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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詩에 빠지다
옛사람이 촛불 켜고 밤에 노닌 까닭은
이백 춘야연도리원서
봄날 밤 도리원 연회에서 지은 시문의 서(春夜宴桃李園序)
이백(李白)
무릇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이요(夫天地者, 萬物之逆旅)
시간은 긴 세월을 지나가는 나그네라(光陰者, 百代之過客)
부평초 같은 인생 꿈 같은데 즐긴다 한들 얼마나 되리(而浮生若夢, 爲歡幾何)
옛사람이 촛불 켜고 밤에 노닌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음이로다(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
하물며 따뜻한 봄날이 아련한 경치로 나를 부르고(況陽春, 召我以煙景)
천지가 나에게 아름다운 문장을 빌려주었음이랴(大塊假我以文章)
복숭아꽃 오얏꽃 핀 향기로운 뜰에 모여(會桃李之芳園)
천륜의 즐거운 일을 펴니(序天倫之樂事)
여러 아우들의 글 솜씨가 빼어나 모두 사련이거늘(群季俊秀, 皆爲惠連)
내가 읊은 시만이 강락에게 부끄러워서 되겠는가(吾人詠歌, 獨康樂)
그윽한 감상이 아직 끝나지 않고 격조 있는 담론이 점점 맑아지네(幽賞未已, 高談轉淸)
화려한 잔치를 벌여 꽃 사이에 앉고 새 모양 술잔을 주고받으며 달 아래 취하니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
아름다운 글이 없으면 어찌 고아한 심정을 드러낼 수 있으랴(不有佳作, 何伸雅懷)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금곡의 벌주 수에 따르리라(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
▲ 김두량·김덕하 ‘사계산수도’ 중 봄, 1744년, 비단에 연한 색, 8.4×184㎝, 국립중앙박물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는 이백(李白·701~762)이 봄 밤에 여러 형제들과 꽃 피는 정원에 모여 큰 잔치를 벌인 장면을 읊은 시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 시(詩)와 부(賦)를 지으며 담소를 나누고 술을 마셨는데 이때 지은 시를 모아 책으로 엮으면서 이백이 서문을 지었다.
이백의 아름다운 시를, 천년 뒤 남리(南里) 김두량(金斗樑·1696~1763)과 그의 아들 김덕하(金德夏·1722~1772)가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의 한 부분으로 그렸다. 꽃밭에 집을 지었는지 집 사이에 꽃을 심었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꽃이 다투어 핀 봄 밤, 대각선으로 배치된 화려한 누각에 사람들이 모였다. 넓은 마당에는 술과 안주를 나르는 하인들이 분주하고 시에는 언급되지 않는 두 마리 학까지 그려져 있다. 고고한 선비들이 지향하는 이상향임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하늘이 이백에게 시 쓰는 재주를 주었으니
‘사계산수도’는 봄과 여름을 한 폭에, 가을과 겨울을 다른 한 폭에 나누어서 두 폭으로 그렸는데, 이백의 시는 봄 풍경에 들어있다.
봄·여름 풍경의 도입 부분에는 ‘춘하도리원호흥경(春夏桃李園豪興景) 시갑자춘정월길일(旹甲子春正月吉日) 일영헌서(日寧軒書) 김두량도본(金斗樑圖本)’이라 써넣어 봄 풍경이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를 바탕으로 그렸음을 밝혀 주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봄밤(春夜)’이 ‘봄여름(春夏)’으로 바뀐 것이다.
‘봄여름 도리원의 멋진 풍경을, 갑자년인 1744년 봄 1월 좋은 날에 일영헌이 글씨를 쓰고 김두량이 밑그림을 그렸다’는 뜻이다. 일영헌이 누군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김두량을 아낀 영조의 호(號)로 추정된다. 김두량은 그의 아버지와 아들, 조카와 외가 식구들이 대거 화원(畵員)으로 활약한 대표적인 화원가문 출신이다. 영조는 김두량에게 ‘남리’라는 호를 하사할 정도로 특별하게 신임했다. 일영헌을 영조의 호로 추정하는 이유는, 두 번째 폭 ‘가을과 겨울’ 풍경에 창경궁의 ‘연경당(延慶堂)’에서 그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기 때문이지만 영조와 김두량의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계산수도’는 그 구성이 독특하다. 많은 작가들이 ‘사계산수도’를 그릴 때 네 계절을 한 폭씩 독립되게 그리는 것을 선호한다. 각 계절의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에서처럼 네 계절을 여덟 장면으로 그릴 때도 각각의 그림은 한 폭씩 개별적이다. 안견(安堅·조선 초기)을 비롯하여 이흥효(李興孝·1537~1593), 정선(鄭敾·1676∼1759), 김유성(金有聲·1725∼?), 정수영(鄭遂榮·1743∼1831) 등 많은 작가들이 시대를 불문하고 이런 형식으로 그렸다. 그런데 김두량은 각 폭으로 그리는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왜 굳이 붓질이 까다로운 두루마리 형식을 선호했을까?
소소한 일상 속에 담담한 운치
계절과 계절이 만나는 지점은 칼로 자르듯이 명확하지 않다.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된다 해서 어제까지만 봄이고 오늘부터 갑자기 여름이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봄은 여름의 시작에 걸쳐 있고, 여름은 봄의 끝자락과 뒤섞여 있다. 계절의 자리바꿈은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어 그 변화과정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김두량이 두루마리 형식을 빌려 봄과 여름을 직조해 놓은 이유는, 단절할 수 없는 계절의 연속성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화면 왼쪽에서 학을 따라 대문 밖으로 나가면 서서히 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김두량의 ‘사계산수도’를 직접 보게 되면 우선 그 크기의 기이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봄·여름을 그린 그림은 가로 길이가 184㎝임에 반해 세로 길이는 8.4㎝다. 8.4㎝는 우리가 요즘 들고 다니는 명함의 가로 길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무척 짧다. 때문에 그림을 감상하려면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봐야 한다.
김두량은 왜 이렇게 좁은 화면을 고집했을까?
주문자의 요구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선택이었을까.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화면이 작은 탓인지 쓱 보면 눈에 띄는 장면도 없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만이 담겨 있다. 장기 두고 담소하고 탁족하고 낚시하는 여름 장면은 물론 새참을 내가고 추수하고 타작하는 가을 장면 그리고 집안에서 대화하고 길쌈하고 들판에서 사냥하는 겨울 장면까지 모두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다. 너무도 평범하여 큰 화면에 드러내놓고 그리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흔한 일상이다. 사계의 시작은 이백의 화려한 시에서 출발한 김두량이 나머지 계절은 왜 평범함으로 채웠을까.
도리원에서의 이백의 잔치도 평범하긴 마찬가지였다.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도, 기념할 만한 날도 아니었다. 이백이라는 천재 시인이 아름다운 시를 지어 그날의 정경을 기념하였기 때문에 불멸이 되었다. 김두량이 ‘사계산수도’에서 전하고 싶은 내용이 그것이 아니었을까.
진부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이라는 것을. 대상을 경이롭게 바라볼 때 세상의 모든 일상은 특별하다는 것을.
/ 주간조선
“그림, 詩에 빠지다” 기획 의도
얼마 전에 저는 뇌종양 수술을 받았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병명을 처음 들었을 때 꼭 남의 얘기인 것 같아 믿을 수 없었지만 수술까지 의연하게 잘 마쳤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 어쩌면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마음공부를 잘 한 것 같아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시간이 참으로 길고 지루해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거울 속에 보이는 빡빡 머리 얼굴도 낯설었고, 인조인간처럼 머리에 꿰맨 자국을 보는 것도 힘 빠지는 일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로지 누워서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이 계속되자, 왠지 제가 쓸모없는 인간인 것 같고 다시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자괴감이 수시로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수술이 단시간의 고통이었다면 회복기간은 은근히 사람을 피 말리는 장시간의 고통이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가 갖는 자격지심에 빠져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누구한테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詩를 쓰는 詩人한테 한 통의 메일이 왔습니다. 잠깐 옮겨 보겠습니다.
“일년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동짓날입니다. 유달리 팥죽을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그날이 지나면 어둠이 더 이상 길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동지만 지나면 벌써 새해가 된 듯 마음이 달뜨곤 한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제 막 동지를 지나셨으니 앞으론 해가 길어질 날만 남았네요. 목련이나 매화처럼 봄에 꽃을 피우는 꽃들은 사실 봄에 꽃이 피는 게 아니랍니다. 이미 지난 가을에 꽃피어 겨울눈 속에 숨기고 있다가 봄에 나오는 것이랍니다.
아무리 팍팍하고 힘겨운 삶일지라도 누구에게나 꽃피는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생의 절정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온몸이 으스러지고 터지면서 마침내 꽃이 되고 푸른 잎이 되는 나무들처럼 겨울의 심장을 건너야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는 지금 삶의 가장 뜨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봄이 올 것입니다. 안으로 숨겨 두었던 그 뜨거움이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덥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게 할 테니까요.”
그러면서 황지우 시인의 시 한 편을 첨부해서 보냈습니다.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삼 도
영하 이십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 도 영상 십삼 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저는 그 날 ‘앞으론 해가 길어질 날만 남았다’는 그녀의 위로를 받고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詩 한 편이 주는 위로와 격려가 이러합니다.
그런데 詩를 읽고 감동을 받은 사람은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화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가들은 詩를 읽은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여 붓을 들었습니다. 때로는 詩 속의 한 구절이 화가의 추억을 건드릴 때도 있었고 때로는 잊고 있었던 꿈을 되찾을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회한을, 때로는 그리움을, 때로는 인생 무상과 삶의 관조를 건드릴 때도 있었는데 어느 경우든 화가들이 붓을 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림은 詩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화가들의 마음을 가장 많이 사로잡은 시인은 누구였을까요? 왕유와 두보, 이백과 소식이었습니다. 고개지와 도연명, 백거이와 구양수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두목, 가도, 왕발, 유장경, 위응물, 송지문, 유종원, 최치원 같은 인재를 알아보는 화가들도 있었습니다.
“그림, 詩에 빠지다”에서는 화가들이 사랑한 詩를 살펴보려 합니다.
화가들이 시를 읽고 그림으로 형상화한 작품을 보면서 ‘詩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詩가 있다’는 경지가 어떤 것인 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연재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림을,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시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화가들이(혹은 화가들에게 시가 담긴 그림을 부탁했던 사람들이) 이런 ‘시의도(詩意圖)’를 통해 추구했던 세계가 무엇이었는 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세계야말로 시대가 변해도 우리들이 가슴 속에 꼭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등불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와 그림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이번 연재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 드립니다.
조정육 합장
브로그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http://blog.daum.net/sixgar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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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夜宴桃李園序
무릇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이요(夫天地者, 萬物之逆旅)
시간은 긴 세월을 지나가는 나그네라(光陰者, 百代之過客)
부평초 같은 인생 꿈 같은데 즐긴다 한들 얼마나 되리(而浮生若夢, 爲歡幾何)
옛사람이 촛불 켜고 밤에 노닌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음이로다(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
하물며 따뜻한 봄날이 아련한 경치로 나를 부르고(況陽春, 召我以煙景)
천지가 나에게 아름다운 문장을 빌려주었음이랴(大塊假我以文章)
복숭아꽃 오얏꽃 핀 향기로운 뜰에 모여(會桃李之芳園)
천륜의 즐거운 일을 펴니(序天倫之樂事)
여러 아우들의 글 솜씨가 빼어나 모두 사련이거늘(群季俊秀, 皆爲惠連)
내가 읊은 시만이 강락에게 부끄러워서 되겠는가(吾人詠歌, 獨康樂)
그윽한 감상이 아직 끝나지 않고 격조 있는 담론이 점점 맑아지네(幽賞未已, 高談轉淸)
화려한 잔치를 벌여 꽃 사이에 앉고 새 모양 술잔을 주고받으며 달 아래 취하니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
아름다운 글이 없으면 어찌 고아한 심정을 드러낼 수 있으랴(不有佳作, 何伸雅懷)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금곡의 벌주 수에 따르리라(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
역려(逆旅) : 나그네를 맞는 곳,여관(旅館), 逆은 맞이하다(迎).
광음(光陰) : 햇빛과 그늘 즉 시간을 말함, 세월(歲月)
백대(百代) : 한 世代는 30년, 百代는 영원함을 말함.
부생(浮生) : 정처(定處)없이 떠다니는 인생, 덧없는 인생.
병촉(秉燭) : 등불을 잡다. 등불을 밝혀 놓고 밤늦도록 노님.
양유이야(良有以也) : 良은 진실로, 참으로. 以는 까닭의 뜻. 진실로 까닭이 있음이라.
양춘(陽春) : 화창한 봄날씨, 봄은 양기(陽氣)가 충만(充滿)함.
소(召) : 부르다. 여기서는 초대(招待)하다의 뜻과 통함.
연경(煙景) : 연하(煙霞)의 경치, 봄날의 아름다운 경치.
대괴(大塊) : 천지(天地), 대지(大地), 조물주. 塊는 흙덩이.
가(假) : 빌려주다, 여기서는 부여(賦與)해주다. 즉 조물주는 나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재주를 빌려 주어 형제간의 즐거운 이날 밤의 풍경을 이렇게 쓴다는 얘기이다.
천륜(天倫) : 하늘이 맺어준 질서 .즉 형제. 芳園 꽃 동산.
군계(群季) : 많은 연소자(年少者), 아우들.俊秀 재주, 지혜(智慧), 풍채(風采)가 뛰어남
혜련(惠連) : 남조 송(南朝 宋)의 사혜련(謝惠連)(397- ? ), 십세에 시를 잘 지어 그의 형 령운(靈雲)은
그를 만나 시를 지으면 좋은 구(池塘生春草)가 얻어졌다 함.
오인(吾人) : 나를 가리키는 일인칭 지시대명사.
강락(康樂) : 사령운(謝靈雲, 385-433)이 강락후(康樂侯)에 봉해졌기 때문에 謝康樂이라 함.
그는 산수시(山 水詩)의 시조로 이태백이 그의 시풍을 특히 좋아하여 은근히 자신에 비유함.
참(慙) : 부끄러울 참.
강락(康樂) :안락(安樂)
유상(幽賞) : 그윽한 감상, 고요히 바라보며 즐김.
고담(高談) : 고상한 담론(談論) 혹은 고성(高聲)으로 말을 함.
전청(轉淸) : 점점 맑은 쪽으로 옮겨 감, 轉은 옮겨 감.
경연(瓊筵) : 옥과 같이 아름다운 자리, 곧 화려한 연회.瓊구슬 경. 筵대자리 연.
우상(羽觴) : 새깃 모양으로 된 술잔의 이름.羽 깃 우.觴 잔 상. 잔내다.
아회(雅懷) : 마음 속의 맑은 회포, 아취(雅趣)있는 마음.
여(如) : 만약, 만약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한다면.
금곡주수(金谷酒數) : 진(晉)의 석숭(石崇)이 금곡원(金谷園)에서 손님들을 초빙하여 연회를 베풀 때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술 석잔을 먹였다는 고사(故事).
金谷 :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의 서쪽 金水가 흐르는 골짜기.
石崇 : 東洋을 대표하는 대부(大富)였으나 녹주(綠珠)라는 애첩 때문에 아사(餓死)함.
陶淵明의 自祭文에도 비슷한 시귀가 있다.
逆旅之館(역려지관) 나그네길 인생 잠시 머물던 곳을 떠나서
永歸於本宅(영귀어본택) 영원히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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