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양 화 (명화)

[스크랩] 박희숙의 미술관 / 행복한 휴식,잠. 남자와 여자.

bizmoll 2013. 7. 3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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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박희숙의 미술관]

괴물은 왜 밤마다 女人을 찾아오는가

 

행복한 휴식, 잠

 

 

‘악몽’, 푸즐리, 1781년, 캔버스에 유채, 101×127,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건강을 지키려면 잘 먹는 것뿐 아니라 잘 자는 것도 중요하다. 숙면이 혹사한 몸을 회복해주는 덕분이다. 우리는 삶의 3분의 1을 잠을 자면서 보내지만 매일 밤 숙면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많아서 선잠을 자거나 꿈을 꾸기 때문이다.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1774~1833)의 ‘이리스와 모르페우스’는 꿈을 그린 작품이다. 그리스·로마신화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데 꿈의 신 모르페우스는 외모나 목소리, 그리고 걸음걸이까지 완벽하게 사람을 흉내 내면서 사람들의 꿈에 나타난다. 모르페우스의 집에는 상아로 만든 문과 뼈로 만든 문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가 상아로 만든 문으로 나오면 기억에 남는 꿈을, 뼈로 만든 문을 나오면 기억하지 못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모르핀이란 말도 꿈의 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고대의 그림을 보면 모르페우스 주변에 양귀비가 있다.

 

‘이리스와 모르페우스’를 보면 모르페우스가 침대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다. 어린 천사가 구름 위에 앉은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를 안내한다. 이리스는 헤라 여신의 명을 받고 모르페우스를 깨우러 온 것이다. 헤라 여신은 지상세계가 모르페우스로부터 벗어나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자 무지개를 만든 뒤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신들의 전령인 이리스를 보냈다.

 

게랭은 이 작품에서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그는 그리스신화를 통해 현실적 아름다움을 초월한 이상의 세계를 표현했다. 게랭은 작품 활동 초기에 역사적 사건을 주로 다뤘으나 후기에는 고전 신화를 연구해 그림 주제로 삼았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은 위장된 소원의 실현이며, 억압된 성적 욕망의 발현”이라고 했다. 무의식 세계에 있던 욕망이 꿈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의식 속 욕망의 세계를 그린 작품이 요한 하인리히 푸즐리(1741~1825)의 ‘악몽’이다.

푸즐리는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극심한 질투에 시달렸다. 질투심에 괴로워하던 어느 날 그 여인과 몸을 섞는 꿈을 꿨고 그러한 체험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 뒤에 푸즐리가 그린 소녀의 미완성 초상화는 그가 짝사랑한 여인으로 ‘악몽’의 탄생 배경을 설명한다.

 

여인은 상반신을 침대 밖으로 떨어뜨린 채 누워 있다. 잠을 자면서도 괴로운 듯 목과 두 팔이 젖혀져 있다. 배에 작은 괴물이 올라타 정면을 노려보고 있다. 침대 뒤 커튼 사이로 커다란 말이 얼굴을 내밀어 여인을 바라본다. 눈동자 없이 흰자위만 보이는 말이 작은 괴물을 태우고 왔다. 괴물은 밤의 방문자다.

 

이 작품에서 반은 원숭이며 반은 악마인 작은 괴물은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악몽의 힘을 상징하는데, 이 괴물은 여인이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커튼 뒤 말은 프랑스와 독일의 민간 전설에 등장하는 몽마다. 전설 속 몽마는 땅속 깊은 곳에 사는 사악한 존재. 말은 이 작품에서 악마다. 말의 눈동자가 없는 것은 뒤러의 ‘기사와 죽음과 악마’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 악몽을 암시한다.

 

‘악몽’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 그리고 실제 이야기를 그린 것이 아니라 최초로 관념을 묘사한 것으로, 낭만주의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꼽힌다. 푸즐리는 문학과 연극에 심취해 고대 신화 및 종교를 주제로 특이한 분위기의 작품을 남겼으며 ‘악몽’으로 화단에서 주목받았다.

 

잠을 길게 잔다고 피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많이 자면 잘수록 잠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일쑤다. 낮잠이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없애주는 이유는 짧지만 달콤한 수면을 취하기 때문이다. 낮잠은 피로를 풀어주는 것은 물론 기억력까지 높여주기에 스페인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권장한다.

 

 

(왼쪽)‘이리스와 모르페우스’, 게랭, 1811년, 캔버스에 유채, 251×178,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시 미술관 소장. (오른쪽)‘낮잠’, 루이스, 1876년, 캔버스에 유채, 88×111,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낮잠으로 일상의 피로를 푸는 여인을 그린 작품이 존 프레더릭 루이스(1805~1876)의 ‘낮잠’이다.

 

귀부인이 소파에 잠들어 있고 화면 오른쪽에 있는 테이블에는 하얀 백합과 새빨간 양귀비가 활짝 피어 아름다움을 뽐낸다. 방 안의 가구를 비롯해 소파에 놓인 부채 등도 상당히 동양적인 분위기가 난다.

 

녹색 커튼이 따사로운 햇살을 차단하고 있지만 여인 머리맡 쪽 창문은 살짝 열려 있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오후의 바람은 여인이 잠을 자는 이유를 설명한다.

 

루이스는 이 작품에서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순간을 양귀비로 표현했는데, 빨간 양귀비는 꽃말처럼 영원한 잠을 의미한다. 그는 극적인 효과를 주려고 양귀비와 흰 백합을 꽃병에 함께 그려넣었는데 백합은 이 작품에서 서구 문화가 엿보이는 유일한 대상이다. 백합은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꽃이다.

 

 

 

 

 

 

남자는 왜 값비싼 굴만 먹었을까?

 

굴과 스태미나와 사치의 상관

 

‘굴이 있는 점심식사’, 트루아, 1735년, 캔버스에 유채, 180×126, 프랑스 상티에 미술관 소장.
굴이 제철이다. 굴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즐겨 먹는 음식으로 바다의 우유라고 부를 만큼 영양이 풍부하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스태미나 식품으로 꼽혔다. 스태미나를 위해 굴을 먹는 남자들을 그린 작품이 ‘굴이 있는 점심식사’다.

 

푸른색 옷을 입은 하인이 굴이 담긴 쟁반을 원형 식탁 중앙에 올려놓고 있다. 화면 왼쪽의 하인은 무릎을 꿇고 굴 껍질을 깐다. 의자에 앉은 붉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하인을 향해 손을 벌리고 있다. 화면 오른쪽의 하인은 한쪽 발로 쓰레기통을 밟고 서서 굴 껍질을 깐다. 식탁에 앉은 남자들이나 주변에 서 있는 남자들 모두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굴을 집어 먹느라 정신없다. 식탁에 놓인 빵은 아무도 먹지 않아 그대로 있으며, 얼음 통에 담긴 와인도 뚜껑을 아직 따지 않았다. 화면 앞쪽에 수북이 쌓인 굴 껍질은 남자들이 점심식사 때 먹은 굴의 양을 의미한다.

 

장프랑수아 드 트루아(1679~1752)의 이 작품에서 황금빛 조각상으로 장식한 식당은 굴을 먹는 남자들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남자들을 내려다보는 비너스와 큐피드 조각상은 사랑을 암시한다. 남자들이 게걸스럽게 먹는 굴이 스태미나에 좋은 음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장치다. 이 작품은 루이 15세가 베르사유 궁전 식당을 장식하고자 의뢰한 것이다. 화가는 루이 15세의 요청대로 식사 장면을 밝고 경쾌하게 표현했다.

 

카사노바가 연인과 뜨거운 밤을 보내려고 하루에 생굴 50개를 먹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남자가 굴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밤을 뜨겁게 보내기 위해서다. 연인과 알콩달콩한 밤을 보내고자 굴을 먹는 남자를 그린 작품이 헨리 스트레조의 ‘굴을 먹고 있는 사람’이다.

 

와인과 빵 그리고 굴을 담은 쟁반이 놓인 식탁에서 젊은 남자는 손으로 굴을 맛있게 먹고 있다. 식탁 위 은색 주전자는 남자의 집안이 부유하다는 것을 상징하며 붉은색 식탁보를 덮은 흰색의 식탁보는 격식을 갖춘 상차림임을 암시한다. 회색 재킷 안 흰색 블라우스는 남자가 귀족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남자의 옷차림과 식탁의 음식은 남자가 굴을 먹는 이유를 설명한다. 당시엔 굴이 비싸서 서민은 자주 먹지 못했다.

 

작가는 격식 있는 상차림과 달리 손으로 굴을 집어 먹는 장면을 그려 육체적 쾌락을 암시했다. 식탁에 홀로 앉은 모습은 비밀스러운 연애를 나타내는 것이며, 값비싼 굴만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모습은 남자가 굴을 먹는 이유를 강조한다.

 

예전에는 굴이 스태미나에 좋은 줄은 알지만 비싼 탓에 보통 남자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양식 덕분에 굴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누구나 먹을 수 있게 됐다. 기술의 발달이 밤의 황제가 되겠다는 남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굴을 먹고 있는 사람’, 스트레조, 1640~1650년경, 캔버스에 유채, 소장 장소 불명(왼쪽). ‘부자와 라사로가 함께 있는 굴 정물’, 비어르트, 1605~1610년, 캔버스에 유채, 49×61, 개인 소장.

 

굴을 소재로 부자를 비판한 작품이 오시아스 비어르트(1580~1623)의 ‘부자와 라사로가 함께 있는 굴 정물’이다. 이 작품은 성서의 한 장면을 묘사했다.

 

누가복음의 일화 한 토막. 먹는 즐거움을 인생 최대의 행복이라고 여겨 매일 같이 잔칫집처럼 호사스러운 음식을 먹는 부자가 있었다. 그의 집앞에서 가난한 라사로는 먹다 버린 음식으로 배고픔을 해결하다 결국 병들어 죽었다. 한편 라사로와 달리 매일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던 부자는 너무 먹어 죽었다.

죽은 후 라사로는 아브라함의 잔치에 초대돼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지만 부자는 지옥으로 떨어져 생전에 경험하지 못한 극심한 배고픔의 고통을 느낀다.

 

식탁에는 굴과 빵이 가득 담긴 접시와 와인, 밤, 그리고 사탕과 과자가 있는데 식탁 앞 부분에는 십자가 형태의 과자가 놓여 있다. 십자가 과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달다’는 것을 의미한다.

밤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데 껍질과 알맹이는 구약과 신약을 각각 나타낸다. 와인은 성찬을 뜻하는 것이다. 화면 오른쪽에는 많은 사람이 식사 중인 식탁 앞에 벌거벗은 남자가 누워 있는데, 벌거벗은 남자는 라사로를 나타내며 화면 앞의 식탁은 아브라함의 잔치를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 벌거벗은 라사로와 대조적으로 풍요로운 식탁은 부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비어르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안트프로펜 출신의 여성 정물화가로 사치를 경고하고자 굴을 주제로 정물화를 다수 제작했다는 정도. 비어르트는 세부묘사가 특히 뛰어나 이 작품에서도 반짝이는 유리잔, 먹음직스러운 굴, 바삭거리는 빵 등 사물의 다양한 질감을 능란하게 표현했다.

 

 

 

 

 

아내는 돈만큼 섹스도 좋아한다

 

남자와 여자

 

‘시장 풍경’, 보이클래어, 1567년, 목판에 유채, 149×215,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소장.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아내와의 섹스에 흥미를 잃는다.

속된 말로 잡은 물고기에 미끼 주는 것을 봤느냐는 식이다.

여자는 반대다.

결혼과 동시에 섹스에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 혼전 임신에 대한 불안이 사라진 까닭이다.

 

남편의 무관심 탓에 바람난 아내를 그린 작품이 요아킴 보이클래어(1533~1574)의 ‘시장 풍경’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시장 풍경은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인기 있는 소재였다. 수많은 과일, 채소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은밀한 성생활을 암시하는 좋은 소재여서 화가들은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경고로 시장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화면 중앙에서 젊은 여인은 과일을 팔고, 젊은 남자는 과일을 고르는 중이다. 젊은 여인 뒤로 노파가 물레 가락을 들고 앉았다. 이 작품에서 물레 가락은 노파가뚜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데, 젊은 남녀가 서로 시선을 피하지만 뚜쟁이의 등장은 두 사람이 이미 눈이 맞았음을 나타낸다.

 

화면 왼쪽 젊은 남자의 복장을 보면 그가 새 사냥꾼임을 알 수 있다. 새 사냥꾼은 네덜란드어로 바람둥이라는 뜻을 가졌다. 젊은 남자는 두 개의 화살이 교차한 장식으로 멋을 낸 모자를 썼는데 화살은 에로스를 상징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과일과 채소는 당시 한 계절에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배추는 겨울, 포도는 9월에 수확했다. 또한 이 작품 속 과일은 당시 최음제로 알려졌거나 성적 표현을 나타낼 때 사용하던 것으로, 달콤한 사랑을 의미한다.

 

 

‘에로틱한 장면’, 피카소, 1903년, 종이에 유채, 개인 소장(위). ‘연애편지’, 페르메이르, 1669~1675년경, 캔버스에 유채, 44×38,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어떤 남자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가끔씩 찔끔찔끔 아내와 섹스를 한다. 그것도 마치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남편과의 섹스가 연중행사인 아내는 밤낮으로 젊은 남자의 품이 그립다.

 

젊은 남자와의 달콤한 섹스에 빠진 여인을 그린 작품이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에로틱한 장면’이다. 상의만 걸친 남자는 좁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다리를 벌렸고, 벌거벗은 여자의 긴 머리칼이 남자의 성기를 가렸다.

 

목까지 채운 줄무늬 셔츠, 짧게 깎은 머리, 앳된 얼굴은 남자가 소년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화면 속 여자의 풍만한 가슴은 농익은 여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여자가 얼굴을 남자의 성기에 묻었는데, 소년이 머리를 감싼 모습은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구겨진 침대 시트는 섹스 중이라는 것은 의미하며, 쿠션에 상체를 기대고 앉은 소년의 자세는 편안하게 즐긴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아무 장식이 없는 방과 좁은 침대는 학생의 방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화면 오른쪽 젖힌 커튼과 정면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은 섹스 경험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나타낸다. 피카소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전통예술아카데미 실습시간에 데생 연습을 하면서 누드모델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했다.

 

남자는 사회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세상 그 어떤 곳에든 간다. 남편이 아내에게 무관심한 이유 중 하나가 여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만족스러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는 돈만큼 섹스도 좋아한다. 20대 과부는 수절해도 30대 과부는 수

절하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아내는 긴긴 밤을 홀로 외롭게 보내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성공도 좋지만, 집을 장기간 비워두면 가정의 평화는 깨지게 마련이다.

 

남편의 부재로 바람난 아내를 그린 작품이 얀 페르메이르(1632~1675)의 ‘연애편지’다. 이 작품은 부도덕한 행동을 경고하고자 만들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여자가 편지를 쓰는 것을 혼외정사로 이어지는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했다.

 

묶인 커튼 사이로 안주인이 벽난로 옆에 앉아 편지를 건네준 하녀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주인과 하녀라는 신분을 뛰어넘어 연애를 공모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왼쪽 벽에는 지도가 흐릿하게 보이고 안주인은 무릎에 류트(16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악기)를 올려놓았다.

 

류트는 보통 행복과 화목을 나타내지만 혼외정사를 다룬 그림에서는 향락과 음란, 경박을 상징한다. 류트를 무릎에 올려놓은 안주인의 모습은 음악을 연주하면서 사랑의 몽상에 잠긴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녀 머리 위쪽으로 배경 구실을 하는 두 점의 그림이 보인다. 아래쪽 그림에서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사랑의 위험을 암시한다. 커튼에 가려 반쯤만 보이는 그림에서는 남자가 길을 걷는데, 그 길은 사랑의 여정을 암시한다.

 

페르메이르는 이 작품에서 바닥에 벗어놓은 실내화를 통해 여자의 음부를 나타냈다. 비스듬히 문에 기댄 빗자루는 안주인의 사랑이 부정한 연애라는 것을 암시한다. 바닥에 뒹구는 쿠션과 옷가지는 여자가 사랑에 빠져 집안일을 소홀히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 박희숙은 서양화가다. 동덕여대 미술학부,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인전을 9회 열었다. 저서로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클림트’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등이 있다.

/ 주간동아

 

 

 

 

상대방 눈치 보지 않고 ‘자신만의 기쁨’ 열망할 때도 있는 법

박희숙의 명화읽기-때로는 섹스의 편안함을 즐겨라

 

 

1903년, 종이에 유채

<에로틱한 장면> 1903년, 종이에 유채

섹스 하는 시간은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섹스를 통해 천상의 기쁨을 누리는 시간은 11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11분 동안만 섹스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섹스다. 섹스의 목적은 즐거움이지 종족 보전이 아니다.

섹스의 기쁨을 진정으로 누리고자 한다면 섹스하는 내내 서로의 몸을 탐구해야만 한다. 그것이 상대방의 최소한의 예의 이기 때문이다. 자신만 천국을 경험했다고 해서 상대방의 기쁨을 외면한다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누가 보상도 없는 힘든 일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섹스는 천국으로 함께 동행 하자는 것이지 너는 천국, 나는 지옥에서 따로 있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 기쁨만 소중하다면 돈주앙처럼 유혹의 기술이 탁월해 매일 밤 다른 상대를 구하면 되겠지만 보통의 평범한 사람에게 돈주앙커녕 하고 싶을 때 마음껏 할 수 있는 상대도 없다.

유혹할 기술도 없고 그렇다고 경제력이 탄탄한 것도 아니라면 섹스라도 잘해야 사랑받는다. 그렇기에 섹스를 하는 동안 천국에 이미 갔다 왔을망정 상대에 대한 배려로 계속해서 서비스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럴 섹스를 즐기고 있는 남자

 

섹스 서비스마저 없다면 그나마 옆에 있는 상대도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별만 보게 만드는 남자를 사랑해 주는 여자는 없기 때문이다.

상대가 도망가지 않게 하려면 낮보다 밤에 더 신경을 써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한 번쯤 휴식이 필요한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하는 섹스보다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섹스 서비스를 받고 싶을 때가 있다.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날이면 날마다 탐구하다 보면 그것도 싫증나기 때문이다.

또 섹스 하는 동안 상대에 눈치를 보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오로지 자신의 기쁨만을 위해 섹스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다. 속된 말로 손 안 대고 코를 풀고 싶은 것이다.

남자가 섹스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신체가 허리다. 허리가 부실하면 튼실한 남성도 무용지물일 뿐이다. 허리힘만 좋다고 섹스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섹스 하는 동안 남자는 끊임없이 허리에 힘을 써야 하는 것이다.

남자가 편안하게 섹스를 즐기고 싶을 때 가장 선호하는 것이 오럴 섹스다. 오럴 섹스의 장점은 남자가 허리 힘 안 들이고 천국을 갔다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혀의 부드러움이 여자의 자궁과 가장 흡사하기 때문이다. 오럴 섹스를 즐기고 있는 남자를 그린 작품이 피카소의 <에로틱한 장면>이다. 상의만 걸치고 있는 남자는 좁은 침대에 비슴듬이 누워서 다리를 벌리고 있고 벌거벗은 여자의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지만 얼굴은 남자의 성기에 묻고 있다.

남자가 입고 있는 목까지 채워진 줄무늬 셔츠와 단정하게 짧게 깎은 머리와 앳된 얼굴은 어린 학생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여자의 풍만한 가슴은 성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자의 얼굴이 남자의 성기에 묻고 있는 것은 오럴 섹스 중이라는 것은 암시하며 머리를 감싸고 있는 소년의 손은 성적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구겨진 침대 시트는 섹스 중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쿠션에 상체를 기대고 앉아 있는 소년의 자세는 여자의 일방적인 서비스로 편안하게 섹스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1889년, 테라코타

<영원한 우상>1889년, 테라코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이 작품에서 아무 장식이 없는 방과 좁은 침대는 학생의 방을 암시하며 화면 오른쪽 커튼이 젖혀 있는 커튼과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시선은 섹스 경험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청소년의 심리를 나타낸다.

피카소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전통 예술아카데미 실습 시간에 데생 연습을 하면서 누드 모델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했다. 상상속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소년은 피카소 자신이다. 피카소는 14살 때 정부를 두었을 정도로 일찍이 성에 눈을 떴으며 자신의 성적 관심을 그림으로 풀었다.

키스…로댕의 <영원한 우상>

남자는 섹스 하는 동안 굵고 빠르게 끝내고 싶지만 여자는 가늘고 길게 하고 싶어 한다. 생리학상 남자는 천국의 문이 가깝고 여자는 멀어서다. 또한 여자에게 섹스는 몸의 대화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몸을 탐구하는 동안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더 느끼기 때문이다.

여자의 감정을 무시한 채 남자가 일방적으로 제 욕심만 채우고 끝내면 여자는 변비에 시달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헐떡거리다 끝나버린 섹스는 오히려 성적 욕망을 사라지게 만드는 게 아니라 미진함으로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차라리 기대하지 않게 시작하지나 말든지.

여자에게 성적 만족을 주는 것은 튼실한 남자의 성기가 아니다. 그저 섹스 하는 동안 내내 열심히 열정적으로 몸을 탐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자의 성적 만족은 남자의 키스로부터 시작된다. 여자의 몸을 키스로 탐구하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로댕의 <영원한 우상>이다.

젊은 여자는 무릎을 꿇고 한손으로는 남자의 머리를 잡고 있고 남자는 서서 손을 허리에 댄 채 여자의 풍만한 가슴에 키스를 퍼붓고 있다.

남자가 손을 허리에 대고 있는 것은 오로지 키스로 여자의 몸을 탐색하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내며 여자의 벌어진 팔은 남자를 받아들이겠다는 심리를 암시한다.

남자의 머리를 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여자의 손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하며 곧추선 여자의 유두는 성적 흥분 상태를 나타낸다. 손가락으로 발을 애무하고 있는 여자의 손은 채워지지 않은 성적 황홀감을 암시한다.

이 작품에서 남자는 키스를 통해 여자의 육체를 찬미하고 있다.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이 작품에서 여자 모델은 카미유 클로델이다.
19살의 카미유 클로델은 40대 중반의 중년인 로댕의 조수로 만나 연인 사이가 되었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 한창 사랑을 나누었을 때 제작된 것으로 로댕은 그녀와 사랑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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