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 (동양 화)

[스크랩] 김홍도(金弘道,)/ 玉荀峯.島潭三峯.九龍淵. 隱仙臺.明鏡臺.飛鳳瀑.

bizmoll 2013. 11. 1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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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金弘道,조선3대화가중 한분, 1745년~1806년?) 작품4편

 

☞충청도 연풍 현감재직시(1791년~1794년)아들 김양기(金良驥)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에 수록

 

▩ 병진년화첩-1796년

 

86.편주도해도(片舟渡海圖) 87.석양귀소도(夕陽歸巢圖) 88.창해낭구도(滄海浪鷗圖)

89.창명낭화도(滄溟浪華圖) 90. 절학송폭도(絶壑松瀑圖) 91. 기려원유도(騎驢遠游圖)등 다수

 

 

1)옥순봉(玉荀峯)-1796년

 

 

 

 

2)사인암도(舍人巖圖)-김홍도 2편에 사진 실림-1796년

 

3)♡도담삼봉(島潭三峯)-1796년

 

 

4)또 다른작품;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김홍도 3편에 사진 실림-1796년

 

이형록(李亨祿)-책거리(冊거리)작품(사면척량화법)에서

 

 

 

※김홍도는 서양의 사면척량화법인 이기법을 잘했다. 이 서양화법과 청나라연경에 가서 한달 동안 천주당성화를 보고 응용하여 후불탱화를 완성했다.

☞금강전도(金剛全圖)는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임-1788년작품(김홍도)

 

 

구룡연(九龍淵)

 

 

 

중향폭포라고도 한다.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한국의 3대폭포로 꼽히는 금강산 제일의 폭포이다. 금강산에 있는 폭포 가운데 가장 크다. 이곳에는 폭포에 의하여 뚫린 대소 9개의 폭호가 마치 용이 빠져나간 듯한 모양을 이루고 있어 구룡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며, 이 폭호의 깊이는 10 m에 이른다.

 

폭포의 상류에 있는 8담도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에 의하여 연주처럼 서로 이어져 있으며, 신비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다.

 

유점사에서 도망온 용에 관한 전설이 스며있다.

말의 귀처럼 생긴 바위 틈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53불에 쫓긴 9마리 용이 이 8담과 구룡폭포 밑에 숨어 금강산을 지키는 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은선대(隱仙臺)12폭(瀑)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산봉우리로, 금강산에 있는 기이한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 신금강에 속한다. (높이는 1,060미터)

 

깊숙하고 은은하며 경치가 아름다워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높이가 20m 되는 은선대는 대밑에서 보면 불쑥 솟아 있는 바위봉우리처럼 되어 있다. 신금강(新金剛) 구역으로 분류되는 곳으로, 금강산 4대 폭포 중에서 가장 장대하다는 12폭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바위를 말한다. 12폭은 이곳 은선대가 아니면 그 전모를 결코 볼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구정봉을 비롯한 금강의 연봉들이 은선대 앞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어서, 그 장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금강산은 12,000봉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금강산은 비로봉(1,638m)을 주봉으로 50여개의 큰 봉우리들과 각양각색의 1만2천 봉우리, 수정같이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폭포, 연못들로 천하 절경을 이루고 있다. 계절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자연경관으로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불린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구분하는데 내금강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서쪽 내륙지역으로서 이 지역 절경으로는 만폭동, 명경대, 수렴폭포, 망군대, 명연담 등이 있다. 외금강은 태백산맥 동쪽 비탈면 지역으로 만물상, 구룡연, 수정봉, 천불동, 은선대 등의 구역으로 나뉜다. 해금강은 외금강의 동쪽에 있는 삼일포를 포함한 해안지대로서 삼일포구역과 해금강 구역으로 나뉜다.

 

 

♡토왕폭(土王瀑,土旺瀑)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 있는 폭포로,신광폭포(神光瀑布)·토왕폭(土旺瀑)이라고도 한다. 설악산을 대표하는 3대 폭포 가운데 하나이다. 설악산국립공원 외설악의 칠성봉(七星峰:1077m) 북쪽 계곡 450m 지점에 있다.

 

설악산 신흥사 동남쪽으로 석가봉, 문주봉, 보현봉, 문필봉, 노적봉 등이 병풍처럼 둘러싼 암벽 한가운데로 3단을 이루며 떨어지는 연폭(連瀑)으로서, 멀리서 보면 마치 선녀가 흰 비단을 바위 위에 널어 놓은 듯하다. 겨울철에는 산악인들이 빙벽훈련장으로 이용한다. 폭포의 물은 토왕골을 흘러 비룡폭포와 육담폭포를 지나 쌍천(雙川)에 흘러든다.

 

원래 토왕폭은 3단으로 이루어 져서, 상,중,하단 모두합해서 약 340m이다. 동양 최대임

 

 

명경대(明鏡臺)

 

 

 

저승의 입구에 있다는 거울. 지나는 사람의 생전의 행실을 그대로 비춘다고 한다.

 

밝은 거울을 상징하는 ‘명경대(明鏡臺) ’에는 부지런히 일만 하던 석봉만이 죄 없이 저승에 끌려갔다 온 이야기가 전한다. 열 명의 대왕이 명경을 앞에 놓고 석봉만의 일생을 본 후, “명부에 잘못 기재되어 잡혀왔으니 어서 인간 세계로 돌아가도록 하여라”고 해서 인간 세상에 와서 정신을 차려보니 명경대 앞이었다는 것이다.

 

 

비봉폭(飛鳳瀑)

 

 

 

강원도(북한) 고성군 온정리(溫井里)에 있는 폭포로 금강산의 외금강 옥류동계곡에 있다. 세존봉(世尊峰:1,132m) 서쪽 경사면의 중턱에서 떨어지며, 흘러내린 폭포수가 짙푸른 소(沼)를 이룬 곳이 옥류동이다 높이 139m, 너비 4m. 구룡·십이·옥영 폭포와 함께 금강산 4대 폭포를 이룬다.

 

폭포수의 모양이 봉황새가 긴 꼬리를 휘저으며 하늘로 오르는 것 같다 하여 비봉폭포라고 했다. 폭포수 밑 연못에 구름이 비치면 마치 구름 속으로 물줄기가 쏟아져내리는 듯하며, 햇빛이 비치면 은빛 물안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주위에는 금강산의 이름난 봉우리를 비롯하여, 천화대·연주암·무봉폭포(無鳳瀑布)·구룡연(九龍淵)· 등이 있다.

 

 

선담(船潭)

 

 

 

소의 아래 바위벽에는 선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배모양과 같다고 하여 선담이라고 한다. 개울 양쪽을 가로지른 큰 바위벽 아래 마치 돌구유같이 우묵하게 파인 곳에 맑은 물을 함빡 담고 있다.

 

담(潭)이라 함은 일종의 폭호(瀑壺)에 해당되는 것이다. 폭호는 폭포 아래에 형성되는 깊은 못을 의미한다. 선담은 팔담중의 하나이다.

 

팔담(八潭)은 금강산 만폭동에 있는 흑룡담(黑龍潭)ㆍ비파담(琵琶潭)ㆍ벽파담(碧波潭)ㆍ 분설담(噴雪潭)ㆍ진주담(眞珠潭)ㆍ구담(龜潭)ㆍ선담(船潭)ㆍ화룡담(火龍潭), 이 여덟 개 못을 말한다. 이곳의 물이 내려와 구룡폭포九龍瀑布와 비룡폭포飛龍瀑布를 이룬다.

 

 

만물초(萬物肖)=만물상(萬物相)

 

 

 

금강산에 있는 바위산. 바위가 여러 가지 물체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고, 기묘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해서 붙인 이름. 온정리에서 온정령을 따라 오르다가 육화암을 지나면 나타나는 골짜기가 바로 만물상이다.

 

기묘한 바위와 어우러진 봉우리들이 모두 모여 있다. 귀면암, 삼선암, 절부암, 안심대, 망장천, 만물초, 하늘문, 천선대, 천녀화장호, 망양대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기암괴석과 봉우리들이 즐비한 곳이다.

 

 

 

☆ 만물초--최익현 (崔益鉉);1833(순조 33)~1906(광무 10)

 

깎아지른 벼랑 따라 길은 걸을수록 으슥한데

머리 돌려 바라보니 이 몸은 하늘에 올라온 듯하네

 

기괴한 새와 짐승들 제 모양 이룬 것 없고

신선들도 부처들도 머리가 같지 않구나

 

알겠노라, 이것을 마련한 조물주의 공력이 많았음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이로 인해 마음껏 노닐 수 있네

 

그 중에서 좋은 것은 노을 비낀 맑은 저녁

우뚝우뚝 높이 솟은 눈처럼 흰 산봉우리

 

*최익현 (崔益鉉);한말의 유학자·애국지사.

 

 

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기남(奇男).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이조정랑·신창현감(新昌縣監)· 성균관직강등을 지냈다. 1866년(고종 3) 어머니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후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그해 10월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聚斂政策)의 혁파, 당백전(當百錢)의 폐지, 사대문(四大門) 문세(門稅)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대내정책을 비판했다. 이 상소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곧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양주 직곡(直谷)으로 내려가 학문에 힘썼다.

 

1873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대신을 비롯한 관리들과 성균관 유생들이 그를 극렬히 비난했으나 당시 친정(親政)을 생각하고 있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그해 11월 다시 상소하여 앞서의 상소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비롯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소문의 문구 가운데 지나치게 과격한 내용이 있어 삼사(三司)를 비롯한 대신들의 탄핵으로 국문(鞫問)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1875년 2월 풀려났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위정척사론). 그는 이 상소에서 첫째, 일본과의 강화(講和)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무비(武備)를 갖추지 못하여 고식책으로 강화를 추진한다면 앞으로 적의 무한한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일본의 물화(物貨)는 모두가 요사기완(搖奢奇玩)으로서 우리나라의 유한한 농업생산품으로 적의 무한한 공업생산품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셋째, 일본을 왜(倭)라고 일컬었으나 실은 양적(洋賊)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일단 강화가 성립되면 금수와 같은 양인(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했다. 이 상소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1879년 풀려나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약탈·잔학행위를 일삼는 집단으로 간주하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해 6월 경복궁 쿠데타가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친일 개화파정권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개화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했으며,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의 처단과 역적들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를 요구했다.

 

1895년 8월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 보낸 순검(巡檢)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되어 있다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자 풀려나 향리로 내려갔다. 이어 고종에 의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을 회유하여 해산시키기 위한,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8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2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여기서 그는 강렬한 화이관(華夷觀)과 양이주의(攘夷主義)의 입장에 서서 갑오개혁을 부정하고 구래의 봉건적 지배체제의 회복을 주장했으며,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을 추진하는 독립협회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라 칭하며 연호를 제정함은 종사(宗社)가 거의 멸망 지경에 이른 현시점에 있어서 명실(名實)이 일치하지 않는 헛된 일이라며 그 철회를 요구했다. 그해말에는 중추원의 설치를 건의한 자 및 박영효의 등용을 상소한 자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만민공동회가 열려 헌의6조(獻議六條)를 제출하는 등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자 독립협회류는 일체 혁파할 것이며 주모자를 모두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1900년 거주지를 충청도 정산으로 옮긴 후 홍천·지평·제천·안동·경주 등지를 여행하면서 친척과 벗들을 방문하고 강회(講會)를 여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2월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8월에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상경하여 자문에 응할 것을 요청하고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의 벼슬을 내렸다. 1905년 1월 고종을 면담하고 국세가 금일과 같이 위란(危亂)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까닭은 민비학살사건 이후 복수심이 결여된 때문이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왕이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재택용(人才擇用)·취렴금지(聚斂禁止) 등 5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상소를 올려 일본의 침략을 비판했다. 그의 반일활동을 계기로 김학진(金鶴鎭)·허위(許蔿) 등의 반일상소가 잇따르자 그해 3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포천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며칠 후 다시 상경하여 상소문을 작성했으나 재차 강제 송환되었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전국에 걸쳐 반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포고팔도사민 布告八道士民〉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는 동시에 비통한 전도(前途)를 예시하고, 오직 우리는 궐기투쟁해야 할 것과 을사5적을 토륙(討戮)할 것, 이들이 국왕을 압박하여 일본의 포로로 하려는 등의 흉악한 음모를 방지할 것, 결세(結稅) 상납을 거부하고 일본이 경영하는 철도를 타지 말고 군기(軍器)·총포(銃砲) 이외의 일본상품을 사지 말 것 등을 촉구했다.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전라북도 태인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고, 113명의 지사들과 〈동맹록 同盟錄〉을 작성한 후 호남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동참을 촉구했다.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창의구국(倡義救國)을 결의하고,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했으며, 격문을 열읍(列邑)에 보내 호응을 촉구했다.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인 〈기일본정부 奇日本政府〉에서는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이 저지른 기만적 배신행위를 16조목에 걸쳐 열거하면서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해 하루 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태인읍을 무혈점령하여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했으며, 이튿날 정읍에 도착해 무기와 병력을 증강했다. 다시 순창으로 행군, 많은 주민과 이속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여 소총과 화약 등 무기를 수합했으며, 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의병의 수는 500명에 달했다. 이때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출동하자 이를 물리쳤다.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의병 수는 900명으로 증가했으며 소총 등의 무기를 갖추게 되어 전력이 증강되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고종의 선유조칙을 전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날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진위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임병찬·고석진(高石鎭) 등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임병찬과 함께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嚴原衛戍營)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으로 사절(死節)하기로 결심하고, 임병찬에게 구술(口述)로 유소(遺疏)를 전했다.

 

유소에서 그는 왕에게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국제관계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은 반드시 미국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단발조치가 철회되자 단식을 중지했으나 그해 11월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했다. 이듬해 1월 유해가 봉환되었다.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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