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음경( 陰莖 )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돼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를 삼도에 보내 배필을 구했다. 사자가 우염부 동로수 밑에 이르니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다. 사자는 그 마을 사람을 찾아보고 누가 눈 똥인가를 물었다. 한 소녀가 말하였다. “이것은 우염부 상공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여자는 키가 칠척오촌이나 된다.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웅궁으로 맞아 황후를 봉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하례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지철노왕] 중에서
민망하기 그지 없는 이 이야기는, 사실 사람됨의 크기를 성기의 크고 작음으로 나타낸 많은 옛 이야기 중의 하나일 뿐이다.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은 이보다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백성들이 낙동강을 왕래하는 것을 불편해 하자 자신의 남근을 양쪽 강 언덕에 걸쳐 놓아 다리로 삼았다고 한다. 허풍도 이 정도면 아무나 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식 꿈 해석에 따르면, 툭 튀어나온 모든 것은 남성의 성기이다. 옛 사람들의 상상력도 이와 크게 다르진 않아 무엇이든 튀어나온 것은 남근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지금까지도 그 흔적은 남아 있어 전국적으로 약 120여 개의 남근 신앙 유적이 남아 있다. 이중에는 선사시대의 암각화나 신라시대 토우에서처럼 남근을 드러낸 인물상들도 있지만, 보통은 신체의 다른 부위는 생략하고 성기 부분만 과장되게 표현한 남근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성기의 쓰임이 그러한지라, 이러한 상징물들은 대개 풍요와 득남을 기원하고 있었다. 특히 철(凸)자의 모양으로 문양화된 남근은 부귀를 뜻하기도 하였는데, 이 문양을 중첩시켜 이은 것은 부귀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나무를 실제 남근 크기로 다듬어 여신에게 바치는 민간 신앙도 있었다. 아직도 많은 해안지방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 풍습은 처녀로 죽은 여신에게 남근을 바쳐 혼령을 위로하고, 아울러 여신의 생산력으로 풍년과 풍어를 기원코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판소리 [변강쇠전]에서는 변강쇠의 남근을 가리켜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히도 생겼네” 라며 희롱하고 있다. 이 이상하고 맹랑한 것을 마을 입구에 세워놓고 풍요, 부귀를 기원한 것이 옛사람들의 넉넉함이었다. 또한 음난을 막으면서 동시에 남녀의 순조로운 결합을 돕는 이중의 슬기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풍요로움이 사라진 지금, 남근은 그저 크기만을 바라는 쓸쓸한 것이 되었다. 김수로왕의 남근 다리와 양영순의 「누들누드」에 나오는 남근 다리가 같지는 않은 것이다.
부귀문(富貴) 아자살(亞子) 부귀문 금동제투각식이. (金銅製透刻飾履). 삼국시대.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