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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감정학 박사 1호 이동천의 ‘예술과 천기누설’]

bizmoll 2013. 7. 3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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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학 박사 1호 이동천의 ‘예술과 천기누설’]

단원 풍속도첩 중 ‘서당’ 김홍도 그림이 맞다

 

화첩은 후대가 만들었어도 필획에 숨은 필력은 확실

 

 

 

 

2000년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열렸다. 필자의 스승인 양런카이(楊仁愷·1915~2008) 명예관장이 ‘최고 감정가(人民鑑賞家)’ 칭호를 받은 것을 기념한 특별전이었다. 전시 작품 대부분은 선생이 감정 공부를 위해 박물관 소장품을 똑같이 모사한 것이었다.

 

연구할 서화작품을 당시 창작 상황과 가깝게 그려보는 것은 감정 학습의 기본이다. 감정가 스스로 붓글씨나 그림을 흉내 낼 정도는 돼야 다른 사람 작품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가능하면 도장도 새길 줄 알고, 작품 표구 방식도 볼 줄 알아야 한다. 서화 감정이 과학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창작의 실천과 재구성을 통한 검증 방식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한국 미술사학계의 신선한 시도

 

최근 우리 미술사학계에서는 신선한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미술사가인 강관식 한성대 교수는 2012년 10월 26일자 아침 뉴스와 신문에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제527호 김홍도(1745~?)의 ‘단원 풍속도첩’ 25점이 모두 가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는 예로 ‘서당’(그림1)을 고쳐서 그린 ‘그림2’를 발표했다.

 

마침 그날은 필자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작품감정론Ⅱ’ 수업을 하던 날이었다.

필자는 2008년 ‘진상-미술품 진위 감정의 비밀’이란 책에서 ‘단원 풍속도첩’ 25점 중 ‘서당’ ‘서화감상’ ‘무동’ ‘씨름’ ‘활쏘기’ ‘대장간’은 진짜고, 나머지 19점은 두 명 이상의 위조자가 그린 가짜라고 주장했다.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필자와 견해를 달리한 강 교수의 주장 및 관련 보도에 대해 학생들의 질문이 잇따랐다.

 

강 교수의 논문 발표 요지문과 2012년 10월 26일자 ‘국민일보’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당’에서 왼쪽에 있는 앞사람 팔과 뒷사람 다리를 하나로 합체해 잘못 그렸다.

둘째, ‘무동’ ‘씨름’에서 왼손과 오른손을 바꿔 그렸다.

셋째, 그림 13점에 찍힌 ‘김홍도인(金弘道印)’은 나중에 찍은 불확실한 도장이다.

넷째, ‘단원 풍속도첩’은 김홍도의 풍속화를 배운 도화서 궁중화원들이 그렸다.

다섯째, ‘단원 풍속도첩’ 순서가 어지럽게 됐다.

여섯째, ‘단원 풍속도첩’은 원래 26점이었다.

 

첫째, 강 교수가 ‘서당’에서 앞사람 팔과 뒷사람 다리를 하나로 합체해 잘못 그렸다는 주장과 이를 그린 ‘그림2’를 살펴보자. 강 교수는 ‘그림3’이 앞사람 팔과 합쳐 오른발이 없는 사람으로 그려졌다고 했다.

 

강 교수가 그린 ‘그림2’처럼 사람이 두 무릎을 다 세웠을 때 나오는 자세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두 손을 앞으로 하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것이고, 하나는 무게중심이 뒤로 이동한 경우다. 여기서 ‘그림3’은 상체를 앞으로 숙인 자세다. 그렇다면 ‘그림4’처럼 두 손이 앞으로 나왔어야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는 ‘그림3’이 강 교수가 그린 ‘그림2’처럼 두 무릎을 세운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3 논란이 된 무릎 세운 학동의 모습.

그림4 1910년 찍은 길가에 앉아 장기 두는 조선 사람들.

그림5 1890년 찍은 조선의 서당 아이들(왼쪽부터).

 

 

‘그림3’은 왼발 무릎을 세우고 오른발은 접어서 엉덩이 밑에 깔고 앉은 자세다(그림5). ‘그림3’에서 앞사람에 가려 몸통과 떨어진 신체 부위는 하얀 바지의 허벅지와 종아리 부분이다. 이 자세는 ‘서당’에서 훈장에게 혼이 나서 눈물을 흘리는 학동의 앉은 자세와 같다. 결과적으로 강 교수 주장과 그가 그린 ‘그림2’는 잘못된 것이다. 독자 여러분도 ‘그림3’의 자세를 검증해보기 바란다.

 

강 교수의 주장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림3’ 아래쪽에 그린 ‘그림6’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다. 강 교수는 ‘그림6’이 “왼팔 어깨가 골절되어 튀어나온 것처럼 기형적으로 그려졌다”고 했으나, 이는 김홍도 그림의 특징이다. ‘서당’에서 훈장 어깨, ‘활쏘기’에서 활을 손보는 사람의 어깨, 김홍도가 1778년 그린 ‘행려풍속도병’ 중 ‘취중송사’에서 태수 어깨 등이 모두 ‘그림6’처럼 과장되게 그려졌다(그림7).

 

둘째, ‘무동’ ‘씨름’에서처럼 손을 잘못 그렸다고 해서 가짜는 아니다. 이는 거침없이 빠르게 그려 나가는 김홍도의 실수이며 시대적 한계다. 그가 그린 ‘행려풍속도병’의 ‘파안흥취’ 속 여인의 왼쪽 팔에서도 이와 비슷한 실수가 보인다(그림8). 팔을 인체에 맞지 않게 부러진 듯이 그린 것이다.

‘행려풍속도병’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8폭 모두 김홍도의 그림과 글씨이며, 8폭 위에 쓴 강세황의 글씨도 진짜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는 김홍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김홍도가 처음부터 25점이나 26점으로 된 화첩을 그린 게 아니다. 김홍도 작품을 수집했던 컬렉터들이 김홍도의 그림을 수집하다 보니 그만큼 모인 것이다. 김홍도가 정조를 위해 그린 그림도 70점을 5권 화첩으로 나눠 꾸몄다. 하물며 민간에서 25점이나 26점을 화첩 한 권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그림 순서 또한 후대 여러 컬렉터가 임의로 정한 것에 불과하다. 컬렉터 중에는 위조자도 있어서, 위조한 도장 하나로 진짜와 가짜를 가리지 않고 무질서하게 도장을 찍어 혼란을 일으켰다.

 

 

그림6 논란이 된 어깨가 과장된 학동의 모습.

그림7 김홍도가 과장되게 그린 어깨 모습들.

그림8 ‘파안흥취’에서 왼쪽 팔이 부러지게 그려진 여인(왼쪽부터).

 

 

민간에서 25~26점 모으기 어려워

 

강 교수는 ‘단원 풍속도첩’이 김홍도의 풍속화를 배운 도화서 궁중화원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어떤 작품이 가짜인지 모르고 한 말이다.

‘자리짜기’ ‘장터 가는 길’ ‘타작’을 자세히 살펴보면, 작품의 네 변 테두리 필선 안쪽에 다른 종이에 그린 그림을 붙여 놓았다. 기존의 테두리 필선을 재활용한 것이다. 진짜 작품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초정밀 전자저울로 무게를 재듯, 감정가는 진위를 감정하는 저울에 작품 필획을 올려놓고 측정해야 한다. 일꾼을 뽑을 때 사람 골격과 기운부터 살피듯, 감정가는 필획에 숨은 필력부터 가늠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가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서당’ ‘서화감상’ ‘무동’ ‘씨름’ ‘활쏘기’ ‘대장간’의 필획은 그가 1778년에 그린 ‘행려풍속도병’과 필력이 같다.

 

 

서당

 

 

 

활쏘기

 

 

취중송사(醉中訟事)

 

 

씨름

 

 

김홍도 대장간

 

 

김득신 대장간

 

 

 

무동

 

 

서화감상

 

 

 

파안흥취

 

 

 

 

 

 

 

 

자리짜기

 

 

장터 가는 길

 

 

타작

 

 

길쌈

 

 

신행

 

 

기와이기

 

 

고누놀이

 

 

고기잡이

 

 

우물가

 

 

빨래터

 

 

담배썰기

 

 

논갈이

 

 

노중상봉

 

 

나룻배

 

 

새참

 

 

행상

 

 

주막

 

 

편자박기

 

 

점괘

 

 

 

신선도

 

 

신선도

 

 

 

 

 

 

 

 

 

 

『단원풍속도첩』에서의 실수, 작가의 의도였을까?

 

 

도 1. 김홍도 『풍속도첩』본 그림 27점,각 22.4 x 26.6 cm, 국립중앙박물관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 』은 조선시대 후기 화단을 이끈 대표적 화가 김홍도金弘道(1745-?)에 의하여 그려진 25점의 풍속화가 장첩되어있는 화첩을 이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유물카드와 이뮤지엄(emuseum.go.kr) 유물용어 사전의 기록에 의하면, 이 첩은 1918년 조한준趙漢俊으로부터 구입하였고(1918년에 조한준에게 누가[조선총독부 박물관?] 구입하였는지 정확치 않다. 정확한 내력[來歷, Collection History] 조사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최근 한 신문기사에 의하면 『단원풍속도첩』[기사엔 풍속화첩]을 제실박물관 시절 구입하였다 했는데, 그렇다면 1909년 혹은 그 이전에 구입하였다는 말이된다. 허면 1918년 구입하였다는 이 기록은 어떻게 된 것인가?), 본래 이 첩의 처음과 마지막에 군선도 2폭이 합장되어 있었으나 1957년 이 두 점의 군선도는 별도로 족자로 표구하고 풍속화 25점을 모아 새롭게 화첩으로 꾸몄다 설명되어 있다. 1970년, 두 점의 군선도를 제외한, 이 도첩(화첩)은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이란 명칭으로 보물 제527호로 지정되었다.

 

 

도 1-1(상); 1-2(하). 김홍도 『풍속도첩』중「군선도1·2」

(도1 전체 그림과 비교하여 보니 「군선도 1」의 좌우가 바뀌어 보인다)

 

 

잘 알려져 있듯, 김홍도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화가로 산수·도석·인물·풍속·화조 등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 크게 화명을 얻었으며, 그 스승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근역서화징』김홍도편의 기록을 잠시 살펴보자.

 

“(중략) 김홍도전金弘道傳에 이르기를, 김홍도의 자는 사능士能이요 호는 단원檀園이다. 풍채가 아름답고 그릇이 커서 자질구레한 예절에 구애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신선가운데 사람’이라 하였다. 산수·인물·화훼·영모 그림이 묘경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고 특히 신선 그림에 뛰어났다.(중략)”

 

김홍도의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畫士·첩취옹輒醉翁 등 다양하다. 위에서 잠시 살펴보았듯 김홍도는 여러분야에 두루두루 뛰어났지만, 우리에게는 신윤복과 더불어 ‘풍속화의 대가’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의 회화사에 있어 18세기 경의 ‘풍속화의 유행’은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고 그 중심에 김홍도가 있었다.

 

작가의 실수, 의도?

 

도첩에 있는 풍속화를 살펴보면, 〈기와이기〉·〈주막〉·〈빨래터〉·〈자리 짜기〉·〈벼타작〉·〈점심〉·〈대장간〉·〈논갈이〉·〈서당〉·〈무동〉·〈점괘〉·〈고누놀이〉·〈씨름〉·〈서화감상〉·〈길쌈〉·〈담배 썰기〉·〈편자 박기〉·〈활쏘기〉·〈우물가〉·〈고기잡이〉·〈장터길〉·〈나루터〉·〈신행〉·〈노중상봉〉·〈행상〉(순서는 정확하지 않음)이 있다. 배경은 거의 생략하고 인물을 중심으로 표현하였으며, 대담하고 활달한 필치, 특히 붓 한 번의 터치에 따른 인물의 다양한 감정표현이 놀랍다. 이러한 진부한 설명은 이쯤에서 덮자.

 

 

도 2. 『풍속도첩』중「씨름」

 

 

도 3. 『풍속도첩』중「무동」

 

 

도 4. 『풍속도첩』중「점심(새참)」

 

 

작품들을 면밀히 살피다 보면 곳곳에 미미한 실수가 보인다. 풍속화 중 ‘씨름(도 2)’에서 우측 하단에 위치한 상투 튼 젊은이의 땅을 짚고 있는 양 손의 위치, ‘무동(도 3)’에서 역시 우측 하단에 위치한 아쟁을 연주히고 있는 악공의 왼손, ‘고누놀이’ 그림에선 ‘손’의 모양이, ‘점심(새참)(도 4)’에선 다리모양(복숭아 뼈)이 등등 잘못된 어색한 표현이 적지 않다. 이러한 작은 잘못된 표현들이 이 풍속도첩에 있다는 것이 이제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천재 화가라 불리우고 있는 단원이 정말 그림을 실수로 잘못 그렸을까? 아니면, 안타깝게 절명한, 오주석의 해석대로 그림을 보는 이를 웃게 만드려 한 ‘작가의 의도된 표현’일까?

 

“(중략)보는 사람들 재밌으라고 장난을 친 것입니다. 속았지 메롱! 하고 즐거워하는 화가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까?(중략)”

 

오주석『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중

 

작가 김홍도의 의도된 해학적 표현? 물론 이러한 해석이 흥미롭고 또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생각한다. 하지만, 왠지 그냥 이 해석을 따르기는 좀 꺼려진다. 좀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사실 이 당시(18세기) 화원들, 특히 ‘자비대령화원’들,에 의하여 그려진 풍속화는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서민의 생활을 그린 또 서민을 위해 그린 그런 그림이라 할 수 없다. 이 풍속화는 당시 국왕 ‘정조대왕’이 서민생활을 살피려는 마음에서 김홍도와 같은 특출한 화원들을 추리어 구성하고 직접 관리한 자비대령화원들에 내렸던 과제 중 하나이다.(강관식,『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 상·하』, (돌베게, 2001) 참조) 다시 말하면 김홍도의 이 퐁속도첩 또한 국왕이 보았을지도 모르는 국정자료였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자료에 작가가(화원) 의도적으로 잘못된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풍속도첩』내內 모든 그림들에 도인만 있고 아무런 친필관서가 없다는 점, 지질이 고급스럽지 않은 점, 잘못된 표현들, 화첩의 처음과 마지막에 군선도가 위치했었던 점, 그리고 풍속화가 우리가 생각하는 가벼운 그림이 아니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자. 이 풍속도첩 내 풍속화들은 김홍도가 서민들과 직접 부딪히며 그 순간을 빠른 시간안에 스케치하는 그런 크로키(croquis)적 성격의 그림이었기에 이런 미미한 실수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 표현이 잘 못된 그림들을 제출하지 않고 이 스케치들을 바탕으로 잘못된 부분들을 수정하며 다른 곳에 옮기어 제출하였을거라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하여 남겨진 그림들을 김홍도 사후, 그 가족들과 친구들이 남겨진 그림들을 모아 엮는 과정에서 이러한 화첩이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된다. 김홍도의 가계에 관하여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이 『단원풍속도첩』(1957년 재표구 전)의 상태가 본래의 상태였는지 확실치 않아 조심스럽지만, 풍속도첩 내에 어울리지 않는 군선도(도 1-1, 1-2)가 위치했었다는 점도 이 첩이 김홍도 본인이 아닌 다른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허나,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 사실은 오직 작가자신 김홍도만이 알 수 있지 않을까?

 

/ 한겨레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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