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소 , 조 각

[스크랩]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1

bizmoll 2013. 8. 24. 10:16

 조각적(彫刻的) 회화공간의 창조(創造)

 

Pieta
c. 1498-99
Marble
174 x 195 cm (5 3/4 x 6 ft)


Basilica of St Peter, Vatican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이며, 동시에 르네상스 전성기의 대표작이다. 그리스도의 시신(屍身)을 무릎 위에 앉은 어머니 마리아의 군상(群像)이 자연스럽고도 이상적인, 특유한 아름다움을 띠며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후기에 가서도 같은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그가 보여준 것은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상(大理石像)이었던' 이 작품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이 피에타상 형식의 직접적인 계보는 중세 북구(독일) 형식의 개신(改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물 크기 이상의 마리아가 보통 크기의 그리스도를 크게 포개진 옷의 무릎 위에 비스듬히 사선으로 안고, 슬픔과 고통을 내면화(內面化)시키고 있는 청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아름다움은 당시의 미켈란젤로가 보여준 독특한 이상적 조화미의 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하겠다.

 

 

Victory
1532-34
Marble, height: 261 cm
Palazzo Vecchio, Florence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한 조각 가운데는 1505년 최초의 계획 이후 여러 번 그 계획이 바뀌거나 축소됨으로써, 제외되거나 방치되거나 새로 계획되는 조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 가운데에 <승리>의 이름으로 불리는 조각은 같은 시기에 만들다 미완성한 채로 남아 있는 4체의 노예상(수염이 있는 노예, 젊은 노예, 아틀라스 노예, 잠이 깬 노예)과 의미 내용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 <승리>의 상이 나타내고 있는 상 자체에서 부터다. 노인(老人)을 발 아래 밟고 있는 젊은이의 나체상, 거기에서 그는 단순히 한 노인에 대한 승리가 아니고, 적어도 노인으로 상징되는 내용에 대한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세(中世) 이래 내려오는 '시간의 할애비'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나타내는 4체의 의인상과 더불어 이를 초극하는 승리를 말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Brutus
1540
Marble, height 95 cm
Museo Nazionale del Bargello, Florence

 

브루투스의 이름으로 우수가 섞인 남성 흉상(胸像)이 미완성이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최후의 심판> 제작 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외형화(外形 化)된 인물상이, 즉 하나의 이상(理想)의 상(像)이 새겨져 있다. 당시의 미켈란젤로는 거대한 시스티나 제단 뒤의 벽화를 그리면서, 기품있는 비토리아 콜로나 (Vittoria Colona)와의 은혜에 찬 친교 관계를 맺고 있을 때라, 많은 편지와 시작(詩作)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에 압제자 코지모(Cosimo 1세) 때문에 고향을 등지게 되어 로마에 피신해 온 피렌체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나게 됨으로써 오랜만에 여유 있는 시절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 속에 압제자 알레싼드로(Alessandro)를 살해한 로렌초 (Lorenzo de Medici), 즉 피렌체 공화국만의 자유의 보복자를 본 도나토(Donato Giannoti)가 있었다. 여기에 자극이 된 것이 압제자의 살해자로 이상화된 <브루투스>였다.

 

 

 

 

 

David
DETAIL of head
c. 1501-1504
Marble
Height 410 cm (13 1/2 ft)
Accademia delle Belle Arti, Florence

 

 

 

'젊고 불고 용모가 아름다운' 다윗은 골리앗의 목을 벤 승리의 청년상(靑年像)으로서 조각가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발 아래 골리앗의 목을 누르고 검(劍)을 가지고 서 있는 부드러운 소년상(少年像)은 그런 일반적인 다윗상의 형식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가로서의 자신을 충분히 발휘한 것도 역시 다윗상에 서였다. 그러나 그가 1501년 8월 피렌체 대성당의 의뢰를 받고 제작하게 된 그 커다란 대리석상은 그와 같은 승리의 상과는 그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 망태를 메고 옆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서서 돌을 쥐고 막 던지려는 순간의 나체(裸體) 청년상이 균형감을 지키면서 드러나 있다. 그 자신 같은 때에 청동(靑銅)의 다른 다윗상을 만들었다고 전하나 실물은 없어졌다. 1495년 메디치가에서 일단 나온 그는 실물보다 큰 헤르쿨레스 상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모두 이 작품 제작의 환경을 들려주는 것이다.

 

 

 

Madonna and Child
1501-05
Marble, height: 128 cm (including base)
O.L. Vrouwekerk, Bruges
 
고딕적인 해석에 어울리는 장엄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성모자상(聖母子像)이다. 아기를 데리고 정면으로 앉아 있는 마리아상(像)은 '장엄한 마돈나'의 모습을 그 대로 지니고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풍요로운 치마폭으로 아기 예수를 감싸면서 한쪽 발을 내려 디딘 마리아와 그의 무릎 사이에서 내려올 듯 말 듯 하면서 자연스러운 자태를 지니고 서 있는 아기 예수에서 전 체에의 조화로운 분위기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아기 예수를 보호하는 마리아의 역할이 이중삼중(二重三 重)으로 강조되고 있다. 옷으로 보호받는 나체의 아기 예수, 무릎 사이에 그를 감싸고 있는 성모 마리아, 그 리고 마리아의 왼손이 아기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그 자태가 이를 모두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고전적인 성 모자상이 완성될 수 있는 이유를 당시의 주 문장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Madonna and Child (detail)
1501-05
Marble
O.L. Vrouwekerk, Bruges

 

Madonna and Child (detail)
1501-05
Marble
O.L. Vrouwekerk, Bruges

 

Madonna and Child (detail)
1501-05
Marble
O.L. Vrouwekerk, Bruges

 

 

Milan Pieta
Full view from front
c. 1555-1564
Unfinished marble
Height 195 cm (6 ft)
Sforza Castle, Milan
 
같은 만년기 작품의 <피에타>, 특히 피렌체의 <피에타 > 같은 경우에서처럼 여러 인물의 군상이 아니고, 이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는 단지 마리아 혼자서 그리스도를 앞으로 떠받들고 있는 형태이다. 그 두 인물이 겹쳐져 있는 이 상은 이미 하나님 아들의 시신을 안고 지키고 있는 마리아의 인상으로서도 박약하고, 또 마리아에 안긴 그리스도의 인상도 박약하리만치 그야말로 특이한 자태의 미완성 상이다. 여기에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1974년에 발견된 그리스도의 頭部(두부) 부 분이다. 그것과 이 상을 연결시켜 볼 때 많은 수수께끼의 문제점이 제시된다. 그 가장 현저한 경우는 이 상의 上半身(상반신)이 더욱 더 가느다란 형태감으로 바뀌어, 어느 조형 형태상의 극단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 만년의 그가 애쓴 자연스러운 인체의 표현에 중점을 둔 그의 표현 형식상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에타

이 피렌체 성당 피에타를 최초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바자리(G. Vasari)의 예술가전(傳)에서다. (1550) 부성(父性)의 사랑이랄까 권위 같은 것을 띤 머리 수건을 쓴 니코데모의 모습이 뒤에서 떠받들 듯, 흐트러지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앞으로 안고 있는 상이 지배적이다. 이 <피에타>는 마리아 무릎 위에 안긴 고전주의 적인 방식의 그의 초기 피에타와는 그 취향을 아주 달리하고 있다. 여기서는 <수난의 그리스도>의 형식을 빈 새로운 중세(中世) 해석인 매너리즘의 배경이 커다랗게 부각된다. 그것은 더 이상 이상화(理想化)하지 않는 세계에로의 복귀라 할 수도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이 거친 군상(群像)작업을 보고 곧 부러질 것 같은 불안을 느끼기도 했다. 스스로 즐기면서 제작한 이 작품 속의 니코데모에서 작가의 자화상을 보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Dying Slave
1513-16
Marble
Height 229 cm (7 1/2 ft)
Louvre Museum, Paris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를 완성한 직후 미켈란젤로는 그간 중단되었던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한일을 계속 했다. 이때 만들어진 작품으로 <모세> 이외에 <빈사의 노예>, <묶여 있는 노예>와 같은, 노예의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벌의 나체상이 전한다. 묶여져 있거나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태, 또는 부자유스러운 인간의 상태는 사실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에서 특히 자주 논의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이것이 대리석 조각을 주요 표현 수단으로 하는 조각가의 자기 과제라는 각도에서 보면 그 내용과 재료에 관한 예술적 연관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이 노예상에는 분명히 계획된 묘당을 위한 조각이라는 목적이 있고 보면, 사체(四體)가 하나의 구성 단위로서 인간의 기질이나, 4대 원소를 곧 잘 의 인화(擬人化) 했던 당시의 표현상의 관습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여러 이뉴도의 경우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출처 : Free As The Wind. (바람처럼 자유로이...)
글쓴이 : 강병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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