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양 화 (명화)

[스크랩] 아트 앤 섹슈얼리티

bizmoll 2013. 7. 3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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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오빠’라는 말에 꼼짝 못할까

 

 

어린 숙녀의 관능을 탐구한 르누아르

 

 

▲ 르누아르 作 ‘잠자는 욕녀’

 

 

오빠라는 단어에 어떤 마력이 숨겨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인 남자에게 ‘어린 여자’는 분명 마력적인 존재다. 연인과의 나이 차가 많을수록 남자는 소위 ‘능력자’로 평가받고 주변 지인들로부터 부러움을 산다.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를 가장 즉물적으로 다루는 포르노그라피의 주요 등장인물이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고 보면 한 남자에게 있어 ‘어린 여자’의 존재 여부는 강력한 남성성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왜 아니겠는가.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출근길에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여학생을 바라보며 야릇한 상상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르시아 마르케스도 여든이 다된 나이에 아흔 살의 남자와 열네 살 소녀의 사랑과 섹스를 다룬 소설을 출간하며 자신의 정력적인 집필 활동을 과시했고, 루이 15세는 베르사유궁 한쪽에 어린 창부들만 모아둔 별장에서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어린 여자에 대한 말초적 상상, 남세스러운 일이 아니다.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즐겁고 예뻐야 해!”

 

화가들에게도 어린 여자는 뮤즈이자 창작의 동력이 됐다.

루이 15세가 가장 총애했던 루이즈라는 소녀는 부셰의 모델이었고, 발튀스는 꼬마 여자 아이의 허벅지와 팬티가 들여다보이는 포즈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에곤 실레는 여자 아이의 은밀한 곳을 노출시켜 징역살이까지 했다.

키르히너와 오토 딕스도 여자 아이를 출연시켰고, 그뢰즈와 마네도 옷가지를 그다지 많이 걸치지 않은 소녀를 등장시켜 남성의 유전자에 잠재된 ‘못된’ 판타지를 자극시켰다. 흥미로운 건, 빛과 색채의 화가이며 관람객에게 행복을 심는 그림으로 알려진 초기 인상주의 회화의 거장 르누아르도 말년에 어린 여자 그림을 꽤 남겼다는 것이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녀들의 모습을 말이다.

 

‘잠자는 욕녀’는 1897년에 완성된 작품이다. 르누아르 나이 쉰여덟이었다. 르누아르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동료 화가, 알베르 앙드레는 그의 모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은 이렇다. 마치 키스라도 해달라는 듯 튀어나온 입술, 밝고 쾌활한 눈, 엉덩이가 과장된 긴 몸통, 둥그스름하면서 그다지 근육질이 아닌 약간 짧은 다리, 뼈가 없는 듯한 느낌. 그는 늘 집안에 모델을 두고 자신의 눈으로만 찾아낼 수 있는 모델들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빠져버린다.”

 

앙드레의 표현대로라면 ‘먹기 편한, 뼈 없는 순 살코기’ 같은 여자 모델들이라고 할까.

당장이라도 회춘한 노화백의 핑크빛 염문설이 나돌 것 같은 설명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말년에 레콜레트라는 시골에 정착했던 르누아르는 심각한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았다. 붓을 잡지 못해 손에 묶어줘야 할 정도였으며 침대에 눕고 일어날 때도 부축을 받아야 했다. 르누아르가 평생토록 여자의 관능에 탐닉했던 로댕이나 루벤스처럼 여자를 밝힌 것도 아니었다. 그럼 왜 제 몸도 가누지 못했던 당대의 거장에게 갓 여자의 향기를 발산하는 모델이 필요했던 것일까?

 

르누아르는 1919년 생을 마친 그해, 알베르 앙드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림이란 건 그렇지 않은가, 벽을 장식하려고 있는 거야. 따라서 가능한한 화려해야 해. 내게 그림이란… 소중하고 즐겁고 예쁜 것, 그렇지, 예뻐야 해!”

 

르누아르 평생의 일관된 예술론이었다고 할까. 마네와 모네, 드가와 세잔 등 초기 인상파 그룹은 비타협주의로 일관하며 당시 프랑스 미술의 주류였던 살롱전에 반기를 든 집단이었다. 르누아르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비타협주의자가 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는 순교자 역할을 맡을 생각은 전혀 없었고, 만일 살롱전에서 내 그림들이 낙선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림을 계속 출품했을 것이다.”

르누아르의 말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화풍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다른 인상파 작가보다 사물의 형태가 좀더 뚜렷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초기 인상주의 작가들이 숱한 비난을 받은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알다시피 인상파란 빛과 주변 사물들의 색에 따라 풍경과 사물의 색감이 달라지는 모습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한 작가 그룹이다. 예컨대 이전까지 인체의 피부를 표현하는데 살색 이외의 물감을 쓰는 건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은 나무 그늘에 있으면 피부에 푸른색이 번지기도 하고, 와인빛 커튼 옆에 서면 와인색이 물드는 현상을 그대로 수용했다. 인간 또한 주변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모습이었다고 할까.

그에 비해 르누아르는 좀 더 선명했다. 앙드레에게 남긴 말처럼 그에게 중요한 건 인상주의 풍의 그림을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쁘고, 즐거운’ 그림을 그리는 데 있었다.

 

르누아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며 흐뭇해 하길 바랐다. 이미 20대부터 즐겨 그리기 시작한 어린 소녀들의 모습은 언제나 깜찍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게 표현했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뱃놀이 일행의 오찬’에서처럼 야유회의 주체가 귀족이 아닌 서민들이어도 즐겁고 행복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르누아르의 여자들은 요염하다

 

인상파에 가장 호의적이었던 비평가 중 한 명이었던 테오도르 뒤레는 르누아르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르누아르는 빛과 속도감 있는 붓질로 여인에게 우아함과 유순함과 편안함을 더해 주고 여인의 피부를 투명하게, 그리고 뺨과 입술은 장밋빛 욕정으로 채색한다. 르누아르의 여자들은 요염하다.”

 

뒤레의 말은 누드화에서만 확인되는 건 아니다. 피아노를 치는 두 자매의 모습과 풀밭에서 들꽃을 꺾는 모습을 그린 작품, 비오는 날 우산을 쓴 거리의 여인들의 풍경 등, 어린 여자 아이는 물론 숙녀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과 행복의 세계를 공간에 기록한 화가’라는 평가처럼 각각의 인물에서 보는 이를 도취시키는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냈다.

 

한 가지 화풍에 자신의 작품세계를 내맡기지 않았던 르누아르는 초기 인상파 작가 중 가장 먼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작가가 되었다. 인상파 작가 중 가장 먼저 프랑스 최고의 문화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의 수훈자가 되기도 했다. 항상 의심받고 비난받던 인상파 활동 때와는 달리 자신만의 작품 세계에 천착할 수 있는 기반을 얻는 것이었고, 그것은 르누아르가 자신 이전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회의 시작이었다. 이때 르누아르는 ‘키스하기 좋은 입술과 뼈가 없는 듯한 몸’을 가진 자신만의 어린 뮤즈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소녀에서 막 숙녀가 되는 순간

 

“아! 저 젖가슴! 얼마나 부드럽고 중량감 있는가! 금빛 색채를 띠며 밑으로 처진 저 아름다운 기복.”

 

르누아르의 말이다.

말년의 그는 소녀에서 숙녀가 되려는 여자의 몸을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이건 그가 평생토록 그리고자 했던 ‘가장 예쁘고 즐거운 것’이었다. 앙드레의 표현처럼 이 시기에 그가 그린 나체의 여자들은 젖가슴과 등을 손으로 만져보고 싶게 만드는 충동을 일으킬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영화배우 스칼렛 요한슨이 처음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을 때 ‘불가해한 매력을 가진 여배우’로 각광받고, 영화 ‘매치포인트’에서 ‘뭔가 (느낌이) 다를 것 같은 여자’로 표현된 것처럼, 르누아르의 여자도 어떤 마력처럼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는다고 할까.

거장이 죽기 전에 몰두한 작품세계란 점을 떠올리면 이건 마치 인생을 통달한 사람만이 깨닫게 되는 무슨 진리처럼 여겨진다. 어린 여자에게 꼼짝 못하는 남자들의 습성이 말이다.

 

 

 

 

⑤ 창녀에게서 시대의 아름다움을 찾은, 키스 반 동겐

 

 

퇴폐적인 건 왜 아름답나

 

 

▲ ‘천사장의 탱고’

 

 

턱시도를 입은 천사가 나체의 여인과 춤을 추고 있다. 천사의 다리는 여자의 다리 사이로 깊숙이 들어가 있고 여인은 허리를 뒤틀며 천사의 품을 파고들고 있다.

여자의 흰 피부색과 대비되는 붉은 입술과 붉게 달아오른 볼에서 여인이 야릇한 감정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상에서 천사와 춤을 추는 여자의 모습이 숭고하고 우아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몸짓과 표정은 퇴폐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키스 반 동겐이 그린 ‘천사장의 탱고’라는 작품이다.

한눈에 봐도 여기에서 천사는 기존의 종교화와 신화에 등장하는 천사가 아니다. 벌거벗은 여자가 끌어안은 천사는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오르가슴이다.

 

 

천사와 나체여인의 탱고

 

‘천사장의 탱고’는 1930년에 완성된 작품이다. 키스 반 동겐은 당시 프랑스 파리 사교계를 이끌던 화가였다. 몽마르트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실은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부활절과 성탄절 등 축제 기간에는 언제나 파티가 열렸다. 그의 파티에 초대되는 사람은 파리의 유력인사들이었다. 오페라 극장주와 주연 가수, 장관과 장관의 부인, 작위를 가진 귀족, 영화배우와 화상 등, 파리의 VVIP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파티 중 하나였다.

파티가 열릴 때마다 반 동겐은 최고의 의상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손님을 맞았으며 그들을 즐겁게 할 특별 이벤트도 빠뜨리지 않았다. 비평가 앙드레 와르노는 반 동겐의 파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파티는 기상천외한 가상무도회였다. 한다 하는 파리의 사교계 인사들이 모두 모이곤 했다.”

 

말하자면 ‘천사장의 탱고’는 파티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연미복을 입고 천사의 날개를 단 남자가 나체의 여인과 탱고를 추는 장면은 반 동겐이 호스트가 된 파티의 특별 이벤트였는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건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홀딱 벗고 춤을 춘 여자다.

당시 미술계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로테르담 거리의 여자에서부터 몽마르트 화류계 여자는 물론 귀여운 파리지엔에 이르기까지 모두 반 동겐으로부터 초상화를 그려 받기를 원하며 그의 작업실에서 네다섯 번에 걸쳐 모델로 설 수 있길 갈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파리의 여자들은 반 동겐 앞에서라면 옷을 훌훌 벗고 모델이 되고 싶어했다는 말이다. 도대체 왜?

 

 

가난한 화가와 귀부인의 만남

 

키스 반 동겐만의 ‘남다른 기술’ 같은 것일까?

증언이나 자료가 없어 ‘은밀한 기술’까지는 알 수 없지만 반 동겐이 빼어난 외모를 가진 꽃미남이었던 것 만큼은 사실이다. 어쩌면 외모만으로도 로테르담 거리에서 모델을 손쉽게 픽업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파리의 여성들이 그의 누드 모델이 되고 싶어했다고 생각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돈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그가 파리에 왔을 때는 가난한 화가였다. 그림을 팔아 연명할 수도 없어서 일러스트를 그려주며 끼니를 채웠다. 이런 형편에서 그가 파티를 열고 파리 사교계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었던 건 한 백작 부인의 후원 덕분이었다. 수려한 외모를 가진 가난한 화가와 귀부인의 만남이라고 할까.

 

백작 부인의 호위를 받으며 반 동겐은 파리 사교계에 빠르게 동화되어 갔다. 당시 언론에 비쳐진 반 동겐의 모습은 ‘정신이 쏙 빠지도록 놀고 있는 파리의 미치광이짓에만 마음을 쏟고’ 있는 화가였다.

‘광란의 시대의 포로’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매력적인 귀부인의 후원을 받은 잘생긴 화가는 화제의 중심에 섰고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는 여자들이 늘어갔다. 이쯤되면 인생역전 드라마라고 할까.

당대의 인기작가로 상업작가로 잘 먹고 잘 산 화가라면 더 이상 거론할 여지도 없고 훗날까지 사랑받는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그의 초상화에는 시대가 원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담겨있었다.

 

 

시대가 원한 것은 ‘퇴폐미’?

 

그것은 ‘퇴폐미’다.

그가 그린 여인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야릇하고, 욕구하는 여자의 끈적한 눈빛이거나, 집착하는 여자의 얼굴, 환희에 찬, 달뜬 여인이었다. 반 동겐이 파리에서 만난 여자들의 모습이었다. 거기에 청년 시절 야수파 초기 일원이었던 그의 대담하고 거친 화풍은 우아하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파리 여인들의 들끓는 속내를 끄집어내기에 최적의 표현법이었다. 또한 발색하는 강렬한 색채는 그림을 한결 화려하게 치장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그림에 파리의 여자들이 열광한 건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 동겐의 초상화에는 화류계 여자들의 몸짓과 표정이 담겨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귀부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귀여운 파리지엔을 모델로 삼은 건 아니었다. 가난했던 초기 파리 생활에서 그의 모델이 된 여자는 로테르담 거리의 여자였고 몽마르트 언덕의 창녀나 무희들이었다.

반 동겐이 전 시대 물랭루즈의 화가였던 툴루즈 로트렉(1864~1901)처럼 돈이 많아서 화류계의 여인들과 친분을 쌓으며 그녀들을 화폭에 담을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의 외모는 그녀들을 모델로 세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여인들을 대하는 두 화가의 생각은 너무도 달랐다. 로트렉이 화류계 여자들의 고통과 삶 등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면, 반 동겐은 사랑하고 집착하고 질투하는 퇴폐적 아름다움을 포착했다.

 

그리고 백작 부인의 후원으로 사교계에 입성한 그는 상류층 여성들 또한 화류계 여성들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했다. 반 동겐은 단단히 여민 코르셋 뒤에 숨겨진 그녀들의 퇴폐적인 면모를 화폭에 갈고닦은 야수파와 표현주의 기법으로 즉물적으로 담아냈다. 시대 또한 광란과 퇴폐의 시대였다.

당시 파리는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활기에 찬 파티의 나날이었다. 근대화의 근엄하고 계몽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는 모두 사라지고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소비와 축제를 누렸다. 여성들도 당당히 사회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쾌락과 향락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나섰다. 반 동겐이 로트렉과 달리 화류계 여성의 모습을 다르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건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조숙녀의 욕망을 엿보다

 

말하자면 요조숙녀가 촌스러워진 세상이었고 종교나 신화, 관습적 모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던 시대였다. 여자들은 숭고하고 희생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반 동겐은 그런 여자들의 욕구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였다. 그리고 반 동겐이 찾은 새로운 아름다움이란 ‘창녀적 퇴폐미’였다. 물론 반 동겐 이전에도 창녀를 그린 화가들은 많았다. 드가는 ‘세 명의 창녀들’이란 그림을 그렸고, 키르히너 역시 ‘베를린 거리의 여인’이란 작품에서 창녀의 모습을 담았다. 인상주의의 대가인 마네도 ‘올랭피아’라는 창녀을 그렸고, 모네의 ‘풀밭 위의 식사’라는 작품 속 여인들 또한 창녀였다. 하지만 창녀를 소재로 한 작품을 대하는 대중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키스 반 동겐의 퇴폐미가 각광받은 건 기존의 질서를 거부한 새로운 것에 대한 대중의 열망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 동겐이 창녀적 속성을 가진 여자의 무의식을 봤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가 거리의 여자들 속에 있었고 파티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여자의 본능, 새로운 시대의 변화 등을 관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벗은 여자들의 몸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말이다.

 

 

 

 

④ 인간의 고독을 치유하는 그림 그녀의 금지된 욕망을 도발하다

 

 

에드워드 호퍼

 

 

▲ 에드워드 호퍼 作 ‘여름’

 

 

그녀들은 외롭다. 에드워드 호퍼의 여자들은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어한다. 반나체로 햇빛 쏟아지는 창가를 향해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오지 않는 누군가를 그린다.

영화가 상영 중인 영화관 복도에 홀로 나와 그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들은 혼자였는지도 모른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에서도 혼자 객석에 앉아 독서를 할 뿐이다. 늦은 밤 카페에서도 홀로 앉아 있다.

 

남녀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호퍼가 담아낸 정서는 관계의 끝에 와 있는 연인들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두 남녀 사이에 오가는 눈빛은 따뜻한 구애의 눈빛이 아니다. 싸늘히 식어버린 사랑만 느껴질 뿐이다. 애써 시선을 피하고 서로 딴청이다. 이별 여행인지, 아니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떠난 여행인지 알 수 없지만 호텔방에서조차 연인을 둘러싼 공기는 차갑기만 하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은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작품에 드러난 이미지대로만 실체를 파악한다면 ‘위기의 주부’쯤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갱년기에 접어든 주부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더 이상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부부가 떠오르기도 한다.

호퍼의 작품 중 ‘철학으로의 탈선’이나 ‘도시의 여름’을 보면 부부 관계가 성적인 불만족에서 오는 위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침대에 있는 여인은 하의를 벗고 등을 돌리고 누워 있으며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다. 더 이상 흥분되지 않는 섹스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심각한 가족사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둘 사이의 친밀감은 전혀 확인할 수 없다.

 

 

그녀는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여름’이라는 작품은 이 부부 관계가 일촉즉발의 상황임을 보여준다. 대문 앞에 나와 서 있는 여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몸의 윤곽과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원피스를 입고 있다. 그녀의 집은 길가에 있고 대문은 물론 모든 창문이 활짝 열려 있다. 아무리 건전하게 상황을 생각해보려고 해도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모습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오후 여름 햇살이 좋아서 서 있는 모습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혹, 오늘 그녀의 남편이 출장 가는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3류 드라마를 많이 본 탓일까. 이건 굉장히 도발적인 상황임에 틀림없다.

지나가는 낯선 남자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속살을 훤히 내비치며 낯선 이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는 상황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여자다. 대리석 기둥과 외벽으로 장식된 집을 가지고 있고 서 있는 모습만으로는 우아하고 기품마저 갖춘 여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그녀는 가문에 먹칠할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집안 꼴이 저렇게 되도록 남편은 무엇을 했는지도 궁금해지는 상황이다. 중요한 건 지금의 모습을 한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상황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가 3류 막장 드라마나 보여주기 위해 이런 그림을 그린 건 아니다. 단순한 한 편의 치정극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호퍼는 당시 미국 최고의 화가였다. 평단의 호평은 물론 대중적 인기도 누렸으며 쉰 살의 나이에 미국 뉴욕 근대미술관(모마)에서 첫 회고전을 가진 화가였다. 온갖 미술상을 휩쓸었으며 세계 각지의 미술 전람회에서 초대하고 싶은 화가로 첫손에 꼽히는 작가이기도 했다. 이건 호퍼의 그림에 모두가 공감할 만한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 아닐까. 호퍼의 ‘탈선’에는 현대문명에 의한 인간의 상실감과 단절이 담겨 있다.

 

에드워드 호퍼는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상실감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고독과 침묵이 지배하는 세계다. 그의 작품에서 사랑, 행복, 기쁨, 즐거움이란 단어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부터 생기가 없을 뿐더러 배경까지도 짙고 암울하다. 호퍼가 표현한 공간은 항상 그림자가 길다. 석양이거나 이른 아침이다. 날이 저물도록 그녀를 찾아온 사람이 없으며 온 밤을 혼자 지새운 여자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말하자면 그림자와 어둠은 고독의 깊이인 셈이다.

 

 

풍요의 시대, 고독을 그리다

 

그 고독의 실체를 현대문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문명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고층 빌딩에서 바라본 풍경이 나타나고, 여행객을 위한 현대화된 숙박 시설인 호텔이 등장한다. 그리고 도시인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인 카페와 바가 주요 배경이 되고, 자동차와 주유소가 등장하기도 한다.

 

1950년대 미국은 황금시대였다. 국민 대다수가 중산층의 가정을 꾸릴 정도로 풍요로웠고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했다. 미국 전역이 고속도로로 연결됐고 누구나 포드 자동차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문화의 중심축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왔다. 뉴욕파가 중심이 된 추상표현주의가 세계 미술을 지휘했고, 팝아트의 본고장으로서 현대 미술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온갖 화려한 이미지가 넘쳐났고 화가들도 할리우드 무비스타처럼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 됐다. 국민 대다수가 즐기며 사는 데 부족함이 없는 시대, 말 그대로 모두가 행복할 것만 같은 황금시대였다.

 

하지만 에드워드 호퍼는 풍요로운 문명의 혜택 속에서 인간 개개인이 느끼는 상실감과 욕망을 파고들었다. 도시라는 공간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소외감을 표현하고 여성에 대한 금지된 시선을 통해 도시인의 내재된 욕망을 표현했다. 모두가 문명의 이기를 누릴 때 문명이 결국 인간을 소외시킬 것이라는 통렬한 비판이라고 할까. 이에 대해 당시 미국 평단은 ‘미국 개인주의의 예술적 완성’이라고 평했다.

 

 

그림 속 여인은 누구?

 

그러나 정작 중요한 건, 호퍼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가장 내밀한 개인적 인상”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문명의 고독’ 이전에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삶에서 ‘굴곡’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화가로 성장했고, 데뷔 이후에도 줄곧 인기 작가로 살았다. 화가로서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린 몇 안 되는 생존 작가였다. 그럼에도 그는 비극적 정서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의 삶에서 스캔들이나 가정불화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오히려 스스로 불행하다는 사실을 고백한 말은 아니었을까? 호퍼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내 조세핀과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이지만 둘은 경쟁관계였다. 조세핀은 호퍼의 비평가이자 매니저였으며 화가이기도 했다.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은 모두 조세핀이 모델이기도 했다. 물론 이 사실만으로 호퍼의 그림이 자신의 부부관계를 그린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 역시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한 ‘레볼루셔너리 로드’라는 영화에서처럼, 모두가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샘 멘데스 감독이 호퍼의 작품 세계를 영화로 구현해낸 작품이었다. 에드워드 호퍼 역시 미국 황금시대 문명의 풍요를 누린 중산층이었다. 그의 그림은 그의 고독이자 상실감이었는지도 모른다.

 

 

 

 

③ 현대미술의 참혹한 이단아 프랜시스 베이컨

 

 

사랑은 파괴를 통해 완성된다?

 

 

▲ 베이컨의 ‘십자가를 위한 세습작’ 중 첫 번째 그림.

 

 

“모든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죽인다.”

영국의 희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달리 말하면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파괴한다는 뜻이 된다. 사랑을 희생과 배려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그건 누군가에게 사랑을 빼앗길 염려가 없을 때의 말이다. 가령 어미와 자식 같은 사랑 말이다.

그러나 나눠 가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집착과 소유다.

사랑을 할 때 상대에 대한 집착과 소유는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이건 3류 드라마에서도 잘 쓰지 않는 흔해 빠진 스토리이지만 사랑을 하는 당사자는 사랑의 뒷면에 파괴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사람,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작품이 거래되고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라는 영국 화가는 그런 인간의 마음을 잔인하리만치 잘 아는 작가였다.

 

 

절규만 가득한 그의 그림에 왜 열광하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어떤 한 단어로 규정하기 힘든 작가다. 팝아트, 추상표현주의, 입체파와 같은 어느 미술사조로도 규정할 수 없고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처럼 장르로도 구분 짓기 힘들다. 베이컨이 가진 세계는 세계적인 석학 질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라는 책 한 권을 통해 연구할 정도로 바닥을 알 수 없다. 최근 개봉한 디카프리오 주연의 ‘인셉션’이라는 영화는 물론이고 수많은 콘텐츠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삶과 작품이 인용될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분명한 건 그가 남긴 그림에 온전한 인간의 형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참혹하다. 얼굴은 짓뭉개졌고 팔과 다리, 그리고 몸통조차 구분이 되질 않는다.

나체의 형상은 싸우는 것인지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십자가에는 도살된 짐승의 고깃덩어리가 걸려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절규와 비명만 가득하다. 그로테스크하고 암울하고 비극적이라고 할까. 그런데 놀라운 건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그의 그림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1년 파리에서 회고전이 열릴 때는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프랑스 잡지 ‘예술 경험’은 가장 위대한 생존 작가 1위로 베이컨을 선정하기도 했다. 1970년대는 피카소가 여전히 생존하던 시기였고, 마크 로스코와 마크 토비 등 뉴욕파가 중심이 된 추상미술의 전성기였다. 그림을 통해 정서적 기쁨과 감동을 얻고자 한다면 베이컨의 작품은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공포와 두려움을 안겼다.

 

 

매춘도 서슴지 않은 동성애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왜 그토록 끔찍한 그림을 그렸는지는 분명치 않다. 가령 작품 ‘교황’과 ‘감금’, 그리고 ‘머리4’를 그릴 때는 “인간의 절규가 가장 뛰어나게 묘사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두 인물’과 ‘잔디밭의 두 인물’은 사진가 머이브리지가 찍은 ‘움직이는 사람’이란 사진을 보고 몸의 곡선과 움직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베이컨의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사람들이 ‘왜 절규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단지 절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몸의 형태만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사람들은 그의 사생활에서 그림의 의도를 찾기도 했다. 베이컨은 동성애자였다. 스스로 매춘부가 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받고 섹스를 하는 것만큼 짜릿한 일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매춘은 그가 작가로 성공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성격도 폭력적이었으며 괴팍했다. 술에 취하면 난폭한 괴짜로 돌변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처벌받는 시대였지만 베이컨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일랜드에서 런던으로 처음 왔을 때 자신이 부유한 노인들에게 ‘온갖 봉사’를 했다는 사실도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그의 곁에는 항상 동성 애인들이 있었지만 애인이 보는 앞에서 또 다른 동성과의 섹스를 즐기기도 했다. 파리와 모로코, 스페인 등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항상 떠돌았다. 재산을 모으는 법도 없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계 최고의 작가라는 명성을 얻으며 불티나게 팔려 나간 그림값은 술과 도박, 그리고 섹스를 즐기는 데 모두 썼다. 베이컨의 전기 작가였던 안나 마리아 빌란트는 베이컨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동료 화가인 브라이언 클라크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철저한 불량배’라고도 했다.

 

 

왕립아카데미회원·기사작위도 거부

 

베이컨은 진부하고 통속적인 것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영국 문화예술계 인사라면 누구나 최고의 영예로 아는 왕립아카데미회원도 거부했고 기사작위도 받지 않았다. 이런 성향은 작품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베이컨은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려고 했다. 전통에서 벗어나 의미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느낀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 화가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베이컨은 데생과 구도를 무시하며 기존에 없었던 충격적인 그림으로 사람들의 감정에 그대로 파고들었다. 그의 사생활만큼 그림도 즉물적이었다.

 

미술 전문잡지 ‘아트’는 베이컨의 그림이 ‘인간 본성의 어두운 미래를 묘사했다’고 표현했다. 베이컨의 작품은 사람들의 감정에 여과없이 전달됐다. 관람객은 그의 그림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처절함을 맛봤다. 질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짐승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고통받는 모든 인간의 고기’를 봤다고 했다.

 

혹자는 그가 아일랜드인이기 때문에 아일랜드인을 연민하는 작품이라고 했고, 나치의 마크가 등장하는 그림을 보고 2차 세계대전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영혼이라고도 했다. 십자가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기존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한 저항을 읽기도 했다. 사회적 의미로 그의 작품을 평가한 건 그가 보여온 행적 때문이기도 했다.

 

 

그림 속 광기와 증오는 자아의 이면?

 

하지만 프랑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뒤틀린 자아를 발견했다. 밀란 쿤데라는 베이컨과 미셸 아셍보의 대담을 기록한 ‘화가의 잔인한 손’이란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베이컨의 초상화는 자아의 한계를 측정하고 있다. 어느 정도 뒤틀어야 개인이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을까?

어느 정도 뒤틀어야 연인은 연인으로 남아있게 될까? 인간의 얼굴은 원래는 사랑스럽다가도 질병과 광기와 증오와 죽음 속에 매몰되면 사랑스럽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얼굴에서 사랑스럽다는 느낌은 어느 정도까지 남아 있게 되는 것일까? 자아가 자아이기를 그만두는 한계는 어디일까?’

 

밀란 쿤데라는 베이컨 그림에 드러나는 광기와 증오가 사랑을 하는 자아의 이면이라고 생각했다. 혹, 베이컨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에서처럼 ‘아름답지만 무자비한 파괴적 힘을 지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물론 그가 남긴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베이컨이 가장 사랑했던 두 남자, 조지 다이어와 피터 레이시는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베이컨의 뮤즈이기도 했다.

자살 시기도 그가 작가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으며 그의 첫 번째 회고전이 있기 전날과 두 번째 회고전이 있기 바로 전날에 자살했다. 두 남자가 자살한 이유는 세상에 알려진 게 없다. 다만 프랜시스 베이컨은 “나는 사랑받기 위해 그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건 “성적 집착뿐”이라고 했다.

그가 짓뭉갠 건 자신의 사랑과 자아였을지도 모른다. 프랜시스 베이컨을 규정하는 한마디를 찾는다면 ‘사랑의 악마’인지도 모르겠다.

 

 

 

 

술의 신 ‘바쿠스’에 ‘인간’을 담다

 

방탕아로 살다 간 요절 화가 카라바조

 

 

▲ 카라바조의 작품 ‘청년 바쿠스’

 

 

누구나 탕아가 되긴 쉽다. 그러나 멋진 탕아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멸시와 박해를 이겨낼 용기가 필요하고 방탕한 삶 속에서도 자기의 세계를 뚜렷하게 표현할 줄 아는 감각도 필요하다.

400년 전 이탈리아에서 살인을 하고 도망자로 살았던 망나니 중의 망나니 카라바조라는 화가가 바로 그다.

 

 

바로크미술 개척자된 로마의 골칫덩이

 

16세기 말, 불꽃처럼 살다 요절한 카라바조. 지금 우리는 바로크미술의 개척자로, 렘브란트와 루벤스에게 영향을 끼친 화가로 카라바조의 작품세계를 칭송하고 있지만 그는 로마의 골칫덩어리였으며 술자리에서만큼은 모두가 피하고 싶었던 망나니였다.

그가 남긴 건 그림만이 아니었는데, 수사기록에 15번이나 이름을 올렸고 수감된 경우도 7번이나 됐다. 번뜩이는 재능은 있었지만 ‘16세기 인간’으로서 갖춰야할 품성을 갖추지 못한 카라바조의 그림이 평가받을 리 없었다. 아마도 당시 귀족들은 그의 그림을 보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림은 좋은데 인간이 덜 됐단 말이야.’

물론 카라바조가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카라바조가 다른 교황청의 화가처럼 단정하고 품위있는 화가로 살았다면 ‘청년 바쿠스’ 같은 그림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청년 바쿠스’가 단지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바라봐야 할 ‘술의 신’으로만 보이지 않고 너무나 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은 카라바조의 방탕했던 삶이 크게 한몫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 바쿠스’는 1598년경에 그려진 작품이다.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본격적인 화가로 활동했던 시기가 1599년이니 이미 그는 로마에 오기 전에 바로크미술의 바탕을 마련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알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바로크미술 거장은 렘브란트와 루벤스다.

그들의 작품 특징은 사실주의적인 묘사와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다. 명암의 대비를 통해 연극적 효과를 높여 등장인물의 서사성을 강조하는 표현법이 바로크미술이다. ‘청년 바쿠스’를 보면, 배경은 어둠이 강조되어 있고 인물에게는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듯 밝고 화려하다. 중세미술과 고딕미술의 특징 중 하나인 신에게 햇살이 내리거나, 머리 뒤에 둥근 빛을 장식하던 표현법을 화폭에 그대로 녹여냈던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신의 모습이다. 인간성이 결여되어야 할 신의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묘사됐다. 얼굴과 표정, 그리고 신체 또한 다비드의 조각 같은 몸이 아니라 평범하기 짝이 없다. 르네상스 미술의 기본 철학이기도 했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에서는 더욱 지상으로 내려온 신의 모습이었다. 과연 이런 신에게 누가 경외감을 가질까 싶지만 제단에 모셔진 신의 모습보다 ‘청년 바쿠스’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놀아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수 있다

 

카라바조가 그린 것은 ‘술의 신’ 바쿠스가 아니라 ‘청년’이다. 그 시대 모든 청년들이 원했던 욕구를 카라바조는 ‘청년 바쿠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바로 쾌락과 탐닉이다.

그림 속 바쿠스는 애써 담담한 표정과 미소가 없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초조하다. 와인 글라스 안에 와인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은 표정과 다르게 와인글라스를 든 바쿠스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켄더에 담긴 와인은 기포가 채 가시지도 않았다. 옷끈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는 빨리 와인을 들이켜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월계관처럼 포도넝쿨을 이어 쓰고 갸우뚱한 고갯짓은 자신을 보는 이에게 의사를 묻는 것이다. ‘오늘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술의 신이라면 이쯤 되어야 하지 않을까.

 

놀라운 건 ‘청년 바쿠스’를 그린 카라바조의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었다는 것이다. 표정과 몸짓을 보면 유혹의 기술이 프로 중의 프로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놓인 ‘먹잇감’을 보며 눈을 희번덕거리고 침을 삼키는 꼴에 유혹 당할 ‘먹이’는 바보가 아닌 이상 세상에 없다. 도도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모습, 그러니까 ‘오늘 너 아니어도 난 아무렇지 않아’라는 모습을 보여야 프로다운 모습이다. 카라바조는 바로 그것을 알고 있다. 이건 ‘놀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다.

 

카라바조는 로마에 입성하기 전부터 쾌락의 진맛을 아는 남자였다. 남아있는 각종 사건 기록으로도 짐작이 가능하지만, 1590년 어머니가 죽은 후 유산을 물려받은 그가 로마에 등장했던 1599년에 빈털터리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유산을 술과 도박, 그리고 섹스에 탕진했다.

 ‘청년 바쿠스’를 그리기 전 1594년경에 바쿠스를 그린 또 다른 그림이 있는데 작품 제목이 ‘병든 바쿠스’다.

불어터진 입술, 퀭한 눈동자, 그리고 바쿠스는 양손으로 소중하게 포도송이를 끌어안고 있다. 술의 신 바쿠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게 포도이겠지만 여기에서 포도송이는 쾌락을 의미한다. 병들고 지쳐가고 있지만 쾌락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쾌락 중독자의 모습이 병든 바쿠스다.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병든 바쿠스는 바로 카라바조의 모습

 

후대 평론가들은 자화상을 한 점도 남기지 않은 카라바조의 모습이 바쿠스일 거라고 추측한다.

방탕하게 살다 결국은 살인을 저질러 한평생을 도망자로 살다 서른아홉에 요절한 화가의 모습이 병든 바쿠스로 보이는 건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미 재산을 탕진하고 오갈 데 없는 카라바조가 로마에 입성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이 ‘청년 바쿠스’다. 병든 기색은 전혀 없고, 온몸에 윤기마저 흐른다.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여기에서 카라바조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두려움과 기대라고 할까. 카라바조는 다짐했을 것이다. 로마에서 교황청 화가로 성공하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 윤택한 환경 속에서 쾌락을 누리겠노라고. 그런데 공허한 눈빛과 떨리는 손을 통해 그의 속내가 드러나고 있다. 두려운 것이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그가 화가로서 성공하지 못할까 두려운 게 아니라, 그것은 다시 병든 바쿠스처럼 삶 전체를 탕진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청년 바쿠스’는 쾌락을 좇는 그 자신의 마음까지도 탐닉하는 ‘탐욕의 신’처럼 보인다. 이미 바쿠스에게 쾌락과 탐욕은 익숙한 것이 됐다. 쾌락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포가 기억한다. 카라바조는 탐욕의 세계가 어떤 곳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바쿠스는 다시 쾌락의 유혹에 빠질까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이제 타인에게 그 위험을 권할 만큼 무덤덤해진, 자신 안에 방탕한 삶과 쾌락이 키워낸 탐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것은 젊음을, 삶을 불필요하게 느끼고 탕진해 본 사람만이 아는 두려움이다.

 

이처럼 인간적인 갈등과 욕구를 가진 신이 또 있을까. 이런 ‘신’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이 그를 이어 그의 화풍을 스승으로 삼았고 바로크미술이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카라바조의 재능은 그의 삶, 망나니로 산 짧은 삶 그 자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누가 세잔의 머리에 ‘나체’를 넣었나

 

‘목욕하는 여인들’에 미친 10년

 

 

▲ 세잔의 작품 ‘나무 아래 목욕하는 여인들’ photo 조선일보 DB

 

 

생애 처음 본 여자의 나체, 또는 첫 경험의 순간이거나 남자로서 나 자신을 성장시킨 여자는 달콤한 기억이었든 낯 뜨거운 순간이었건 떨쳐낼 수가 없다. 소년 시절 프랑스 화가 폴 세잔(1839~1906)이 최초로 목격한 낯선 나체의 여인은 현대미술을 태동시킨 미학적 근원이 됐다.

 

‘나는 품 안의 창녀, 나의 여공, 나의 연인, 나의 처녀를 껴안고 싶었다네.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여주고 다른 것들도 할 수 있기를….’

 

폴 세잔이 사춘기 시절 자신의 친구였던 에밀 졸라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아무리 허물없는 친구 사이에 오간 편지라고 하지만 너무 솔직한 표현이 아닌가. 이해 못할 감정은 아니다.

남자 나이 열여섯,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장에서 뛰는 여학생의 출렁이는 가슴만 봐도 온밤을 뜬 눈으로 지샐 수 있는 시절이다. 하물며 호숫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나체의 여인들을 봤다면, 그건 평생 잊지 못할 ‘내 인생의 명장면’쯤은 되고도 남는다. 아마도 이런 감정이 ‘목욕하는 사람들’을 탄생시킨 결정적 순간이 아니었을까?

 

 

입체주의 탄생 알린 ‘목욕하는 사람들’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린 입체주의의 선조 격인 작품이다. 사물의 형태와 특징을 단순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입체주의는 원근법과 같은 기존의 미술 기법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의 생각을 그리는 대상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입체주의 이전에는 보이는 것을 그렸다면 그 이후부터는 생각하는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할까.

입체주의의 선구자인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린 후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알고 있는 것을 그린다”라고 말했다. 아마추어의 습작처럼 추하고 기괴하게 그린 자신의 그림에 대한 변명이 아니었다. 이 한마디는 화가들에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의 대상을 확장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작가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이었다면, 비로소 생각한 대로 그릴 수 있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또 하필이면 그 문제작이 벌거벗은 여인네들 모습이다. 단지 여자를 너무 좋아한 탓일까?

 

남자라면 누구나 모니카 벨루치가 출연한 영화 ‘말레나’에 등장하는 남자 아이 레나토만처럼 성에 눈뜨는 시기를 겪게 된다. 성인이 되기 위한 첫 과정이며 무언가 열망하는 첫 순간이라고 할까. 난생 처음 누군가를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안고 싶어진다. 셔츠 겨드랑이에 밴 땀자국만 보고도 낯이 붉어져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남녀가 함께 있는 방에 불이 꺼지는 드라마 속 장면만 봐도 온갖 상상의 세계를 떠다녔던 시절. 신기한 건 무슨 마약 중독자처럼 망각의 순간을 경험하고 나면 누군가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어떤 진실에 다가선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여자의 가슴을 만져본 적도 없고 벗은 몸을 본 적도 없는데 마치 경험했던 일처럼 지난 밤의 기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해진다. 여자와 사랑의 본질에 한발 더 다가선 느낌이라고 할까. 쥐뿔도 모르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 기억들이 잊히지 않고 남아 있다는 건 비로소 남자로서 갖춰야 할 자격을 하나 얻게 되는 것이다.

 

 

남자의 자격을 얻다

 

폴 세잔이 살았던 19세기 말은 이 본능을 숨겨야 할 죄의식처럼 여겼다. 하지만 세잔은 자신의 본능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랐다. 물론 사춘기 시절 세잔이 훗날 ‘목욕하는 사람들’을 그리게 될 순간을 예견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편지 내용 그대로 좀 더 진한 육체 행위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화가를 꿈꾼 한 소년이 여자와 그 여자를 대하는 자신의 감정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20세기 현대미술 시작을 알린 입체주의를 탄생시킨 스승이 됐다.

 

세잔은 정물화·풍경화·인체화를 그렸다. 그림의 대상은 예전과 같았지만 세잔은 다르게 그렸다.

 세잔은 말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사물에 대한 지식과 진실성을 터득해가면서 만족할 만큼의 완벽함에 이르고자 한다.”

 

세잔은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화폭에 표현하려고 했다. 사과와 산의 구조를 파악하려고 했다고 할까. 작가의 인상에 의해 사물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 본연의 구조를 그려 완벽한 형태를 추구했다. 그의 그림은 기하학적인 모습을 가지게 됐고 당시 비평가들은 그를 ‘정신병자’라고 매도했다.

온갖 악평에도 세잔은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40여년 동안 매일 같은 형태의 그림을 그렸다. ‘생 빅투아르 산’만 30번을 넘게 그렸고, 사과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그려냈다. 그의 집요한 신념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려고 했다. 그의 성격을 미뤄 짐작해 보면 ‘목욕하는 사람들’에 등장하는 나체의 여인들도 소년시절 프랑스 남부 어느 시골에서 목격했던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상상으로 키워낸 나체의 여인들

 

세잔의 성격은 개방적이지 못했다. 내성적인 아이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10여년 동안 ‘목욕하는 사람들’만 그렸지만 누드 모델을 두고 그림 한 번 제대로 그린 적이 없었다.

프랑스 남부 시골 마을에서 누드 모델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의 성격 탓도 컸다. 말하자면 세잔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에 의지하며 나체의 여인을 그렸던 것이다. 세잔이 그려낸 ‘목욕하는 사람들’은 수십여 점에 이른다. 그리고 그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가 어느 날 들판을 헤집고 다니다 호숫가에서 목격한 최초의 나체 여자였다면 비약일까?

 

사실이야 어찌됐건 세잔은 나체의 여인을 탐구했을 것이다. 사과 정물화를 그리듯 구조를 파악하고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를 찾기 위해 10년 동안 같은 그림만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세잔이 죽은 그해 ‘대 수욕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로서 자격을 얻은 뒤 줄곧 상상하며 키워낸 세잔만의 가장 순수한 형태의 나체의 여인들이었다.

 

흥미로운 건 20세기 현대미술을 알린 입체주의의 대표 작품 역시 세잔의 영향을 받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란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또는 시작을 알린 두 화가에게 나체의 여인이 미학적 근원이 됐다는 것이다. 단지 두 화가의 경우만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최초의 여자가 있다.

주류 홍보용 달력 속의 여인에게 순정을 바친 사람도 있고, 어느 날 밤길 골목을 가다 물소리에 홀려 샤워를 하는 창가의 여인이 삶의 전부로 느껴지던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한 여인을 통해 고통스러운 성장통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불현듯 어느 시기가 지나면 한꺼풀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마 세잔도 소년 시절 불면의 밤들을 떠올리며 목욕하는 여자들을 그려나가지 않았을까.

 

 

 

김영진
‘월간 미술세계’기자, 여성 패션지‘바자’, 남성 패션지 ‘에스콰이어’ ‘루엘’ 피처 에디터

 

 

 

주간조선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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