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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람둥이는 거의 다 심한 조루

bizmoll 2009. 2. 3. 15:38

 

바람둥이는 거의 다 심한 조루

“난 지금까지 성관계 가진 여자가 100명이다.”
“난 말이야, 다 세 보면 200명은 넘을 거야.”
이런 스타일의 바람둥이는 그 내실을 잘 살펴보면 거의 심한 조루이다.

그들은 짧은 사정의 쾌감만을 추구하기 대문에 상대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온통 느끼며 함께하는 황홀한 합일감이나 둘이 만들어 내는 커다란 사랑과 영혼의 엑스타시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섹스란 새로운 대상을 통해 권태감과 허탈감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촛불처럼 나타났다 스러지는 호기심일 뿐이다. 새로운 대상을 통한 새로운 느낌만이 섹스의 모티브인 것이다. 이 여자나 저 여자나 그 짧은 성교에서는 사정의 느낌은 어차피 똑같기 때문이다.

자위행위와 다를 바가 별로 없는 것이지만, 다만 새로운 여자를 정복했다는 얄팍한 감정의 흥분에라도 기대고 싶은 것이다. 알고 보면 내면이 몹시 외로운 불쌍한 모습이다.

30대 후반의 노총각이 자기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놨다. 어떤 여자 친구를 만나 사귀게 됐는데 정열적으로 거의 모든 다양한 상황 속에서 섹스를 다 해 보았다고 한다. 카페 화장실에서 묘한 스릴을 느끼면서도 해봤고, 대낮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다른 사람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도 묘하게 흥분되는 것을 느끼면서 해보기도 했다.

새로운 상호아들을 만들어 가면서 하니까 매번 아주 좋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밤새 술집에서 있다가 새벽 해가 어스름히 밝아올 때 길거리 골목에서도 짧은 순간 짜릿하게 해 보기도 했단다.

그런데 시간이 1년쯤 지나자 자기 내면에서 발견되는 사실은 처음 얼마간은 섹스 후에 4일 정도는 그녀에 대해 백지장처럼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는 것이다. 성욕이든지 사랑의 감정이든지 아무것도 샘솟지 않게 되면서 가끔씩 다투게 되기도 했단다.

여자에게서 전화가 와서 왜 전화 한 통화도 없었냐고 투정하는 말을 들으면 그래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 여자에게 전화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섹스 후에 1주일 동안 아무 생각이 안 나기 시작하고 나중엔 10일로 늘어나고 더 이상 새로운 자극의 요소가 없어지니까 묘하게 싸늘히 식어가는 자신의 마음이 느껴져 결국 2년간의 교제를 끝내게 됐단다.

그 친구 이야기는 앞의 심한 바람둥이와는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근본적 문제는 비슷하다. 억압없는 자연스러운 섹스를 솔직하게 용감하게 즐기고, 그 안에 몰두했던 것은 매우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본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사정에 목표를 두는 섹스의 한계이다. 성 에너지와 사랑 에너지, 영성 에너지는 하나의 에너지여서 그 물질적 토대인 정액을 많이 배설하면, 이렇게 사랑의 자원도 같이 메말라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내가 단전호흡 수련을 하던 곳에 우연히 인도에서 다다루파라는 수행자 한 분이 잠을 잘 숙소를 찾고 있다가 그 도장에 찾아오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수련에 대해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강의의 통역을 내가 하게 되었다. 여러 좋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가장 나의 인생 나침반을 뒤흔들어 놓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그 요기가 강의 도중 질문하기를 우리 육신의 양식이 밥이요 빵이라면 우리 영혼의 양식은 무엇이겠냐는 것이었다. 책이다, 스승이다 등의 대답이 있었는데, 그 요기의 대답은 의외로 ‘정액’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의외의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이 원리에 대해서 탐구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17년 동안 성도인술, 탄트라 섹스를 실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생활 속에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도 감사하게 느끼게 되었고, 많은 이에게 들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전하고 싶어졌다.

오쇼 라즈니쉬는 ‘남성’이라는 책에서 보통의 섹스와 탄트라 섹스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질문에 이같이 대답한다.

“그대의 성행위와 탄트라 섹스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대의 성행위는 무엇인가 내보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시원하게 재채기를 하는 것과 같다. 에너지가 방출되고 그대는 짐을 던다. 그것은 창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파괴적인 행위이다 물론 배설 뒤에 몸과 마음이 이완되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탄트라 섹스는 이런 성행위와 기본부터 다르다. 탄트라 섹스느 에너지를 내보내고 방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정하지 않고 행위의 중심에 머무는 것이다. 어떤 에너지도 내보내지 않고 행위 속으로 녹아드는 것이 탄트라 섹스이다. 이것이 행위의 질을 변화시킨다. 보통의 성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탄트라 섹스는 그대가 원하는 만큼 오래 행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의 섹스는 그렇게 오래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경우에 그대는 섹스를 통해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으며 에너지가 다시 회복되려면 일정 시간이 지나야 한다. 그리고 회복된 다음에는 다시 그 에너지를 소모할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일처럼 보인다.

에너지를 회복했다가 소모하고, 다시 회복했다가 잃고 이런 일이 평생 계속된다. 그대는 흥분의 정상에 이르렀다가 추락하낟. 그것이 성행위 후에 공허감을 느끼는 이유이다. 마치 높은 곳에서 추락한 느낌이다. 그러나 탄트라 섹스에서는 행위가 끝난 후 그런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대는 추락하지 않는다. 이미 그대는 골짜기 깊이 들어가 있으므로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 오히려 그대는 높은 곳으로 비상한다.

더 충만한 에너지로 싱싱하게 살아나는 느낌이다.  이런 엑스타시는 몇 시간뿐 아니라 며칠 동안 지속될 수 있다. 그 기간은 탄트라 섹스 중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정이 순전히 에너지의 낭비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아이를 원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정할 필요가 없다. 탄트라 섹스 후에 그대는 하루 종일 깊은 이완 상태를 체험한다. 한 번의 탄트라 섹스만으로 며칠 동안 릴랙스된 느낌을 받을 것이다.

폭력성과 분노가 사라지고, 기분이 침울해지지 않는다. 마음이 평화롭고 편안하다. 이제 그대는 타인에게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남들을 도우려고 할 것이다. 그럴 기회가 없다면 최소한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탄트라는 신 인간을 창조할 것이다. 시간이 사라진 차원을 아는 사람, 존재계와 깊은 일체감을 지닌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

이 말씀 또한 성도인술이나 탄트라 섹스를 경험해보면 일점일획 그대로 사실로 체험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남성들이여! 자기 자신의 넘치는 기쁨과 평화, 건강을 위해서 또 그대의 파트너에게 진정 멋있는 연인이 될 수 있는 이 공부를 이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 : youngheej
글쓴이 : 하늘과 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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