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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재시인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

bizmoll 2013. 11. 11. 13:43
 
 
천재시인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 1807~1863?)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 쉰일곱이라는 조금은 아쉬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는,
호는 난고(蘭皐)이며 허구한 날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金笠)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살아생전 부귀영화도 마다하고 조상에 대한 죄책감과 운명에 대한 회의로 좌절하며
뜬구름 인생을 살다 갔다. 그리고  죽어서는 외딴 강원도 영월 땅에 묻혀있다.
 
 
김삿갓의 삶..

1807~1863.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세도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선천 방어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반군에 투항함으로써 그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되어 멸족을 우려한 부친이 형과 함께 그를 곡산으로 보내 노비의 집에서 숨어 산다.
여덟 살에 조정의 사면으로 집으로 돌아오나 그 가족들이 온전히 터 잡고 살 곳이 있겠는가.
여주, 가평, 평창을 거쳐 영월에 정착을 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보려는 모친의 후원에 힘입어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글공부에 힘 쓴다. 나이 스물, 결혼한 그 해, 운명을 다시 바뀌게한 시골에서의 백일장을 보게 된다.
 
과제는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을 찬양하고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한탄하라"
그는 조부를 규탄하는 명문으로 장원에 급제하나 할아버지를 팔아 입신양명하려고 한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껴
 글공부를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은둔 생활을 한다.
그러나 신분 상승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 가지만 부패한 과거 제도에 실망을
하고 어느 세도가의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던 중 그의 출신 성분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제도권 진입을 포기하고 스물 다섯에 기나긴 방랑의 길에 들어선다.
 
방랑 초기에는 지방 토호나 사대부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나름대로의 품위를 유지하나
세상 인심이 한결 같을 수는 없는 것.
 그는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고 서민들 속에 섞여서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 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일생을 보낸다.
그의 나이 쉰 일곱, 전라도 땅에서 눈을 감음으로써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일생을 마감하고 아들 익균이 유해를
 영월로 옮겨 장사 지낸다.
영월 와석리에 그의 생가터와 묘지가 있다.



 그는 김삿갓이고 싶었겠는가?

조선 순조 11년(1811년) 신미년에 홍경래(1780-1812)는, 서북인(西北人)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에 대한 반감과, 탐관오리들의 행악에 분개가 폭발하여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교묘한 수단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민심의 불평 불만을 잘 선동해서 조직한 그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가산, 박천, 곽산, 태천, 정주 등지를 파죽지세로 휩쓸어 버리고 군사적 요새지인 선천으로
쳐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가산 군수 정시(鄭蓍)는 일개 문관의 신분이었지만 최후까지 싸워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편 김병연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관직이 높은 선천 방어사였다.
그는 군비가 부족하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음을 낙심하다가, 날씨가 추워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고 있던 중에 습격한 반란군에게 잡혀서 항복을 하게 된다.
김익순에게는 물론 그 가문에도 큰 치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국법의 심판은 냉혹하여서,
이듬해 2월에 반란이 평정 되자 김익순은 3월 9일에 사형을 당하였다.
 
그 난리 때 형 병하(炳夏)는 여덟 살, 병연은 여섯 살, 아우 병호(炳湖)는 젖먹이였다.
마침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從僕)에 김성수(金聖秀)라는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황해도 곡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병하, 병연 형제를 피신시키고 글공부도 시켜 주었다.
그 뒤에 조정의 벌은 김익순 한 사람에게만 한하고, 두려워하던 멸족(滅族)에는 이르지 않고 폐족에
그쳤으므로 병하, 병연 형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김병연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여주, 가평으로 이사하는 등 폐족의 고단한 삶을 살다가 부친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홀어머니 함평 이씨가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로 이주하였다.
이무렵, 조정으로부터 김익순 일가에 대한 역적이란 죄명을 사면 받고, 그 후손의 관직등용도 허용돠었지만, 스스로를 몰락한 양반의 후손 쯤으로 알고 살아온 김병연은, 갈고 딲아온 학문의 뜻을 펼치고자
은인 자중하던차.....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6년(순조 32년),
당시의 인재 등용문의 하나인 백일장에 나가게되었다.
강원도 영월읍내의 동헌 뜰에서 치러진 백일장 대회 시제(詩題)는,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 정가산에 대한 충절사를 논하고, 적에게 항복한 김익순에 대한 죄를 탄하라)이었다.
시상을 가다듬어 정의감에 불타는 그의 젊은 피는, 충절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고,
김익순의 불충의 죄에 대하여는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 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였다.
 
김병연이 이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장원을 하였음을 알리는 자리에서,
어머니는 그 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듣게 되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명문거족이었다.
너는 안동 김씨의 후손이다.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壯洞)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세도가 당당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들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는데 너는 바로 장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네가 오늘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세워 욕을 퍼부은, 익자(益字) 순자(淳字)를 쓰셨던 선천 방어사는
네 할아버지시다.
너의 할아버지는 사형을 당하셨고 너희들에게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사때 신주를
모시기는 커녕,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처사(處士)로 써서 너희들을 속여 왔다..."
 
김병연은 너무나 기막힌 사실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반란군의 괴수 홍경래에게 비겁하게 항복한 김익순이 나의 할아버지라니.....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이 글로써 만천하에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자, 불효손이라 고 스스로
 단죄하고, 하늘을 머리에 이고는 살 수 없는 자신이라,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린 후,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뛰어난 학식임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모든 인연에서 스스로 단절하여 전국을 떠도는 객으로, 세상을 한탄과 해학으로 쓸쓸한 운명을 살다간
그의 백일장 장원시문은 아래와 같다.
 
 
* 詩題 -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역적 김익순의  죄상을 통탄하라."
 
 
 
一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일이세신김익순 정공불과경대부

將軍桃李?西落 烈士功名圖末高
장군도리농서락 열사공명도말고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溪
시인도차역강개 무검비가추수계
 
宣川自古大將邑 比諸嘉山先守義
선천자고대장읍 비저가산선수의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청조공작일왕신 사지영위이심자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승평일월세신미 풍우서관하변유
 
尊周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葛亮
존주숙비노중련 보한인다제갈량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동조구신정충신 저장풍진입절사

嘉陵老吏揚名旌 生色秋天白日下
가릉노리양명정 생색추천백일하
 
魂歸南畝伴岳飛 骨埋西山傍伯夷
혼귀남무반악비 골매서산방백이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錄臣
서래소식개연다 문시수가식록신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가성장동갑족김 명자장안항렬순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가문여허성은중 백만병전의불하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청천강수세병파 철옹산수괘궁지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城凶賊脆
오왕정하진퇴슬 배향서성흉적취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혼비막향구천거 지하유존선대왕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춘추필법이지부 차사유전동국사
 
 
* 해역(解譯)
 
 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鄭公)은 경대부에 불과했으나 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충신열사들 가운데 공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로다.
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 가을 날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예로부터 대장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가산 땅에 비하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서 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태평세월이던 신미년에 관서 지방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변고인가.
주(周)나라를 받드는 데는 노중련 같은 충신이 없었고
한(漢)나라를 보좌하는 데는 제갈량 같은 자 많았노라.
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 군수의 명성은
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 같았노라.
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와 벗하고 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의 곁이라
서쪽에서는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려선 안되리라
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고 물러날 때 무릎 꿇어야지 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꿇었구나
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삿갓시인 김병연(金炳淵·1807~ 1863)은 전국을 떠돌면서 시를 지었다.
지금까지 그의 시는 480여수가 전해지고 있다.
 
 
김삿갓의 사상..

김삿갓의 방랑 생활은 출발 동기부터 불평객과 반항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명(假名)을 김란(金란)이라 하고 난고(蘭皐) 외에 이명(而鳴)이라는 호(號)로 불리고
머리에 삿갓을 쓴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명(而鳴)은 중국 서적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있는 불평이명(不平而鳴)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불평과 반항은 계급적 몰락에서 오는 개인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함에 따라 세계관과 사회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조선 왕조에 대해 은근히 반대의 감정을 표시한 것은 물론 봉건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빈부의 차가 심한 사회적 불합리를 저주하고 양반 귀족들의 죄악과 불의, 거만, 허식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중년을 넘으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그의 사상에 이러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폐족이라는 계급적 지위, 종의 집에서 자라난 유년 시기의 성장 과정, 또는 일생의 방랑 생활이
말해주는 불우한 사회적 처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그가 살던 조선 말기의 사회 환경과 시대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행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만인이 갈망하는 벼슬을 포기함과 동시에
당시 봉건 질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그 사상과 태도 속에는 멸망과 붕괴에
 직면한 민중들과 사회의 시대적 기운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 정신과 풍자 정신이었으며
인도주의로 받침되는 평민 사상이었다.
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개개 사물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적인 관심 등의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의의를 가지거나 중심 사상의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그의 사상과 결부하여 몇 가지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이러한 사상 경향의 심도와 강도가 매우 철저하고 강렬했다.
 일생 동안 방랑 생활을 하는 중 그의 아들이 세 번이나 찾아와서 귀가를 간청하였으나
끝까지 돌아가지 않은 점,
모친이 계신 외가가 있는 마을을 지날 때는 들러서 직접 만나지는 않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러 온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갔다는 이야기,
친구 정현덕의 주선으로 왕의 사면을 받고 벼슬 받을 기회를 거절했다는 사실 등에서 그러한 특성을
볼 수 있다.
 
둘째, 사상 경향의 표현 방법과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우선 방랑 생활 자체가 불평과 반항의 한 표현이었다.
그 이전의 많은 반항아들 역시 이 방법을 취했으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일생을 방랑객
으로 지냈고 봉건 체제에 반항했던 허균(許筠)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방랑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기이하고 광적(狂的)인 행동도 반항적 태도의 한 표현이었다.
 
황오(黃五)의 녹차집(綠此集)에는 '하루는 정현덕이 내게 편지를 보내 오기를 천하 기남자(奇男子)가
여기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는가 하기에 같이 가 보니 과연 김삿갓이더라.
사람됨이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니 과연 기인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석우는 해장집(海藏集)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되 어떤 때는 수십 편을 짓고 나오고 어떤 때는 한편도
 안 짓고 나오니 그 광태가 이와 같더라....
과거장 밖의 술집에서도 그의 이름을 사랑하나 그 광태를 무서워하여 술을 모조리 먹어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그의 기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큰소리로 웃어주기도 하고 풍자와 재담으로 비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일부 양반들도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한편 즐겨 쓴 삿갓 역시 변형된 투쟁 무기였으니 보기 싫은 당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김삿갓은 조부를 탄핵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죄인이라기 보다는 봉건적인 지배 계급에 대한 반항아라는 사회 정치적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실천문학사 발행 (김삿갓 풍자시 전집 참조.) -
 
 
‘將遊赤壁歎有客無酒(장유적벽탄유객무주)’라는 유람시를 발견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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