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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 84×60㎝ 장지에 혼합재료, 2009
채움과 비움
대접
잉어
체리(함지박)
香
비움과 채움 53× 45.5㎝
달항아리 130× 162㎝
비움과 채움
비움과 채움
#무한 긍지, 도자기
무엇을 담으려고 나오는 그릇의 숙명. 다시 채우려면 비워야하고 채운다는 것은 하나의 간절한 염원이다. 존중과 또 버리는 것조차도 그 본질은 어울림에 가깝다. 속을 텅 비워 내 받아들이는 도자기의 포용성은 변화무쌍한 파고를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이 이어 온 원리이다. 그것은 무한(無限) 긍지, 도자기이다.
#명암법과 공기원근법의 혼용
오관진 작가는 서양화의 명암법과 동양화의 공기원근법을 혼용하여 작업하고 있다. 한지를 조각조각 칼로 도려낸 바탕에 돌가루와 안료를 혼합하여 자기(磁器)의 매끈한 형태를 올리고 태토(胎土)와 유약과 나무가 뜨거움 속에서 한바탕 어우러져 만들어낸 균열을 섬세하게 채운 입체적 화면은 관람자로 하여금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박옥생 평론가는 "동양적인 모티브와 관념을 내재하지만 항아리에 조용히 감도는 빛과 깊은 음영, 자로 잰 듯한 정확한 기하학이 보이는 것은 다분히 서양화의 작화태도이다. 즉, 그의 그림은 한지 위에 그려내는 동양화의 행위를 파내고 채워 넣는 상감기법이라는 공예적인 부분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으며 빛의 과학적 반사의 제시를 통해 서양화로의 이행을 보여준다"라고 평하고 있다.
비움과 채움
#극적인 미의 대조, 부드러운 끌림
살포시 춤추듯 리듬감을 갖는 곡선인가하면 고요한 듯 쭉쭉 휘몰아치는 매화의 몸통과 가지의 담박한 그릇과의 묘한 인연. 이 극적인 미의 대조는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작가는 "도자기의 수많은 균열들을 손으로 일일이 그리다보면 도저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아지경의 경험을 느끼곤 합니다"라고 밝혔다. 작가가 주도적으로 그려가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내용과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 곧 인력(引力)에 의한 몰입이 주는 부드러운 끌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완성도 높은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피어난다.
#빨강체리, 또 하나의 여백
오관진 작가는 도자기 위 혹은 아래 예쁘고 맛있는 빨강체리(cherry)를 놓고 있다. 안으로 아니면 밖에서도 체리는 도자기와 만나면 곧 울림을 일으킬 것 만 같다. 이미 작가는 비움과 채움이라는 순환에서 어울림의 편안함을 넌지시 제시하고 있음으로 체리를 담을 것인가 그러하지 않을 것인가는 순전히 관람자의 몫이다. 이것이 작가의 또 하나의 여백이다.
오관진 작가|심상을 일깨운 연민 달항아리서 꽃피다
한국화가 오관진 ‘비움과 채움’ 연작… 넉넉한 관용의 세계
비움과 채움, 84×60㎝ 장지에 혼합재료, 2009
작작(灼灼). 설중매가 제 무게보다 무거운 눈꽃송이를 이고 찬란하게 피어올랐다. 여린 꽃잎들을 누르는 절망의 시간에 오히려 더욱 더 선연히 빛깔을 뿜어내는 정신. 그 치열한 생명력이 틔어놓은 산기슭엔 노을만큼이나 붉은 속살이 흘깃 보이는 진달래 사이로 봄, 봄이 느릿하게 오고 있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매화는 자신이 피어난 세계에 온전히 스스로를 던지며 열정으로 타오른다. 백일 고운 꽃이 몇이며 대지의 품을 벗어나 피는 꽃이 어디에 있을까. 매화는 희망과 쓸쓸함, 꽃피우던 시절과 지는 세월의 외로움, 돌아오는 자의 귀로(歸路)와 멀어져가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그러한 모든 관계의 정의를 뛰어넘고서야 비로소 이 한겨울 한 송이로 거듭났다.
인생도, 사랑도, 그리움도 그러한가! 예찬에 연연해하지 않는 자연과 합일한 그 무위(無爲)에 이르는 통로는 꽃잎의 여린 겹이다. 겹은 꽃송이를 만들고 바람을 막고 꽃씨를 품는다.
◆참다운 선의 실천
비움과 채움, 84×60㎝ 장지에 혼합재료, 2009
한 가지에서 나온 매화 꽃송이가 여인의 방안 백자 달항아리에서 넉넉한 자애로 고독의 불꽃을 들여다 본다. 홀로이 갖추었고 홀로이 충분한 아름다움. 꽃은 완전한 세계인가. 하늘을 향하여 길게 솟구친 장삼자락이 미끄러지듯 허공서 내려와 어깨춤에 사뿐히 휘감기듯 매화 가지는 끊길 듯 끊어질 듯 왠지 모를 비감(悲感)을 불러일으킨다.
달항아리는 그지없이 희고 눈부시며 풍만하다. 회화이면서도 반 부조(浮彫)이고, 극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이며, 실경이지만 관념적이기까지 한 그림은 심상으로 받아들인 인간 근원의 연민과 사랑의 빛깔로 이끌고 있다.
작가는 상감기법으로 도자(陶瓷)와 그 안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들리지 않으나 들을 수 있는’ 것에 대해 탐미해왔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고유의 매끈한 유기질감, 거친 손길로 빚어진 소박함, 전통적 맥락 아래 구현된 문양, 작금의 세태에선 쉽게 마주하기 어려운 정(情)마저 화면에 이식해 놓는다.
여기에 그는 참다운 선이랄 수 있는 인성의 본질까지 수용함으로써 관용과 포용이라는 감쌈의 실천을 행하고, 삶의 지향에 관한 철학적인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다”고 썼다.
그의 지난한 노력 흔적은 작품들을 실제 마주하면 사진의 평면에서와는 많이 다른, 볼록이 올라온 도자의 질감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오관진 작가도 “도자기의 수많은 균열들의 선을 손으로 일일이 그린다. 그것은 사물의 참모습과 진리를 비추어 보고자 관조(觀照)하는 자기침잠(自己沈潛)에 이르는 수행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오랜 시간을 이겨 뛰어넘어 온 살아 유지되고 축적되어 이룩된 깨달음과 교감하는 충만한 기쁨을 만난다. 그것은 흉내내기와 겉치레 등과 진작에 분별되는 울림이라고 확신해 왔다”고 말했다.
◆한 송이 꽃, 그 향기의 미학
봄봄봄, 76×76㎝ 장지에 혼합재료, 2009
매화 한 송이가 방바닥에 살포시 드러누웠다. 햇살이 한지(韓紙) 문으로 가늘게 들어오면 그렇게 고고하던 꽃이 인적 없는 빈 방에서 스르르 잠들었다. 그 한 송이 낙화의 일생은 더 바람 없는 채움 혹은 홀가분한 비움이었을까….
방, 주인께서 주무시는 아랫목서 보이는 벽 족자(簇子)의 선시(禪詩) 한 수.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당나라 선사, 황벽희운(黃檗希運) 스님>
오관진 작가와 대화
몸과 정신 울리는 소리까지 담고파
오관진 작가는 몇 번을 보아도 늘 고요한 사람이다. 말수도 많지 않고 그럼에도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가 아주 섬세하다. 한 점, 한 획을 그을 때도 그는 온 신경을 팔과 손끝으로 모아 집중해 그 에너지를 쏟는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요란하거나 화려한 장식적인 겉멋을 볼 수 없는 것도 작가의 이러한 성품과도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인가. 화면에서는 고요한 여운과 포근한 미감의 맛스러움이 배어나온다. 관람자의 마음을 이끌어 작품 화면을 나직이 한참 동안 응시하게 하는 동화(同化)의 힘은 그의 자연과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洞察)에서 비롯된 미학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의 “이미지들과 사물 간 대비가 강한 색감, 서정의 미를 내포한 공간 등은 작가 오관진의 예술세계를 잘 설명하는 언어들”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맥락에서 작동하는 원리들이다.
그는 눈으로 보는 이전의 어떤 울림, 그 세계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동(動)과 정(停)을 포용한 울림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은 소리의 세계”라고 작가는 간결하게 말했지만 이 몸과 정신의 소리로 확장된다. 소리의 울림을 위해 작가는 미처 빚다 만 듯한 투박한 막사발, 기품을 함유한 세련미가 일품인 분청사기에서부터 세상의 모든 넉넉함과 온유함을 끌어안은 달항아리까지 그 균열의 선 하나하나를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자세로 그리는 것이다.
오관진 작가는 홍익대 및 동국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예술의전당, 파리 라데팡스(프랑스), 화지갤러리(일본 동경) 등지에서 개인전을 20회 가졌고 이스탄불 아트페어(터키), 화랑미술제 등의 교류전에 140여회 참여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아시아미술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권동철 기자 ⓒ 이코노믹 리뷰
오관진의 예술세계에 대한 소론
선繕과 선鮮으로 빚어 공空을 짓다
비움으로써 채우고 채워짐으로써 비워내는 공진의 과정들은 과거 전통적인 채색화나 필묵만으로 생의 서사를 읊던 작품들에서는 물론 현대적으로 번안된 오늘날의 실험적인 작업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글 | 홍경한(미술평론가)
그의 작품에 있어 소재의 친근함과 높은 인식력은 낯섦을 적게 하고 시각적 불편함을 희석시킨다. 사실적인 재현을 거쳐 ‘채움’을 강조하되, 형상성을 가미한 조화(遭禍)를 새롭게 추구함으로써 되레 비움을 은유하는 방식은 누가 봐도 오관진의 작품임을 증명하는 요소이다. 그의 그림 속 생경하지 않은 이미지들과 사물 간 대비가 강한 색감, 서정의 미를 내포한 공간 등은 작가 오관진의 예술세계를 잘 설명하는 언어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작 오관진 작품에 변별성을 부여하는 요인은 대상의 익숙함이나 물파적 필치, 조화로운 구성 등이 아니다. 필자는 작가의 작품을 차별화하는 요소로써 소리(音)를 꼽는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유약의 크랙(crack)마저도 놓치지 않는 정밀함과 자유롭게 운용되는 필의 기세를 뚫고 올라오는 나지막한 음(音)이 존재한다.
비움과채움162X130
비움과 채움(축복)(상감기범,혼합재료)35x112
모든 잡음을 끊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그 파동의 진원지는 청아한 형색의 도자가 아닌, 그 너머 시각적 범주 외계에 놓여있다. 미처 빚다 만 듯한 투박한 막사발, 기품을 함유한 세련미가 일품인 분청사기에서부터 세상의 모든 넉넉함과 온유함을 끌어안은 달 항아리까지, 그동안 작가 오관진이 선택해온 소재들은 그것자체로 특유의 ‘울림’을 내재한 것들이었다.
비움으로써 채우고 채워짐으로써 비워내는 공진의 과정들은 과거 전통적인 채색화나 필묵만으로 생의 서사를 읊던 작품들에서는 물론 현대적으로 번안된 오늘날의 실험적인 작업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필자는 오관진의 작품에 개괄되어 있는 표출언어들을 관념으로 포박(捕縛)할 경우, 두 개의 ‘선’으로 함축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중 첫 번째 언급해야할 선은 기울 선(繕)이다. 엄밀히 말해 이 선(繕)은 오관진의 작업 경향에서 유추할 수 있는 실험성을 근간으로 한다. 그는 무언가를 깊거나 손보아 고치듯이 특정적인 장르의 룰을 벗어나면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 왔음이 사실이다.
담소(채움과 비움)41X605
비움과채움(행복)
회화적 표현 방식에 있어 쉽고 빠르며 편한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미술의 가치 중 일부는 엄연히 수공적인 특질에서 비롯됨을 믿기에 손수 공들여 그리고 상감기법으로 화면을 분할해 채우면서 물질의 실체성은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것, ‘들리지 않으나 들을 수 있는 것’에 대해 탐미해왔다. 그리고 이 결과는 구체적으로 서두에 언급한 공명으로 환원되는 수순을 밟는다. 이러한 표면적 특징들, 그 영향으로 일궈진 심성의 감화(感化)와 공명의 치환만으로도 그의 그림들은 ‘미술’로써의 존재성을 확인시키고 미의식을 재고토록 하는 역할을 다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작가는 단순히 질감을 구현하고 형태를 재현하는 등의 거죽만이 아닌, 그 속에 담겨진 의미와 정신에 선(鮮)의 방점을 찍는다. 이에 필자의 눈에 비친 또 하나의 선은 외부의 이미지와 내부의 메시지를 포괄하는 고울 선(鮮)이다.
채움과 비움 시리즈를 비롯한 봄연작들, 그리고 바람이 일다, 향을 비우다 등의 대표작에서 인지할 수 있듯, 작가는 주요 소재인 도자기들을 통해 진솔하고 덤덤하나 실용적이면서 무위(無爲)했던 우리네 선조들의 지혜로움과 정서를 아름다운 형상 아래 오롯이 작품 속으로 끌어다 놓는다.
도자 고유의 매끈한 유기질감, 거친 손길로 빚어진 소박함, 전통적 맥락 아래 구현된 문양, 작금의 세태에선 쉽게 마주하기 어려운 정(情)마저 화면에 이식해 놓는다. 여기에 그는 참다운 선이랄 수 있는 인성의 본질까지 수용함으로써 ‘관용’과 ‘포용(包容)’이라는 감쌈의 실천을 행하고, 삶의 지향에 관한 철학적인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오관진의 작품들은 즉시각적인 반면 매우 감각적일 뿐만 아니라 서정적이다.
외부의 이미지와 내부의 메시지를 포괄하는 선(鮮)은 근래 들어 공명의 수위를 건너 공(空)이란 개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말은 선이 이해와 행동으로 정신적인 의미들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공은 공명을 발판으로 한 의식의 실천이랄 수 있음을 뜻한다. 작가는 어떤 형태를 만들고 그것에 여러 현실적인, 혹은 시공의 잔상이 남긴 의미들을 덧씌우지만(2차원적인 타블로의 형태를 크게 이탈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형식을 통해 직관적인 지력위에서 활성화 되어있을 뿐 그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그 속의 ‘비어있음’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그런 차원에서 차라리 그의 비움이란 어떤 의미를 존립하고 있음을, 함유하고 있음을 역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다.(실제로도 그는 채움과 비움을 포함한 많은 연작에서 체감할 수 있듯 덜어내고 거둬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되레 포용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어쨌든 복합적으로 자리한 ‘선’은 오관진 작품을 가장 명료하게 정의하는 단어이며, 또한 공은 그의 평소 가치관을 상징하는 관념의 기호이자 차후 나아갈 미의식의 방향성을 일러주는 조타임에 분명하다. 물론 선과 공을 잇는 것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그의 그림들, 그리드(grid)처럼 혹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킨 여러 내외적 의미들을 포섭하는 실질적인 매개인 그림이다. 그것이 비록 소재의 리얼리티나 동양화라는 일반적 견해에 천착할수록 독해의 요령을 체득토록 하고 가끔은 선문답처럼 질문을 던져 그 답을 찾아야만 하는 타자는 수고스러움을 거치긴 하나 ‘교감’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작화의 의도와 의미는 익히 상호 교환적이며 소통은 이미 충만하게 다가온다. 이에 필자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읽어내 깨달을 수 있는 그림, 치렁한 군더더기에 준하는 말과 문자는 별 효용성을 갖지 못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같은 그림이 오관진의 작품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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