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양 화 (명화)

[스크랩] 렘브란트 - 작품과 생애

bizmoll 2013. 8. 24. 10:32

 

툴프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 ]

당시에는 범죄자 시체를 사용하여 해부학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과감하고도 획기적인 이 그림에 출현(?)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의 유명 인사 7명은 돈을 지불하였답니다. 많은 이들이 서로 이 그림에 등장하려고 했다는 데요, 이유는 과학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양인으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라 하네요. 이 집단은 개인들의 지위와 명예를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스키아 (1634) ]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고 해요. 밀려드는 초상화 주문량을 채우기 위해 바빴지만 그는 틈틈이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표현하여 화폭에 담았습니다. 어두운 바탕에 대조적으로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옆얼굴과 정교한 의상 및 장신구 질감의 표현 등이 렘브란트의 역량을 잘 보여줍니다.

 

[ 그리스도의 승천 (1636) ]

신비롭고 화려한 그리스도의 승천 모습은 당시 바로크 화가들이 많이 사용하던 화제였습니다. 카톨릭 교도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종교성을 잃지 않았던 렘브란트는 성경 내용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내린 후 승천하는 모습까지 3편 연작으로 그린 것입니다.

 

사스키아를 무릎에 앉힌 자화상 (1636) ]

<선술집의 방탕아> 라는 또 다른 제목의 그림입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 속에서 자신을 방탕한 난봉꾼으로, 아내 사스키아를 선술집의 매춘부로 표현했습니다. 거부인 자신의 처가를 조롱하면서 연애와 재물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듯 하네요. 왼쪽의 공작새와 렘브란트가 차고 있는 칼이 그의 사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폭풍을 머금은 풍경 (1636) ]

렘브란트는 풍경화를 많이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이 그림은 상상으로 하늘과 언덕과 구름을 그린 것이에요. 먹구름 사이로 언듯 엿보이는 광선과 마을의 모습이 렘브란트 특유의 빛과 명암처리로 되어 있습니다.

야경 (1642) ]

부인과 가족들이 죽고, 힘들었던 시기에 내놓은 렘브란트의 대표작입니다. 자경단원들 16명이 100길더 씩 내놓고 렘브란트에게 자신들을 그려달라고 했답니다. 독특한 군상화를 그리고 싶었던 렘브란트는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는 데요, 처음 그림을 보고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불만이 많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림 속 빛과 그림자의 선명한 색채 효과로 대원들의 심리와 극적 효과까지 잘 표현되어 있다는 평을 하고 있습니다.

 

 

환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1645) ]

환자를 고치고 설교를 하는 예수를 그린 작품은 렘브란트의 판화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는 동판화 제작을 즐겼는 데요, 이 작품에 보여지는 정교한 판화의 기법과 섬세한 명암표현이 우아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는 뒤러와 함께 서양 미술사의 대표적인 에칭화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편지를 든 밧세바 (1654) ]

당시 밧세바는 다윗왕 신하의 부인이었으나, 다윗은 그녀의 미모에 반해 자신의 신하를 죽이고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것입니다. 왕의 편지를 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나체라 할 지라도 너무나 슬퍼보이네요. 렘브란트는 밧세바의 얼굴을 통해 비극을 느끼게 하는 그녀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도살된 소 (1655) ]

들라크루와, 도미에, 수틴 등 19세기 많은 현대작가들이 렘브란트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이 그림을 많이 모사했었습니다. 푸줏간 모습을 그리는 것은 당시 그림의 한 경향이었다고 해요. 대들보에 걸려있는 소의 시체를 보며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끄집어 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적 표현과 강렬한 색채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유태인 신부 (1655) ]

이 그림은 성경에 등장하는 이삭과 레베카를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부인인 헨드리케가 사망한 후였던 렘브란트는 그녀를 추억하며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재혼시에는 유산을 주지 않겠다는 첫번째 부인 사스키아의 유서 때문에 합법적으로 결혼식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을 표현한 것이죠.

 

 

 

르네상스 이후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아홉 명의 자녀를 둔 방앗간집 주인의 여덟째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다른 형제들은 가업에 따라 제분업자, 제화업자가 되어야 했지만, 렘브란트는 7살에 라틴어 학교를, 14살에는 대학에 들어가고, 그 후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그림공부를 할 수 있었답니다. 타고난 그의 재능을 부모님이 가장 먼저 알아본 모양입니다.


19세에 동료화가 얀 리벤스와 함께 아뜰리에를 연 렘브란트는 자기자신이나 주위의 친구, 가족들을 모델로 한 그림을 자주 그렸는데요. 웃거나, 찡그리거나, 슬퍼하는 혹은 멍한 무표정의 사람들의 얼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업을 진행했답니다. 특이하게도 20대의 렘브란트는 노인들의 스케치를 많이 했다고 해요. 당시 젊은이들 답지않게 말이죠. 나이 든 노인들의 얼굴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던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그 고민을 진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17세기 유럽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데카르트의 실존주의 등 과학적 근대 철학이 활발했습니다. 렘브란트도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여러 자화상과 인물화들을 통해 인간의 실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다양한 인물의 포즈와 표정, 명암, 구도등을 이용하여 인간의 내면세계를 보이고자 했던 거죠.


또한 17세기 네덜란드는 막강한 해상강국 이었습니다. 동인도와 서인도 등의 여러 식민지는 네덜란드에게 엄청난 경제적 부를 가져다 주었으며, 건축과 예술에 활발한 활동을 가능케 해주었습니다.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은 예술품 수집에 마구 돈을 쏟아 부었으며 렘브란트에게는 수많은 후원자들이 생기게 되었죠. 특히 프레데릭 헨드릭 왕자는 렘브란트의 절대적 후원자가 되어 주었구요. 렘브란트는 이런 후원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귀족들이 개인자화상도 아닌 그림에 등장하기 위해 렘브란트에게 돈을 지불할 정도였다니, 그의 인기를 실감하시겠죠.


1634년 렘브란트는 미술거래상의 조카인 사스키아와 결혼을 했는 데요, 그녀는 막대한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왔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비싼 미술품과 여러 진기한 물건 들을 수집하느라 낭비를 일삼았고, 결국 파산에 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의 세 자녀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모두 생명을 잃고, 1940년에는 어머니가, 이듬해엔 30세의 아내 사스키아 마저 1살된 아들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가족을 잃는 비극을 견디면서 렘브란트는 포기하지 않고 역사에 남을 유명한 걸작들을 이 시기에 완성합니다. 두터운 붓질과 거친 터치로 후기 바로크 스타일을 완성해 나가는 데요, 그는 당시의 유행이나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개성있는 색감과 명암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러한 빛과 명암을 덕분에, 많은 이들이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종교적 신성함과 깊은 인간애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번째 부인 헨드리케와의 사이에서 두 아이를 더 얻기도 하고, 화가로서의 명성 또한 날로 높아지기도 했지만 렘브란트의 말년은 매우 비참했습니다. 엄창난 빚에 시달린 렘브란트는 가난한 장인들의 거주지역 안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겨야만 했어요. 1663년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으로 부인과 아들이 죽자, 그는 우울한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힘들게 그림을 그리던 1669년, 렘브란트는 부인의 무덤 곁에서 묘비도 없이 잠들었습니다.


 

 

출처 : Free As The Wind. (바람처럼 자유로이...)
글쓴이 : 강병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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