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 (동양 화)

[스크랩] 小山 朴大成의 예술세계

bizmoll 2013. 7. 31. 17:56

 

 

小山 朴大成의 예술세계

 

신라정신을 현대화한 水墨의 達人

 

 

小山 작업의 특성은 장쾌한 구성과 대담한 먹의 활용으로 화면을 역동감 있게 처리한다는 점이다. ‘날아갈 듯 생동한 것(如飛如動·여비여동)’ 바로 소산의 세계다.

박대성 화백
⊙ 1945년 경북 청도 출생.
⊙ 수상: 제18~25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입선, 중앙미술대전 장려상(1978년),
    중앙미술대전 대상(1979년).
⊙ 작품: <천년배산-불국사> <불국설경> <불국야월> <적설> <석탑야색> 등.

尹範模 미술평론가·경원대 교수

 

 

 

불국설경

 

 

 小山 朴大成(소산 박대성)의 예술세계를 일별하려면 2006년 가나아트에서 발간한 <소산 박대성>(2006) 화집을 보면 된다. 회갑을 맞아 두툼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화집은 소산 예술의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화집 속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작가 약력을 소개한 부분이다.

그곳에는 1974년 타이완부터 2006년 서울 가나아트센터까지의 개인전과 주요 단체전의 내역, 중앙미술대전 대상 수상(1979)과 문신미술상(2006) 같은 수상 기록, 공모전 심사, 작품 소장처 등이 소개돼 있다.

 


  상림

 

여기까지는 다른 미술가들의 이력 소개와 다름이 없다. 문제는 학력란이다. 여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988 윤범모와 중국 화문기행/ 1998 윤범모와 북한 화문기행.’
 
  단 두 줄의 경력. 그것은 중국과 북한 여행, 하지만 동행자 이름까지 명기하며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거기에 이름이 오른 여행의 동반자인 필자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불밝힘굴

 


  소산과 필자는 많은 지역을 함께 다녔다. 우리는 서울올림픽 개막 직전 이른바 ‘竹(죽)의 장막’이라던 ‘中共(중공)’ 여행을 했다. 외국인 출입금지 구역이 적지 않았던 시절, 우리는 3개월간 중국대륙에서 좌충우돌 ‘畵文(화문) 기행’을 했다. 후일 우리는 북녘 땅도 함께 여행하면서 평양이나 묘향산 등지를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의 화문기행은 신문연재로 이어졌다.

필자는 이때의 기록을 풍물사진집 <중국대륙의 숨결>과 <평양미술기행>으로 남겼다.
 
  소산과 필자가 여행한 곳은 주로 히말라야 골짜기나 타클라마칸 사막과 같은 오지였다. 萬年雪(만년설)에 덮인 高山(고산)지대나 오아시스의 고마움을 체득하게 하는 사막을 무작정 헤매 보는 일, 그것처럼 훌륭한 인생공부가 또 어디에 있을까.
 
  실크로드 답사를 통해 우리는 참으로 많은 공부를 했다. 苦行(고행), 그렇다. 고행처럼 창작의 깊이와 넓이를 실감나게 하는 교실도 많지 않으리라. 

 

 


 
법열

 


을숙도
 
  자발적 유배
 
  소산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다. 자신의 팔 한쪽까지 잃었다.

自手成家(자수성가)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그는 외로운 고행길을 통하여 나름 세계를 구축했다. 예술은 고행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작가의 고통이 클수록, 또 그 고통을 잘 소화하면 할수록 예술은 싱싱해진다.
 
  소산의 예술은 바로 극한상황을 넘고 피어난 야생화와 같다. 그 꽃은 바람과 천둥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향기가 은은하면서도 오래간다.
 
  소산과 중국 桂林(계림)을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계림의 산수 앞에서 소산은 화폭을 펼쳤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사이에 필자는 티베트를 다녀오기로 했다.
 
  계림은 중국 山水畵(산수화)의 고향이 아니던가. 나는 소산에게 리커란(李可染)의 계림산수 같은 걸작을 만들라고 덕담을 건넸다. 우리는 베이징(北京)에 있는 리커란의 자택을 방문해 他界(타계) 직전의 老(노)대가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13억 중국인 가운데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던 20세기의 마지막 대가, 리커란은 소산의 화첩을 보고 남다른 관심을 표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리커란의 주특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계림산수였다.
 
  계림에 소산을 남겨놓고 필자는 티베트로 향했다. 1주일 정도 있다가 다시 계림으로 돌아오니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고생만 잔뜩 했다”는 것이다. 아니, 그림 그리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텐데, 왜?
 
  한마디로 그는 계림을 그리지 못했다. 무수한 스케치들만 마치 死鬪(사투)의 흔적처럼 쌓여 있었다.

중국 산수화의 고향을 정복하겠다는 욕심은 결국 過欲(과욕)임을 자인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계림 절경이 한국의 자연과 달리 지나칠 정도로 이색적 풍경이라는 데 있었다.
 
  이는 마치 北宋(북송)의 화가 郭熙(곽희)가 그의 <林泉高致>(임천고치)에서 말한 可行者(가행자)가 아닌 可居者(가거자)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때때로 자연은 관광객처럼 대충 보고 화면에 옮기려 할 때 허락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물론 껍데기만 흉내 내고자 할 때에는 가능하다.
 
  하지만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형상화하려면 일정기간의 소화작용이 필요하다. 자연과 함께 살면서 자연과 합일될 때, 비로소 창작의 문은 열린다. 절경, 아니 자연은 反芻(반추)의 시간을 요구한다. 

 

 


  천년신라의 꿈

 


  소산은 현장에서 화폭을 펼치는 화가다. 하지만 대상이 소화되지 않으면 화폭을 접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이른바 관광산수이기 때문이다. 관광객처럼 겉만 흉내 내는 태도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이 소산이 주장하는 예술론이다.
 
  현재 소산은 서울의 가족과 떨어져 작품 소재의 현장인 신라의 古都(고도) 경주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른바 ‘자발적 유배’의 경우다.
 
  우리 역사에서 유배문화는 종종 찬란한 예술적 성과를 낳기도 했다. 尹善道(윤선도)·丁若鏞(정약용)·金正喜(김정희) 등이 그 예이다. 김정희의 대표작 <歲寒圖> (세한도)는 제주 유배시절의 산물이다.
 
  조선 선비의 유배는 他意(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산의 경우는 ‘자발적’ 유배다. 스스로 선택하여 외롭고 절실한 상황 속에서 작품과 맞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타의의 상황에서 나온 ‘세한’의 의미와 자발적 선택에 의해 나온 ‘신라’의 의미는 차원을 달리한다.


  
  
  수묵화 전통의 창조적 계승자
 
  소산은 먹 작업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오늘날 미술대에서 먹 작업을 하는 미술학도는 보기 어렵다. 이 같은 풍조는 화단으로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대답은 단순하다. 秋史(추사) 이래 먹 작업의 정통 계승자는 누구일까.

추사가 주장한 文字香(문자향)과 書卷氣(서권기)를 가슴에 품으면서 자유자재의 筆力(필력)을 구사하는 水墨(수묵)의 달인, 그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 한국미술계가 소산을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먹의 정통 계승자’라는 데에서도 찾게 한다.
 
  소산 예술의 주요 특징은 우리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점이다. 그의 출발은 전통적 수묵화의 충실한 학습에서 비롯됐다.
 
  그의 출세작이자 중앙미술대전 대상 수상작품인 <霜林>(상림·1979년)의 경우, 안개 짙은 산간 마을을 사실적 묘사로 경물을 집약한 작품이다. 거대한 산 능선은 흐릿하게 배경으로 처리했고 前景(전경)은 성글게 서 있는 나무들을 중심으로 돌산과 밭이 부각되어 있다. 대상을 압축하면서 淡彩(담채)에 의한 사실적 표현은 경쾌한 화면경영을 보여준다. 상큼한 수채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재래의 수묵화와 차별상을 보인다.
 
  산수의 정신은 살아 있으되, 종래의 정형 산수와는 궤도를 달리한 것이다. 소산은 제주 풍경이라든가 을숙도와 같은 현장을 화면에 즐겨 담았다. 을숙도 연작은 감각적 화면구성으로 이미 전통산수의 세계와 거리를 둔 성과물로 각광받았다.
 
  그는 생략과 집중으로 대상을 자유롭게 재단하고 부각시키면서 이를 小山式(소산식) 풍경으로 각인시켰다. 소산 풍경은 자연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면서 문화유산의 현장이나 인물들을 출현시킨다.
 
  소산 회화의 특징은 무엇보다 수묵 작업이라는 데 있다. 그는 어쩌면 거의 마지막 세대에 해당하는 수묵화가인지도 모르겠다. 수묵화가 푸대접 받는 현실에서 어느 누가 下圖(하도) 작업에만 10년 이상을 투자하겠는가.
 
 
  먹의 향연
 
  줄 긋기 10년, 요즘의 화가와는 무관한 표현이다. 붓 훈련을 하지 않으니 필력이 약하다.

그림에 필력이 약하니 이른바 氣(기)가 약하다. 요즘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약점이기도 하다. 색깔 亂舞(난무)시대의 수묵. 채색 시대에서 검은 그림이 돋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唐(당)나라 화가 張彦遠(장언원)은 그의 <歷代名畵記>(역대명화기)에서 “꽃이나 눈보라를 화려한 색깔을 쓰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고, 五色(오색)을 쓰지 않고도 오색 비단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수묵의 장점을 강조한 말로서, 장언원은 먹으로 오색을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계를 得意(득의)라고 했다.
 
  득의라, 화가들이 지향할 저 높은 곳이 아닌가. 먹으로 득의를 표현할 수 있다. 아무리 먹에 오색이 깃들어 있다 해도 운영하기 나름 아닌가. 검은색은 죽음의 색이 아니고 약동하는 생명의 색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모든 색을 조합하면 먹색이 된다.
 
  색의 귀향, 그것의 궁극적 지향은 먹색이다. 먹 색깔은 살아 꿈틀거린다. 하여 먹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색채 난무시대에 소산의 먹 그림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먹의 정신성 때문에 그럴 것이다. 먹의 향연, 이는 소산 회화의 원형이다.
 
  먹 작업의 특징은 筆線(필선)일 텐데 그것의 기초는 묘사력이다. 細筆(세필)의 치밀한 묘사는 소산의 長技(장기)다. 그는 불국사의 건축을 세필로 처리하여 숨을 죽이게 할 수 있는 필력의 소유자다.
 
  길이 8m의 대작 <佛國雪景>(불국설경·1996년)은 소산 필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작품이다. 近景(근경)을 흐드러진 소나무 줄기로 화면에 변화와 긴장감을 배치하고 遠景(원경)에 불국사의 외경이 차분하게 묘사되어 있다. 어떤 카메라라 하더라도 쉽게 잡아낼 수 없는 가람의 설경을 소산은 치밀하고도 섬세하게 표현했다. 과연 먹 그림의 승리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득의작이다.
 
  비슷한 장소에서 묘사한 또 하나의 불국사 풍경인 <千年拜山(천년배산)-불국사 전경>(1996년)은 길이 9m의 대작으로, 풍경을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습윤하게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 외경을 이렇듯 생동감 있게 화면에 담은 작품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자유자재의 화면구성
 
  소산은 세필의 사실적 묘사를 구사하다가도 八大山人(팔대산인·‘중국의 고흐’라고 불리는 明나라 말기의 승려화가- 편집자 주)처럼 대담한 붓질로 대상의 요체만 一筆揮之(일필휘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소산 작업의 특성은 장쾌한 구성과 대담한 먹의 활용으로 화면을 역동감 있게 처리한다는 점이다. ‘날아갈 듯 생동한 것(如飛如動·여비여동)’, 바로 소산의 세계이다.
 
  소산 먹 그림의 진면목은 <玄律>(현율·2006년)이란 작품에서 그 怪力(괴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현율

 


  화면은 마치 俯瞰法(부감법)에 의한 것처럼 상공에서 내려다본 자연이다(소산은 독수리처럼 상공에서 본 부감법이나 어안렌즈로 본 시각 등 다양한 시각에서 자연을 ‘해석’하기도 한다).

수직으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이 제각기 기립하고 서서 자연의 웅대한 괴량감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조용한 비파 소리가 아니라 일종의 절규에 가깝다. 자연의 웅장한 內在律(내재율)이 먹 작업 속에 스며 있다. 우뚝 일어선 산들은 화면을 장쾌하게 이끌면서 그 사이사이에 사찰이나 다리 등 사람의 흔적을 양해해 준다.
 
  <현율>은 소산 60평생의 걸작이다. 먹 작업의 대단원에 해당한다. <현율>은 산전수전을 겪은 소산의 내면 풍경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소산의 회화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소산 먹 그림의 특징은 무엇보다 線(선)을 중시한다는 점, 더불어 圓(원)·方(방)·角(각)의 묘체를 자유스럽게 구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圓角(원각)의 원리, 곡선과 직선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 우주의 원리는 숨어 있다. 김지하 시인이 현대시박물관 시인의 집 택호로 작명했던 ‘원각’, 이는 존재의 본질을 은유하기도 한다.
 
  사실 원과 각의 자유스런 구사는 먹에 의한 毛筆(모필)의 특장이기도 하다. 이는 소산 그림의 핵심 사안이기도 하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관 초대전(2009)에 출품했던 <玄鄕>(현향·2009)이라는 작품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소산의 화면구성은 한마디로 자유자재를 희구한다. 實景(실경) 같지만 대상을 임의로 배치하기 때문에 사진과 다르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다
 
  <불 밝힘 굴>과 같은 작품은 토함산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런데 산의 아래에 불국사 경내가 조감도처럼 펼쳐지고 산 위에는 석굴암이 위치한다. 토함산의 동쪽에 석굴암이, 서쪽에 불국사가 위치하기 때문에 도저히 한 화면에 함께 나올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소산은 경우에 따라 그 같은 고정관념을 파괴한다.
 
  금강산의 삼선암을 그릴 때도 현지의 실경과 다르다. 이는 卞寬植(변관식)이 그의 대표작 <삼선암>을 그릴 때, 소재들을 한 화면에 임의 배치한 방식과 상통한다.
 
  소재의 임의 선택으로부터 구도의 임의 배치, 이는 寫意(사의·그림에서 사물의 형태보다는 그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하여 그리는 일)의 기초이다. 소산은 단순 풍경을 가져와 묘사력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빌려 자신의 독자적 발언을 전하고자 한다. 바로 氣韻(기운·글이나 글씨, 그림 따위에서 표현된 風格(풍격)과 정취)의 세계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소산의 작업에서 具象(구상)과 非(비)구상의 경계를 가름할 필요가 있는가. 언뜻 보면 소산의 작품은 실재하는 실경을 사실적으로, 그것도 아주 충실히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득의 심상 표현은 굳이 대상의 재현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구상과 抽象(추상)의 경계, 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리커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중국화의 필묵은 추상을 매우 중요시한다. 아울러 추상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서예는 매우 추상적인 예술이다. 추상이란 객관적인 사물을 개괄하는 것인데, 추상이란 곧 구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상이 없으면 추상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추상과 구상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면서 실은 서로 협조하는 관계이다. 모순 속의 통일이라고 하겠다. 이런 까닭에 전통적인 중국화에서 자연주의가 출현한 적이 없으며 또한 추상파가 등장한 적도 없다.”
 
  소산의 세계는 이제 구상과 추상의 세계를 자유스럽게 넘나든다. 아니 구상과 추상이라는 경계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소산은 대상과 거리를 두기도 하면서 본질과 대응한다. 그의 작품은 寫景(사경)인 듯하지만 寫意(사의)에 가깝다. 

 

 


 

삼선암

 

  경주의 풍경은 특히 그렇다. 그것은 소산식의 心象(심상)이다. 그는 경주의 토함산에서 남산까지, 불국사에서 포석정까지, 보름달에서 연꽃에 이르기까지, 계속 유목민의 감각으로 藝魂(예혼)을 가꾼다.
 
  소산은 <古美>(고미)와 같은 도자기를 소재로 한 작품도 제작했다. 백자 혹은 분청사기, 그 하나만을 화면 가득히 부각시킨다. 대담한 作意(작의)이자 구도이다.
 
  도자기는 사진이나 油畵(유화) 장르에서 다룬 전통적 소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산이 일구어낸 도자기는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작가는 무엇보다 형태라는 표현성보다 흙의 실체인 정신성에 주목한다. 유화에서 자아내는 기름기의 반들거리는 요소를 제거하고 깔깔할 정도로 담박하게 도자기의 맛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게다가 유화처럼 바탕 칠을 하지 않고 화선지의 본성을 살려 세월의 때가 낀 도자기의 성품을 표현한다.
 
  이렇듯 소산의 독특한 도자기 그림은 그가 오랜 세월 골동과 함께 살아 온 성품을 반영한다. 여타의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도자기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대담하게 구사된 여백의 미이다. 소산 그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대상의 함축이다. 함축은 바로 여백을 동반한다. 검은 먹이 강하게 작용할수록 상대적으로 여백의 역할은 부상하게 마련이다. 이 점은 주목을 요한다. 함축은 여백을 불러온다. 소산의 회화세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서양 유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먹의 맛, 게다가 대담한 필력과 구도 등은 소산 세계의 덕목으로 작용한다.
 
 
  경주에서 꿈꾸는 원융과 무애행
 
  경주 칩거생활의 결과로 소산은 신라의 풍경과 정신을 화면에 담았다. 작품 <천년 신라의 꿈- 圓融(원융)의 세계>는 새로운 기법을 동원하여 경주의 역사 현장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몇 가닥의 산봉우리로 화면을 적당히 구획하고, 그 산의 품에 갖가지의 신라 유산을 배치했다. 분황사 탑, 불국사, 남산 마애불, 삼체 석불, 포석정 등. 이들의 위치는 현장과 무관하다. 어떤 건축물은 정면으로 위치하지 않고 옆으로 비딱하게 서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은 탁본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마치 고고학자가 탁본에 의해 과거를 해독하듯 독특한 표현기법을 구사했다. 표현 방법상의 새로운 시도이다.
 
  <法悅>(법열)이라는 대작에서도 흡사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는 석굴암 본존상과 십대 제자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화면 바탕을 古拓(고탁)처럼 바리고 線描(선묘)로 제자상을 각기 표현했다.
 
  <천년 신라의 꿈>은 원융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정말 신라의 문화가 총체적으로 동원되어 소산의 신라정신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소산의 신라정신은 무엇인가. 그가 추구한 원융의 세계는 무엇인가.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데, 사실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 아쉽기도 하다.
 
  신라정신의 핵심은 元曉(원효)사상에서 추출할 수 있다. 원효는 그의 <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론)에서 모든 상대적 대립을 초월한 一心(일심)의 근원은 상대적 도리가 아닌 지극한 도리(無理之至理·무리지지리)이며, 그렇지 않지만 크게 그러하다(不然之大然·불연지대연)라는 대외법적 논리를 펼쳤다.
 
  정말, 그렇지 않지만 크게 그러하다! 원효의 사상은 일심·和會(화회)·無碍(무애)로 요약할 수 있다.
 
  ‘거리낌이 없는’(무애) 것, 거기에서 신라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역시 원효의 사상을 無碍行(무애행)으로 정리할 수 있다면, 신라인의 마음도 무애행의 드러냄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곧 원융의 세계와 상통한다. 원융은 무애행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원효는 저잣거리에서 무애의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무애행은 바로 한국미의 한 원형이기도 하다.
 
  소산은 경주에서 ‘신라인’으로 자처하면서, 작품에 ‘신라인’이라고 서명을 하면서, 신라정신을 천착하고 있다. 과연 소산이 도달한 신라정신은 어디일까. 원효가 실천했던 무애행과는 얼마만큼의 親緣性(친연성)이 있을까. 소산의 그림은 이제 기법의 수준에서 정신의 세계로 진입한 만큼 그가 추구하는 원융 세계의 실체가 궁금해진다.
 
  그는 진정 신라인인가. 언젠가 소산은 원효와 즐겁게 만날지도 모른다. 거리낌이 없는 무애의 세계, 우리는 언제 그 같은 세계에서 거닐어 볼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남는 결론, 話頭(화두)는 무애행이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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