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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戀 詩 (연시) / 一休宗純

bizmoll 2013. 11. 11. 13:23

 

戀   詩 / 一休宗純

 

 

月 夜 思 君 長 不 忘  (월야사군장불망)                      

                      

夜 深 戀 募 臥 空 床  (야심연모와공상)

                      

夢 中 携 手 欲 相 語  (몽중휴수욕상거)

                      

被 駭 曉 鐘 又 斷 腸  (피해효정우단장)

                    

                           

달밤에 님을 그려 잊을 길 없고

                           

밤 깊어 연모하다 빈자리에 눕네

                           

꿈속에 손잡고 소곤대려도

                           

새벽종이 깨우니 슬픔이 새롭다.

 

 

 

携 이끌 휴.㉠이끌다 끌다 가지다 잇다 들다

駭 놀랄 해. 曉鐘 새벽에 치는 종 . : 曙鐘(서종) 

被 駭 曉 鐘 又 斷 腸  새벽 종소리에 놀라 또 애간장이 끓는구나.  

 

 

 

잇뀨우(一休宗純;1394-1481)선사

 

잇뀨우(一休宗純;1394-1481)선사
그는 일본 남북조 시대의 선승이다. 역사적 비운을 맞아 태어난 분이다.

교또를 중심으로 한 북조와 토시노(吉野;나라현 남부)를 중심으로 한 남조시대에 북조의 후소송천황

(後小松天皇)과 남조의 대표적 장군이자 북조의 적인 등원씨(藤原氏)사이에서 태어나

남북조의 분열을 염려하여 6세때 안국사(安國寺)에 출가했다.

출가 법명은 주건(周建),이름(諱)은 종순 (宗純) 또는 광운(狂雲) 잇뀨우는 호이다.


13세 때부터 동산모철(東山慕喆)과 보당사의 청유사인(淸臾師仁)에게 시 짓는 법과 불교를,

17세 때 서금사의 겸옹종위(謙翁宗爲) 문하에서 참선을 배웠다.

그런데 겸옹은 무인종인(無因宗因) 밑에서 수도하여 견성하였으나 인가 받기를 사양하여 겸옹이라는

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그렇기대문에 잇뀨우가 견지에 이르렀지만 인가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다가

잇뀨우가 21세 때 열반하자 잇뀨우는 망연 어머니에게 가서 지내다가 22세에 마음을 다잡아

상서암(祥瑞庵)의 화유종담(華臾宗曇)을 찾아갔는데 받아들여주지 않자 며칠동안 밖에서 물러나지 않고

 기다려 문하생이 되었다.


'동산30방'화두를 받아 정진하다가 25세 때 눈먼 비파법사(琵琶法師)가
<<평가이야기(平家物語)>> 가운데 기왕실총낙식(祇王失寵落飾)의 한대목을 읽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쳐 화유에게 점검 받고 잇뀨우라는 호를 받았다.
2년 뒤 나룻 배 안에서 선정에 잠겼다가 까마귀 소리를 듣고


"십이년전 아집분별에 어리석었던 마음
노여움과 오만이 이제 들어나도다
티끌을 벗어난 까마귀는 웃는다
나한의 깨달음을
밝게 빛나는 햇살 속에
아름다운 면목이 노래 부른다" 고 읊었다.


화유가 나한의 경지라고 나무라자 그는 물러나지 않고

"저는 선승의 경지를 �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화유는 참으로 선승의 경지라고 칭찬하고 인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화유의 인가증을 받지 않고 나와버려 종귤부인(宗橘夫人)에게 전하라 해 종귤부인은

원재상(源宰相)에게 건네서 그가 44세 때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덕사 개산조 대등국사 100주기 기일에 인가증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늙도록 화유를

지극히 시봉했다.


35세 때 화유가 입적하자 예를 치르고 운수하였고,생부인 후소천황과 칭광천황,후화원천황 3대의 귀의를 받았다.
39세 때는 항상 목검을 가지고 다녀 비판하자 "목검으로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요즘의 선가도

목검이나 쥐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 모습을 서자(瑞子)라는 제자가 '잇뀨우가 큰 칼을 휘두름(一休朱太刀像)'으로 그렸다.


47세 때 스승 가소오(화유) 13 주기를 맞아 10일간 법회하고 운수의 길을 떠나 49세에 양우산(讓羽山)에 초암을 짓고 살았는데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나중에는 시타사(尸陀寺)가 되었다.

60세에 대덕사가 불이 나 전소하여 그의 사형인 양유종이(養臾宗이)가 복원을 위해 인가증까지 남발하자

 매승(賣僧)이라고 비판하였다.
여러 지식인들이 그에게 귀의하였고 승려들도 그의 지도를 받았다.


다도의 대가인 무라다(村田珠光),능악(能樂)의 권위자인 금춘선죽(金春禪竹),정토진종의 연여상인

(蓮如上人) 등과 교유 하였다. 62세에 <<자계집(自戒集)>>을 편찬하고,66세 때 대덕사 주지 잠간,

77세 때 무로마찌 막부 멸망의 원인이 되는 응인의 난을 피해 보은암에서 피난하였다.

그 때 장님인 삼시녀(森侍女)와 만나 사랑하였다.

이 때 그의 사랑에 관한 정서를 적나라하게 노래한 시가집 <<화화록(下火錄)>>이 나왔는데 그 묘사가

 노골적이다.


"시들고 잎 떨어진 고목에 다시 봄을 맞으니
잎이 무성하고 꽃이 피니 옛날이 새롭구나
삼의 깊은 이 은혜를 내 만일 잊는다면
무량억겁동안 축생보를 받으리라."

 


"풍만한 몸매를 바라보다가
기어이 오르고야 마는구나
깊은 밤 구슬같은 침상위에
그윽한 꿈에 잠긴 그 얼굴
한 줄기 매화가지 아래
꽃봉오리는 벌어지고
흔들리는 수선화 향기는
허리를 감싸고 도는구나."

 


이러한 무애행은 선가에서는 이견이 잇었지만 오산문학인들에게는 대단한 추앙을 받았다.

81세 대 조정의 청으로 대덕사 주지를 다시 맡아 100여명의 선승이 모였고,87세 때 <<광운집(狂雲集)>>

을 펴고 88세에 입멸했다.

 


"수미산 남섬부주에서
누가 나의 선을 알리오
허당이 온다고 해도
반푼어치도 못되리라."

 


임종게에 나오는 허당(虛堂智愚;1185-1269)은 그가 존경하던 중국의 선승이다.
저서로 <<일휴화상어록>>,<<자계집>>,<<광운집>>,<<가명법어>>,<<해골>>,<<불귀군>>,

<<강구>>,<<산로>>,<<하화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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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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