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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9]
배운 자 나약함 다그치는 안경 속 그 눈길
1909년, 전라도 구례에 칩거하던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상경했다. 숨통이 할딱거리는 조선의 사직을 그는 확인했다. 그는 사진관을 찾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독사진을 찍었다.
챙 좁은 갓과 주름진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그 사진이 징조였을까. 두루마기는 빛나도 갓 너머는 낙조가 드리운 듯 얼룩졌다. 그의 얼굴도 암전(暗轉)되고 있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년을 돌이키던 황현은 글을 배운 자의 노릇에 통탄하며 자결했다.
1911년, 고종의 어진(御眞)을 그렸던 화가 채용신은 우국지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골몰했다.
망국(亡國)의 신록이 구슬프던 5월, 그는 황현의 초상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황현의 사진을 보고 또 봤다. 사진 귀퉁이에 황현이 적어놓은 글귀가 또렷했다.
'묻노니 그대 한평생, 가슴속에 무슨 불평이 그리도 쌓였는가'.
'황현 초상' - 채용신, 비단에 채색, 120.7×72.8㎝, 1911년, 개인 소장.
화가는 붓으로 황현의 혼백을 불렀다. 사진에 있던 갓과 두루마기는 드높은 정자관(程子冠)과 깃에 검은 천을 댄 심의(深衣)로 바꿔 그렸다. 초시(初試)에 장원급제하고도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은 황현의 유학자적 면모가 고친 차림새에서 도드라졌다.
안경 속에서 눈은 뚫어 보지 않고 째려본다. 홍채 속의 반점까지 그렸다. 오른쪽 눈이 사시(斜視)라서 눈길이 낯선데, 그 낯섦이 모델을 외려 주목하게 한다. 국록(國祿)을 받은 적 없고 초야의 처사나 다를 바 없으니, 앞에 나서 목숨을 끊을 의무가 없었던 황현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서는 결기가 서있다.
'오백년이나 선비를 길러온 나라에서, 국난을 당해 죽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 원통치 않은가?'
성글고 버석거리는 수염에서 강퍅함이, 긴 콧날과 지그시 다문 입술에서 단호함이 엿보인다. 선비의 나약함을 다그치는 저 눈길, 그의 사시는 차라리 여기저기 다 보는 겹눈이다.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10]
그날 그녀는 알았다, 죽음과 입맞추리라는 걸
'계월향 초상' - 작자 미상, 비단에 채색, 105×70㎝, 1815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때 진주의 논개(論介)는 왜장(倭將)을 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평양에도 왜군의 간담을 얼어붙게 만든 여성이 있었다. 의기(義妓)로 추앙받는 계월향(桂月香·?~1592)이다.
임진년 그해 평양성이 함락되자 계월향은 정인(情人)이던 김경서(金景瑞) 장군을 성안으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치밀하게 짜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副將) 고니시 히(小西飛)의 목을 베었다. 왜군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계월향은 그날 죽었다. 평양성을 되찾는 데는 그녀의 숨은 공이 있었다.
이 초상화는 계월향 사후 200년이 넘은 1815년에 그려졌다. 그녀를 기리는 평양의 사당에 걸려있던 작품이다. 물론 생전 모습은 아닐 테다. 형식은 미인도를 닮았다.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괸 자태가 성숙한데 조붓한 얼굴선에서 애티가 난다. 부드럽게 내려오다 인중을 만난 콧날은 시원스럽고, 애써 오므린 입술은 다소곳한 기색을 더한다. 머리 꾸미개는 올올이 묘사하는 대신 덩이지게 그려놓았다. 쪽 찐 머리가 아닌데 비녀를 꽂은 게 낯설다. 초록빛 선명한 삼회장(三回裝) 저고리는 어깨와 팔에 꼭 끼어 터질 듯하다.
뒷날 계월향은 온갖 팩션(faction)의 주인공이 됐다.
이 초상에도 그녀가 죽는 장면이 드라마틱하게 기술돼 있다.
'김경서가 왜장의 머리를 들고 문을 나오니 계월향이 옷을 잡고 따랐다. 둘 다 빠져나오기는 어렵게 되자 김경서는 칼을 들어 그녀를 쳤다'.
계월향은 왼손에 수건을 부여잡고 있다. 저 손으로 김경서의 옷자락을 잡았을 것이다. 눈썹 위에 눈썹 하나씩을 더 그렸다. 그렇게 한 화가의 속내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가슴에 매단 노리개에 '재계(齋戒)' 두 글자가 또렷하다.
의식을 치르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재계다. 그날 계월향은 죽을 줄 알았다.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11]
우리가 형제라는 걸 알아들 보시겠소?
세 사람 중 가운데 있는 인물은 옷에 두른 띠가 다르다. 황금색 테두리 안에 붉은 장식이 든 학정금대(鶴頂金帶)다. 그는 수사(水使)를 거쳐 통제사를 지낸 조계(趙啓·1740~1813)다.
그 양 옆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같은 모양의 띠를 찼다. 왼쪽이 조두(趙山斗·1753~1810), 오른쪽이 조강(趙岡·1755~1811)이다. 둘 다 부사(府使) 벼슬을 했고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외자 돌림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은 형제다. 삼형제가 한 화면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초상화는 이 작품뿐이다. 이들을 한데 모은 사정이 있었을까.
가문의 살붙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벼슬길로 나아간다. 그것도 모조리 삼품(三品) 이상 고위직에 오른다. 참 가슴 벅찬 출세다. 바로 조씨 형제들이 그랬다. 과거 급제자를 알려주는 방(榜)꾼이 동네방네 큰소리로 형제의 이름을 외쳐대는 순간 집안의 살림이 피기 시작하고, 이를 지켜보는 윗대와 아랫대는 더불어 어깨춤이 났을 테다. 당연히 누대에 두고두고 이야기꽃을 피울 거리가 필요했다. 이게 이 초상화가 그려진 이유다. 개인의 명예와 가문의 영광을 내세우는 '인증샷'으로 초상화만 한 것이 있을까.
뻣뻣한 자세가 좀 멋쩍긴 해도 오사모와 담홍색 단령 차림에 자존(自尊)이 넘친다.
자주꽃 핀 감자는 캐보나 마나 자주감자다.
내림이 어디 가랴 싶게 형제들의 눈매와 골상(骨相)이 빼닮았다. 모두 광대뼈가 불거지고 하관이 빨았다. 눈꼬리가 위로 들렸는데, 막내가 가장 매섭다. 수염은 제가끔이고 아우들에 비해 형의 숱이 성글다. 그 형의 얼굴에 어느덧 검버섯이 피었다. 연암 박지원이 읊었다.
'선친이 그리울 때 형의 얼굴을 보고, 형이 그리울 때 제 얼굴을 냇가에 비쳐 본다'고. 형제는 그런 사이다. 초상화의 시선이 어디로 향했는가. 형제는 같은 곳을 바라본다.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12]
얼마나 염불했길래 염주 알이 저리 투명할꼬
짙은 남색의 장삼 위에 붉은 가사가 선명하다. 녹색 매듭을 지은 금빛 고리는 마치 훈장처럼 반짝인다. 색깔이 눈에 띄게 대비되어도 들뜬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매무시다.
다만 주인공이 앉은 의자의 장식이 요란할 정도로 복잡하다. 연두색 바지 아래 보이는 발 받침대가 의자 다리 노릇까지 하는 특이한 디자인인데, 초상의 주인공을 귀하게 모시려는 배려가 소도구에서까지 엿보인다. 왼쪽 위에 표제가 있다.
'청허당(淸虛堂) 대선사(大禪師) 진영(眞影)',
서산(西山)대사로 널리 알려진 휴정(休靜·1520~1604)의 초상이다. 스님의 호(號)가 청허당이다.
전국을 주유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휴정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주장자를 놓고 칼을 들었다. 임진왜란이 묘향산에 은거하던 그를 불러냈다. 그가 산문(山門)에서 전쟁터로 간 까닭은 시로 전한다.
'나라를 사랑하니 종사(宗社)가 근심이라/
산속의 중도 또한 신하라오.'
그는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고, 정이품 직위까지 받았다. 휴정의 진영은 지금까지 여러 점 남았는데, 강골(强骨)의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승군(僧軍)을 지휘한 이력 때문일 테다.
이 작품은 고승의 진영을 자주 그린 승려화가 유성(有誠)의 솜씨다. 휴정의 눈맵시는 길고 부드럽게, 대춧빛 입술은 단단하게 묘사해 강온(强穩)을 고루 살렸다.
휴정의 손에 든 염주가 하얗다. 얼마나 염불을 해야 염주 알이 저토록 투명해질까. 큰스님은 손에 칼을 들거나 염주를 들거나, 큰스님이다.
하지만 카드 패를 잡은 큰스님은 없다.
저지레하다 들킨 스님들 때문에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는 부처님이 안 오실까 걱정이다. 휴정은 생전에 초상화가 있었다. 그는 입적하면서 그 초상을 보고 말했다.
"80년 전 네가 나더니 80년 후 내가 너로구나."
저잣거리의 걱정을 덜어주려면 절집이 여여(如如)해야 한다.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13]
요절한 아저씨, 기억으로 되살려… 유족 울음바다
소동파가 쓰던 두건을 머리에 얹고 주름이 드러난 도포 속에서 두 손을 맞잡은 이 사내는 조선 후기의 유생(儒生) 심득경(沈得經·1673~1710)이다. 이름이 좀 낯설다. 대신 그 집안을 들먹이면 알 만하다.
심득경의 어머니가 유명한 시조 시인 고산 윤선도의 딸이다. 윤선도는 또 조선 초상화의 백미이자 국보인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의 증조부다. 심득경은 나이가 다섯 살 많은 윤두서(1668~1715)의 아저씨뻘이었다. 두 사람은 진사시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살지 않았다. 함께 시문(詩文)을 읊조리며 초야의 다정한 짝으로 지냈다. 따라서 이 초상은 당연히 윤두서가 그렸다.
그림의 위아래에 글이 많다. 그중 심득경의 벗이던 서예가 이서(李敍·1662 ~?)가 지은 글이 눈에 든다. 읽어보면 심득경의 생김새와 됨됨이가 떠오른다.
'눈이 맑고 귀가 단정하며 입술이 붉고 이빨이 촘촘하다'. 그 모습이 초상화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품성은 어떤가.
'물에 비친 달은 그의 마음이요, 얼음 같은 옥(玉)은 그의 덕이다'. 입에 발린 칭찬으로 듣기에는 이어지는 글이 단호하다.
'잘 묻고 힘껏 실천했으며 깨달은 것은 확고했다.' 한마디로 겉과 속이 딱 맞는 인물이란 얘기다.
'심득경 초상' - 윤두서 그림, 비단에 채색, 160.3×87.7㎝, 1710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을 그린 윤두서의 소회는 맨 아래에 적혀 있다. '숙종 36년(1710) 11월에 그렸다. 이때가 공(公)이 돌아가신 지 넉 달째다. 해남(海南) 윤두서는 삼가 가다듬고 마음으로 그린다'. 이게 무슨 소린가.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그렸다는 토로다. 심득경은 마흔을 못 채우고 세상을 떴다.
애통하기 그지없던 윤두서는 4개월 뒤 정신을 수습하고 붓을 들었다. 피붙이와 다름없던 심득경의 이목구비야 눈에 선했을 테다. 초상화를 받은 심득경의 유족은 다시 살아 돌아온 사람을 본 듯이 통곡했다. 저 붉게 타오르는 입술! 윤두서는 식은 입술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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