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 대못이 박히고 구멍이 뻥 뚫린 채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여자,
피눈물을 흘리며 맨발로 깨진 병 위에 올라서 있는 여자….
여자로 산다는 게 저토록 힘든 일이었던가. 그녀의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서야 마음속 생채기가 기억나 ‘아, 그토록 아팠지’ 고개 끄덕이게 된다. 애써 외면하고 살아왔던, 혹은 무감각하게 잊고 지냈던 오래 묵은 상처들이 떠올라 그제야 내 모습인 듯 반갑다.
일단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버려진 나뭇조각에서 여인의 삶을 깎아내는 작가 송진화.
마흔이 넘어 ‘늦깎이’ 작가로 데뷔하기까지 그녀는 오랫동안 평범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였다.
미대 졸업 후 바로 결혼해 아이를 낳고 14년 동안 입시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녀의 20~30대도 생활은 있되 그녀 자신은 없었다.
“어느 날 문득 뭔가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더라고요. 더 늦으면 안 되겠다 싶어 화실을 정리했어요.”
여자 나이 마흔, 다시 출발점에 섰다. 무엇보다, 자신을 찾고 싶었다.
조각이 내게로 왔다
작가로서 정체성을 찾은 마흔여섯의 송진화는 편안하다. 물론 그걸 찾기까지 오랜 인내의 시간이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처음 시작은 동양화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잡은 붓질은 말할 수 없이 굼떴고, 내 것처럼 손에 붙지가 않았다. 재료를 준비하고, 그림을 그리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게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는 건 조각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진짜 사랑을 만나면 이전의 사랑은 시시한 감정 놀음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조각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어느 날, 인사동의 한 갤러리를 거닐다가 조잡한 목각 인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비매품이라 구입할 수는 없고, 잘 봐두었다가 아쉬운 대로 직접 깎았는데, 나무의 겉껍질을 벗겨낸 연분홍 속살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란다. 그때부터였다.
닥치는 대로 굴러다니는 나무들을 그러모아 무조건 깎아대기 시작한 것은.
뇌에게 늦은 나이란 없다
작가의 삶을 오랜 시간 접어두었던 탓일까.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용암이 분출하듯 밑바닥에서부터 열정이 쏟아져 나왔다.
“늦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생활 전선에서 고군분투했던 시절이 없었다면 아마 이렇게 열정적으로 작업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헛된 시간은 없는 것 같아요.”
40대에 진입한 2002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버려진 나무토막을 깎아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
전공인 동양화가 아닌 조각으로 승부를 건 것은 다소 뜬금없는 일이었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다.
조각은 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아무 생각 없이 자르고 깎고 다듬는 단순 작업’이다. 일단 그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작업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나무들에게 말을 건다.
그들이 어떤 형상으로 드러나길 원하는지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인다. 나무와 주파수가 맞아 그 형상이 마음에 들어오면 망설임 없이 작업에 들어간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춰져서가 아니다. 치밀하게 계산하고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대신 그는 그저 눈대중으로 슥삭슥삭 형체를 잡아나간다. 큰 틀을 잡고 나면 작은 손짓과 발짓, 얼굴의 미세한 표정까지 어서어서 자기를 표현해달라고 아우성친다. 그쯤 되면 작업을 멈출 수가 없다.
이 녀석이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스스로 궁금하고 설레서 나무를 깎는 손길이 부산해진다. 평면 작업을 했던 사람이 입체 작업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는 나무 속에서 형상을 찾아내는 작업에 급속하게 빠져들었다. 한 번 시작하면 하루 종일 작업에 매달린다.
적당한 운동으로 몸을 관리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양분을 보충하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자기를 드러내달라고 아우성치는 나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서 깎고 다듬고 만들어가는 일에 몰입할 뿐이다.
작업이 재밌어서 시간을 잊는다. 외로움도 잊는다. 이 작품을 끝내고 바로 다음 작품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난다. 때로는 자신을 닮은, 그래서 세상 모든 여자들과 닮은 오브제들에 말을 걸기도 한다.
하늘로 고개 쳐들고 목청을 다 드러낸 채 처절하게 우는 ‘목구멍 깊숙이’를 깎을 때는 입 속의 톱밥을 털어내면서 “그래, 다 토해내자” 하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하나둘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는 스스로가 신이 나서 작업에 매달린다. 오늘처럼 인터뷰 일정이 잡히면 작업 시간이 줄어 애가 탄다. 그녀는 비로소 나이 먹는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뇌에 집중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오히려 가장 세계적인 것 아닐까?
나와 다르지 않은, 나를 보는 듯한 송진화의 작품은 2007년 1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호평을 받았다. 송진화는 남들이 원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솔직해지자고 다짐하면서 비로소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작고 소소한 것들, 일상적이고 섬세한 것들에 관심을 갖는 제 성향을 지적하는 사람들 때문에 주눅이 들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남들이 한계라고 지적하는 것들을 극복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내가 잘할 수 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꺼내보자고 다짐했어요.”
나이가 들면서 갖게 된 미덕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자기 아닌 것을 덕지덕지 덧칠하는 대신 온전히 자기인 것에 집중하게 되었고, 여리고 예민한 자신까지 보듬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를 인정하고 나자 비로소 자신감이 들었고, 강하지는 않지만 질긴 칡넝쿨 같은 생명력이 작품에 깃들기 시작했다.
송진화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특별한 이론이나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하지 않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길어 올린 익숙한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다. 그녀가 표현하는 일상은 무겁지도 않고, 진지하지도 않다. 아내와 엄마로 살아가면서 수없이 상처 입고 생채기 났던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조금은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때로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목 놓아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철버덕 주저앉고, 내 깜냥보다 훨씬 큰 짐을 지고 힘겹게 한 발 한 발 내디디던 우리네 일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아내와 엄마로 살아가면서 그 역할은 있으되 정작 자신의 욕구를 참고 사느라 고생하는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작가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을 테지만, 그 작업은 영락없이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진다. 지난 시절의 상처와 눈물은 실패와 좌절이 아닌 그 나름의 멋과 향기를 지닌 삶의 한 단면이라고 말한다. 삶은 가혹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실컷 운 다음 거뜬히 다시 일어서자고 말한다.
사랑밖엔 난 몰라’
나무, 43×45×15cm
손발 끝에 온 힘을 주고 빨간 하트를 꼭 끌어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생명력이 빛난다.
가운데 벌레 먹은 것처럼 구멍 뚫린 하트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나뭇조각을 살짝 다듬었을 뿐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4’
나무·혼합 재료, 38×32×12cm
때로 날카로운 칼날 위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것처럼 현기증이 난다.
삶이 가혹하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래도 한 번 더 용을 써본다. 지나고 나면 헛된 시간이란 없는 법이니까.
‘목구멍 깊숙이’
나무·혼합 재료,45×86×40cm
하늘을 향해 목젖까지 드러내고 꺼이꺼이 운다.
눈물은 유약한 인간이 만든 감정의 늪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 놓아 울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살아 있고, 그럭저럭 잘 견디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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