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1452-1519)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
1481-82, Oil on panel, 246 x 243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인문학의 발전으로 중세와의 단절이 무리 없이 이루어졌고 예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인문학이 가능했던 것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세 시인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가 일찍이 고전에 대한 이해에 앞장섰고 인간의 지식 전반에 걸친 성찰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는 인문학의 발달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과학과 예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미술에 있어 르네상스는 과학의 정신을 가진 레오나르도와 순수예술론을 가진 미켈란젤로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적하자면 우선 레오나르도는 정신보다는 물질이 근본이라고 생각한 유물론자이며 미래가 아주 밝다고 생각한 낙천주의자이다. 이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이상주의자로 물질을 하찮게 여기고 물질에 앞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형상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정신만을 귀하게 여겼으므로 매우 진지하며 고독한 사람이었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했다. 두 사람의 이런 본질적 상이함은 자연히 작품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체를 통해 순수하고 영원한 영혼의 모습을 관람자가 볼 수 있기를 바란 데 반해 레오나르도는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인간이 사는 세계를 관람자에게 확인시켜주려고 했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주의자라면 미켈란젤로는 환영에 사로잡힌 현실도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레오나르도에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있었다. 그는 전통적 도상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지식과 믿음을 배척하고 논리적·분석적인 새로운 해석과 판단을 통해 과거의 오류에 대한 반성을 요구했다. <동방박사의 경배>91를 예로 들면 그는 전통적인 도상을 무시하고 야만 시대의 종말과 이성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분기점을 표현하려 했다. 제목이 성서적이고 성모자의 모습이 화면 중앙을 차지하여 종교화로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당시의 신학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품이다.
철학과 문학의 요람에서 교육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당시에도 난해한 단테의 『신곡』을 해설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했지만, 오늘의 지성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학문에 치우친 협소한 시각을 가졌다.
그는 일찍이 시각적 현상과 기교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면을 과시했지만 내용에서는 전통을 받아들였다. <로마 피에타>183를 예로 들면 대리석을 밀가루반죽 다루듯 쉽게 옷자락의 우미한 주름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표현했고, 아들을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신의 어머니이자 딸로서 품위를 지키는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청순하고 우아한 자태로 표현하는 놀라운 기교를 시위했지만 당시의 신학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Michelangelo (1475-1564) [피에타] Pietà
1499, Marble, height 174 cm, width at the base 195 cm
Basilica di San Pietro, Vatican
미켈란젤로는 인체와 영혼에만 집착할 뿐 그 외의 것들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레오나르도는 목욕탕의 구조와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복지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골고루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태를 알기 위해 인체해부를 했지만 레오나르도는 생리학적인 관점에서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알기 위해 해부하고 심근경색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을 밝혀냈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날의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탔다. 손수 악기를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그는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고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겼다. 그와 달리 중세적인 도덕관에 젖어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명성이 드높아 많은 돈을 벌었지만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에 빠지는 것을 죄라고 여겨 검소하게 생활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미켈란젤로는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했기에 일찍이 자신이 속했던 상류사회를 벗어났다. 그는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스스로 염세주의의 짐을 졌다. 그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 같았다.
두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레오나르도는 미래의 사람이고 미켈란젤로는 과거에 속한 사람이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개척했다. 또한 그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발명가로서 분주한 생을 살았다. 그는 인체를 기계에 비유해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의 사상에 심취해서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업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업에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는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늘 작품에 불만이 많았다.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독신으로 생을 마쳤고 동성연애자로 알려졌다.
동성애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폭넓게 이루어졌다. 발랄한 성격의 레오나르도는 동성애로 기소당한 적이 있고 주변에 잘생긴 젊은이들이 있었으며 그들과 여행하기를 좋아했다.
행동에 앞서 사고하는 기질의 미켈란젤로도 동성애자로 알려졌지만 확증할 단서가 될 만한 행동을 남기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의 삶은 닫혀 있었고 가문과 자신에 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레오나르도는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졌다. 이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편지와 시를 많이 남겼어도 그것들이 철학적인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구체적인 생활상은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스물세 살이나 되다보니 레오나르도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는 미켈란젤로가 아직 예술의 세계에 발을 내딛지 않았을 때였다. 피렌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피렌체에 돌아와 잠시 머문 적은 있지만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그곳에 뼈를 묻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와 로마에서 주로 활약했으므로 두 사람의 삶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겹쳐지는 때가 별로 없어 두 사람을 한 환경 안에 두고 책을 구성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자연히 이 책의 후반은 레오나르도의 사망 후 미켈란젤로의 남은 45년의 활동으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을 한 쌍으로 묶은 이유는 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르네상스라는 지평 위로 떠오른 별들이며, 이 두 별이 길을 내고 이탈리아 전역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환히 밝혔으므로 뒤이어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라는 또 다른 별들이 떠오를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높이를 재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이 두 거장이 공존하여 유럽 전역에 두 개의 산자락으로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독보적인 존재로서 한 사람만 존재한 것보다는 두 거인이 함께 존재한 것이 역사에는 유익하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양대 산맥이 펼쳐져 러시아 문학이 세계를 리드하는 구심점이 되었듯이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큰 산맥으로 자리 잡았다. 르네상스 운동은 이탈리아의 부흥에 그치지 않고 유럽 전역으로 이어졌고 두 사람은 서양미술의 기본 패러다임이 되어 5백 년을 존속했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몇 점의 작품만으로 르네상스를 논한다거나, 미켈란젤로의 우울하고 심각한 작품만으로는 미술의 재탄생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의 지식과 지혜를 경외하는 미켈란젤로의 진지함이 레오나르도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과학에 근거해서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려 한 레오나르도의 행위가 미켈란젤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준다.
근대가 요구한 것은 둘 모두였다. 두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물질문명의 발전만이 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성찰하고 부덕한 행동을 금하는 데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오늘날의 미술에도 이런 보완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하는 유물론적 경향에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사변적인 점이 결여되어 있고, 반면 지나치게 개념적인 경향에는 물질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점이 있다.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변화하고 있지만 르네상스 대가들의 완벽한 드로잉과 혼을 불어넣은 작품, 즉 볼 때마다 감동하고 삶의 규범이 되어주는 그런 작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미술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 데도 원인이 있지만 르네상스 시기와 같이 한 작품에 수십 년 동안 정성과 노력을 기울일 수 없는 창작의 환경에 문제가 있다.
문명이 급류를 타다 보니 사고와 표현 또한 수시로 변하게 되어 오랜 시간을 두고 작품을 제작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본질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상대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제작한 작품만 있고 관람자 또한 즉흥적으로 감상하게 된다. 따라서 르네상스 패러다임은 과거의 것이고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패러다임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여전히 갖고 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활약을 통해서 르네상스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