水簾圖> 부분, <四郡江山參僊水石>帖 제12면
32. 金弘道, <舍人巖圖> 1796년, <丙辰年畵帖> 중
   지본담채 각 26.7×31.6㎝, 호암미술관 소장

 

 

<참고자료> 李昉運의 落款

1. <桃花洞圖> (부분) 2. <平登石圖> (부분)
3. <錦屛山圖> (부분) 4. <島潭圖> (부분)
5. <龜潭圖> (부분)   6. <水簾圖> (부분)
7. <義林池圖> (부분) 8. <舍人巖圖>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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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우 안숙은 음관의 벼슬길에서 영락한 상태였지만 뜻과 기운이 시들지 않아서 아름다운 시문은 더욱 힘찼어라 비록 황강의 수령 일로 응접하는 번거로움 속에서도 초연하게 문장을 짓고 읊조렸네죽루에서 청아하게 여가를 보내면서 날마다 두 그루 소나무를 읊으며 사슴과 학을 길들이다가 흥취가 다하면 돌아갔어라 사군으로 나아가서는 오마 탄 군수로 행차하였으며 경치를 묘사한 여러 작품들은 산수를 좋와하는 어질고 지혜로운 자의 즐거움을 얻었네 그밖에 관리로서의 일은 버려두고 자연에 노닐며 감상함을 애호한 것을 이 첩에서 볼수있노라. 또한 산골짜기에 사는 백성들 중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은 그가 떠난 뒤에도 그리워 하여 언급하는 자들이 많았다네 (계해년1803년 정월 상순에 거사 김양지)

 

 

 

도화동

 

 

流下芙蓉璧, 通明水氣多, 鳥衣飛鶴鶴, 人髮照皤皤, 赤壁蘇翁賦, 靑山謝子歌, 幽深長自送, 評品巽初過

 

부용벽으로 흘러 내려가자 밝게 통하는 물 기운 많아라

새의 힌 깃털 펄럭이고 사람들 센 머리카락 허옇게 반사되네

붉은 벽은 소식(蘇軾)이 읊은 부(赤壁賦)요 청산은 사령운(謝靈運)이 부른 노래이네

깊고 그윽함에 오래도록 만족하여 품평을 사양한 채 비로소 지나노라

 

불빛은 반짝거리다 다시 아득해 지고 누워 놀다가 또 걸어 다니며 유람하네

시냇가에서 지팡이 짚고 쉬는데 강의 배도 순조로이 흘러가네

거문고와 책 실은 짐 뒤따르고 술과 음식도 함께 실었노라

수고로움과 편안함을 구분할 필요 없이 청광한 사람이 가을을 보내네

*소식(蘇軾) : 1037~1101 唐宋八大家의 한사람 으로 동파전집에 적벽부 등 3천여 작품이 전해짐

*적벽부(赤壁賦) : 소식 이란 사람이 배를타고 유람하며 지은 2편의 시

*사령운(謝靈運) : 南朝동진의 명장이던 사현의 손자로 많은 산수시를 남김

 

 

 

평등석

 

사군산수가 묵은 빚 되어 꿈속에서 본지도 오래 되었는데, 오마 타고 홀연 동쪽에 있는 청풍으로 나아가 벼슬하게 되었네.한벽루에 한가롭게 누우니 가을이 여물어서 백성 다스릴 일 없어 9월초 아흐렛날에 지필묵 준비한채 유람 떠났어라.

제천연에서 점심먹고 나니 십리쯤 되는 큰 못이 있네, 의림지는 무었하는 곳인가 농경지에 물댄 공이 이와 같다네. 하룻밤 묵고 春州로 향하니 새벽 닭 울음소리는 어제와 같도다.불그스레한 빛은 청산을 포개 놓은 것 같고 가랑비는 걸음을 재촉하네 배타고 북벽 있는곳 물으니 가리키는 곳에 북벽이 나타났네.

누군들 옷 걷고 빨리 가지 않겠는가, 도착지에 함장의 자리를 설치하니 어른에 대0한 법도가 밝아 자질구레하고 인색함을 사라지게 하네

눈같이 흰 피부 빛은 고야산 신선같고 보배로운 기운은 서방 페르시아 저잣거리 같아라, 아홉겹 산은 모두 천 길이나 되는데 하늘과 나란히 달리다가 땅을 지나네

빈 굴에 일곱 구멍을 뚫었으니 어둡고 혼탁함이 어찌 적었겠는가 영롱한 다섯가지 색채가 널리 펼쳐졌으니 조화옹은 수고롭게 생각이 많았네

가을 풍도는 본래 맑고 엄숙한 것, 들에 쌓은 둑은 비단처럼 아름다워서 가득 차도록 높이 세웠는데 흔들리며 움직여 밑 부분 잃었노라

무딘 것은 격분하여 성내는 듯 하고 뾰족한 것은 외로워서 떨어지려는 듯 하며 조용한 모습은 천만 부처님이 조는 듯 하고 달리는 모양은 만 마리 말들이 일어나는듯 하네

새는 멀리 날아올라도 미치지 못하고 소나무는 작아서 아래 끝부분에 기대섰어라 여섯마리 자라가 三山을 이고 있으니 속까지 맑은 가을의 큰물이 이르렀네 내마음은 가서 돌아올줄 모르고 우두커니 빈껍데기 처럼 취해 있네 오만한 모습에 허리숙여 절을 하게 되고 세찬 기세에 죽은 넋조차 빼앗길 정도이네

천고의 절벽을 유람하니 소선이 둘째가 되었어라. 조물주가 공들여 만든 기이하고 웅장한 곳을 늙어서 지나가는데 존엄하고 도 영괴한 모습 네 글자가 큰뜻을 말해주네

이곳에서 노니는 것이 큰 행운이니 우리들은 어떠한 선비더냐 큰 붕새를 보지 못한 메추라기와 같아서 다만 부끄러울 뿐이라 작은 현의 기록이 없어지는  안타까우니 열국의 역사에 당연히 전해져야 하네 귀갑과 구슬처럼 귀중한 경관을 보아야만 자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리라

 

*춘주 : 옛 영춘의 지명

*삼산 : 중국동쪽바다의 전설상의 산(영주,봉래,방장)

 

 

 

금병산

 

 

궁벽한 고을 관원들은 기발한 일 좋아하여 글 읽고 난 여가에는 낚시줄 드리우네

명월이라 부르는 누각에는 그림자 나타나고 청풍이란 땅은 바람 불기를 기다리지 않노라

물의 성질은 투명하고 맑아 모든 빛을 받아 반사하며 산의 모습은 높고 기괴하지만 홀로 긍를 가졌네. 쩡쩡 바둑알 놓는것은 한가함을 탐하는 손님이요 바둑판세 뒤집히는 것은 구경꾼조차 알겠도다

천년된 옛 골짜기는 고색이 창연하고 숨은 짐승과 높이 나는 새들은 가까이 있네

강산의 손님은 노쇠해서 병이 많고요 봄날 비바람은 고운 햇볕 멈추었어라

흘러가는 금빛 물결은 닦은 거울처럼 넓게 트이고 물위에 떠오르는 석벽은 펼쳐놓은 병풍처럼 길어라 그림 같은 누각에 밤 되자 시 벗들이 이르고 관청에서 새로 빚은 맑은 술에 야채안주 향기롭네, 조화옹은 어렵잖게 만 가지 모습을 만들어 놓으니 의장은 태고시대를 배회하였네

오질은 게수나무 잘라 병풍틀 만들고 두 벌의 비단 짜서 화본을 만들었네

요 임금의 예복에 수를 놓아 다섯가지 채색의 복희 옷 얻었으며 점괘 그린 연못은 천 가지나 남아있네

5일 동안은 돌이 보이고 10일 동안은 물에 잠기니 愚公이 높은산 을 옮긴듯 하여라

봄 바람 여름 구름은 햇볕을 움직이며 가을달 겨울 눈은 맑은 정신 일깨우네

넓디넓게 펼쳐지는 햇볕은 땅으로 기울고 겹겹이 에워싼 가랑비는 하늘에서 내려오네

구슬처럼 아름다운 화초는 두루미와 사슴의 장난감이요 아득한 표류는 태고적  마을이라

여릉태수 구양영숙(毆陽永叔)같이 술을 좋와하여 백발노인이 그곳에 누워서 고주망태 되었네

 

*愚公 : 열자에 전하는 우공이산의 고사(바보같이 노력하여 집앞의 태행산을 옮김)

*구양영숙(毆陽永叔) : 북송의 정치가겸 문학가로 호는 취옹 이다

 

 

 

 

 

도담

 

 

가운데 세 손님 앉아 있고 강위에는 세 섬 이 떠 있네

손님들 각각 섬을 나눠 갖을 욕심으로 험한 물 건너 목도 따라 왔노라

이옹과 장씨 늙은이는 미친 사람처럼 노년을 마치겠다고 말하니

나 또한 그들을 따라가서 동참한다는 문장을 시 대신 썼네

세 신선이 다리 셋 달린 솥처럼 앉으니 상산사호(商山謝皓) 보다 한사람 적어라

서리바람은 티끌을 쓸어내고 가을 양지는 쪼여서 하얗게 되었네

여섯 장정이 이미 명령을 듣고 과부와 더불어 토론하였네

몸의 껍데기는 마침내 버려지는 것이고 혼백은 길이 보존되지 못하는 것이라

둥근 햇무리가 구천까지 울리며 흰구름은 넓디 넓게 날고 있네

아름답게 깎은 용마루와 난간의 돌이 무디어 귀신들이 채찍과 도끼를 많이 허비했네

불조의 청정한 지역은 항상 열려져 있고 늙은 신선들이 출입하는 관문은 아름답게 지어졌네

우물속 푸른 샘은 비스듬히 보이며 술 단지 속 흰 해는 높이 떠 있노라

때때로 토해내고 받아들이는 신령스런 구름 모습은 동쪽 바다 영주에 있는 혈망산과 흡사하네

 

*상산사호(商山謝皓) : 진나라 폭정을 피해 상산에 은거한 한나라 초기의 4명노인

 

 

 

 

귀담

 

산위에 산이있고 물 밖에 물 있는곳 구담에 이르러 수레와 배를 타고 감상하였네

쓸모없는 선비의 뜻과 기개가 어찌 한결같을 쏘냐

천지를 벼슬길로 여기니 스스로 호탕하더라 둘려있는 빼어난 벽이 험한 여울 눌렀으니

문득 이름난 지역이 홀로 밝아졌네. 蒼霞 라는 작은 정자가 크게 관할하니

나도 높은 발자취를 밟아 길이 따라 가고자 하네 금 은 경옥 은 섬의 광채를 바꾸고

생황 종 경은 번갈아 소리를 내노라 원령(元靈)의 그림솜씨와 윤지(胤之)의 시는

귀신조차 아끼고 숨기며 석장에게 물어볼 정도이네

제천의 큰못은 마소의 발자국에 괸 물과 같고 영춘의 여러 산봉우리들은 풀숲과 같도다

반쪽 모래사장 모습이 전체 터인지라 배회하니 마음의 경계가 한없이 넓어지네

들 벼와 강가 생선은 먹기에 좋은데 저녁바람에 어부와 농부들 노랫소리 멀리서 들려오네

구담 근처에 있는 혼을 부르니 초나라 굴원의 이소가 홀로 슬퍼하네 맑은 혼으로 교유하니

묵은것이 없어지고 여러가지 패물을 주니 들쭉 날쭉 하여라

신선이 남겨 얻은 것은 구름과 우레의 모습이요 땅속에는 옥설같이 고운  자태가 부질없이 묻혀있네 유와 하나라의 한떨기 꽃과  주나라의 엣솥은 그사람이 떠난 후에 다시 누구에게 전해졌는가

공중으로 난 갈로 돌아서 더 깊이 들어가니 두보가 촉 지방으로 들어가 읊은 문장과 같아라

신령스런 거북이 상서로운 그림을 가지고 나올 것 같은데 다만 기이한 전서로 써놓은

경계하는 글만 보이네 고요히 흐르는 백 이랑의 넓은 강은 거울이 되었고

우뚝솟은 천 층의 바위는 수풀이 되었도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 배를 돌리는 신선 나그네에게 아쉬움만 남겨주네

창하정(蒼霞亭) : 단양에 은거했던 단릉(丹陵) 이윤영(李胤永:1714~1759)이 1752년에 구담봉의 건너편에 건립했던 정자이며 주변을 유람하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시문과 서화창작의 장소로 활용되었던 곳이나 지금은 없어졌다

 

원령,윤지 : 원령=이인상(1710~1760)의 호. 윤지=이윤영의 字

굴원 : 초나라 문학가로 어부사시사 등의 25편이 전해짐

두보 : 당대의 시인으로 [두공부집]에 1천 5백여수의 작품이 전해짐

 

 

 

 

 

水蘭山菊惜香衰, 小棹沿洄百頃遲,

自有渚涯成器局, 誰云澇旱被盈虧,

雲端不識源窮處, 壑底惟看瀑始垂,

高唱大堤歌一曲, 跳魚飛鴨各天姿

 

수란과 산국화 향기가 시드는 것 애석하게 여겨서 조그만 배 타고 넓은 강을 더디게 올라가네,

저절로 물가의 형세 이루어졌으니 누가 장마와 가뭄으로 차고 줄어든다고 말하겠는가

구름 저 멀리 물줄기 끝나는 곳을 알지 못하는데 골짜기 밑에는 폭포수 떨어지는 것만 보일 뿐이네.

[방죽노래:大堤曲]한곡조를 큰 소리로 부르니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나는 오리는 각각 천연스러운 제 모습이어라

 

 

 

 

수렴(水廉)

 

 

큰 명성 오히려 믿을 수가 없었는데 첫 눈에 바라보니 명불허전 이라 아래로 내려가니 금석이 열리면서 높은 주렴(폭포수)이 하늘 중간쯤 걸려잇네

옥구슬 같은 물방울들 질풍처럼 흩어지니 구슬 먹줄이 연달아 비껴 떨어지는 듯 하네 홀연 불꽃 같은 삼복 더위를 생각하면서 폭포 앞에서 이마를 드러내고 잤노라

 

 

 

 

사인암(舍人巖)

 

 

취해서 살다가 꿈꾸듯 죽는 인생 내 마음은 항상 슬프도다

잠시 여행하고픈 평소의 소원에 만족하여 지팡이 짚고 걸어서 산골짜기로 가노라

홀로 험준하게 우뚝 서있는 바위 사인암은 누구의 자취인가

영롱하게 세겹 포개진 벽은 천길 먹줄이 곧게 뻗은 듯 하고 맑고 밝은 일곱 굽이의 물은

옥거울 처럼 한결같이 푸르도다

침상은 평평하고 베개가 높아서 하늘이 사람 누을 수 있는 돌을 빌려주었네,

시내가의 수레가 강의 배보다 나으니 편안한 몸으로 그윽하게 바라보네

우연히 죽간의 뜻를 보았지만 사람은 구름속 정자에 없더라

무성한 초목이 가을 햇빛 가리우자 문채를 연마하는 손님이 와서 머무르네

시 지어 산 모습을 제대로 묘사하니 마신 술이 물소리에 깨었노라

이 라름다움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노니 속세에 찌든 마음 아득히 멀어지네

 

 

 

 

참조;

http://blog.naver.com/gungmuk?Redirect=Log&logNo=90085262981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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