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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가 말을 걸다
연꽃은 피었는데 풍류에 빠진 양반들, 그대들은 君子인가
신윤복 ‘연당야유도’
▲ 신윤복 ‘연당야유도’종이에 색, 28.2×35.2㎝, 간송미술관
그해 여름을 잊을 수가 없다. 마흔을 갓 넘길 때였다. 8월의 햇볕이 타들어가던 시절에 낙동강 하류의 남지철교가 보이는 작은 모텔에서 열흘을 보냈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결심으로 찾아간 동네였다. 물도 설고 낯도 선 동네에서 나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모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니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꿈은 번거롭지 않았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한낮에는 주로 방안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러다 지치면 근처에 있는 절에 가서 좌선을 하거나 하릴없이 철로를 걸어 다녔다.
모텔은 논 가운데 덩그마니 세워져 있었다. 앞 도로를 제외하고는 주변에 건물이 전혀 없었다. 모텔 바로 뒤쪽에는 자그마한 산을 배경으로 연방죽이 있었는데 아침마다 매미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울어 젖혔다. 떼를 쓰듯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좇아 창문을 열면 매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산처럼 널찍한 연잎 속에서 이 세상 꽃이 아닌 듯 기품 있고 우아한 연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은’ 바로 그 꽃, 군자의 꽃이었다.
가야금 소리 들으며 연꽃을 감상하다
여기가 어디일까. 정갈하게 석축을 쌓고 담장을 두른 걸 보니 어느 대갓집 후원이다. 연못에는 시퍼런 연잎 사이로 붉은 연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개인 집 후원에 연못을 만들 정도라면 집주인은 그 위세가 아주 당당한 정승급이거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역관(譯官)이다.
도포에 두른 붉은색과 자주색 띠를 보니 역관 같은 중인(中人)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복장은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당상관 이상만이 할 수 있다.(당하관 이하는 파란색 띠를, 벼슬이 없는 백면서생은 검은색 띠를 두른다.) 권력에 재력까지 갖춘 것인가.
백성의 심부름꾼이라는 공무원이 쥐꼬리만한 박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화려한 저택에서 여름 한낮의 넉넉함을 즐기고 있다. 이런 사람은 필시 아버지가 부자거나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권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쪽이든 남들보다 여유롭게 즐기며 사는 것을 그들은 풍류(風流)라고 생각한다.
고급 관료들이 노는 모습 한번 감상해 보자.
장마도 끝나고 연못 속의 연꽃들이 경쟁적으로 꽃대를 들어 올리던 8월 어느 날, 세 남자가 후원에서 만났다. 모처럼 하늘도 맑게 단장하고 서늘한 바람을 흘려보내는데 분위기 띄워 줄 가야금 소리가 빠질 수야 없는 법. 아리따운 기생들이 짝을 맞춰 동석했다. 소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 깔고 앉아 가야금 소리 울려 퍼지니 이보다 더 좋은 풍류가 없으렸다.
여자를 대하는 사내들의 태도가 사뭇 다르다. 한 남자는 모임의 취지에 충실하게 장죽을 물고 앉아 가야금 소리를 감상하고 있다. 뒤로 빠진 남자는 방건까지 내던지고 무릎에 앉힌 기생을 주무르기에 여념이 없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했던가. 서 있는 남자는 자기 짝 대신 다른 남자의 여자를 보고 있다.
이에 화가 난 버림받은 여자는 애꿎은 담배만 뻐끔거린다.
‘청금상련(聽琴賞蓮)’은 기생과 한량들을 많이 그린 신윤복(1758~?)의 대표작이다. 작품 제목은 가야금 소리 들으며 연꽃을 구경하다란 뜻으로 ‘청금상련’이라 부르기도 하고, 연꽃 핀 연못에서의 유희라는 뜻으로 ‘연당야유(蓮塘野遊)’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림 속에 담긴 작가의 풍자와 해학이 통렬하다. 곧 죽어도 공자 왈 맹자 왈을 들먹이며 체통을 중시하던 양반들이, 가려진 장소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폭로한 작품이다.
그런데 폭로하는 자세가 전혀 전투적이거나 시니컬하지 않다. 그의 붓끝이 얼마나 교묘하던지 폭로의 현장에 있던 양반이나 현장을 목격한 감상자 모두 그림을 즐기느라 바빠 본질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신윤복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연못 속에 연꽃을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연꽃을 무척 사랑했던 주돈이(1017~ 1073·중국 북송의 유학자)는 ‘애련설(愛蓮說)’을 지어 연꽃을 ‘군자(君子)의 꽃’으로 치켜세웠다. 그 뒤부터 연꽃은 고결하게 살고 싶어하는 선비의 상징이 되었다.
‘군자’는 ‘높은 인격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고결하고 높은 인격을 상징하는 연꽃은 피었는데 당신들은 군자인가? 그림 속 연꽃이 세 남자를 향해 그렇게 일갈하는 것 같다.
민요 중에 ‘진주난봉가’가 있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진주에 사는 꽃다운 처녀가 ‘울도 담도 없는’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간다. 서럽고 서러운 시집살이가 3년쯤 지난 어느 날, 시어머니가 아들이 온다면서 며느리한테 진주 남강에 빨래를 하러 가란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젊은 부부가 떨어져 살았던 모양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창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난데없는 말굽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힐끗 보니 ‘하늘 같은 갓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탄’ 낭군님이다.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서려는데 그는 ‘못 본 듯이 지나간다’.
서러웠지만 흰 빨래는 희게 하고 검은 빨래는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시끌벅적하다. 그러지 않아도 서러운데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가관이다. 네 낭군이 지금 사랑방에 와 있으니 어서 가서 인사드리고 오너라. 서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사랑방에 건너가 보니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낭군님이 앉아 있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술상을 차려놓고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는 중이었다.
이것을 본 며느리는 아랫방으로 물러나와 아홉 가지 약을 먹고 목매달아 죽어버린다. 격정적인 성정을 지녔던 것 같다. 아님, 그동안 낭군님을 목숨처럼 그리워했든지.
그 말을 들은 진주 낭군은 깜짝 놀라 버선발로 뛰어나와 통곡하며 이렇게 울부짖는다.
‘화류계 정은 삼 년이고 본댁 정은 백 년인데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 되어 푸른 청산 찾아가서 천년만년 살고 지고.
어화둥둥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남자가 자기 배우자가 아닌 여자와 스캔들이 있으면 로맨스이고 풍류인가.
나이 들어도 여전히 자신의 젊음이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인가. 혹은 철없을 때 몰랐던 사랑을 철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진짜 사랑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냥 인생이 무료해서 생의 활력소가 필요한 건가. 어느 경우든 상관없다.
사랑이든 바람기든 당사자야 행복하면 그만이지만 때론 그 행복이 배우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진주 낭군은 백 년이나 되는 본댁 정에 비해 삼 년밖에 되지 않은 화류계 정이 짧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삼 년이 삼백 년이 될 수도 있다. 남자는 안정적인 가정은 유지한 채 어여쁜 기생이 뜯는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권주가를 부르는 것이 풍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멋들어진 풍류가 누군가에게는 풀뿌리까지 사정없이 뽑아버리는 세찬 바람일 수 있다. 신윤복이 ‘청금상련’에 그려 넣은 군자의 꽃이 그걸 얘기해 주려는 것은 아닐까.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죽는다
세월이 흘러 주름주름 늙어지게 되면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것이 별거 아니란 걸 알게 된다. 풍류가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흘러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까짓 것이 입에 거품 물고 따져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목숨을 걸 만큼 절박한 사건은 더더욱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젊었을 때야 어디 그러랴.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 사소한 것 때문에 목숨이 왔다갔다 할 때가 젊음 아닌가.
모텔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연꽃만 쳐다보면서 매미처럼 비명만 지르던 때의 번민도 지나놓고 나니 별거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싸우는 것도 시시해지는 나이가 되면 아무리 세찬 바람도 찻잔 속의 태풍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을 피우기까지 어떻게 뜨거운 여름을 버틸 수 있단 말인가.
길조이거나 낙동강 오리알이거나
홍세섭의 유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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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세섭 ‘유압도’ 비단에 먹, 119.5×47.8cm, 국립중앙박물관 |
20일 넘게 내리던 비가 그치더니 곧바로 폭염이다. 타들어갈 것처럼 뜨거운 햇볕인데도 짜증스럽기는커녕 그저 반갑다. 모처럼 떠오른 해를 맞아들이기 위해 온 집안의 창문을 전부 열었다. 해가 걸림 없이 베란다에 내려올 수 있도록 방충망까지 열어젖혔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빨래를 해서 온전한 햇볕 속에 널었다. 20여일 동안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나타난 해가 떠날까 봐 조바심을 내며 수선을 피웠다. 그랬더니 사흘이 지나도 눅눅하던 빨래에서 반나절 만에 뽀드드득 새물내가 난다. 해의 선물이다.
해한테 선물받은 그 냄새가 좋아 한낮 땡볕에 집 근처 냇가에 나갔다. 햇볕 속에서 내 몸을 말리면 장마철 습기처럼 눅눅했던 마음이 증발되고 새물내가 날까?
끝없이 내리붓는 폭우 때문에 산책로까지 잠겨 발길을 끊었더니 그동안 텁텁한 물속은 말끔히 닦여 있었다. 깊은 산속 계곡물이 연상되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수초들의 표정도 생기가 넘친다. 너무 웃자란 풀들은 여지없이 꺾여 바닥에 누워 있다. 천방지축 날뛰던 사람이 삶의 고초를 겪어보고 나서 세상 무서운 줄 알고 겸손해지는 모습 같다.
자연이라는 경전(經典)은 은유법이 아니라 직설법이다. 빙빙 에둘러 표현하는 법이 없이 살아있는 언어로 가득한 직설법이다. 그 직설법의 한가운데에서 오리 두 마리가 다정하게 헤엄을 치고 있다.
암수 서로 다정한 오리
햇볕도 물속에 들어가 멱을 감고 싶은 한낮. 홍세섭(洪世燮·1832~1884)의 ‘유압도(遊鴨圖)’ 속에서 두 마리 오리가 헤엄치고 있다.
오리 한 마리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자 또 한 마리가 그 뒤를 따른다. 오리는 유독 암수가 다정한 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마리 오리는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오리의 발짓으로 물에 파장이 일자 한낮의 고요가 뒤로 밀린다. 포물선을 그으며 뒤로 밀리는 물결은 부감법(俯瞰法·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에 의해 더욱 현장감이 생생하다.
외곽선을 생략하고 연한 먹과 진한 먹을 배합해서 그린 오리의 모습도 신선하거니와 물 위에 툭툭 떨어뜨린 듯한 진한 먹과 수초의 표현은 대담하면서도 청신하다.
작가 석창(石窓) 홍세섭은 당상관을 지낸 선비화가로 ‘유압도’ ‘야압도’ 같은 풋풋한 영모화(翎毛畵·새와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를 여러 점 남겼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의 작품을 그려 19세기 이색적인 화풍의 대표화가가 되었다. 홍세섭은 붓 끝에 생기를 달고 사는 사람인가?
냇물에 붓을 빨면서 독하고 매운 분노까지 씻어낸 듯 붓질이 청아하다. 홍세섭은 물과 수초가 어우러진 자연의 풀향기를 붓끝에 적셔 거리낌없이 사방에 흩뿌리고 있다. 오리가 발짓을 할 때마다 싱싱함이 퍼덕거린다. 오리가 일으킨 파문은 감상자의 마음에서 쉽게 잦아들지 못한다. 혼탁한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다 온 사람이라면 대번에 둔사적(遁思的) 본능이 꿈틀거릴 것이다. 개결(介潔)한 선비의 풍모와 그윽한 시정(詩情)이 담겨 있는 작품 앞에서 감상자는 세상에서 강조하는 처세술이나 욕망의 덧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말한다. 냇가에 오려거든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살았던 조바심을 내려놓으라고. 더 빨리, 더 많이 이루기 위해 휘청휘청 살아온 시간도 잠시 내려놓고 그저 시원한 냇가에 풍덩 빠지라고 권한다. 마음을 짓누르던 시름일랑 잊어버리고 오리가 들려주는 냇가의 청신한 내력에 귀 기울여 보라고 얘기한다. 이런 물속에 맨발을 담근 채 한나절 첨벙거리고 나면 가뭄에 시들어가듯 팍팍했던 삶이 전율하듯 벌떡이는 에너지로 채워질 것이다. 먼지 쌓인 삶은 말끔히 헹궈질 것이고 자연이 주는 깊은 위로는 심장까지 젖어들 것이다. 뒤틀린 심기는 편안해질 테고 자글자글 끓던 불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 나그네는 삶에 대한 외경(畏敬)을 맛보리라. 마지못해 적선하듯 툭툭 내뱉던 언어 속에도 정감이 담기리라. 엉켜 있던 생각의 실타래는 가지런해질 것이고, 삶에 대해 성실해야겠다는 당위성을 얻으리라. 대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티끌 하나 쓸려나가지 않고, 달빛이 호수를 뚫고 들어가도 물에는 흔적이 남지 않듯 나그네의 마음밭도 평온해지리라.
홍세섭은 오리 그림뿐만 아니라 산수화도 잘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알려진 유작은 대부분이 영모화이다. 그의 아버지 홍병희(洪秉僖)도 그림을 잘 그려 부자가 때로 합작(合作)을 했다고 전해진다.
금실 좋은 오리가 장원급제 도와 줘
오리는 선비화가나 화원화가들이 그린 감상용 그림 외에도 민화에 자주 등장한다. 오리는 암컷과 수컷의 사이가 좋아 부부간의 금실을 기원하는 그림을 선물하려고 할 때 언제나 그림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다. 오리는 대표적인 물새다. 오리가 서식하는 곳은 거기에 물이 있다는 뜻이다. 농경 민족에게 물은 생존이 걸린 문제다. 오리가 풍요를 기원하는 솟대의 장대 끝에 모셔지게 된 것은 물을 부를 수 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오리는 복을 불러오는 상서로운 길조(吉鳥)다. 그러나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새라서 그다지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낙동강 오리알 같다’는 표현도 낙동강에 오리알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인간의 소망을 천상의 신에게 전해주는 신성한 중재자인 오리가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단지 흔하다는 이유만으로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어디 오리뿐이랴.
오리는 부부 금실과 물이 필요한 곳에서만 불러 주는 새가 아니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도 인기 만점인 매력적인 새다. 오리 압(鴨)자를 파자(破字)하면 甲과 鳥로 되어 있다. 甲은 1등 혹은 A학점을 의미한다.
그러니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새를 상징한다.
오리가 두 마리 있으면 이갑(二甲), 즉 향시(鄕試)와 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함을 의미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 방에 오리 그림이 여러 점 붙어있다 한들 전혀 뜬금없는 짓이 아니다. 합격에 대한 강렬한 소원을 드러낸 것이다.
연꽃에 오리 두 마리가 그려지는 그림도 있다. 연꽃의 연밥을 뜻하는 연과(蓮顆)는 잇달아 합격함을 의미하는 연과(連科)와 발음이 똑같다. 그러니 연꽃에 오리 두 마리를 합하면 ‘연과이갑(連科二甲)’, 즉 연속해서 두 군데 시험에 장원을 하라는 뜻이 된다. 과거시험에서 장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벼슬하고자 하는 바람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이런 식의 그림이 무수히 많이 그려졌을까, 측은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수험생 부모가 학교 대문에 엿을 붙이고 빌고 있는 모습도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이런 오랜 역사와 전통의 맥락 속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길조이거나 절름발이 오리이거나
홍세섭이 ‘유압도’를 그릴 때 마음속에 어떤 의도를 품고 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부부간의 금실을 도모함인지, 장원을 기원한 것인지도 알쏭달쏭하다. ‘특별한 사명’을 띠고 그린 그림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감상화로서의 독창성과 예술성이 과할 정도로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아름답다. 한여름 냇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이로운 생명체에 대한 찬탄이 담겨 있다. 그가 그린 그림 속의 오리는 아무리 가볍게 행동해도 절대로 레임덕(lame duck·절름발이 오리)의 비참함은 맛보지 않을 것 같다. 물속에 들어갈 때도 아름답고 물 밖으로 나올 때도 기품 있다. 모름지기 사람도 오리처럼 한결같다면 어느 자리에 있든 결코 손가락질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리의 깃털에서도 새물내가 난다.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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