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國이 보관중인 朝鮮時代寫眞에의 招待★
1880년대 당시의 남대문
2가에 세운 "화신 백화점" "삼성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レ-トクレ-ム) 화장품 세로 광고탑
전력확보를 위해 건설이 개시되었다. 부터 80 km지점의 한만국경(현재는 중.북 국경). 총공비는 약 5억엔이다. 신칸센 건설 규모에 필적하는 금액이었다) 기업인 조선질소비료 (현재의 질소/日チッソ-칫소) 가 부담했다. 발전소(발전 능력 60만 kW)와 함께 준공했다. 280만 kW와 비교해도 그 크기는 용이하게 비교할 수 있다.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기(현재의 토시바)에서 제조를 맡았으며 건설(間組, 西松建設)이 했다. 5기를 약탈해 갔다. 이리티슈 카와카미류의 댐에서 확인되었다. 견고했었기 때문에 파괴를 면했다. 현역으로 활동 중에 있다. 도안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에 수풍댐의 사진이 그려져 있다.
선룸무도가 崔承喜의 모습
""(Victor) 세로 간판이 보인다. 걸려 있다.
황실가족 사진.
덕수궁 대한문(대안문) 앞은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전국으로 퍼져 3.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광복절 특집 '고종황제, 진실을 파헤친다. 고종 독살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제시되었다. 구라토미의 일기. 지시에 의한 독살이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나 있었다. 식혜로 알려져 왔는데, 라며 "현대 법의학을 통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해외에 독립을 호소하려는 것을 감행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망명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여사와 진왕자가 탄생했을 때의 영친왕 부부.
가족 사진 황족 출신 이방자(李方子) 여사
톱레스 치마 저고리 이었던 조선시대 아낙네들의 대담한 모습 "젖가슴 드러낸 치마 저고리" 풍자화 위로 말을 붙이는 일본. 더라면, 대신 침략한 것은 저 털보 소련놈들이었을 테니...!"
변화가 생겼다. 가치가 없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출산하여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다."라는 상징적인 자랑이기도 했다. 굳건히 지켜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한 뒤인 1950년대까지도 이어졌었다. Paul Jacoulet(1896-1960)의 작품 건너가 한국, 중국, 폴리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생애를 일본에서 보내며
여성답게 표현했다 저고리 아낙네들의 분주한 움직임 - 1921년
되고서도 이런 풍습은 남아 있었다. 하여 일본 순사로부터 길거리에서 뺨 맞아 가면서도
"한국판 마리아 상" 안치된 한국형 성모마리아상. 만든 약 2m 높이의 이 작품은 등에 발가벗은 아기 예수를 업고 성수(聖水)를 나타낸다. 전부 대담히 드러낸 모습이 한국적이다.
전차의 진동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올려놓았다. 이 당시에는 자배기와 독뚜껑은 특히 여인들이 잘 깨뜨리는 그릇이었다.
햇볕에 펼쳐 놓고 말리고 있다.
평양 시내를 촬영 모습
장군의 장군기(帥字旗)가 배수량 3, 425 톤) 갑판에 걸려있다. 2007년10월에 한국에 10년 동안 임대되는 형식으로 돌아와 6월 10일, 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란, 쇄국정책을 펼쳤던 구한말 흥선대원군 당시 발생한 조선과 미국간의 전쟁이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1865년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입항 하려다 이를 침략행위로 간주한 조선 군민에 의해 저지되고 이 결과 셔먼호가 소각되고 선원 전원이 처형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배상과 통상을 요구하며 1871년 아시아 함대 5척을 동원해 조선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다. 이 결과 조선군민 250여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비록 조선은 이 전쟁에서 우세한 미군에 패했지만 미국 역시 조선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조선과의 통상이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40여일만에 중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더욱 더 쇄국의 길로 접어 들게 되며 서양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 역시 더 한층 깊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요새가 점령당하거나 파괴되고 미군은 3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촬영한 한국의 선박(Junk, 猛船)
미군에 의해 잡힌 조선군 포로는 2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사진의 조선군 2명은 저항하고 있다.
계획을 짜고 있다.
문정관(問情官)이 포로협상단 대표가 미해군 군함에 승선 해 듣고 있다.
미해군. 초지진에서 1박 야영을 한 미군들은 6월11일 이른 아침부터 덕진진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눈에다 못을 박아 눈에 들어간 액귀를 아낸다.
땅바닥에 사람의 그림을 그린 다음 그 복부에 칼을 꽂아 두어 말라리아를 퇴치했다.
장티부스를 예방하기 위해 소머리와 마늘을 문앞에 둔다. 경기도
전라남도에서는 말라리아 퇴치 방법으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환자의 발바닥에에 쓴다. 여자인 경우 오른쪽 발바닥에다 쓴다.
맥주병으로 황담 치료 황담이 낫는다고 믿었다.
환자의 옷이나 모자를 나뭇가지에 걸어두면 홍역이 낫는다고 믿었다. 평안남도
설사퇴치
고추를 처마밑에 걸어 두면 콜레라를 퇴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 액운을 짊어진 - 강이나 갈버닥에 버리면
노는 장난꾸러기들의 모습을 담았다. ( Willard Dickerman Straight)씨가 촬영한 것으로 대학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 그때 그 시절 <코윈 테일러 사진첩에서(1908 - 1922) | |
아래의 사진들은 대한제국 1908년 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인 1922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코윈 테일러(Corwin Taylor) 부부가 찍은 것으로 손자인 Ewing Bevard Taylor씨가 남가주대학 한국헤리티지 도서관에 기증한 것이다. 정겨운 추억에의 정감을느끼게 한다.
江건너 정자(亭子)의 모습이 보인다.
송림(松林)과 석교(石橋).
수천년간 땔감으로 나무를 베다보니 山은 늘, 황폐화 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조림(造林)사업을 장려하였다. 충남 공주.
초가지붕의 교회. 1800년대 말엽에 설립된 듯 하다. 1870년대, 쇄국정책을 폈던 조선은 사학(邪學)이라 하여 초창기 천주교를 핍박하고 박해하였다.
오래된 교회. 1900년대 이전에 설립된 듯...
배재고등학교 강독실(講讀室).
배재고등학교 화학실습실.
배재고등학교. 체육시간.
배재고등학교 기숙사.
배재고등학교 운동장.
이화학당 Recitation hall.
이화학당 화관(花冠) 연습 장면.
이화학당(梨花學堂). 학생들.
이화학당. Modernism의 영향으로 여성들도 신학문을 배우려는 열의가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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