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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가방? 고급 승용차? 낚싯대 하나면 충분해!
대복고 조대
낚시터(釣臺)
대복고(戴復古)
세상일에 무심한데 오직 하나 낚싯대라(萬事無心一釣竿)
삼공 벼슬 준다 해도 이 강산과 안 바꾸네(三公不換此江山)
평생에 유문숙을 잘못 안 까닭에(平生誤識劉文叔)
헛된 명성만 세상 가득 드러냈네(惹起虛名滿世間)
(참고도판)김홍도, <동강조어>, 종이에 연한 색, 52.6×111.9cm, 간송미술관
‘명품 가방, 고급 승용차, 정원 딸린 집, 회원제 피트니스클럽, 목 좋은 빌딩, 퍼스트클래스, 럭셔리 크루즈여행’. 친구들에게 ‘부자’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물어봤더니 나온 대답이었다. 우리 시대의 부자 개념을 압축한 단어들이다. 이것들은 대복고(戴復古·1167~?)의 시에 등장한 ‘삼공(三公)’에 해당한다. 삼공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세 정승을 의미하는데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를 상징한다. 그런데 시인은 낚싯대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단다. 큰 집도 필요 없고 낚싯대 드리울 수 있는 강산만 있으면 된단다. 원래부터 욕심이 없는 사람이거나 삼공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한심한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강렬한 유혹을 간단없이 물리쳐버린 그가 궁금해진다.
강태공 말고 엄광
이 시는 후한(後漢) 때의 은자(隱者)인 엄광(嚴光·기원전 37년~서기 43년)을 위한 헌사다. 엄광의 입장이 되어 쓴 시다. 엄광은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기원전 6년~서기 57년)와 친구였다. 자(字)가 문숙(文叔)인 광무제는 황제가 되자 어린 시절의 친구 엄광을 불렀다. 믿을 만한 사람을 곁에 두고자 함이었다. 절친한 친구가 황제가 됐으니 얼굴만 들이밀어도 한자리를 얻을 판에 엄광은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광무제 유문숙이 사람을 보내 수소문을 해보니 엄광은 양가죽 옷을 걸치고 냇가에 앉아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촌부로 살다 죽었다.
권력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다 간 엄광의 모습은 ‘동강수조(桐江垂釣)’ ‘동강조어(桐江釣魚)’ ‘엄릉거조(嚴陵去釣)’ 등의 제목으로 시와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엄광이 낚시질하던 곳이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의 엄뢰(嚴瀨)였기 때문이다. 남송(南宋)의 시인 대복고가 ‘낚시터(釣臺)’를 쓴 이유도 그의 절개를 찬탄하기 위함이다. 낚시꾼을 그린 그림의 주인공이 강태공 말고 엄광이라는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홍도가 그린 <동강조어>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옹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과 같은 병풍에 담겨 있다
강태공과 엄광은 낚시꾼의 이름으로 강가에 앉아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전혀 다르다.
강태공(姜太公)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 앉아 있다면, 엄광은 자신을 찾는 사람으로부터 숨기 위해 앉아 있다. 강태공의 낚싯줄은 천하를 도모하려는 거대한 야망을 향해 던져졌지만 엄광의 낚싯줄은 천하를 버림으로써 천하를 얻고자하는 무위자연을 향해 드리워졌다. 이렇게 두 사람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월척을 낚았다.
강태공은 문왕(文王)을 도와 주(周)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엄광은 도가적(道家的)으로 유유자적하게 살다 후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영생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렇듯 엄광은, 무균(無菌)스러운 사람인지 아닌 지는 알 수 없으나 삼공이 뭔 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거부하는 청맹과니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김홍도, <삼공불환도>, 1801년. 비단에 색, 133.7×418.4cm. 삼성 리움미술관
삼정승 벼슬보다 더 욕심나는 삶
화성(畵聖)이라 불리는 김홍도(金弘道·1745~?)가 대복고의 시 ‘낚시터(釣臺)’의 한 구절을 제목 삼아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를 그렸다. ‘삼공의 벼슬을 준다 해도 이 강산과 안 바꾸네(三公不換此江山)’에서 앞 글자만 취했다. 8폭 병풍 대작인 이 작품은 오른쪽 1폭이 일부 불에 타서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고, 각 폭이 연결되는 부분이 조금씩 잘려나가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옛이야기에서 화제(畵題)를 가져온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와 풍속화가 결합된 김홍도의 말년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림은 웅장한 산과 바위를 등지고 대각선으로 배치된 기와집 안의 풍경이 1폭에서 4폭까지 전개돼 있고, 5폭부터 8폭까지는 집 밖의 풍경이다.(병풍 그림이나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된다.) 집 안 풍경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조감도법(鳥瞰圖法)을 활용해 안채와 바깥채의 일상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그렸다. 닭과 개가 한가롭게 놀고 있는 안채는 여성의 공간임을 알 수 있도록 아낙네가 집 안에서 일하고 있다. 남성의 공간인 바깥채에서는 책을 읽고 거문고를 연주하고 자식을 가르치고 벗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돼 있다. 그 외 집안 곳곳에 학, 말, 사슴 등을 그려 넣었으며 시중 드는 아낙과 말먹이를 주는 하인 등의 모습도 잊지 않았다. 풍속화로 이름난 김홍도의 장기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한 선비가 누각에 앉아 새를 감상하는 건물 바깥으로는 기름진 밭과 돛단배가 떠 있는 강이 보인다. 특별한 사건이 눈에 띄지 않아 자칫 민틋해지기 쉬운 풍경인데 김홍도 특유의 구성력이 그림을 살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림 제목은 ‘삼공불환도’인데 엄광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낚시터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7폭 상단에 보이는 돛대 달린 강가 풍경이 엄광이 낚시한 엄뢰(嚴瀨)는 아닐 텐데 그는 어디로 숨은 걸까?
김홍도, <삼공불환도> 세부
어찌 제왕의 문에 드는 것을 부러워하리
단정한 필치로 그린 이 작품의 제발(題跋)을 쓴 홍의영(洪儀泳·1750~1815)에 의하면, ‘신유년(辛酉年) 겨울 12월에 임금의 병환인 수두가 나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중장씨(仲長氏)가 지은 낙지론(樂志論)을 화제로 썼는데 그 말이 그림에 부합되는 것을 골랐다’고 밝혔다. 중장씨는 후한(後漢) 때의 문인 중장통(仲張統·179~219)인데 그는 병을 핑계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전원에서 자신의 뜻을 즐기며 살았다. 그 뜻이 고스란히 담긴 내용이 ‘낙지론(樂志論·뜻대로 삶을 즐김)’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거처하는 곳에 좋은 논밭과 넓은 집이 있고, 산을 등지고 냇물이 곁에 흐르며 도랑과 못이 둘러 있으며, 대나무와 수목이 죽 펼쳐져 있고, 앞에는 타작마당과 채소밭이 있고 뒤에는 과수원이 있다. 배와 수레가 걷거나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대신하고, 심부름하는 이가 육체를 부리는 일에서 쉬게 해준다. 갖가지 진미로 부모를 봉양하고 아내나 자식들은 몸을 괴롭히는 수고 없이 편안하다. 좋은 벗들이 모여 머무르면 술과 안주를 차려서 즐기며, 기쁠 때나 좋은 날에는 새끼 양과 돼지로 제사를 지낸다. 밭이랑과 동산을 거닐고 숲에서 노닐며, 맑은 물에 몸을 씻고 시원한 바람을 좇으며, 헤엄치는 잉어를 낚고, 높이 나는 기러기를 주살로 잡는다.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 아래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좋은 집으로 돌아온다. 깊숙한 방에서 정신을 편안히 하고 노자의 현묘하고 허무한 도를 생각하며, 정화된 정기를 호흡하여 지인(至人·도인)과 같아지고자 한다. 통달한 사람 몇 명과 도를 논하고 경서를 강론하며, 하늘과 땅을 올려보고 내려보며 고금의 인물들을 종합해 평한다. ‘남풍(南風)’의 전아한 가락을 연주하고 ‘청상(淸商)’의 미묘한 곡도 연주한다. 온 세상을 초월하여 유유히 노닐며 놀고, 하늘과 땅 사이를 곁눈질하며 시대의 책임을 맡지 않고 기약된 목숨을 길이 보존한다. 이와 같이 하면 하늘을 넘어 우주 밖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어찌 제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부러워하리?’
이제야 그림이 이해된다. 김홍도는 대복고의 시 ‘낚시터’를 제목으로 삼고, 중장통이 지은 ‘낙지론’을 내용으로 해 그림을 완성했다. 지은이는 다르지만 대복고나 중장통이 지향한 세계는 한마디로 ‘전원에서의 행복한 삶’이었다. 그 삶은 제왕의 문에 들어가는 것도 부럽지 않은 열락의 삶이었다.
남과 차별되는 ‘퍼스트클래스’로서의 몇 가지 혜택을 누린다 하여 폴짝폴짝 뛰는 범인들의 좁은 속내로는 가늠조차 어려운 유장한 세계다
조정육의 『그림, 시에 빠지다』2, 사마광, <화외소거>
<약속을 어겨도 그 사람이니까 용서된다>
북송(北宋)때 얘기다. 낙양에 살고 있던 사마광(司馬光:1019~1086)은 자신의 별서(別墅:별장)에서 소옹(邵雍:1011-1077)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대정치가 사마광은 편년체 역사서《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한 인물로 북송 고전문화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한 명사였다. 아무나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옹도 사마광 못지않게 낙양에서 이름이 알려진 학자였지만 은자(隱者)였다. 명리에 목숨을 거는 시정잡배가 아닌 만큼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따라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소옹이 사마광을 만나기로 했다. 신분 고하를 떠나 둘의 마음이 통했음을 알 수 있다. 사마광은 즐거운 마음으로 소옹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술상 위의 안주가 다 식었다. 소옹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사마광이 싫었던 것일까? 헌데 바람맞은 사마광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짐작된 바가 있어 빙그레 웃으며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옅은 해 짙은 구름에 가렸다 다시 열리고(淡日濃雲合復開)
푸른 숭산 맑은 낙수 저 멀리 둘러 있네(碧嵩淸洛遠縈回)
숲 속 높은 누각에서 바라본 지 오래건만(林間高閣望已久)
꽃 밖에서 작은 수레는 아직도 오지 않네(花外小車猶未來)"
(사마광, <약소요부부지(約邵堯夫不至)>중에서)
소옹은 어디로 간 것일까?
작은 수레를 탄 위대한 영혼
소옹은 이곳에 있었다. 꽃구경 온 것이다. 버드나무 줄기가 바람에 낭창거리고, 벚꽃은 잎사귀 뒤로 꽃잎이 밀리는 늦봄이다. 꽃이 피면 마음이 들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 소옹이 야외로 나왔다. 소옹은 하인이 모는 수레에 앉아 냇가 건너편에 핀 봄꽃에 정신이 팔려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마디씩 한다.
“그러면 그렇지. 이렇게 화사한 봄날에 요부선생이 빠지면 안되지.”
시호(諡號)가 강절(康節)인 소옹의 자(字)는 요부(堯夫)이며, 호(號)는 안락선생(安樂先生)이었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낙양(洛陽)에 은거하며 강학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수학자였고 역학자였으며 철학자였다. 인품이 훌륭하여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사마광(司馬光)과 함께 북송을 대표하는 ‘육현(六賢)이라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작가들은 사마광의 싯귀절을 딴 ‘화외소거(花外小車)’와 자(字)를 넣은 ‘요부소거(堯夫小車)’라는 화제(畵題)로 그에 대한 존경심을 형상화하였다. ‘소거(小車)’는 소옹의 청빈하고 소박한 삶의 모습을 상징하는 단어다. 제목은 다르지만 두 가지 그림 형식 모두 봄가을이 되면 소옹이 동자가(여기서는 조금 나이 들어 보인다) 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 꽃구경 가는 모습을 공통적으로 그렸다. ‘소거’를 탄 채 꽃구경하는 ‘요부’의 모습은 소옹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는 비록 화려한 마차나 말 대신 작은 수레를 타고 다녔지만 선비들은 앞 다투어 그를 맞이했다. 동네 아이들과 하인들도 그의 방문을 기뻐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림 속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린 것은, 소옹이 그 동네에서 받는 평가를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중요한 것은 외양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소옹은 작은 수레를 타고 다녔지만 위대한 영혼이었다. 작가들이 경쟁적으로 소옹의 이야기를 화제로 그린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이 작용해서다. 그림을 보며 자신도 소옹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꿈꾸고 기어이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기 위해서다.
양기성(梁箕星:?-1755)이 그린 <요부소거(堯夫小車)>는 대화문화관 소장《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만고기관첩에 대해서는 ‘섬계회도 참조) 양기성은 18세기 전반 어진(御眞) 모사와 궁중의 갖가지 회사(繪事)를 담당한 최고의 자비대령화원이었다. 소옹과 관련된 그림을 남긴 작가는 양기성을 비롯하여 정선(鄭敾), 김홍도(金弘道), 유숙(劉淑), 장승업(張承業)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양기성은 다른 작가들이 ‘화외소거’라는 그림 제목을 쓴 것에 반해(장승업 제외) 유독 소옹의 자(字)를 따서 ‘요부소거’라는 제목을 고집했다. 이는《만고기관첩》에 실린 다른 작품들의 제목과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만고기관첩》에는 <이윤경신(伊尹耕莘)><부열축암(傅說築巖)><임포방학(林逋放鶴)>하는 식으로 그림 속 주인공의 이름이나 자호(字號)가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화외소거’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을 감상해보도록 하자.
꽃 밖에서 작은 수레 아직도 오지 않네
복숭아나무일까. 박태기나무일까. 아니면 명자나무나 꽃아그배나무일까. 정선의 작품 <화외소거>는 불타듯 붉게 피어있는 꽃나무 아래서 소옹이 수레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냇가 저편의 누각 아래에도 버드나무와 함께 꽃이 피어 있어 봄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전경의 흙둑과 원경의 산에는, 정선 그림의 특징인 피마준(披麻皴:마의 껍질을 벗겨서 풀어 놓은 듯 실 같이 그린 필선법)과 미점(米點)이 사용되었다. 화면은 불필요한 설명은 생략하고 전하고자 하는 내용만 간략하게 그린 까닭에 경물(景物) 사이의 간격이 넓어 시원함이 느껴진다. 공간 구성에 탁월한 화가의 능력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소옹의 시선은 옆에 서 있는 꽃나무나 누각 아래가 아니라 화면 밖의 세계를 향해 있다. 주인공의 얼굴을 그림감상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배려로 보인다. 아니면 꽃을 좋아하는 소옹이 그림감상자를 바라보게 한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 바로 옆의 꽃나무를 외면한 채 화면 밖을 쳐다보게 함으로써 그림 바깥의 세상이 온통 꽃세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소옹은 그림 감상자를 쳐다보고 그림 감상자는 그림을 쳐다본다. 그림 속 주인공이나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 모두 자기 곁에 정말 아름다운 꽃이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멀리 바라볼 필요 없이 고개 한 번 돌리면 자기가 딛고 있는 자리에 꽃이 피어 있다는 진리를 알려주기 위한 의도일 수도 있다. 꽃 옆에 있으면서 멀리 있는 꽃을 바라보는 인물을 그리기는 양기성이나 김홍도, 유숙과 장승업 모두 공통된 특징이다.
작가는 꽃과 인물을 함께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무심코 이런 구도로 그렸을지 모르지만 감상자는 작가가 생각지도 못한 의식세계까지 읽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래서 그림 읽기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 정선이 그림 제목을 <화외소거>라 붙인 것은 사마광의 시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화외소거(花外小車)’는 ‘꽃 밖의 작은 수레’라는 뜻인데 사마광이 바람맞고 시를 지은 이후 소옹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소거(小車)’는 사마광이 시어(詩語)로 차용하기 훨씬 전부터 소옹의 ‘닉네임’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소옹, 당신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군요
김홍도(金弘道:1745-?)가 그린 <화외소거>는, 정선과 양기성의 작품에 비해 가로 길이가 유난히 더 길다. 그 때문에 전경, 중경, 후경으로 이어지는 넓은 공간감을 살리기가 옹색하여 소옹의 모습을 근경에서 잡았다. 다음에 소개될 유숙의 작품도 역시 근경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품의 가로, 세로 길이에 따라 그림의 구도가 어떻게 변하는 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다.
계절은 이른 봄. 언덕 위의 나무와 버드나무가 잎사귀를 내민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다. 소옹의 ‘상춘(賞春)’이 너무 이른 것은 아닐까. 어디를 둘러봐도 꽃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찾으려고 했던 것은 꽃이 아니라 희망이 아니었을까. 메마른 혼령이 갑갑한 겨울을 견디는 동안 건조해지는 소리를 듣고 봄이라는 물기를 찾아 서둘러 나선 것은 아닐까. 성인군자라면 감정조차 거세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편견을 이런 식으로 에둘러 나무란 것은 아닐까. 위대한 사람도 가끔은 흔들린다. 그러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주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뭐, 이런 뜻의 격려와 위로를 담았는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중국고사도8첩병풍》의 한 폭이다. 60세 전후에 쓴 ‘단구(丹邱)’라는 관서가 적힌 것으로 볼 때 김홍도가 만년에 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8폭 모두 각 폭의 상단에 제목을 적고 관서와 도장을 찍었다. 그림은 소옹 이외에도, 엄광(嚴光의 이야기는(http://blog.daum.net/sixgardn/15770520), 임포(林逋), 사안(謝安), 왕희지(王羲之), 도연명(陶淵明)의 이야기가 그려졌는데 특별히 주자(朱子)는 두 개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들 모두 조선 선비들이 일반 상식처럼 알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 모두 풍류가들이었으며 자신이 걸어 가야 될 길을 벗어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조차 항상 평온하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김홍도의 작품을 통해 가까이에서 소옹을 만나보니 그런 속내도 보여준다. 역시 사람이나 그림은 가까이에서 깊이 볼 일이다.
아직도 그는 꽃을 찾아 다닐 것이다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도 잊은 채 소옹이 찾아간 곳은 산비탈이다. 매화꽃이 피어나는 봄날이다. 아직 덜 여문 햇살이 머뭇거리며 꽃 속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반해 작은 수레를 탄 소옹이 경사진 비탈을 지나간다. 동자는 가파른 비탈에서 주인이 탄 수레를 미느라 등이 굽을 지경이다. 대각선으로 배치된 언덕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습윤한 붓질로 처리하였다. 봄기운이 파고들어 헐거워지는 자연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려함이다. 언덕 위에 핀 홍매, 백매는 선이 두드러진 구륵법과 선을 완전히 배제한 몰골법을 섞어서 썼다. 늙은 고목과 새로 돋아난 어린 줄기를 대비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에 반해 인물과 수레는 꼼꼼한 선으로 분명하게 그렸다. 흙과 나무가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며 하루가 다르게 변신하는 것과 달리 관찰자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그다지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눈부시게 변신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마음속의 동요만이 있을 뿐이다. 유숙(劉淑:1827-1873)은 <화외소거>라는 제목으로 그린 그림 속의 인물과 배경을 사선으로 배치함으로써 소옹이 꽃을 찾아 계속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감상한 네 작품 중에서 가장 운동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조용한 듯 보이나 더 이상 조용함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봄의 꿈틀거림도 전해주고 싶었으리라.
신뢰가 쌓여야 이해받을 수 있다
다시 사마광이 앉아 있는 별장으로 돌아가 보자. 사마광은 소옹에게 바람을 맞았다. 그러나 자신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소옹에 대해 전혀 서운함 감정을 갖지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소옹이라는 사람의 인간 됨됨이를 신뢰하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소옹은 매사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었다. 소옹은 자평(自評)하기를, “천함도 가난함도 없고 부유함도 귀함도 없고 보냄도 맞이함도 없고 얽매임도 거리낌도 없다. 온 세상의 봄을 거두어 마음 속에 간직했다.”고 했다. 이 정도 된 사람이었기에 설령 약속을 어겼어도 이해받을 수 있었다.
소옹과 사마광의 얘기가 아무리 그럴 듯하게 들려도 소옹의 행위를 함부로 따라해서는 안된다. 소옹의 행동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생활 태도가 현자(賢者)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누가 곁에 있든 없든 자신이 정한 원칙에 따라 생활했다. 이런 일화가 전한다. 어느날 친구가 달밤에 소옹을 방문했는데 밤이 깊었어도 등잔불 아래에서 옷깃을 바르게 여미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희(朱熹)는 소옹을 흠모하여 “손으로는 달 속의 굴을 더듬고 발로는 하늘의 맨끝을 밟는”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평소에 신뢰를 받지 못한 사람이 중요한 사람과 약속해놓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될까. 약속을 헌신짝버리듯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옛사람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려면 먼저 본질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古文眞寶後集卷一 樂志論 仲長統
使居有良田廣宅 背山臨流 溝池環匝 竹木周布 場圃築前 果園樹後
舟車足以代步涉之難 使令足以息四體之役 養親有兼珍之膳 妻孥無苦身之勞 良朋萃止則陳酒肴以娛之
嘉時吉日則烹羔豚以奉之
躕躇畦苑 遊戱平林 濯淸水 追凉風 釣游鯉 弋高鴻 諷於舞雩之下 詠歸高堂之上
安神閨房 思老氏之玄虛 呼吸精和 求至人之彷彿 與達者數子 論道講書 俯仰二儀 錯綜人物
彈南風之雅操 發淸商之妙曲
逍遙一世之上 脾睨天地之間 不受當時之責 永保性命之期 如是則可以凌霄漢 出宇宙之外矣
豈羨夫入帝王之門哉
仲長公理樂志論
使居有良田美宅,背山臨流,溝池還市(匝),竹木 ?布,場圃築前, 果園樹後,
舟車足以代步涉之難,使令足以息四體之役。養親有兼珍之 膳,妻帑(奴)無苦身之勞。良朋萃止,則陳酒肴以娛之;嘉時吉日, 則亯羔豚以奉之。
歭躇畦苑,游戲平林。濯清水,追 ? 風,釣游鯉,弋 高鴻。風于舞雩之下,詠歸高堂之上。
安神閨房,思老氏之元虛;呼歙 精龢,求至人之仿佛。與達者數子,論道講書,錯綜人物,
彈南風之雅 操,發清商之眇(妙)曲,
消搖一世之上,俾倪(睥睨)天地之間。不受當時之責,永保性命之期。如是則可以夌(凌)霄漢,出宇宙之外矣 ,豈羨乎入帝王之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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