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화 (한국)

[스크랩] 김정수 ‘진달래’ 화가 / 내가 고향을 떠나오던 그날

bizmoll 2013. 11. 1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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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향을 떠나오던 그날

 


가출했다 돌아온 아들 손 붙들고 진달래 지천인 뒷산으로,
진분홍 꽃잎은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김정수 ‘진달래’ 화가(1955년생)
   

 

고향인 부산을 처음 떠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가출을 했다.

그땐 나름대로 심각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이유 없는 반항이었다. 사춘기 몸살 같은 것이었다. 모범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니다 주먹깨나 쓰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집안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친구로부터 ‘어머님이 위독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사춘기 소년의 철없던 반항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집에 들어가면 맞아 죽겠구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속 썩이는 아들 걱정에 얼굴이 수척해지기는 했지만 병색은 없었다. 아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작전’에 속은 것이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집 바로 뒤에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뒷산은 진달래꽃이 지천이었다. “이제부터 훈계가 시작되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손으로 진달래를 가리키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수야, 이 진달래꽃 좀 봐라, 참 예쁘지? 기다리고, 때가 되면 이렇게 예쁜 꽃이 된단다. 너도 너무 조급하게 생각 말아라. 기다리면 네가 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현실 같지가 않고 마치 영화 속 장면 같았다. 어머니는 어떤 영화배우보다 아름다워 보였고, 어머니의 목소리는 천상의 소리 같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치 꿈속의 한 장면 같다. 그 이후 나는 ‘문제 학생’에서 다시 어머니의 착한 아들로 돌아왔다.
   
두 번째 고향을 떠났을 때는 모두의 배웅을 받으면서였다. 홍익대에 합격해 설레는 대학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는 아쉬움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홍익대 옆 하숙집에 짐을 풀었다. 고향을 생각하기에는 젊음이 너무 바빴다.
   
그렇게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고향을 떠올린 건 프랑스 유학을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다. 1983년 2월,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날씨는 겨울답게 춥고 스산했다. 가족과 공항에서 이별을 나누고 탑승대를 통과해 비행기 좌석에 앉았을 때 김포공항의 시멘트 담장이 날개 저편으로 펼쳐져 있던 것이 유난히 눈에 꽂혔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하나같이 예쁜 승무원도, 비행기 내부도, 창밖으로 보이는 김포공항의 풍경도, 심지어 옆 좌석에 앉은 사람들조차 다른 세계의 풍경들로 낯설게 다가왔다.
   
유학, 드디어 가는구나. 비행기 엔진 소리도 전혀 시끄럽게 들리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조금 전까지 발을 딛고 서 있던 세상이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건물, 산, 강, 바다가 점점 조그맣게 보였다. 눈을 감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달콤한 희망과 함께 새로운 기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에펠탑은 얼마나 클까,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나, 영화에서 보던 센강과 낭만적인 다리는 실제로 봐도 똑같을까, 강변을 거닐며 영화 속 주인공이 돼 봐야지, 인상파 그림들은 어느 미술관에 있을까, 그 그림들 속 풍경들은 그대로 존재할까, 그곳 현대미술가들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설치작업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카페에서 포도주도 한잔 해야지, 파리의 여인들은 다 미인일까, 아 샹송도 라이브로 들을 수 있겠구나, 샹송을 부르던 친구가 부럽고 특별해 보였는데 이제 맘껏 들을 수 있겠네….

머릿속은 벌써 1년 동안 할 일을 다 경험한 듯했다. 당시에는 파리가 세계의 유행을 이끌고 있었고, 그곳에서의 모든 것은 화가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는 그랬다.
   
바로 그곳으로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1970~1980년대 우리나라의 상황은 암울 그 자체였다. 아주 어둡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어디 가서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어디서 반정부 발언이라도 했다가는 바로 끌려가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정치·경제적으로 불안한 시대였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숨막히는 대학생활을 보내야 했다. 시위대 뒤에서 구호도 외치고, 야학 선생도 하면서 그 시대의 아픔을 나름대로 함께하면서, 작품으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가자. 자유로운 곳으로. 미술세계를 좀 더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고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거기가 어딜까 생각해 보니 파리였다.
   
그런데 그게 간단치가 않았다. 그 당시에 유학을 간다는 것은 참 큰 문제였다. 지금처럼 쉽지도 않았고 여러 제약이 따랐다. 경제적인 문제며 집안 문제며 어머니가 팔 걷고 나서주지 않았다면 파리행 비행기는 타지 못했을 것이다.
   

▲ 김정수 작가의 진달래 그림.

 

 

비행기가 경유지인 앵커리지에 도착했다. 지금은 파리까지 직항로로 10여 시간 걸리지만, 1980년대 초에는 20시간 이상이 걸렸다. 공항 안에서 우동을 파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먹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당시에는 월 1000달러까지만 송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상은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그만큼 외화가 귀했다. 돈을 아끼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온갖 상상과 기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지쳐갈 때였다. 눈으로 뒤덮인 앵커리지 공항을 출발하고 피곤해서 얼핏 잠이 들었다.

 

“6시간만 가면 파리에 도착하겠네.”

잠에서 깨어 머릿속으로 시간 계산을 하는 순간, 지금껏 유학 간다는 기분에 들떠 잊고 있었던 현실적인 일들이 떠올랐다. 부모님 건강도 걱정이고, 인사 못 하고 온 친구들도 생각나고, 앞으로 파리에서 부딪쳐야 할 일도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학교 서류문제·기숙사·어학원 송금 등 이런저런 걱정들이 한꺼번에 실타래처럼 얽혀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애써 마음을 다독여도 좀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언젠가 이런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가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중학교 때 가출하고 돌아온 내 손을 잡고 진달래 산을 올라갔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다리고 때가 되면 예쁜 꽃이 된단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철없던 중학생 아들에게 들려주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순간 거짓말처럼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 기다리고 때가 되면 다 잘될 거야.” 나는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남은 비행시간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파리에 도착하고 1년6개월이 지난 후 유명한 화랑가인 생제르맹 데프레에 있는 한 화랑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3년 뒤에는 영주권까지 취득했다. 파리에서 내 활동이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외국 생활을 하다보니 내 뿌리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국적인 작업이 하고 싶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뭘까.”

 

오랫동안 답을 못 찾고 있을 때 어머니 손을 잡고 걷던 진달래 꽃길이 생각났다. 어머니가 진달래 한 송이를 따서 허공에 던지며 “내 새끼 잘되게 해주소” 하고 빌던 모습이 생각났다.

학교 갔다 오면 고봉밥을 퍼주던 어머니의 사랑도 그리웠다.

대바구니에 고봉밥처럼 수북이 쌓여있는 진달래 그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수십 번의 붓질로 만들어지는 진달래 한 잎 한 잎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고 고향의 정이다.

오늘도 나는 그 진달래 꽃잎을 화폭 위에 열심히 피워내고 있다.


 

 

 

 

 

 

 

김정수, <진달래>, 2007년, 100×72.7cm,

 

 

 

김정수, <진달래>, 2009년, 80×120cm

 

 

 

 

김정수, <진달래>, 2008년, 100×72.7cm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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