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양 미 술 자 료

[스크랩] [이진숙의 `그림, 시대를 말하다`](1) ‘중세의 가을’ 부르고뉴 공국 이야기

bizmoll 2013. 11. 1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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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의 `그림, 시대를 말하다`]

 

(1) ‘중세의 가을’ 부르고뉴 공국 이야기

 

…패러다임 전환 때마다 그림이 ‘전령’ ‘중세의 종말’ 알린 ‘부르고뉴’ 그림들

 

“사고방식, 과학적 패러다임과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를 예고하는 징후를 알아채려면 공공정보도서관보다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것이 더 낫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의 저자인 레지스 드브레의 주장이다. 화가들은 전혀 박식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들의 예민한 촉수는 가장 적은 정보로도 시대의 특성과 그 변화의 방향을 감지해낸다는 말이다. 본능적인 직관에 의존하며 때로는 직설화법으로, 때로는 간접화법으로 그림은 시대를 말한다.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인 중세에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기에는 많은 그림들이 쏟아져 나왔다. 흔히 ‘암흑시대’라고 알려져 있지만, 중세의 마지막은 화려했다.

미술 용어로는 국제 고딕 양식이라 불렀고, 네덜란드 역사학자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이라는 로맨틱한 말을 만들어 냈다. 우리의 첫 번째 이야기는 15세기 부르고뉴 지방에 관한 것이다.

한때 프랑스와 어깨 겨눴던 부르고뉴

 

그림 ➊ 랭부르 형제,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 中 5월, 1413~1416년.

 

 

“파리는 프랑스의 머리요, 샹파뉴는 심장, 부르고뉴는 위장이다.”

멋진 와인과 풍부한 식재료가 공급되는 풍요로운 땅이 바로 부르고뉴라는 말이다. 부르고뉴는 지금은 프랑스의 일부(위장)지만, 한때 부르고뉴는 프랑스와 어깨를 겨누던, 화려한 문화를 가진 융성한 공국이었다.

부르고뉴공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 보석 같은 작품들이다.

14~15세기 부르고뉴의 전성기를 이끈 발루아 가문의 궁전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으로 유명했다. 랭부르 형제가 그린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는 그들의 화려한 궁정 생활을 잘 보여준다. 기도서는 달력과 함께 시간과 계절에 어울리는 기도문들과 화려한 채색 삽화를 담고 있는 책이다.

그림 ➊은 그중 ‘결혼의 달’ 5월의 장면이다. 신랑, 신부는 사랑의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발끝의 강아지들도 곧 사랑을 나눌 태세다. 결혼식 행렬의 차림새와 말의 치장이 예사롭지 않다.

랭부르 형제는 세밀한 붓질로 흥겹고 호화로운 장면을 그려냈다. 발루아 왕조를 연 장 2세의 셋째 아들인 베리 공작은 화가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청금석에서만 얻어지는 가장 값비싼 물감인 울트라마린 블루를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6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림의 귀족적인 파랑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프랑스 전체는 영국과 백년전쟁(실제로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으로 진행됨)을 겪고 있었다. 1400년 무렵부터 소빙하기가 시작돼 전 유럽이 추위에 떨었다. 유럽을 휩쓴 페스트로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했다. 인구 감소는 노동력의 가치를 높였다. 봉건 영지에 귀속돼 있던 농노들은 임금을 받는 자유노동자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도시에 모여드는 임금노동자들의 출현은 봉건적 관계를 해체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서에는 농민과 귀족만이 등장한다. 화가들은 주문자의 뜻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보호하에 있는 선량한 농부와 자신들로만 이뤄진 ‘중세적 삶’을 사랑했다. 기도서 자체는 중세적인 형식이었지만, 호화로운 세속적인 삶이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속적인 삶의 즐거움과 쾌락의 향취가 개개인의 삶까지 파고들어올 때 비로소 개인이 탄생하고 중세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들은 여전히 중세의 한복판에 있었고, 중세적 비극을 누구도 피하지 못했다. 1416년 베리 공작이 먼저, 그리고 몇 달 후 랭부르가의 재능 많은 세 형제 엘망, 폴, 장도 뒤를 이어 전염병의 희생자가 됐다.

 


아라스조약 이후 부르고뉴 역사 속으로…

 

그림 ➋ 얀 반 에이크, 롤랭 재상과 성모 마리아, 1437년. Jan van Eyck. Chancellor Rolin praying before the Virgin, known as The Virgin of chancellor Rolin.

 

 

페스트가 지나간 후에도 삶은 계속됐다. 부르고뉴 왕정의 예술 사랑도 계속됐다. 유화 기법을 최초로 사용한 미술가로 잘 알려진 얀 반 에이크는 부르고뉴 왕정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1437년 그가 그린 ‘롤랭 재상과 성모 마리아(그림 ➋)’는 부르고뉴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니콜라스 롤랭은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손을 모으고 있지만 재상은 화면의 절반을 차지한다. 금실로 수놓은 밍크털이 달린 재상의 코트는 성모 마리아의 붉은색 옷보다 더 화려하다. 그의 성공에는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다. 연대기 작가 샤틀랭은 “그는 마치 지상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재산을 거둬들였다”라고 표현할 정도다.

이 그림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아라스 조약(1435년)을 체결한 직후에 그려졌다. 1419년 부르고뉴의 군주가 프랑스 왕족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과의 백년전쟁 와중에 부르고뉴는 영국의 편을 들게 된다. 프랑스가 프랑스를 배신한 사건인 영국과 부르고뉴의 동맹을 주도한 것도 롤랭이었다. 사실 영국과의 교역이 중요했던 부르고뉴의 국익을 위한 선택이었다.

16년 뒤 롤랭은 다시 아라스 조약의 체결을 주도한다. 이 조약으로 부르고뉴는 프랑스와의 봉건적인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또 부르고뉴를 자기 편으로 만든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현실 정치가 롤랭은 이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역사를 한 페이지 또 기록한다. 그림처럼 롤랭은 성모 앞에서 기도하고 참회할 일이 많았다. 기도하고 있는 저 두 손으로 그는 잔 다르크(1412~1431년)를 영국에 팔아넘겼다.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 동안 영국군을 무찔러서 수세에 몰린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다. 그러나 아라스 조약 체결 전, 영국 편을 들고 있었던 부르고뉴는 잔 다르크를 생포해서 영국군에게 팔아넘긴다. 1431년 마녀로 낙인찍힌 잔 다르크는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화형을 당했다. 잔 다르크를 판 대가로 받은 어마어마한 거액의 일부가 재상의 주머니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엑스레이 검사를 해보니 반 에이크가 원래는 재상을 손에 커다란 지갑을 든 모습으로 그리려고 했었던 흔적이 발견됐다.

현실적인 잔혹함에 어울리지 않게 롤랭은 선행으로도 유명했다. 롤랭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해서 기증했다. 본(Beaune)에 위치한 병원에는 거대한 포도밭이 딸려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병원은 이 포도밭에서 수익을 얻고 있다. 그림 속 재상의 머리 부근 창 밖에 그 포도밭이 보인다.

 


백년전쟁 끝나고 르네상스 시작

 

 

그림 ➌ 장 푸케, 천사들에 둘러싸인 동정녀, 1452년. Jean Fouquet

 

 

비스마르크에 비견할 만한 최고의 재상이었지만,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안 돼 결국 부르고뉴가 프랑스로 합병됐기 때문이다. 그가 체결한 아라스 조약의 결과였다. 그는 이제 반 에이크의 그림과 본의 병원으로, 그리고 포도주로만 기억된다.

아라스 조약으로 부르고뉴를 다시 프랑스 편으로 만든 샤를 7세는 파죽지세의 기운으로 백년전쟁을 끝맺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왕이었던 그는 미술사에서는 장 푸케가 그린 ‘천사들에 둘러싸인 동정녀(그림 ➌)’로 이름을 남겼다. 잔 다르크 덕분에 왕위에 올랐지만, 샤를 7세는 영국군의 손에서 그녀를 구해내지 않았다.

 

푸케의 그림은 이 냉혹한 군주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잘록한 허리의 성모 마리아는 하얀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랭부르 형제의 그림에서도 나오는, 이마를 훤히 드러낸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중세 말 마리아 숭배는 극에 달해서 마리아는 구원의 여신이자 동경의 여인이 됐지만, 이 그림은 도가 지나치다. 뒤의 천사들도 붉은 색과 푸른색 두 가지 색으로만 그려져 장식적인 효과에 충실하다. 성과 속이 교차하면서 묘하게 마음을 설레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모델은 샤를 7세의 애첩인 아그네스 소렐(1422~1450년)이다. 그녀는 역사에 기록된 최초로 공인된 애첩이었다. 왕은 그녀에게 성(城)을 하사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사치스럽고 오만한 성격은 많은 적을 만들었다. 28세에 넷째 아이를 임신했을 무렵 그녀는 갑자기 죽었다. 이질에 걸렸다고 알려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샤를 7세의 아들(훗날 루이 11세)을 의심했다.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소렐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측근이 독약을 투여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2005년 남아 있는 유해에 관한 과학적인 조사를 실시한 결과, 그녀의 사인은 수은 중독임이 밝혀졌는데 이게 타살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림 속의 대리석처럼 유난히 흰 피부는 그녀가 죽은 여인이라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살아생전의 그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아름다움을 위해 그녀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그녀가 죽은 지 2년 뒤, 죽은 여인을 그리워하는 왕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상의 여인이 아닌 천상의 여인으로 아그네스 소렐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림이 완성된 다음 해인 1453년, 샤를 7세는 백년전쟁을 끝냈다. 전쟁이 끝나고 부르고뉴를 합병한 샤를 7세는 근대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중세는 저물어 가고 근대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근대의 해는 프랑스보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떴다.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매경이코노미는 인문학 열풍 시대를 맞아 미술과 역사를 함께 조망할 수 있는 새 연재물 ‘이진숙의 <그림, 시대를 말하다>’를 선보입니다.

이진숙 평론가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러시아국립인문대학 미술사학부에서 말레비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월간에세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림은 직간접적으로 시대의 정신을 예감하고 반영한다’는 기치 아래 중세시대 미술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 속 시대정신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진숙 미술평론가 ‘러시아 미술사’ ‘미술의 빅뱅’ 저자]

 

 

 

 

Jan van Eyck . The Lucca Madonna

 

 

 

Jean Fouquet . Virgin and Child.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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