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12)
고흐 ‘슬픔’
ㆍ슬픔이 슬픔에게, 고흐의 슬픔
슬픔이 아름답지요?
그림 속 여인의 슬픔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그릴 수 없는 그림, 고흐의 ‘슬픔’입니다. 그러고 보니 기쁨이나 행복만 아름다운 게 아닌 모양입니다.
저 초라한 실루엣이 왜 이렇게 사무칠까요? 저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울컥, 했습니다. 생의 버거움을 고스란히 짊어진 그녀의 실루엣은 행복했던 순간들이 없었던, 행복을 모르는 사람의 포즈 같았으니까요.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묻고 있는 저 여자, 울고 있는 거 같지 않습니까?
지지해주는 이 없이 살아낸 그악한 세월이 버거워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 하는 저 여자는 고흐가 사랑한 여자 시엔(Sien)입니다. 도대체 의지를 내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 불행하기만 했던 청년 고흐가 사랑했던 여자는 불행한 남자가 알아본 여자답게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얽히고 설킨 인연,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인연을, 불행한 사람을 불행한 인연을 부릅니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니겠니?
그녀의 이름은 시엔이다.”
빈센트 반 고흐, ‘슬픔’, 석판화, 38.5×29㎝, 1882년,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400 × 400 - Sorrow by Vincent van Gogh is a sketch of a sad, nude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는 진솔하기만 한데, 저 착한 남자의 따뜻한 사랑의 힘으로 슬픔에 사로잡힌 여인이 위로받을 수 있을까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고개를 들고 거울을 볼 수 있을까요?
가까이 보니 여자의 배가 불렀습니다. 가난하고 외로운 엄마의 슬픈 몸에 기대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악착 같은 생명의 힘이 저 여인에게 힘일까요, 짐일까요?
저 여인 시엔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고단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미 아이가 있는 데다 또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를 아이를 품고 차마 울 수도 없는 여인, 그 여인은 19세기 말 보수적인 프랑스 사회에서 죄인도 아닌데 죄인으로, 그림자로 살아야 했던 존재감 없는 여인이었던 거지요.
그런 여인이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밑바닥 세상에서 가혹한 운명의 매를 맞으며 황폐해져만 가다가 고흐를 만난 겁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슬픔의 선을 아는 섬세한 고흐를. 슬픔은 인간을 내향적으로 만드는 가장 적합한 정서 아닌가요?
고흐를 만나 시엔은 슬프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었던 팍팍하기만 했던 삶 속에서 비로소 슬픔을 드러낼 수 있었겠지요. 선택의 여지없이 끌려 다니기만 했던 서러운 세월을 그제야 토해낼 수 있었을 겁니다. 처음으로 사랑받는 여인이 되어. 처음으로 자기 삶을 반추해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햇빛 환한 창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자 나는 행복했다.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인의 곁에 있을 때 깊은 감동을 느낀다.”
그 보잘것없는 여인을 사랑하다니,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사랑으로 감동받아본 적이 없는 메마른 인생입니다. 슬픔이 슬픔을 사랑하는 건 연민이라고 부르는 건 적어도 고흐에게는 모독이니까요.
슬픔이 매파가 되어 연인으로 행복했던 사랑의 시간은, 그러나 길지 않았습니다. 형 고흐를 목숨처럼 사랑했던 동생 테오가 시엔을 너무 싫어했습니다. 가난하고 거칠게 살아왔으나 체념이 빠른 착한 여인이 격렬한 테오의 결혼반대를 당당하게 버텨내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고흐는 시엔을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고흐 인생의 발목을 잡는 족쇄를 풀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결과적으로 고흐는 그 이후 더 깊은 슬픔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것은 인생, 그것은 생의 비밀이라 탄성을 지르게 만드는 그림을 그리려고 고흐는 그토록 슬프고 그토록 불행했나 봅니다. 저 그림 ‘슬픔’을 시작으로 고흐의 그림들은 모두 자신의 생을 희생 제물로 내주고 얻은 보물 같습니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목숨을 걸었고, 나의 이성은 반쯤 괴멸했다, 그래도 좋다!”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사람들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행 속에서 오묘하고도 감미로운 생의 비밀과 만나고 있으니까요.
Sad / Vincent Van Gogh's 'An Old Man's Winter's Night'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4)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
ㆍ누가 이웃인가?
운명에는 목격자가 있고, 목격자의 운명이 있습니다. 혹 상처 입고 쓰러져 위기를 맞고 있는 누군가를 목격하신 적 없으신가요? 그 때 어떻게 하셨나요?
포대기에 쌓인 아기가 길가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아기의 목숨이 위태롭기만 한데 한 사람, 두 사람…, 마침내 열일곱 번 째 사람이 그 아기를 지나칩니다.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지나치는 사이 아기는 목숨 줄을 놓아버렸습니다. 얼마 전 중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어찌 중국만의 문제겠습니까?
나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내가 이웃의 위기에 무디고 무딘 피폐한 영혼이고, 그럼으로써 나의 위기에도 아무에게도 손 내밀 수 없는 고립된 영혼인지도 모른다고.
그 상황에 떠오르는 그림이 바로 고흐의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분위기가 환하지요? 저 따뜻한 노랑과 안정감이 있는 파랑이 상처 입은 사람에게 괜찮다, 괜찮다, 위로해주는 어머니의 품 같습니다. 아마도 저 그림을 그릴 때 고흐는 따뜻한 사랑이 절절히 그리웠나 봅니다.
Vincent van Gogh, The Good Samaritan
빈센트 반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 1890, 캔버스에 유채 73×59.5㎝,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테를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서 한 남자가 강도를 만나 빈털터리가 된 채 상처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율법사가 그냥 지나가고, 경건한 레위인이 그냥 지나칩니다. 그를 보고 도와준 것은 천하디 천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환자를 말에 태우는 사마리아인을 보십시오. 상처 입은 남자의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세우는 사마리아인의 자세가 힘에 부쳐 보입니다. 그러나 힘이 생겨나는 것도 같지요? 남자를 받아들이는 말의 태도도 안정적인 것이 저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흐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사랑에는 진정한 힘이 있다. 사랑으로 한 일은 무엇이든 잘 한 일이다.”
고흐는 저 한 장의 그림에 많은 걸 담았습니다. 오솔길을 따라 앞으로 가보면 뒷모습만 보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한 사람, 그리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또 한 사람! 그들은 상처 입은 남자를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버린 율법사와 레위인입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고 교육을 해왔던 지도층 인사들인 거지요.
아마 그들은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양로원이나 보육원을 방문해서 그들 방식의 나눔을 실천하는 괜찮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렇게 피 흘리고 있는 구체적인 개인의 친구는 될 수 없는 거지요.
윤리적인 사람들의 함정이 있습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계명 혹은 윤리 뒤에 숨어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 것! 그들은 윤리적인 우월성으로 군림하려 들면서 자신의 삶이 빛나기만을 바랄 뿐 서로의 삶속으로 스미지를 못하기 때문에 정작 삶이 빛나지 않는 겁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초라하게 사라지는 그들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들’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너무나 윤리적인 우리들인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저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나 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본 적도 있었고, 누군가를 도와줘본 적도 있었습니다.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해서 명치끝에 걸려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우리는 부족해서 도움을 받고 넘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님을. 인간은 도움을 주며 풍요로워지고 도움을 받으며 윤이 나는 존재임을.
인간의 영혼은 어려움으로 죽어가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함께할 존재가 없이 고립되어 있을 때 서서히 죽어가는 거지요. 물을 만나지 못한 화초가 말라가는 것처럼.
저 그림에서는 상처 입은 남자까지 모두가 다 나의 자화상입니다.
살다 보면 손발이 마비된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요. 사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돕지 못하는 위기의 순간에는 보다 섬세해지지요? 도움을 주는 손길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 순간에 너그러운 도움으로 위험을 헤쳐오고 보면 그야말로 기적을 믿게 됩니다. 먹은 마음 없는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넘어온 사람, 그 사람은 단순히 위기를 모면한 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본 것입니다.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0)
고흐의 ‘해바라기’
ㆍ해를 등진 해바라기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는 존재를 솔메이트(Soulmate)라고 하지요?
솔메이트는 나를 나 되게 하는 존재입니다. 해바라기의 솔메이트는 태양, 태양입니다. 박두진의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해바라기가 사랑한 해일 겁니다.
‘해바라기’라는 말, 참 예쁘지요? 해를 바라 해바라기, 아닙니까? 그 말은 영어의 선플라워(Sunflower)보다 훨씬 은유적입니다. 해바라기의 노란 잎은 해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환희의 흔적일 겁니다. 그 노란 음에 도달하기 위해 고흐는 그렇게 많은 해바라기를 그렸나봅니다.
저 해바라기(1887년, 캔버스에 유채, 43×6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는 노란 음으로의 여행의 첫발이랄 수 있는 해바라기입니다. 두 송이의 노란 해바라기가 별밤 같은 배경의 터키블루로 인해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해를 닮은 둥근 얼굴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바람에 쓸리고 쓸려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고, 태양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바람을 맞고 또 맞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흐는 이렇게 썼습니다.
Two Cut Sunflowers
“나는 외톨박이 화가야. 누구도 내게는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글거리는 태양마저도 나를 보고는 외면한다. 내 심장은 항상 사랑과 열정으로 고동치는데, 그야말로 고독한 외침일 뿐이구나.”
그래서 저 해바라기, 보고만 있어도 바람의 냄새가 나나 봅니다. 저만큼 피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요? 그 고독과 상처의 시간을 햇빛을 빨며 흡수하며 그저 해 바라기로 견디며 쓸쓸하게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왔을 해바라기가 어쩐지 고흐 같고 또 ‘나’ 같지 않으십니까?
저 해바라기의 매혹에 빠져 있자니 생은 어쩌면 굴곡 없이 그저 환하고 매끈하게 피어나는 것만이 좋은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이야기는 상처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자기 이야기가 없는 생은 화려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가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해바라기가 언제까지 해 바라기를 하는지? 해바라기는 만개할 때까지만 해바라기를 합니다. 뜨거운 해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만개한 이후부터는 해를 등집니다. 저 해바라기는 해 바라기를 끝내고 해를 등지기 시작한 해바라기 같습니다. 버림받은 해바라기보다 고통과 고독을 삶으로 받아들이며 긍정하며 오롯하게 자기만의 시간으로 침잠한 해바라기 말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랑 후에 남는 것은 고독이고, 고독을 견디는 힘이라고. 그 힘으로 열매를 영글게 하는 거라고.
고흐의 해바라기는 희망의 상징이라면서요?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 희망은 꿈은 이루어진다는 그런 유의 희망은 아닐 겁니다. 해바라기가 희망이라면 그 희망은 깊은 절망의 심연에서 살기 위해 붓을 든 자의 비통한 생존의지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불 같은 거! 해바라기라는 이름에 현혹되어 해바라기를 희망의 상징이라고 외어버리는 유의 희망은 희망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름의 이면이 있습니다. 이름은 해바라기인데 해를 등진 해바라기 같은 것! 이름이 빛이라면 그 이면은 어둠입니다. 사람들은 이름을 믿고 이름에 기대하기 때문에 이름에 부응하지 못하면 비난하거나 동정하지만, 사실 성숙은 거기, 빛나는 시간이 끝나고 난 뒤의 시간에서 일어납니다. 빛나고 난 뒤의 시간, 해를 등진 해바라기의 시간이 없다면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영성가 안셀름 그륀은 성공하고 있는 동안엔 삶이 중단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름에서 힘이 빠져야 성찰이 일어납니다.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행세하고 있습니까? 그 이름에서 힘을 좀 빼셨습니까?
그나저나 해를 등진 해바라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토록 간절하게 해바라기를 했던 시절이 진짜 존재했던 걸까, 하는 생각! 어쩌면 햇빛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기에 바람을 견디고 견딘 그 간곡했던 바라기의 시간 때문에 기꺼이 해를 등지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물고기 속에 바다가 있듯 해바라기 속에는 해가 있습니다. 뜨거운 사랑 후에 해를 등지고는 어느새, 해를 닮아버린 자신의 에너지로 고독하게 열매를 영그는 해바라기가 아름답습니다.
Vincent van Gogh 1853 - 1890 Pieta (after Delacroix) 1889
a‑pair‑of‑lovers‑arles Van Gogh
Noon Rest from Work - Van Gogh
Shoes, 1888, Vincent van Gogh (Dutch),
Vincent Van Gogh. Branches Of An Almond Tree In Blossom (Artist Interpretation in Red). 1890
'서 양 화 (명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상처 입은 남자. 귀스타브 쿠르베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0) | 2013.11.11 |
---|---|
[스크랩] [강지연의 그림읽기] 히에로니무스 보슈(Hieronymus Bosch·) (0) | 2013.11.11 |
[스크랩] 레옹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0) | 2013.11.11 |
[스크랩] 루치안 프로이트(Lucian Freud)[ 박희숙의 미술관] (0) | 2013.11.11 |
[스크랩]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Art | 박희숙의 미술관] (0) | 2013.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