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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는 악귀 물리치는 영물(靈物)

bizmoll 2009. 2. 7. 20:24

 

 

개는 악귀 물리치는 영물(靈物)
개의 해|민속과 설화
신라 때부터 액막이로 삽살개 키워... 무속신앙에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동물

▲ 조선 화가 이암의 모견도(母犬圖)
2006년은 병술년(丙戌年) 개띠의 해다. 육갑(六甲) 가운데 개띠해는 갑술(甲戌), 병술(丙戌), 무술(戊戌), 경술(庚戌), 임술(壬戌) 등 다섯 번 든다. 십이지(十二支)의 열한 번째 동물인 개(戌)는 시간으로는 오후 7시에서 9시, 방향으로는 서북서, 달로는 음력 9월에 해당하는 방위신(方位神)이자 시간신(時間神)이다. 개(戌)는 이 방향과 이 시각에 오는 사기(邪氣)를 막는 동물신(動物神)이다.

우리나라 민간신앙 속에서 개는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邪)의 신통력을 가진 동물이었다. 그 이유는 개가 늘 인간의 주위에서 인간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인간에 비해 예민한 개의 귀는 영귀(靈鬼)의 바스락거림도 놓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또한 개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동물로 인식됐다. 무속신앙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환생할 때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는 길을 안내해주는 동물이 하얀 강아지다. 불교에서도 ‘눈이 셋 달린 개는 삼목대왕의 환생물’이라는 설화가 있다. 눈이 셋 달린 개는 민화 속에도 많이 등장한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개가 조상(祖上)의 환생’이라는 속신이 널리 퍼지면서 불가에선 개고기를 특히 금기시했다. 사찰이 대개 산 속에 있으므로 ‘개를 먹고 산사에 가면 개고기 냄새 탓에 호랑이에 물려 죽는 사례가 많았다’는 믿음이 퍼지면서 더욱 개고기를 금했다는 설도 있다. 그에 비해 유가(儒家)에서는 개고기를 크게 막지는 않았다. 음식의 예(禮)를 특히 중시한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개고기가 안주로 나왔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옛 그림에 등장하는 개 역시 벽사의 상징이다. 조선 초기 왕족화가 이암의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와 모견도(母犬圖), 영조 때 화원(畵院) 화가 김두량의 흑구도(黑狗圖)에서처럼 옛 그림 속의 개는 대부분 나무 아래 앉아 있다. 동양에서는 그림을 문자의 의미로 바꿔 그리는 경우가 흔했는데 나무(樹) 아래 앉은 개는 바로 집을 지키는 수호신장을 상징한다. 개는 술(戌)이고 나무는 수(樹)다. 戌은 ‘변방을 지킨다’는 뜻의 수자리 수(戍)자와 모양이 비슷하고, 戍는 지킬 수(守)와 음이 같을 뿐만 아니라 樹와도 음이 같기 때문에 동일시된다. 즉 ‘戌戍樹守’로 도둑 맞지 않게 잘 지킨다는 뜻이 되며, 이와 같은 개의 그림을 그려 붙임으로써 도둑을 막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 토기의 뚜껑에 장식으로 붙인 개 토우.
그러한 일종의 주술적 속신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각저총(角抵塚)과 무용총, 안악 3호분 그림에도 표현돼 있다. 그 고분에는 무덤을 잘 지키라는 의미에서 개 그림을 그려놓았다. 중국 지안현 각저총에 그려진 황구는 진돗개와 흡사하며 목걸이를 하고 있어 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모체인 부여의 관직명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관직명이 있었다’고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위지부여전’에 기록돼 있어 그때부터 개는 말, 소, 돼지와 함께 가장 중요한 가축의 범주에 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당시 지배층은 북만주에서부터 이주한 유목민의 후예로 사냥을 도와주고 가축을 지키는 개를 소중히 여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에 헌신하는 충복의 상징이지만 특히 우리 설화에는 충성과 의리를 갖춘 의견(義犬)이 자주 나타나서 우호적이고 희생적인 행동으로 사람을 구한다. 의견 설화와 의견 무덤의 다양한 이야기는 전국에서 전승되고 있다. 전북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에 전해오는 진화구주(鎭火救主:불이 붙은 주인을 살리기 위해 시냇물에 털을 적셔 불을 끄다가 죽은 개의 얘기)의 의견설화가 대표적이다. 오수리와 진돗개의 고향 진도에는 충견상(忠犬像)까지 세워져 있는데 아마 동상을 세워서 기리는 동물은 개가 유일할 것이다.

특히 한국의 토종개인 삽살개는 악귀를 쫓는 개로 대접받았다. 삽살개라는 이름 자체가 ‘삽’(없앤다 또는 쫓는다)과 ‘살’(귀신, 액운)이 합쳐진 말이다. 귀신 쫓는 삽살개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이 설화나 민화(民畵)에 많이 나타나 있다. 영리한 삽살개는 온몸이 긴 털에 덮여 산중의 신선이나 도사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신라 왕실과 조선시대 양반의 넓은 집 마당에 삽살개를 길렀다고 한다. 터의 크기에 비해 사는 사람이 적은 집, 땅 기운이 드센 곳에서 산 사람들은 사기를 누르기 위해 거처 가까이 삽살개를 둠으로써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삽살개를 기르지 않았던 일반 평민도 개그림을 집에 걸어둠으로써 액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 고구려 고분 각저총 벽화에 그려진 개(오른쪽 밑).
옛 기록에 의하면 한국의 개가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신라의 아찬 김정나가 일왕 천무에게 개를 선물했다’는 기록과 ‘686년에 신라의 왕이 개 세 마리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세종 2년에 대마도 사람이 개를 구하러 왔으나 마침 명나라에 진공할 물건이라 거절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은 한국의 개가 왕이 외교적 선물로 이용할 만큼 뛰어난 견종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개는 종종 비천한 대상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개만큼 우리 속담에 자주 등장한 동물은 없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속담 속에선 대부분 천덕꾸러기로 표현된다. ‘주구’(走拘:앞잡이) ‘똥개’ ‘개털’ ‘개소리’ 등의 단어에서 개는 비열함과 비천함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또한 개는 불길한 동물로 취급되기도 했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슬피 울면 집안에 초상이 난다 하여 개를 팔아버리는 습속이 있었고, 또 개가 이유없이 땅을 파면 무덤을 파는 암시라 하여 개를 없앴다. 삼국유사에 보면 ‘백제의 멸망에 앞서 사비성의 개들이 왕궁을 향해 슬피 울었다’고 적혀 있다.

개에 관한 이런 극단적 태도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서양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만큼 인간과 가장 밀접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어쨌든 누가 뭐래도 한국에서 개는 충의의 동물, 심부름꾼, 안내자, 지킴이, 조상의 환생, 인간의 동반자로 살아왔다. 때로는 구박과 멸시와 버림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 조상은 ‘인간이 개를 버릴지언정 개는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때로는 사람과 거의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자기 자식을 가리켜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는 애칭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천진기 - 국립민속박물관 민속학 학예연구관

 

 

 

 

<출처;eroom.korea.com/bs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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