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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절명시(絶命詩) / 매천(梅泉) 황현(黃玹)

bizmoll 2013. 11. 1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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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천(梅泉) 황현(黃玹)/ 절명시(絶命詩)

 

 

절명시(絶命詩)1

 

 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末然

 난리곤도백두년 기합연생각말연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금일진성무가내 휘휘풍촉조창천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구나.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도다.

 

 

 

 

 절명시(絶命詩)2

 

 妖氣掩翳帝星移 九闕沉沉晝漏遲

 요기엄예제성이 구궐침침주루지

 詔勅從今無復有 琳琅一紙淚千絲

 조칙종금무복유 림랑일지루천사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제성(帝星)이 옮겨지니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절명시(絶命詩)3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조수애명해악빈 근화세계이심륜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추등엄권회천고 난작인간식자인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절명시(絶命詩)4

 

 曾無支厦半椽功  只是成仁不是忠

 증무지하반연공  지시성인불시충

 止竟僅能追尹穀  當時愧不躡陳東

 지경근능추윤곡  당시괴불섭진동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당시의 진동(陣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1910년 황현(黃玹)이 지은 한시. 칠언절구 4수이다.

김택영(金澤榮)이 편한 ≪매천집 梅泉集≫(7권, 1911, 상해) 권5에 수록되어 전한다.

절명시〉는 작자 황현이 경술국치를 당하여 8월 7일(음력)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자결하면서 남긴 시이다.

 

 

 

 

 

◈ 어구 풀이

 

백두년(白頭年) : 머리가 세어진 나이

창천(蒼天) : 푸른 하늘. 창공

제성(帝星) : 별자리 이름(제왕의 상징)

구궐(九闕) : 구중궁궐(문이 겹겹이 달린 깊은 대궐)

침침(沈沈)하여 : 고즈넉하고 음침하여

주루(晝漏) : 낮 시간

조칙(詔勅) : 조서(어명을 적은 문서)

얽히는구나 : 적시는구나

근화(槿花) : 무궁화. 여기서 '槿花世界(근화세계)'란 우리 나라를 일컬음

침륜(沈淪) : 침몰. 몰락

식자인(識字人) : 글 아는 사람

인간 세상에 ~ 어렵기만 하구나 : 이런 세상에서 지식인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다.(직접 한일 투쟁에 나가지 못함을 한탄)

윤곡 : 중국 송나라 진사로, 몽골 침입 때 가족이 모두 죽음.

진동 : 중국 송나라 선비로,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상소를 하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죽음.

 


◈ 요점 정리

지은이 : 황현(黃玹)

형식 : 칠언절구 (七言絶句)의 우국시

제재 : 국권의 피탈(被奪)

성격 : 저항적, 우국적, 고백적

주제 : 국난에 대처하는 지식인의 고뇌 또는 일제의 국토 강점에 대한 저항 의지, 국권을 강탈당하는 위기에 처한 지식인의 고뇌 (제1수에서는 작가가 이미 순명(殉名)에 대한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말하였다. 제2수에서는 망국에 대한 슬픔을 나타냈으며, 제3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제4수는 충(忠)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한 한탄을 표현하였다.)

출전 : 매천집(梅天集. 1911)


◈ 이해와 감상 1

역사적 수난기에 대처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직접 역사를 이끄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저항적이기도 하고, 외세와 타협하여 민족을 저버리기도 한다. 구한말의 학자이자 시인인 작가는 농촌에서 생활하다가 국권을 강탈당하는 위기에 처하자 선비가 해야 할 도리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 고민과 고뇌를 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이 이루어지자, 그 소식을 들은 시인은 하룻밤 사이에 '절명시(絶命詩)' 네 편을 남기고 음독자살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어려운 역사 속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처신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역사를 이끄는 힘을 갖지 못한 지식인의 저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중시하면서도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선비의 한계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 이해와 감상 2

1910년 황현(黃玹)이 지은 한시. 칠언절구 4수이다.

김택영(金澤榮)이 편한 ≪매천집 梅泉集≫(7권, 1911, 상해) 권5에 수록되어 전한다.

절명시〉는 작자 황현이 경술국치를 당하여 8월 7일(음력)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자결하면서

남긴 시이다.

 

황현은 종사(宗社)가 망하는 날 국민이면 누구나 죽어야 옳다고 여겼다.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히 하지 못하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를 망쳐 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였다. 그는 인간 양심의 각성을 외치며 양지(良知)에 순명(殉名 : 명예를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해 온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한 사람으로서

순명하였다.

 

〈절명시〉 제 1수에서 작자는 이미 을사년부터 순명을 결심해왔음을 말한다., 창천을 비출 촛불에다 자신의 외가닥 양심을 비유하고 있다. “난리통에 어느새 머리만 허예졌누/ 그 몇 번 목숨을 버리렸건만 그러질 못했던 터/ 하지만 오늘은 정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末然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절명시〉 제 2수는 나라의 종언(終焉)을 고하는 양국조서(讓國詔書)이건만 옥음(玉音 : 임금의 음성)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하며 슬퍼하였다.

 

〈절명시〉 제 3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책을 드러내었다. “새 짐승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다 영락하다니/ 가을밤 등불 아래 곰곰 생각하니/ 이승에서 식자인 구실하기 정히 어렵네(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절명시〉 제 4수는 자신이 죽는 것은 충(忠)을 다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적을 탄핵하다가 참형 당한 진동(陳東)을 본받지 못하고 겨우 몽고병의 침입 때에 자분(自焚)하고 만 윤곡(尹穀)의 뒤나 따를 뿐이라고 통탄하였다. 〈절명시〉는 우국(憂國)의식이 짙은 높은 수준의 시이다. 

 

참고문헌≫ 梅泉 黃玹의 詩에 대하여(鄭良婉, 誠信漢文學 1, 성신여자대학교 한문교육과, 1988).

 

 


◈ 심화 자료

황현(黃玹 )


1855(철종 6)∼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시인·문장가.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라남도 광양 출신. 시묵(時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와서 문명이 높던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을 때 그가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시골 출신이라

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 놓았다.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회시(會試)·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고 관계에 뜻을 잃고 귀향하였다.

 

1888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나라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정책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계와 결별을 선언, 다시 귀향하였다.

 

전남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해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 짓기와 역사 연구·

경세학 공부에 열중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매천야록 梅泉野錄≫·≪오하기문 梧下記聞≫을 지어 경험하거나 견문한 바를 기록해 놓았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통분해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매천집≫·≪매천시집≫·≪매천야록≫·≪오하기문≫·≪동비기략 東匪紀略≫ 등이 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獨立運動之血史,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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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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