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 (동양 화)

[스크랩] 이유신 포동춘지(浦洞春池).양기성 섬계회도 / 동양화가 말을 걸다

bizmoll 2013. 11. 1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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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가 말을 걸다

春花가 몸을 열면 선비들 가슴에 꽃불이 일고…

 

이유신 포동춘지(浦洞春池)

 

 

 

 

“3월에 남쪽에서 매화 핀다는 소식이 들리면 시간되는 사람끼리 모여 바로 출발하지요.”
   
한 달 전에 수술을 하고 폄적(貶謫)당한 사람처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지인이 전화를 해서 솔깃한 제안을 내놓는다. 매화 구경이라니. 얼마 만에 들어보는 꽃 같은 소리인가. 완강한 겨울에 갇혀 오는 봄이 믿기지 않을 때면 섬진강에 갔었다. 죽지 않고 살아 나니 이번에도 갈 수 있겠구나.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서는 매화꽃이 펑펑 피어나기 시작했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안개처럼 피어있던 매화꽃이 시큼한 향기를 뿜으며 어른거렸다. 매화꽃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마음 맞는 사람끼리 나누는 대화는 얼마나 풍성할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벌써 마음속에 온기가 밀려든다.
   
   
봄꽃 위로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거든
   
계절은 바야흐로 봄. 복숭아꽃, 살구꽃이 ‘꽃대궐’을 이루는 화락(花樂)의 시간이다. 천지가 꽃으로 붉게 달아오르는 봄날, 집안에만 무심히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다. 봄에는 조금 들떠도 좋다. 꽃을 핑계 삼아 한 사람이 연통(連通)을 돌리면 지인들이 주르르 엮이게 되어 있다. 계절에 민감한 친구가 돌린, 번개팅을 알리는 쪽지는 이러하다.
   
 ‘오늘 저녁 유시(酉時). 봄꽃 위로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장관을 감상하시려거든 포동(浦洞)의 물가로 오시라. 회비는 무료. 흥에 겨워 시 한 수 읊을 수 있으니 지필묵 휴대 바람. 춘화(春花)가 난분분(亂紛紛)하니 곳간에 숨겨둔 곡주 한 병씩 들고 와도 모두 용서됨.’
   
아침에 돌린 간찰(簡札)을 받고 여덟 명의 지인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다 한들 ‘만화방창 호시절’에 어이 아니 오겠는가. 번개팅이라 선약이 있는 친구 둘은 애석하게도 참석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후일담을 들으며 두고두고 아쉬움을 달랠 것이다. 좋은 장소에 좋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오늘만큼 행복한 날은 없으리라.
   
포동의 물가에 반가운 얼굴들이 모였다. 생명 있는 풀과 꽃이 향기로운 체취를 흩날리면서 오늘 모인 사람들을 환영한다. 연못 속의 물풀은 미처 얼굴의 물기를 닦지도 못한 채 뛰쳐나왔다. 노을 속에 붉게 상기된 복숭아꽃은 굳이 설렘을 감추려는 기색도 없이 손님을 맞는다.

살구꽃도 뒤질세라 발목까지 발그스레하게 상기되어 시인의 눈앞을 어슬렁거린다. 가지마다 돋는 은밀한 속정. 춘화(春花)가 몸을 열어 지분 냄새를 풍길 때마다 선비들의 가슴에도 열꽃이 돋는다. 부끄러움은 나중 일. 무슨 수로 가슴속의 꽃불을 끌 수 있으랴. 꽃과 살 섞고 망가지는 것이 우선이다. 격정이 지나고 난 자리에는 흥분한 시(詩)편들이 널려 있다.
   
   
저녁 노을 진 포동의 저물녘
   
그날의 정경을 탁월한 붓질로 전해주는 이유신(李維新·18~19세기)의 재주 때문에 그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상자의 마음이 봄빛으로 물들 것 같다. ‘포동의 봄 연못’을 그린 이 작품은 ‘포동춘지(浦洞春池)’라는 제목으로 기념되었다. 그림 위쪽에는 그날의 정경을 묘사한 듯한 천원(泉源)이란 사람의 제시가 적혀 있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畵中有詩), 시 속에 그림이 있다(詩中有畵). 제시를 살펴보자.
   
‘물 맑은 포동의 물가(水淸浦洞漵)
꽃향기 가득한 포동의 저녁 노을(花香浦洞霞)
풀밭에서 시 짓고 술 마시며(詩樽芳艸上)
물도 보고 꽃도 보고(看水又看花)’.
   
봄 풍경을 그린 ‘포동춘지’는 ‘귤헌납량(橘軒納凉·여름)’, ‘행정추상(杏亭秋賞·가을)’, ‘가헌관매(可軒觀梅·겨울)’와 같은 화첩에 들어 있다. 네 작품 모두 윤필(潤筆)로 계절의 변화과정을 서정적으로 전해주는 명작이다. 이 화첩은 사계절을 한 화첩에 담은 ‘사계산수화(四季山水畵)’ 중에서 가장 싱그럽고 운치 있는 작품이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림 속의 장소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의 참신한 색감과 화풍은 신윤복(申潤福)에서 김수철(金秀哲)로 이어지는 이색화풍(異色畵風)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가을, 서울에 있는 한 화랑에서 이 작품들이 전시되었을 때 넋을 잃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겨울 풍경인 ‘가헌관매’가 출품되지 않아 매우 아쉬웠다. 소장처를 알 수 없어서라고 하는데 다음 기회에는 꼭 출품되었으면 좋겠다.
   
이유신은 조선 후기의 여항(閭巷) 문인화가다. 자(字)는 사윤(士潤)이고 호는 석당(石塘)인데 가계와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항문인 유재건(劉在建·1793~1880)이 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그에 관한 간략한 기록이 실려 있어 그가 중인 출신의 문인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산수화로 간략한 구도와 담담한 색의 사용이 특징이다. ‘포동춘지’는 이유신의 물기 젖은 화풍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백(李白·701~762)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천지는 만물이 잠시 쉬어 가는 여관이고, 시간은 긴 세월을 거쳐 지나가는 길손이다. 덧없는 인생은 꿈같이 허망한데, 우리가 즐긴다 한들 얼마나 되겠는가? 때문에 옛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밤에도 노닌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었구나!’
   
계절도 즐기고 몸도 돌보라는 ‘경고’처럼 몸에 생긴 종양을 떼기 위한 수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병원 창밖으로 탄천을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한기로 가득한 1월의 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사람과 웃으며 걷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꼭 딴세상 사람들처럼 생소했다. 문득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내가 언제 저 사람들처럼 마음 편히 냇가를 거닐면서 즐겨본 적이 있었던가. 인생이 꿈처럼 허망하게 지나갈 텐데 나는 너무 노예처럼 일만 하고 살았구나. 옛사람들처럼 촛불을 밝혀 술자리를 벌인다 한들 무에 그리 자책할 만큼 인생을 낭비하는 사치가 될까. 좋아하는 사람들과 꽃그늘 아래서 만나 술잔을 부딪치며 부드럽고 따스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야 말로 진정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기쁨이 아닌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내게 다시 삶이 주어진다면 일중독에서 벗어나 하루에 한 번씩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흘러가는 바람 속에 얼굴을 적셔 보리라. 꽃피는 밤이면 보고 싶은 사람에게 불시에 전화를 걸어 무조건 만나자고 억지도 부려 보리라. 어둠에 묻혀 산책하는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거듭 중얼거렸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나이에 삶의 진리를 꿰뚫어볼 줄 알았던 황진이는 얼마나 통찰력이 뛰어난 시인인가. 이제 나는 청산리 벽계수가 되지 않겠다. 앞만 보고 달려가서 바다에 도착한 후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고 후회하는 거친 물살이 되지 않겠다. 밝은 달이 빈 산에 가득할 때 잠시 쉬어가는 사치를 잊지 않으리라. 달밤을 거닐면서 벽계수 같은 친구가 있다면 읊어줘야겠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가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명월(明月)이 만공산(滿公山)하는 장관을 건성으로 보고 살았다면 그대여, 가끔은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보는 여유를 가져 보시라.

 

 

 

 

 

 

“친구 집 대문 앞에서 돌아선 까닭은”

 

양기성 섬계회도

 

 

▲ 양기성 ‘섬계회도’ 종이에 색, 33.5×29.4cm. 일본 대화문화관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도 안되는 사람인데 견딜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어 편지를 썼다. 그때 냉정했던 모습은 진실이 아니었노라고, 오랜 시간 당신만을 생각하며 살았노라고 구구절절 애타는 심정을 담아 장문의 편지를 썼다. 쓰는 동안 감정이 격해졌다. 격한 감정을 순화시키려 애를 썼지만 글은 웅변조로 변해갔다. 아무리 많은 말을 써 넣어도 마음을 다 담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쯤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편지를 부쳐야지. 들뜬 기분으로 달콤한 잠에 빠졌다.
   
결국 그 편지는 부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읽어 보니 너무 유치했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는 분명 스스로가 읽어봐도 감동적일 만큼 잘 쓴 편지였는데 환한 아침에 읽어 보니 아니었다. 오로지 내 감정에 빠져 폭포처럼 쏟아낸 말들이 왠지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이런 편지를 보내려 했다니. 큰일날 뻔했다. 안타깝지만 밤새 쓴 편지는 휴지통에 버렸다. 메일이나 카톡 같은 통신수단에 익숙해지기 전 세대라면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흥이 올라 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
   
왕자유(王子猷·338?~386)가 산음현(山陰縣)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밤새 큰 눈이 내렸다. 잠에서 깬 그는 술 생각이 간절했다. 하인을 부르려 방문을 열었는데 사방이 온통 은빛이었다.

천지에는 눈이 가득 쌓였고 달빛마저 맑고 차가웠다. 술이 아닌 눈에 취한 그는 마당을 서성이며 좌사(左思·250?~305?)의 ‘초은시(招隱詩)’를 읊조렸다. 그러다 갑자기 친구 대안도(戴安道)가 보고 싶어졌다.

대안도는 산음현에서 가까운 섬현(剡懸)에 살고 있었다. 그는 곧장 그 밤에 작은 배를 타고 친구를 찾아 나섰다. 하룻밤이 지나서 도착한 그는 친구의 대문 앞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않은 채 돌아섰다. 곁에서 이를 지켜본 사람이 의아해서 물었다. 왕자유가 대답했다.
   
“나는 본래 흥(興)이 올라서 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간 것이니, 어찌 반드시 대안도를 만나야만 하리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얘기다. 양기성(梁箕星·?~1755)의 ‘섬계회도(剡溪廻棹)’는 왕자유가 대안도의 집에까지 왔다 대문 앞에서 되돌아가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화첩의 왼쪽에는 ‘세설신어’의 내용이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섬계(剡溪) 위의 배 안에는 사공과 두 명의 승객이 타고 있다. 친구 집 대문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왕자유와 ‘곁에서 이를 지켜본 사람’이리라. 이야기의 중심이 왕자유의 ‘회도(廻棹)’에 있는 만큼 대안도의 집은 대문만 보여주는 식으로 간략하게 그렸다. 대신 밤새 내린 눈을 강조하기 위해 천지를 ‘설백(雪白)’으로 처리했다. 군데군데 서 있는 을씨년스러운 나무에서 겨울 추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눈은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린 폭설은 아니다. 왕자유의 잠을 깨워 대안도의 집에 올 때까지만 내린 눈이다. 대문 곁의 바위와 뒷산 골짜기에 살짝 드러난 녹색이, 눈이 그다지 두껍지 않음을 말해준다.

눈이 내리는 동안 ‘흥이 올라서 왔다가’ 눈이 그치자 ‘흥이 다해 돌아간’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가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왕자유는 진(晉)나라 때 시인 왕휘지(王徽之·338?~386)로 자유(子猷)는 그의 자(字)다. 서성(書聖)으로 알려진 왕희지(王羲之)의 아들이다. 왕휘지가 찾아간 친구 대안도는 대규(戴逵·325~396)를 일컫는다.

안도(安道)를 자(字)로 쓴 대규는 학문이 해박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고 거문고를 잘 탔다. 왕휘지와 대규는 소광(疏廣), 도잠(陶潛), 소강절(邵康節)과 함께 후대 사람들에게 본받고 싶은 ‘다섯 현자(五賢)’로 선정된 유명인이다. 이들의 일화가 굳이 그림의 주제로까지 그려지게 된 배경에는 후대인들의 흠모의 마음이 있었음이다. 후대의 추종자들은 왕휘지의 평전을 찾아 읽는 것은 물론 그가 읊었던 좌사의 ‘초은시’까지 찾아서 읊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온갖 기이한 광경
   
‘섬계회도’는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에 장첩되어 있는 작품이다. ‘만고기관첩’은 당시 사람들이 애송하던 시문(詩文)과 그에 어울리는 그림으로 이루어진 서화합벽첩(書畵合璧帖)이다.

‘만고기관(萬古奇觀)’, 즉 ‘이 세상의 온갖 기이한 광경’이라는 뜻이 말해주듯 이 화첩 속에는 유명한 시인과 문사(文士), 명상(名相)과 현신(賢臣)의 고사(故事)가 글과 그림으로 꾸며져 있다. 서화합벽첩은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여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꾸준하게 제작되었다.

‘만고기관첩’뿐만 아니라 ‘천고최성첩’ ‘사공도시품첩’ ‘현원합벽첩’ ‘표옹선생서화첩’ 등 다양한 형식의 서화첩이 유행했다. 그중에서도 ‘만고기관첩’은 궁중에서 정조가 열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8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도화서 화원들 장득만, 장계만, 한후방, 한후량, 양기성, 진재해 등이 대거 제작에 참여한 중요한 서화첩이다. 특히 양기성은 ‘섬계회도’를 비롯하여 이 서화첩의 가장 많은 그림을 담당하였다.
   
‘만고기관첩’은 동일한 제목의 화첩이 삼성 리움미술관과 일본 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에 소장되어 있다. 두 화첩 속에 담긴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당시 문인이 갖추어야 할 지식과 소양, 사대부로서 지켜야 할 교훈적 내용을 시각자료로 만든다는 근본 취지는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만고기관첩’에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담겨 있다. 당시 사람들이 지향했던 문인들의 세계, 지키고자 했던 삶의 품위, 여유와 풍류가 반영되어 있다.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상대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즐기고 자족할 줄 아는 자의 멋과 운치가 느껴진다.
   
   
내 감정이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은 좋은 일이다. 누군가를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도 좋은 일이다. 문제는 자신의 감정이 상대방에게 가 닿을 때도 좋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좋은데 상대방한테는 짐이 되고 거북하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감정이 아니다. 이기적인 것이다. 그건 사랑도 아니고 순정도 아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주는 마음이 있다면 밤새 쓴 편지를 휴지통에 버릴 수도 있다. 친구집 대문 앞까지 왔다 되돌아갈 수도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굳이 여러 권의 화첩을 만들어 다 아는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림으로 남겼다. 행여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아름다운 삶의 덕목을 되새기며 실천하자는 뜻이었다. 좀이 슬어 군데군데 해어진 낡은 그림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토커를 넘어 사생팬(사생활을 쫓는 팬)까지 등장하는 우리 시대에 답답하게만 보이는 옛 사람들이 그리운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사랑을 아는 순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옛그림에서 사랑과 배려를 배운다.

 

 

조정육 / 미술사가

 

http://blog.daum.net/sixgardn/15770472

 

 

 

 

 

剡溪 섬계. 절강성(浙江省) 승현(嵊縣)에 있는 하천. 剡 날카로울 염/ 땅이름 섬.

廻棹 배를 돌리다.棹 노 도.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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