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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박희숙의 미술관]
그 한순간 세상 멈추고 인생이 변했다
‘키스’
‘키스’, 클림트, 1907∼08년, 캔버스에 유채, 180×180,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세상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연인이 되는 과정에서 첫 번째 통과의례는 키스다.
연인은 키스로 말미암아 새로운 행복에 눈뜨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불확실하던 감정이 단 한 번의 키스로 사랑의 확신을 심어준다.
키스로 사랑을 확인하는 연인을 그린 작품이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키스’다. 연인은 절벽 위 꽃밭에서 열정적으로 키스를 한다. 연인이 입은 옷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검은색과 흰색의 직선이 그려진 남자 옷은 남성의 힘을, 적색 타원형 무늬의 여자 옷은 여성성을 강조한다. 옷의 모티프가 이렇게 대조적인 것은 남녀의 이질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남자가 두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감싼 것은 키스의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음을 의미하고, 눈을 지그시 감은 여자의 얼굴은 키스의 성적 황홀감을 드러낸다.
남자가 머리에 쓴 담쟁이 덩굴은 사티로스(그리스 신화에서 음탕한 장난을 즐기던 반인반수의 괴물)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성으로 통제가 안 되는 사랑을 의미한다. 남자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별은 세속적인 후광을 상징하며, 중간에 끊어진 꽃밭은 사랑의 위태로움을 암시한다.
전통적으로 금박은 종교화에서 성스러움을 나타내려고 사용하지만 클림트는 부와 남자의 매력을 극대화하려고 금박과 은박을 과도하게 사용했다. 연인이 포옹한 자세가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무릎을 꿇고 앉은 여자의 키가 지나치게 크다. 클림트는 화면 구성상 인체 비례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유럽과 비잔틴, 일본의 미술 요소를 절충해 장식을 극대화하면서 상징성을 높인 ‘키스’는 1906~09년에 빛을 발한 클림트 황금스타일의 정점에 있는 작품으로, 1908년 쿤스트샤우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됐다. 클림트는 금박을 과도하게 사용해 에로티시즘을 한층 강화했다.
연인이 가장 애달플 때가 헤어지는 순간이다. 헤어지는 아픔을 잊으려고 연인은 뜨겁게 키스를 나눈다. 이별의 키스는 약속의 키스다. 내일의 사랑을 기약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일의 사랑을 기약하는 이별의 키스를 그린 작품이 프란체스코 하이에스(1791∼1882)의 ‘작별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키스를 통해 연인의 절제된 감정을 표현한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중 로미오와 줄리엣이 첫날밤이자 마지막 밤을 보내고 헤어지는 장면을 묘사했다.
줄리엣과 애절한 이별의 키스를 나누는 로미오는 오른손이 밧줄이 묶인 기둥에 닿아 있으면서도 왼손으로는 줄리엣의 허리를 잡아 헤어지기 싫음을 표현한다. 기둥에 묶인 밧줄은 로미오가 타고 내려가는 도구다.
집안의 반대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줄리엣을 만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창문은 줄리엣의 집안이 귀족임을 상징하며, 열린 창문은 날이 밝아 아침이라는 의미다.
(왼쪽)‘작별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하이에스, 1833년, 캔버스에 유채, 112×88, 밀라노 개인 소장.
(오른쪽)‘스핑크스의 키스’, 슈투크, 1895년, 캔버스에 유채, 160×144, 부다페스트 국립미술관 소장.
두 사람 뒤로 보이는 침대에는 흰색 시트가 흐트러져 있으며 화면 오른쪽 기둥에는 수녀 복장을 한 늙은 여인이 있다. 시트의 흰색은 순결을 의미하고, 시트가 흐트러진 것은 두 사람이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음을 암시한다. 수녀 복장의 늙은 여인은 줄리엣의 유모로 두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
화면 중앙 벽장에 놓인 십자가는 두 사람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별의 엄숙한 분위기를 더한다. 하이에스의 작품은 인간 감성을 중요시한 낭만주의 회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키스가 꼭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키스는 유혹의 수단이 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감정을 속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 키스하는 여인을 그린 작품이 프란츠 폰 슈투크(1863∼1928)의 ‘스핑크스의 키스’다. 이 작품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장면을 표현했다.
바위에 누운 스핑크스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채 남자 몸을 감싸며 키스하고,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 열정적인 키스를 받아들인다. 스핑크스가 남자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남자가 여자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고, 남자가 지그시 눈을 감은 것은 성적 황홀감을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남자는 여자의 키스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19세기 말에는 남자를 여자의 유혹에 놀아나는 희생양으로 생각했다. 슈투크의 이 작품은 세기말 남자들이 여자에게 가졌던 공포심을 에로티시즘적으로 표현했다. 얼굴은 여자면서 사자의 몸을 한 스핑크스는 인어 사이렌과 마찬가지로 에로티시즘을 자극한다.
프란체스코 하이에스 (Francesco Hayez,1791~1882)
남녀가 살아서 천국에 가는 시간
‘섹스’
‘성교’, 실레, 1915년, 종이에 연필과 구아슈, 빈 레오폴드 박물관 소장.
살면서 천상의 기쁨을 누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섹스다. 하지만 동일한 스타일을 고집한다면 매일 밤 천국을 구경하긴 힘들다. 변강쇠도 매일 밤 같은 인물과 같은 포즈로 섹스를 했다면 최고의 정력남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과감한 스타일로 섹스하는 남녀를 그린 작품이 에곤 실레(1890∼1918)의 ‘성교’다. 남자는 무릎으로 여자의 엉덩이를 받치고, 여자는 남자의 허리를 꼭 안은 채 정면을 바라본다. 남자가 입은 붉은색 바지와 쌍을 이루는 조끼는 정장차림임을 나타내며 여자의 상체는 남자의 와이셔츠에 가려졌지만, 배꼽이 드러난 것에서 여자가 벌거벗었음을 암시한다. 여자의 머리 위에 있는 남자의 팔은 여자가 벽에 기댔음을 나타내며, 두 사람이 선 자세로 섹스하는 것을 강조한다.
작품 속 남자는 실레 자신이며, 여자는 그의 애인 노이첼이다. 실레는 노이첼과 동거하면서 섹스의 모든 것을 배웠다.
이 작품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두 사람이 정면을 바라보는 것은 섹스 광경을 다른 사람에게 들켰을 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동그랗게 뜬 두 사람의 눈은 죄의식보다 무안함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낸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스타일만 바꾼다고 기쁨을 얻는 것은 아니다. 하모니를 이뤄야 한다. 누워서 하든, 앉아서 하든, 서서 하든, 스타일에 상관없이 일방적이면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기쁨을 얻으려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섹스는 국지전이 아니다. 전방위 체제다. 천국에 갈 때 엘리베이터를 타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천천히 올라간다.
여자에게 서비스하는 남자를 그린 작품이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도라와 미노타우로스’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자신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려고 신화를 주제로 제작했다.
포세이돈이 미노스 왕에게 제물로 쓰라고 흰 황소를 보냈고, 미노스 왕이 나중에 돌려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자 분노한 포세이돈은 왕비 파시파이가 흰 황소와 사랑에 빠지도록 저주를 내린다. 포세이돈의 저주대로 흰 황소를 꾀어낸 파시파이는 얼굴과 꼬리는 황소이고 몸은 인간인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훗날 미노타우로스는 성적 욕구가 강한 남자를 상징한다.
(왼쪽)‘도라와 미노타우로스’, 피카소, 1936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오른쪽)‘가학 피학성 변태 성욕자들의 헌정’, 딕스, 1922년, 종이에 수채, 개인 소장.
신화를 주제로 성적 능력 과시
숲 속에서 미노타우로스가 여자의 음부에 얼굴을 대고 있다. 손으로 여자의 팔과 다리를 잡은 것은 남자에게 힘이 있음을 상징한다. 벌거벗은 여자의 벌어진 입과 감은 눈은 성적 황홀감을 나타내며 미노타우로스의 발기된 페니스는 사랑의 쟁취를 의미한다. 또한 미노타우로스의 뿔은 강한 남자임을 강조하며 흑색의 얼굴과 사타구니는 남자의 성욕을 암시한다.
피카소의 이 작품에서 미노타우로스는 피카소 자신이며 여자는 그의 네 번째 정부(情婦)인 도라 마르다. 피카소는 1926~36년 미노타우로스 작품 시리즈를 통해 마르에 대한 성적 욕구를 표현했다.
평생 한 스타일만 고집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매번 다른 스타일을 고집하는 사람도 섹스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섹스에 대한 탐닉이 지나치면 평범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섹스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을 그린 작품이 오토 딕스(1891~1969)의 ‘가학 피학성 변태 성욕자들의 헌정’이다. 검은색 부츠를 신은 여자는 코르셋 뒤로 채찍을 숨겼고, 허리에 권총을 찬 여자는 모피 코트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여자들 뒤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있으며 십자가 아래 탁자에는 피가 흐르고 바닥에는 늑대 가죽이 펼쳐져 있다. 널브러진 도구는 이곳이 고문실임을 나타낸다. 해골과 십자가는 희생자를 암시하면서 위협적인 분위기도 자아낸다.
딕스의 이 작품에서 채찍과 권총은 변태 성욕자를 의미하며, 해골과 늑대 가죽은 남자를 암시한다. 붉은색 의자 시트와 젊은 여자의 붉은색 스타킹은 가학적 섹스의 상징이다. 젊은 여자의 코르셋 위로 보이는 곧추선 유두는 변태 성욕으로 인한 성적 흥분을 나타낸다.
그녀는 누구를 위해 향수를 뿌리나
목욕하는 여인
‘한낮 햇살을 받은 나부’, 보나르, 1908년, 캔버스에 유채, 124×109,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
겨울바람이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면 사우나가 간절히 생각난다. 뜨끈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면 추위는 물론 쌓인 피로까지 말끔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시설이 좋은 찜질방이 많아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우나를 즐겨 찾는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의 ‘터키탕’은 대중목욕탕을 그린 작품이다. 젊은 시절부터 목욕하는 여자에게 흥미를 느낀 앵그르는 18세기 무렵 터키 주재 영국 대사 부인이 쓴 ‘터키탕 견문기’를 읽고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그렸다.
누드의 정물화로 불릴 만큼 많은 누드의 여인이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이 작품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를 가진 여인들이 목욕을 즐기는 모습을 담았다. 악기를 든 여인 오른쪽에서 어색할 만큼 관능적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이 앵그르의 두 번째 아내 델핀이다.
앵그르는 티치아노작품 ‘안드리안의 바커스 축제’에서 쾌락을 상징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그를 표현했다. 두 명의 여인이 서로의 가슴을 만지는 것은 이들이 동성애 관계라는 것을 암시한다. 몸종에게 머리 손질을 맡긴 여인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왼쪽 끝에 요염하게 서 있는 여인은 처음엔 그리지 않았으나 구도를 맞추려고 추가한 것이다. 화면 앞 도자기 주전자와 잔, 배경 부분의 큰 도자기, 그리고 여인들의 머리 장식 문양은 이국적인 것을 강조하려는 장치다.
앵그르는 이 작품에서 여성의 누드를 다양한 형식으로 다룬 그간의 경험을 집대성했다. 그는 에로틱한 내용을 더욱 고양하려고 여성의 신체를 왜곡해 묘사했다. ‘터키탕’은 그의 작품 중 드물게 구성 자체를 공상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이 작품을 어떤 귀족에게 주문받아 그렸는데, 노골적으로 표현한 그림 속 여성의 관능미 탓에 귀족이 작품 받기를 거절했다. 결국 관심을 보인 부유한 터키인이 이 그림을 사갔다.
피곤을 풀고자 찜질방을 찾지만 오히려 더 피로를 느낄 때가 있다. 아이들이 막무가내로 뛰어놀 때나 연인이 지나친 애정 행각을 벌일 때 그렇다. 개인 욕실에서 피로를 푸는 여인을 그린 작품이 로렌스 앨마 테디마(1836~1912)의 ‘테피다리움에서’다. 테피다리움이란 고대 로마시대 온욕실로, 열탕과 냉탕 사이에 있었다.
당시에는 테피다리움 소유를 부유함의 척도로 여겼는데 욕실이 세 개나 있는 집은 호화로운 주택이게 마련이다. 또한 목욕탕은 단순하게 씻는 장소가 아니라 사교와 쾌락을 제공하는 곳이었으며, 로마 부유층은 휴식과 사교의 장소인 목욕탕을 집에 반드시 갖춰야 했다.
여인이 왼손에 낙타 깃털로 만든 부채를, 오른손에 몸 긁개를 쥔 채 누워 있다. 몸 긁개와 낙타 깃털은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한 도구다. 여인 혼자 누운 것은 이곳이 테피다리움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곰 가죽 깔개는 바닥의 대리석이 뜨겁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곰 가죽을 깔고 편안하게 누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은 여인이 매춘부라는 것을 나타낸다. 당시 고급 매춘부들은 저택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이 작품을 그린 테디마는 고고학에 관심이 지대했다. 초기작은 폼페이시대를 재현한 것이 많았는데 후기로 가면서 아름다운 여성으로 주제를 바꿨다.
찜질방 앞 풍경 중 하나가 남자들이 여자들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남자들은 샤워와 동시에 목욕이 끝나지만 여자들은 목욕하는 시간보다 아름다움을 위해 얼굴과 몸에 화장품을 바르는 시간이 더 길다.
목욕을 마무리한 여인을 그린 작품이 피에르 보나르(1867~1947)의 ‘한낮 햇살을 받은 나부’다. 이 작품은 화려한 색채를 써 여인의 내밀한 모습을 표현했다. 한낮에 여인은 목욕을 마친 후 몸을 뒤로 젖힌 채 향수를 뿌리고 있다. 화면 왼쪽 화장대 거울 속에는 가슴에서 배에 이르는 누드가 비친다. 여인은 거울 속 자신과 대화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바닥에는 둥근 이동식 욕조가 놓여 있다. 창문 넘어 들어온 햇살이 붉은색 소파와 카펫에 패턴을 만들어 벌거벗은 몸의 곡선을 강조한다. 보나르는 빛의 효과에 관심이 많아 창문의 햇살, 벽지 등을 모자이크 모양으로 처리했으며 직물과 가구를 왜곡해 표현함으로써 장식적 효과를 얻고자 했다.
보나르가 그린 이 작품의 모델은 아내 마르트다. 마르트는 결벽증이 있어 오랜 시간 목욕하기를 좋아했는데, 그의 목욕하는 습관은 보나르의 예술적 감성을 자극했다. 이 작품을 비롯해 ‘목욕하는 나부’ ‘욕조 속의 나부’ 등 보나르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나부상은 아내가 없었다면 탄생치 못했을지도 모른다.
보나르는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부터 어두운 색조에서 벗어나 밝은 색조를 사용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이로써 보나르는 나비파[폴 고갱의 영향을 받은 젊은 반인상주의(反印象主義) 화가 그룹]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원)‘터키탕’, 앵그르, 1863년, 캔버스에 유채, 직경 198,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오른쪽)‘테피다리움에서’, 테디마, 1881년, 나무판에 유채, 24×33, 레이디 레버 아트 갤러리 소장.
*박희숙은 서양화가다. 동덕여대 미술학부,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인전을 9회 열었다. 저서로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클림트’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등이 있다.
/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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