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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봉황 문양

bizmoll 2013. 12. 31. 09:19

봉황 鳳凰
성인의 출현. 태평성세. 경사. 왕. 황후. 여인

이날 사염리에 있는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져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 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중에서

봉황은 용과 학 사이에서 나왔다. 그 생김새는 닭의 주둥이,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도상에 나타나 있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확실한 것은 상서롭고 아름다운 상상의 새라는 것이다.
그러나 봉황은 어떤 생물이 신령화된 것이라기보다는 용과 마찬가지로 자연현상, 특히 바람이 의인화되어 생긴 상징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봉황의 기원을 풍신(風神)에 두는 이유는 봉(鳳)자가 풍(風)자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봉황은 태양을 마주하는 조양(朝陽) 골짜기의 단혈산(丹穴山)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해(四海)의 밖을 날아 곤륜산(崑崙山)을 지나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風穴)에서 잔다.
그리고 5색의 깃털 무늬를 지니고 울음소리는 5음을 내며, 오동나무에 깃들이고,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한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 즉 우리나라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 고대에는 봉황의 상징이 중국처럼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라시조 혁거세의 왕후 알영이 계룡(鷄龍)의 딸인데, 혹시 이 계룡이 봉황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볼 뿐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나 삼국시대 전돌에 봉황이 보이기는 하지만, 성군의 상징으로 봉황이 본격적으로 많이 사용된 것은 고려조 이후, 특히 조선왕조가 열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봉황은 성천자가 출현하거나 성군이 덕치(德治)를 펼쳐 천하가 태평할 때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든 새들의 군주이므로 이 때 뭇 새들이 따라 모인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군왕은 자신의 치세 때에 봉황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였다.
또한 봉황의 생김새나 행동거지는 제왕의 속성과 같다 하여, 그 자체로 군왕을 상징하기도 한다.
궁궐 전각의 기둥이나 천장, 왕의 수레나 흉배 등 궁궐 장식에 봉황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 문장과 국새에도 봉황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금슬 좋은 부부, 혹은 여인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에 부인들의 머리장신구나 혼례복, 혼수장롱에도 많이 보인다.

글_유나영<발췌:디자인진흥원>


봉황무늬 암막새. 통일신라시대
문자도(文字圖)
고구려 금동봉형장식. 삼국시대
봉선. 조선시대. 궁중유물전시관 소장.
출처 : colorplaying
글쓴이 : tex1004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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