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명언과 일화
‘모네’
- “우리들은 작은 새들이 지저귀듯이 그림을 그린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빛과 그림자 사이의 인상을 재빠르게 포착해 화폭에 담았다.
‘피사로의 편지’
- 호텔에서 바라본 전망은 참으로 아름답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파리 사람들은 심지어 보기 싫다고까지 말하지만 나에게는 이 거리를 그리는 것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일이다. 이곳은 근대화의 숨결로 가득 차 있다.
- 피사로가 묵던 루브르 호텔의 2층 방은 그 호텔 최고의 방이 되었고, 벽에 <테아트르 프랑세즈 광장>과 <피사로의 초상화>의 복사본이 벽에 걸려 있다. 주로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으며 하룻밤 숙박료는 5,000프랑 정도로 일본 엔화로 환산하면 12~13만 엔정도이다.
‘르누아르’
- 르누아르는 쉬잔 발라동과 사랑하는 관계로 그녀를 모델로 하여 <도시의 춤>과 <전원의 춤>을 그렸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의 질투로 <전원의 춤>의 여성을 부인의 얼굴로 바꿨다.
- 레스토랑 “풀네즈”
‘알퐁시누 풀네즈’는 파리 서쪽, 센 강가에 가늘고 길게 떠 있는 샤토 섬의 레스토랑 ‘풀네즈’의 주인집 딸로 르누아르 그림의 모델이 되곤 했다. <알퐁시누 풀레즈, 1879년작> 센 강의 오염이 심해져 강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점차 사라져서 레스토랑도 문을 닫았다. 그런데 1979년 샤토 시가 이 건물을 매입해서 역사 건조물로 지정하고 개조 공사를 새롭게 하여 레스토랑이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 한 일본인이 <물랭 드 라 갈레트>를 한 일본인이 119억엔에 매입하였다.
‘밀레’
- <만종>은 프랑스어로 ‘앙젤뤼스’, 천사가 성모마리아에게 “은혜로운 성총(聖寵)을 받은 마리아‘로 동정녀의 임신을 고한 축사를 의미한다. 이 축사가 기도가 되어 카톨릭 교회에서 시간이 되어 종을 울리면 신자들이 경건한 기도를 올린다. 몇몇 지방에 아직까지도 이러한 풍습이 남아 있다. 밀레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밭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할머니가 하던 일을 멈추고 죽은 이들을 위해 삼종기도를 올렸던 것을 회상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밀레가 특별히 신앙심이 깊었던 것은 아니고 어렸을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렸다.
‘베르트 모리조’
- 정부 고위관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미술을 공부하였고, 루브르에서 일하던 중 마네를 만나 종종 마네의 모델이 되어주곤 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마네의 동생인 외젠과 결혼했다. 54년의 생을 다할 때까지 평온하고 행복한 여자의 삶을 살았다. 유화, 수채화, 파스텔화 등 가정생활의 소박한 모습들을 담고 있다.
‘드가’
- 파리에서 태어난 드가의 선조는 프랑스 귀족 출신이었다. 드가는 파리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화가가 되려고 결심한 뒤 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만 학교에 다녔을 뿐 대부분의 시기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21살 때 드가는 친구의 아버지에게 이끌려 평소에 흠모해 왔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를 만나러 갔다.
이때 앵그르는 “선을 그어라. 많은 선을 그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실물을 보고 그려도 좋고, 기억으로 그려도 좋다.” 이 말을 드가는 평생 잊지 않았다. 앵그르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드가는 일생 동안 수백 점에 이르는 데생을 그렸다.
- 이탈리아 각지를 방문하며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에 매료되어 3년 동안이나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귀국 후 이탈리아에서 배운 역사화와 초상화에 주력해 작품을 그렸지만 마네를 만나 ‘카페 게르부아’의 모임에 나가게 되면서 주변의 실생활에 관심을 가짐. 마을의 서민적인 테마, 예를 들어 카페의 한 장면이나 세탁소에서 다림질 하는 여인들의 일상적인 동작, 오페라 극장에서 발레하는 무희나 경마장의 기수 등 인물의 미묘한 움직임을 쫓으면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동작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함.
-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한 사진기를 사용해서 움직임이 격렬한 경마장을 그리는데 사용하였다.
‘쇠라’
- 완벽주의자.
-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함.
- 색채학 연구에 몰두해 과학적으로 색채를 이해하려 했던 쇠라의 미술 이론은 당시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모네’
- 첫째 부인 카미유가 두 아들을 낳은 후 투병하다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모네는 아리스와 10년간 동거한 뒤 52세 때 재혼하였다.
- ‘루앙 성당’의 연작을 그리고 있던 시절, 두 번째 부인 아리스에게 쓴 1892년 4월 3일의 편지 “나는 매일 새로운 것을 그리고 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잘해 나가고 있어요. 며칠 내내 좋은 날씨가 계속되면 더 많이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프고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도 있어요. 밤마다 거대한 절이 내 위로 무너져내리는 악몽을 꾸는데 그것이 청색과, 분홍, 황색으로 보였어요.”
‘세잔’
- 1906년 10월 폭풍이 몰아치던 어느 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졸도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 “자연은 원주, 구, 삼각형에 의해 성립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원근법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했다.
-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에 영향을 주었다.
- <크루브루 강변의 물방앗간> 1879년, 세잔이 고전주의 그림에서 탈피해 밝은 인상주의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 방앗간은 오래도록 방치되어 소멸될 운명이었는데 최근에 퐁투아즈 시가 이곳을 재건하기로 결정하여 물방앗간을 수리하고 주변의 환경을 정비하는 한편, 부근 공터를 매입해 “아틀리에 세잔”이라는 예술촌을 건설하여 1992년 봄에 새로이 문을 열었다. 화가, 조각가, 만화가 등 이삼십대의 예술가 14인이 집세를 내고 입주해 작업에 힘쓰고 있다.
- 세잔의 <목맨 사람의 집>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브루타뉴 지방의 사투리에서 온 것이다.
‘로트레크’
- 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난 로트레크는 소년기에 당한 두 번의 골절로 성장이 멈추었다. 신장 152센티미터, 두툼한 입술, 커다란 코에 턱하니 안경을 쓰고 있는 외모에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면서 춤추는 듯한 자세로 걸었다.
- 노래도 잘 부르고 요리도 잘했으며 짓궂게 장난치는 것도 아주 좋아했다. 몽마르트에 1881년 ‘검은 고양이’라 불리는 카바레가 문을 열면서 화려한 번화가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889년 뮤직홀 ‘물랭루즈’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로트레크의 쾌락이 넘치는 밤 생활이 시작되었다. 로트레크는 물랭루즈에 매일 밤이 멀다 하고 찾아와 인물들을 그렸고, 화려한 밤거리의 인물화에 인간의 허무함, 슬픔, 단순함을 표현하였다.
- 술에 절어 살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버린 로트레크는 물랭루즈의 창부의 집에 기거하면서 이곳에서 창부가 보여준 소박하지만 따뜻한 애정에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그림에 몰두한다. 그런던 1899년, 발작을 일으킨 로트레크는 정신착란을 겪으며 영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시슬레’
- 시슬레는 평생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평생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다.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00년의 경매에서 화가가 생전에 180프랑에 팔았던 <폴 마를리의 홍수, 1876, 그해 일어난 대홍수를 테마로 하고 있다>를 카몽드 백작이 4만 5,000프랑에 낙찰했다. 시슬레는 평생토록 풍경화만 그렸다.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닌 가혹한 삶 때문에 인간보다 자연에게서 평온함을 구했던 것이리라 여겨진다.
‘클래스 올덴버그’
- 1961년에 발표한 새로운 예술에 대한 선언문 “미술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일 말고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는, 정치적이고 에로틱하며 신비로운 예술을 추구한다” 이는 예술이 패스트푸드와 네온사인에서 의복과 도시의 부패상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고 형태를 취할 수 있음을 제안함으로써, 예술을 삶의 복합성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외침이었다.
‘리처드 해밀턴’
- 1961년에 쓴 에세이 <최상의 예술을 위해서 팝을 시도해 보라(For the Finest Art Try Pop)>에서 “20세기에 도시생활을 하는 예술가는 대중문화의 소비자이며 잠재적으로는 대중문화에 대한 기여자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팝아트,데이비드 매카시/조은영, 열화당, 2003, p23
‘앤디 워홀’
- 앤디 워홀의 철학 -A에서 B까지, 그리고 거꾸로 다시(The Philosphy of Andy Warhol-From A to B Again)>에서 쾌활하게 고백했다. “사업을 잘하는 것은 예술의 가장 매혹적인 측면이다. …돈을 버는 것이 예술이며, 일하는 것이 예술이다. 좋은 사업은 최상의 예술이다.” 이 놀라운 고백을 한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제조소)라고 불렀다. 팝아트,데이비드 매카시/조은영, 열화당, 2003, p26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 1990년 인디펜던트 그룹의 회고전을 위해 출판된 도록에 “미국 잡지는 매혹적인 사회의 카탈로그를 대변했다. 그곳은 배 통조림을 파는 행사가 총천연색 꿈으로 변하고, 테이트 갤러리나 왕립 아카데미의 정통적인 선택보다 더 솜씨 좋고 만족스러워 보이는 예술 형태를 형성하기 위해 관능과 정력이 융합되는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사회였다”팝아트,데이비드 매카시/조은영, 열화당, 2003, p30
<인왕제색도> 관련 기사
조선일보 1997.8.5.월자에 우리문화유산기행28회 "인왕제색도"를 연세대 교수 최정호씨가 언급하여 우리미술 '한국화'에 대한 무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 내용을 대략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듣는 공부인 것처럼 미술은 보는 공부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또는 그림을 감상하면서 우리는 보는 공부를 한다. 그러나 사과를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과를 먹는 '음식'으로, 과수원에서 거둬들이는 '수확'으로, 또는 사고파는 '상품'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을까? 미술은 사물을, 자연을, 인간을 보는 우리 눈의 공부이다. 훌륭한 미술작품은 우리가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준다. 인간적인 욕망, 사회적인 통념, 역사적인 이유 등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사물의 존재를 볼 수 있도록 해준다.
‘훌륭한 예술가란 모든 사람과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들추어 보여 준다’란 말이 가치를 가진다면 겸재 정선(1676~1759)은 산의 나라 한국,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산에서 해가 뜨고 산으로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사는 '산의 나라'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 가운데서, 처음으로 이 땅의 산을 그린 화가로 훌륭한 예술가 중의 한사람이 된다. 한국 산수의 참된 모습, 동국(東國)의 진경을 주제로 그린 진경산수의 거장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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