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가(黃鳥歌)
- 琉璃王(유리왕)
翩翩黃鳥(편편황조) 펄펄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놀건마는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운 이 내 몸은
誰基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黃鳥 꾀꼬리.
翩翩 (편편)①가볍게 나부끼거나 훨훨 나는 모양 ②풍채가 풍류스럽고 좋은 모양 ③(건축물(建築物)이)
번듯하고 웅장(雄壯)하고 화려(華麗)한 모양 ④거들거리는 기색이 있는 모양.
翩 나부낄 편.㉠나부끼다 ㉡훌쩍날다 ㉢오락가락하다.
依 의지할 의.㉠의지하다 ㉡전과 같다 ㉢좇다 ㉣따르다 ㉤우거지다 ㉥머릿병풍 ㉦비유
연대: 고구려 유리왕 3년(B.C. 17)
작자: 유리왕
형태: 한역가, 서정시
주제: 실연의 비애
의의: 현존하는 최초의 서정시, 제천 의식 때 불렀던
남녀 사랑 노래의 한 토막 인 듯
출전: 삼국사기
갈래 : 4언 4구의 한역시가, 개인적 서정시
성격 : 우의적, 애상적
표현 : 자연물을 빌려 우의적으로 표현, 대조, 의태, 설의적 표현을 통해 화자의 외로운 심정을 노래,
한시의 전형적인 선경후정의 방식을 사용함
(선경후정:先景後情 - 한시 창작의 한 방법
으로 시의 앞부분에서 경치를, 뒷부분에서는 이에 대한 시적 화자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
는 구성방법으로 여기서 꾀꼬리가 정답게 놀고 있는 모습(선경)과 나의 외로움(후정)을
표현하고 있는 방법을 선경후정의 방법으로 볼 수가 있다.)
寓意 :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거나 풍자함. 또는 그런 의미
설의(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을 의문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상대편이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수사법.)
제재 : 꾀꼬리
주제 : 짝을 잃은 슬픔(외로움), 임을 잃은 슬픔
의의 :
① 현전하는 최고의 개인적 서정시
② 집단 가요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가는 단계의 가요
③ '공무도하가'와 함께 우리 나라 최고의 서정시로 추정된다.
출전 :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유리왕(?-A.D. 18): 고구려 2대 왕. 재위 B.C. 19-A.D. 18.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맏아들.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며, 비(妃)는 다물후(多勿候) 송 양(松讓)의 딸 송씨(松氏).
부여에서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와 태자가 됨.
주몽에 이어 즉위 했음.
가장 오랜 노래로서 고구려 제 2대 왕인 유리왕이 지었다.
재위 3년(B.C. 17)에 지은 것으로서, 우리 나라 사람의 작품으로는 문헌상 가장 오랜 것이다.
이 노래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권 13.고구려 본기 제1.유리왕 3년의 항목)
유리왕 3년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가 세상을 떠났다.
왕은 다시 두 여자를 계실로 맞았다.
그 하나는 골천 골에 사는 화희이고, 또 하나는 한 나라 사람의 딸인 치희였다.
이 두 여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은 할 수 없이 양곡에 동 서 두 궁전을 지어 따로 살게 하였다.
한 번은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나가 이레 동안을 돌아오지 않았더니, 그 사이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어
화희가 치희를 욕하되,
"너는 한 나라 비첩의 몸으로 어찌 이렇게 무례히 구느냐?"하니,
치희는 부끄럽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제 고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이 돌아와 그 소문을 듣고 곧 말을 달려 그 뒤를 좇았으니 치희는 노염을 풀지 않고 끝끝내 돌아가기를
거절하였다.
외롭고 슬쓸한 마음으로 돌아오던 왕은 고달픈 몸을 이끌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나뭇가지에 꾀고리들이 날고 있는 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황조가를 불렀다.
이 노래는 왕이 사랑하는 아내 치희를 잃고, 실연의 쓰라림을 꾀꼬리에 기탁하여 부른 노래이다.
기원전 17년 경에 이미 서정적인 노래가 지어졌다는 것은 문학사상 시가의 발달 과정에서 보아
주목할 만한 일이다.
[황조가에 대한 견해]
- 고구려 건국 이전에 이미 한자가 전래되어 유리왕이 애초부터 한자로 이 노래를 지었을 것이라는
유리왕의 한시 창작설을 기록 그대로 받아들이는 견해
- 개인에 의해 창작되어 성적(性的) 제의(祭儀)에서 가창되거나 민요로 널리 불리던 것이 영웅활동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에 따라 당시의 영웅적 인물이던 유리왕의 사적에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견해
- 당대에 널리 불린 민요를 유리왕이 단지 가창했을 뿐이라고 보는 견해
- 유리왕의 창작설을 받아들이되 애초에 우리말로 지은 것을 후대에 한역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
- 이 노래는 집단적·종교적인 특성을 지니는 원시종합예술 형태에서 점차 벗어나 개인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한국 최초의 서정시로 꼽힌다.
?~18(유리왕 37). 고구려 제2대 왕(BC 19~AD 18 재위). |
이름은 유리(類利)·유류(儒留)·누리(累利).
중국의 〈위서 魏書〉 고구려전에는 처음 이름이 여해(閭諧), 나중 이름이 여달(閭達)이라고
되어 있다. 동명왕 주몽(朱蒙)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왕비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주몽이 부여에서 예씨의 딸과 혼인하고 떠난 뒤 태어나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와서 태자로
책봉되었다
가 곧 왕위에 올랐다. BC 18년(유리왕 2) 송씨(松氏)를 비(妃)로 삼았다.
이듬해 왕비가 죽자 화희(禾姬)와 치희(稚姬)를 계비로 삼았는데, 서로 싸우고 치희가 떠나자 〈황조가 黃鳥歌〉를 지어 외로움을 노래했다.
BC 9년 선비족(鮮卑族)이 국경을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자, 토벌하여 항복을 받았다.
3년 서울을 졸본(卒本)에서 국내(國內)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지금의 洞溝山城子)을
쌓았다.
4년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았으나 해명이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자 자결하도록 했다.
12년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王莽)이 흉노(匈奴)를 정벌하는 데 고구려 군사가 참여하기를
요구하자 이에 불응하고 신의 변방을 공격했다.
그러자 왕망은 엄우(嚴尤)를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으며, 천시하는 뜻으로 고구려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불렀다.
13년 부여인이 침입하자 왕자 무휼(無恤)에게 나가 싸우게 하여 이겼다. 14년 무휼을 태자로
책봉했다.
18년 두곡이궁(豆谷離宮)에서 죽었다.
시호는 유리명왕(琉璃明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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