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양 미 술 자 료

[스크랩] 題高峰郡上亭 / 최경창(崔慶昌)

bizmoll 2013. 11. 11. 13:28

 

제고봉군상정(題高峰郡上亭)-최경창(崔慶昌)

고봉군 상정에서 짓다-최경창(崔慶昌)

古郡無城郭(고군무성곽) : 오래된 군이라 성벽도 없어지고

山齋有樹林(산재유수림) : 산 속 객관에 나무숲만 울창하다

蕭條人吏散(소조인리산) : 관원도 백성도 흩어져 쓸쓸하기만 한데

隔水搗寒砧(격수도한침) : 물 건너 저편에 차가운 다듬이 소리 들린다

 

山齋 산에 지은 서재. 또는 운치(韻致) 있게 산에 지은 집

蕭條 ①분위기()가 매우 쓸슬함 ②고요하고 조용함

搗 찧을 도.㉠찧다 .砧 다듬이돌 침.㉠다듬잇돌 모탕(도끼 받침)  

搗砧(도침) 도침(). (피륙이나 종이 따위를)다듬잇돌에 다듬어서 반드럽게 하는 일

 

 

최경창(崔慶昌)의 자는 가운(嘉運)이니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무진년(선조 1, 1568)에 진사

(進士)를 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강등(降等)되었다가 국자 직강(國子直講)을 제수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조선조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자 일세의 풍류아였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다.

선조때 종성부사(鍾城府史)를 재낸 그는 시인·문장가였을 뿐 아니라 글씨를 잘 쓰고 피리를 잘 불며

활쏘기에도 명수였던 당대의 멋쟁이였다.

관북(關北)에 있을 때 역시 문학을 이해하고 그 자신 뛰어난 시재를 지닌 여류시인(女流詩人-妓女)

홍랑(洪娘)과의 로맨스는 우리 국문학사에 한편의 아름다운 전설처럼 전해온다.

 


묏버들 가려꺽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선조 6년 북해평사(北海評事)로 경성(鏡城)에 있을 때 사랑을 맺었다가 이듬해 벼슬이 갈려

고죽(孤竹)이 서울로 돌아오게 될 때 영흥(永興)까지 배웅하고 함관진(咸關鎭)에 이르러

저문날 비내리는 속에 버들가지 한줄기를 꺽어 애인 고죽(孤竹)의 손에 건네며 홍랑(洪娘)이 읊었다.

이 시조는 우리시조 문학의 이채(異彩)이다.


고죽(孤竹)은 이 시를

절양류기여천리인(折楊柳寄與千里仁)

위아시향정전종(爲我試向庭前種)

일야신생엽(一夜新生葉)

초췌수미시첩신(憔悴愁眉是妾身)이라고 한문으로 옮겨 지금껏 전해오나

 

작고한 국문학자 양주동(梁柱東)박사는

"홍랑(洪娘)의 절절한 우리말 시조에 짝을이룰 화답 시조가 없었던 것이 일세문장의 이름에 아쉽다"고

고죽(孤竹)을 타박하는 것으로 홍랑(洪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도 했다.

 

근래 국문학자 김동욱(金東旭) 교수가 주창, 경기도(京畿道) 파주(坡州) 고죽(孤竹)의 묘소아래

그녀의 시비가 세워졌다.


고죽(孤竹)은 율곡(栗谷) 이이(李珥)·구봉(龜峰) 송익필(宋益弼) 등과 함께 당시〈8문장〉의 호칭을

들었는데 그중에도 당시(唐詩)의 대가로 옥봉(玉峰) 백광훈(伯光勳)·손곡(蓀谷) 이달(李達)과 함께 〈

삼당(三唐)〉으로 꼽혔다.


옛고을이라 성곽도 없고
산중재실이라 수풀 우거져
쓸쓸타 벼슬붙이 다 흩어지고
물건너 처량한 다듬이 소리…….


고군무성곽(古郡無城郭)

산재유수림(山齋有樹林)

소조인리산(蕭條人吏散)

격수도한침(隔水搗寒砧)


기발한 착상과 산뜻·유려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시작품은 ‘고죽집(孤竹集)‘으로 엮어져

조선조 중기의 우리 문학에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멋쟁이 시인답게 성품도 곧고 맑아 돌아간 뒤 숙종때 청백리(淸白吏)에 뽑혀 오르기도 했다.

 

 

변사(邊思)-최경창(崔慶昌)
변방의 심사-최경창(崔慶昌)

幼少離家音信稀(유소이가음신희) : 어려서 집 떠나 편지마저 드물고

秋來猶着戰時衣(추래유착전시의) : 가을에도 여전히 전시의 옷을 입었구나

城頭畵角吹霜急(성두화각취상급) : 성 위의 뿔피리 소리가 서리를 급히 불어와

一夜黃楡葉盡飛(일야황유엽진비) : 하룻밤에 누런 느럽나무 잎이 다 날가갔구나

 

 

 

冬日書懷(동일서회)-崔慶昌(최경창)
겨울에 마음을 적다-崔慶昌(최경창)

楊州冬不寒(양주동불한) : 양주의 겨울은 춥지가 않아

臘月見靑草(납월견청초) : 섣달에 푸른 풀을 보는구나.

家在洛陽西(가재락양서) : 집은 낙양의 서쪽에 있는데

未歸人欲老(미귀인욕로) : 사람은 늙는데 돌아가지 못한다.

 

 

 

 

짧은 인연 깊은 사랑에 목이 맨 애별가(哀別歌)

 

얼굴에 상처 내고 가슴에 묘막을 짓다.

 

비는 온다마는 님은 어니 못오는고

물은 간다마는 나는 어이 못 가는고

오거나 가거나 하면 이대도록 그리랴

<작자미상>


최경창은 파면 후 복권돼 종성부사로 간 지 1년 만에 한양으로 돌아오다
1583년(선조 16)
객관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 때 그의 나이 45세....

임니별 하든날 밤에 나는 어히 못 죽엇노

한강슈 깁흔 물에 풍덩실 빠지련만

지금에 사라 잇기는 임보랴고 그리헌다

<작자 미상>


최경창의 죽음이 알려지자 홍랑은 그의 무덤 옆에 묘막(墓幕)을 짓고 그 곱디 고운 얼굴을
스스로 훼손한 뒤 세수도 않고 머리도 안 빗으며 9년 동안을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며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평생을 두고 기껏 세 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사랑을 나눴을 뿐인데도 무려 9년간이나 시묘를
살았다 하니 그 사랑의 깊이가 그리고 그 애정의 지순함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사람이 죽어지면 어드러로 보내는고

뎌성도 이성갓치 님한데 보내는가

진실노 그러곳 할쟉시면 이제 죽어 가리라

<무명씨>


허벅지에 쑥뜸을 떠서 역병인 것처럼 속여 수절했던 기생은 있어도

기생의 생명인 얼굴에 스스로 상처를 내서 남자의 유혹을 막고 평생을 수절한 기생은

홍랑 말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으리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시고(詩稿)를 정리하여 등에 짊어지고 다녀서
겨우 병화(兵火)에서
피신했고

그 덕분에 최경창의 시가 온전하게 오늘날에 전해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홍랑은 임종할 때에 "나를 님 곁에 묻어 주오" 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완고한 해주 최씨 가문에서도 그녀의 정절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기리어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며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묘를

가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초에는 파주시 월롱면 영 태리에 있는 누대 선영하에 모시었으나  정부 시책상 증발되어
후손들의 주선으로 교하면 다율리로 고죽선생과 함께 1969년 6월 12일 천장되어 심산의 한떨기

유향이 고죽선생의 유덕을 문중사화로만 그치니하고 새로 비명하여 홍낭 시인도 함께 영세를

기하는 동시 숭문상덕(崇文尙德)의 조훈에 보답하기 위하여 문명을 다시 현창하였다 한다.

 

사라셔 동실(同室)하고 �어셔 동혈(同穴)하니

은정도 중커니와 예법을 찰일거시

금슬(琴瑟)을 고타시하여 상경여빈(相敬如賓)하여라

<작자미상>

 

홍랑은 비록 평생 동안 이처럼 최경창을 세 번 짧게 만났으나

영원을 함께 한 지고 지순한 사랑으로 최씨 문중과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켜

당시 풍류를 읊조리는 자리에서는 시를 논하고 가무에 화창하여 어울리면서도 화류계 여자라고

 배척하고 양반 적서의 차별이 심하여 겨우 첩실(妾室)로나 받아들이던 사회에서 기생 중에서

유일하게 양반의 문중에 받아들여진 여인이 되었다

 

고죽유고 산책 

 

고죽 최경창과 홍랑 두 사람 사이에 남겨진 후손은 누구일까?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를 소상히 적고 있는 <회은집>에 따르면 유일자(有一子),

즉 아들 한 명을 두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는 누구일까?

취재진의 추적결과 최경창의 서자 최즙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며 그 후손이 현재까지 핏줄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7년 임진왜란의 피난 길에서도 최경창이 남긴 고죽유고를 챙겨 등에 짊어지고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지켰던 홍랑에겐 최경창의 시문이 담긴 서책이

곧 바로 두 사람 사이에 남겨진 사랑의 열매였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이 되려나

  뒷 사람들이 고죽 유고를 펼칠 때 마다 홍랑의 지순한 사랑의 숨길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면 그 것으로 족하다고 할 수 있으려는지.  

 

 제 한 목숨 지키기에도 겨웠던 임진 난리통의 피난살이가 아닐지라도

글이 솥에 들어가느냐는 400여 년 전의 헐벗고 배고프던 시절

쌀 한 주먹이라도 더 이고 지는 대신 당장 허기를 면하는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서책보퉁이를

 무슨 보물단지처럼 껴안고 다녔다는 것은 육이오 피난길을 걸어 본 사람이 아닐지라도

참으로 대단한 정성이자 간수가 아니었을 것임을 쉽사리 깨닫는다.

 

최소한 죽기 살기로 고죽 유고를 지키겠다는 의지와 결심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고죽유고에 실렸던 최경창의 한시 몇 수를 훑어보고자 한다.

 

 

 

동일서회(冬日書懷)  

겨울에 마음을 적다

                 
양주동불한 (楊州冬不寒) 양주의 겨울은 춥지가 않아

 납월견청초 (臘月見靑草) 섣달에 푸른 풀을 보는구나.

가재락양서 (家在洛陽西) 집은 낙양의 서쪽에 있는데
미귀인욕로 (未歸人欲老) 사람은 늙는데 돌아가지 못한다

 

 

감우 (感遇)  

그냥 생각이 나서

 

인심여운우 (人心如雲雨) 사람의 마음은 비구름 같은 것

번복재수유 (飜覆在須臾) 잠깐 사이에도 이리저리 바뀌고

소사염흑색 (素絲染黑色) 흰 실에 검정 물들이면

안능복기초 (安能復其初) 어찌 처음 색으로 돌아가리

아아군비조 (啞啞群飛烏) 까악까악 까마귀 떼 날아

집아전중려 (集我田中廬) 우리농막에 모여들었는데

자웅경막변 (雌雄竟莫辨) 암수 구별할 수 없어

읍제공희허 (泣涕空欷歔) 주르륵 부질없이 흐르는 눈물

 

 

홀억서암승 (忽憶西菴僧) 

스님을 생각하며

 

추산인와병 (秋山人臥病)   산은 가을이요 사람은 병들어 누웠는데

낙엽복행경 (落葉覆行逕)   낙엽은 산사로 드는 길을 덮었구나.

홀억서암승 (忽憶西菴僧)   문득 서암의 스님을 생각하니

요문일모성 (遙聞日暮磬)   멀리서 저녁 종소리 들려오네

 

 

자봉은귀주 (自奉恩歸舟)   

봉은사에서 배 타고 돌아오며

귀인임발절매화(歸人臨發折梅花) 떠나기에 앞서 매화를 꺽어들고
보출사두일우과(步出沙頭日又斜) 백사장에 걸어나가자 해가 또 기우네
수전산이주거원(水轉山移舟去遠) 강물 돌고 산 움직이며 배가 멀어지니
만강이사기풍파(滿江離思起風波) 헤어지는 슬픔이 온 강에 가득 풍파를 일으키네



고봉산재 (高峰山齋) 

고봉군 산 재실에서 

고군무성곽 (古郡無城郭)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조차 없는데
산재유수림 (山齋有樹林) 산 서재엔 나무숲만 둘러 서 있네
재조인리산 (蕭條人吏散) 쓸쓸하게 아전 사람 흩어진 뒤에
격수도한침 (隔水搗寒砧) 물 저편서 들려오는 다음잇 소리



이 시는 고봉군(高峰郡)에 있는 산 속 서재에서 읊은 시로, 인적이 드문 산 속에서 외롭고 적막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 시적 주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영월루 (映月樓) 

 영월루에서

옥람추래로기청(玉檻秋來露氣淸) 고운 난간 가을 드니 이슬 기운 맑아지고
수정렴냉계화명(水晶簾冷桂花明) 수정발은 차가운데 계수 꽃만 환한데
란참일거은교단(鸞驂一去銀橋斷) 난새 타고 한 번 떠나 은하 다리 끊긴 뒤로
초한선랑백발생(怊悵仙郞白髮生) 서글퍼라 서방님은 흰머리만 생겨나네

 


이 시는 영월루에서 쓴 네 수 가운데 세 번째 작품으로, 시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금은 초속적이다.

 이 시는 작자가 영월루에 들려 영월루에서 지난 날 있었던 아름다운 인연을 그리워하며 쓴

시이다. 이 시의 화자는 고죽이지만 여성화되어 있고, 시적 주체는 선랑(仙郞)으로 설정되어

있어, 기생과의 이별 사연을 마치 선녀(仙女)와 선관(仙官)의 이별 사연으로 변용하여 읊고 있다.

 

 

패강루강제영(浿江樓舡題詠) 

대동강 놀이배에서 읊음

수안유유양류다(水岸悠悠楊柳多) 물가 언덕 한가롭게 버들숲들 참 많은데
소강요창채련가(小舡遙唱采蓮歌) 저 멀리 작은 배선 연밥 따는 노래 소리
홍의락진추풍기(紅衣落盡秋風起) 붉은 꽃잎 다 떨어져 가을 바람 불어오니
일모방주생백파(日暮芳洲生白波) 해질 무렵 물가에선 하얀 물결 일어나네



이 시는 정지상의 <송인(送人)>을 차운하여 지은 시인데,

<송인>은 송별시(送別詩)인데 비해 이 시는 채연곡(采蓮曲)이다.

고죽 이외에도 여러 사람이 <송인>을 차운하여 연밥 따는 노래를 읊고 있는데,

같은 제재이면서도 작자에 따라 달리 표상되고 있다.

고죽은 이 시에서 다른 사람들 시에 비해 자기 내면의 투영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기성진상좌승 (寄性眞上座僧)

성진의 상좌승에게 

모암기재백운간(茅庵寄在白雲間) 초가 암자 흰구름 속 붙여놓듯 있는 채로
장노서유구미환(長老西遊久未還) 노 스님은 수행 나가 오래 돌아 못오는데
황엽비시소우과(黃葉飛時疎雨過) 누런 잎들 휘날릴 때 가랑비 내리는 속
독고한성숙추산(獨敲寒磬宿秋山) 홀로 경쇠 울리면서 가을산서 자겠구나



이 시는 성진스님의 상좌승에게 준 시로, 상좌승의 생활을 상상을 통하여 그렸다.

상좌승이 거쳐하는 공간적 배경과 상좌승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작은 암자는 높은 산에 자리잡고 있어서 마치 구름 속에 얹혀있는 듯한데,

노스님께선 수행을 나가신 뒤 오래도록 돌아올줄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겠느냐는 것이다.

 

 

봉은사승축(奉恩寺僧軸)

봉은사 시 두루마리에

삼월광릉화만산 (三月廣陵花滿山) 삼월이라 광릉에는 꽃 펴 산에 가득한데
청강귀로백운간 (晴江歸路白雲間) 개인 강에 돌아갈 길 흰 구름 사이 일세
주중배지봉은사 (舟中背指奉恩寺) 배 속에서 돌아보며 가리키는 봉은사엔
촉귀수성승엄관 (蜀魄數聲僧掩關) 소쩍새 몇 마디 속 스님은 문 닫았겠네



이 시는 <봉은사승축(奉恩寺僧軸)>의 제목으로 된 4 수의 연작시 가운데 첫 번 째 시이다.

봉은사(奉恩寺)는 경기도 광주(廣州) 저도(楮島) 남쪽에 있던 절로, 현재는 행정구역이 서울로

바뀌었다.

 

 

궁원 (宮怨) 

궁안에서의 원망

앵도화락옥계공 (櫻桃花落玉階空) 앵도 꽃은 떨어지고 옥 계단은 비었는데
누습라건친천홍 (淚濕羅巾襯淺紅) 비단 수건 눈물 적셔 엷은 빛을 띠고 있네
수의숙상무희반 (愁倚繡床無戱伴) 수심으로 비단 침상 기대봐도 희롱할 짝 없으니
환회앵무출금롱 (喚回鸚鵡出金籠) 앵무새나 부르려고 금빛 새장 내어오네



이 시도 앞에서 살펴본 <閨思>와 같이 악부시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시적 주체가 여성이다.

이 시는 궁안에서 있을 수 있는 궁녀들의 한을 상상을 통해 그려낸 시인데, 차천로(車天輅)는

<악부신성(樂府新聲)>을 편찬하면서, 궁사(宮詞)규원(閨怨)새하곡(塞下曲)유선사(遊仙詞) 등 몇편은 제목이 매우 좋은데, 이러한 시들은 그 제목만 바라보고도 당시(唐詩)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無題, 무제>

군거경읍첩양주 (君居京邑妾楊州) 님께서는 서울 살고 첩은 양주 있으니까
일일사군상취루 (日日思君上翠樓) 날마다 님 생각에 푸른 다락 오릅니다
방초점다양류노 (芳草漸多楊柳老) 방초 점차 짙푸르고 양류조차 늘어지니
석양공견수서류 (夕陽空見水西流) 석양 무렵 부질없이 서쪽 흐르는 물만 보네



이 시의 시적 주체도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고, 전형적인 염정류의 시임을 알 수 있다.

만당(晩唐) 시인인 이상은(李商隱)이 <무제(無題)>란 제목으로 쓴 시가 네 수 있는데,

이러한 제목의 시들은 대체로 애정류(愛情類)의 시들이 많다.


이 시 속의 여인은 서울에 계신 님 생각에 날마다 푸른 다락에 올라본다.

그런데 기다리던 님은 오질 않고 방초는 짙어가고 버들가지도 늘어진 계절이 되었다.

그래서 석양 무렵에 님 계신 서울로 흘러드는 물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도 <궁원(宮怨)>이나 <규사(閨思)>처럼 시적 주체인 여성의 한(恨)을 상상을 통해 그려낸

 작품으로, 시어들이 화려하고 시 내면의식도 애상적이고 환몽적인 색조를 띠고 있다

 

 

기정원외계함 (寄鄭員外季涵) 

원외랑 정계함에게

남궁안곡춘주영(南宮按曲春晝永) 예조에서 연주하니 봄낮은 긴데
화지입란유불연(花枝入欄柳拂筵) 꽃가지는 난간 들고 버들가진 자릴 쓴다
요망홍운수기진(遙望紅雲隨妓陣) 멀리 보니 붉은 구름 기생떼를 따르더니
취루심처주신선(翠樓深處住神仙) 높은 다락 깊은 곳에 신선인양 앉았구려



이 시는 정철(鄭澈 1536-1593)에게 지어 준 시로 정철의 풍류스런 모습을 잘 담아내었다.

정철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애주가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그의 면모는 가사인

<관동별곡(關東別曲)>의 마지막 부분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술 때문에 세인들의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42세 때에는 스스로 술을 경계하는 계주문(戒酒

文)을 짓기도 하였다. 송강의 막하에서 종사관(從士官)으로 지냈던 신흠(申欽)은

<송강집(松江集) 서(序)>에서, “송강이 술잔을 잡고 술이 반쯤 취하여, 입으로 읊고 손으로 쓰면

장시(長詩) 단가(短歌)가 섞여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이 시에서도 정철의 이러한 모습을 잘 묘사하였다.

 

 

쾌재정차퇴재운 (快哉亭次退齋韻)

쾌재정에서 퇴재의 운을 빌어서

동남산혜대강래(東南山豁大江來) 동남쪽 산 탁 트인 곳 큰 강물은 흘러오고
일편성임고한개(一片城臨古塞開) 한 조각 성 옛 변방에 터를 잡아 서 있구나!
백운원미기자국(白雲遠迷箕子國) 흰구름은 저기 멀리 기자 나라 아물대고
홍운반요초왕대(紅雲半繞楚王臺) 붉은 구름 초 왕궁터 반 남짓을 둘렀는데
금구영리화등란(金
𨥁�影裏華燈亂) 미녀들의 그림자 속 꽃등불은 어지럽고
옥적성중화각최(玉笛聲中畵角催) 옥 피리 소리 속에 뿔피리도 재촉하니
명일별수환만리(明日別愁還萬里) 내일 이별 하고 나면 시름 되레 만릴텐데
양관삼첩진여배(陽關三疊盡餘杯) 양관곡을 세 번 불러 남은 잔을 다 비우세

 

이 시는 평양 북쪽에 있던 쾌재정(快哉亭)에서 기생들과 놀이하면서 지은 시이다.

 수련은 쾌재정의 위치를 읊었고, 함련은 현장의 시공간을 역사적 배경이 있는 시공간으로

변용하였다. 즉 평양은 그 옛날 기자가 나라를 세웠던 곳이기도 하고, 모란봉에 있는

기린굴(麒麟窟)에는 고구려 동명성왕에 얽힌 설화가 남아있기도 하다.

함련에서 초왕대(楚王臺)라고 표현한 것은 정녕 고구려 왕궁터를 연상하고 이 고구려 어느 왕의

사연을 상상하며 초애왕(楚襄王)에 빗대어 읊은 것이다.
경련은 쾌재정 현장에 기생들이 춤추는 모습과 옥피리
뿔피리 소리가 요란하게 연주되는 상황을 표현하였다. 미련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다가 내일 아침 작별하고 나면 수심은 되려 만리나 되기에, 이별가나 연이어 세 번 부르며 남은 잔이나 다 비우고 가자고 하였다.

 

 양관삼첩(陽關三疊)’은 <양관곡(陽關曲)>의 어느 한 줄을 세 번 연이어 부르는 것으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려 할 때 시를 읊던 관습이었다.

 

송승귀산 (送僧歸山) 

스님께서 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며

잠유경국고사귀(
遊京國苦思歸) 한양 잠깐 노닐어도 돌아갈 생각 괴로운데
세모하산독엄비(歲暮何山獨掩扉) 세모에는 어느 산서 홀로 사립 닫으실까?
명일춘생호해로(明日春生湖海路) 다음날에 봄기운이 시골길에 감돌적에
매화향우습정의(梅花香雨濕征衣) 매화 꽃 향기로운 비 가는 옷을 적시겠지

 

 

이 시는 산 속 절로 돌아가는 스님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로, 스님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

한양을 떠나간 뒤에 쓸쓸해 할 스님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한해가 저무는 세모에는 어느 산에서 홀로 사립문을 닫고 계시겠느냐는 것이다.


전구(轉句)와 결구(結句)에서는 다음날 홀로 떠나시는 스님께선 봄기운을 마음껏 느끼며 가시게

될 것인데 특히 매화(梅花) 꽃잎이 휘날리는 모습을 ‘향우(香雨)’라 하여 향기로운 비처럼 내린다고 하였으며 뒤에 ‘습장의(濕征衣)’라는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동생 허균이 그만치 정성을 쏟지 않았더라면 그의 요절한 누이  천재 여류시인 난설헌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어찌 전해 질 수 있었겠으며,

 홍랑이 7년 난리 중에 피난 길 그 죽음의 고단한 길을 헤매면서도 등에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귀한 열매인 아들을 업는 대신 고죽의 유고집을 울러매고 다녔다니....

 세상에 여늬 여인이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글을 자기 생명처럼 아껴 그 험한 피난길에도

이고지고 다니다가 후대에게 남겨지도록 해 줄 수 있을까?

 

고죽의 한시에 관련한 한역과 해설은 아래 두 분의 글을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참조 : 박을수(朴乙洙)님의 시조시화(時調詩話)
참조  : 변종현님의 고죽 (孤竹) 최경창 (崔慶昌) 한시의 (漢詩) 당풍적 (唐風的) 성격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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