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림 과 명 화

[스크랩] 민족혼의 화가, 박생광 이야기

bizmoll 2009. 1. 20. 15:47

 

 

박생광(1904-1985)

 

 

"남은 생명의 등불을 초연한 자연으로서  

 

전신(傅神)의 경지로 살아갈수 있을 것 같다"

 


 

경남 진주태생인 박생광은 1920년(17세)에 일본유학을 떠나 그림을 시작하게 된다.

그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그는 일본에서 거주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당시의 한국화단은 너무나 혼란한 시대적 상황의 연속이었고

특히 대일본 회화(對日本繪畵)배척운동의 일환으로

'척색사조(斥色思潮)가 화단전체에 일고 있어 순수한 작업생활에 정진하지 못하게 된다.

귀국 후 그는 생활을 부인에게만 의존하였고 이에 따라 가세가 점점 어려워져

집 앞부분을 수리하여 다방을 경영하였는데 그 다방은

진주 문예인들의 중심적인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되고. 결국 그는

1967년에 상경하여 화가 천경자의 권유로

1968년부터는 홍익대학교에 강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 후 1974년에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원전(院展)' 에 참가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원우(院友, 원전회원)에 초대되어 그의 딸과 두번째 일본 체제기간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의 그는 여러차례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나름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1977년에 다시 귀국한 그는 서을 진화랑의 초대로 최초의 서울개인전을 가졌다.

이즈음부터 그는 70대 중반을 넘는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작업량을 보이게 되는데

경주를 여행한 이후 1981년(78세)에 백상기념관에서 다시 개인전을 개최하여

서서히 국내화단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1982년에는 수개월에 걸쳐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는데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강행했던 그 여행은

그의 불교와 관련한 절대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인도 현지에서 만났던 서경보 스님과의 여행을 마친 후

다시 일주일 정도의 불란서 여행을 다녀오게 되는데, 귀국하여 술회하기를

"남은 생명의 등불을 초연한 자연으로서  

전신(傅神)의 경지 로 살아갈수 있을 것 같다"되뇌이었다 한다.

박생광은 그 후 줄곧 도봉의 기슭에서 온종일 작업에 몰두하였고

1984년 4월에 도자기를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약 두 달간에 걸쳐 세 번째로 일본에 체류한 후 귀국하였다.

이어 한국화단에 열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던 미술회관에서의 개인전을 개최하고,

그 해 여름에는 또 다시 보름여에 걸쳐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을 인상적으로 관람하고 돌아왔다.

그러던 그는 1984년 7월. 81세에 이르러서 후두암이라는 한정성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병에 굴하지 않고 더욱더 청아한 정신자세로

삶의 세계를 초월하는 입신의 경지에서 의욕적이고도 초인적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84년 10월에 파리에서의 한국미술특별전 준비차 내한 했던

프랑스의 토트리브 미협회장 을 만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85 르 살롱전'의 특별초대작가로 초대되었다.

당시 박생광에게 감명한 토트리브는

그에게 샤갈과의 상봉을 주선해 주기로 약속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85년 3월에 샤갈의 부고(訃곰)에 매우 낙담하기도 하였는데,

그해 7월에 박생광도 82세의 긴 생을 마치고 영연(翡端畿)하였다. 

  - 박 미 화 (국림현대미술관 학예 연구사)

    박생광 (朴生光 1904∼1985)

     설명

한국화가. 진주(晉州) 출생. 진주농업학교를 다니던 중
1920년 교토[京都(경도)]로 건너가서
다치가와미술학원[立川酸雲美術學院(입천산운미술학원)]에서 배웠다.
1923년 일본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京都市立繪畵專門學校(경도시립회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근대교토파[近代京都派(근대경도파)]>의 기수인
다케우치[竹內柶鳳(죽내사봉)]·무리카미[村上華岳(촌상화악)] 등에게서
신일본화(新日本畵)를 배웠다.
광복이 되자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작품활동을 하면서
백양회(白陽會) 창립전에 참가하였고,
1967년 홍익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하였다.
1977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진화랑에서,
1981년에는 백상기념관(百想記念館)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82년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뉴델리 인도미술협회에 초대되어 초대전을 열었다.
초기 일본화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한국의 샤머니즘·민화 등을 주제로 폭넓은 정신세계를
전통적 색채와 현대적 조형성으로 표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무당(巫堂, 1981)》 《무속(巫俗, 1983)》 《토함산 해돋이(1984)》 등이 있다.
1985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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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혼의 화가, 박생광 이야기 

 

 민족혼의 화가, 박생광 이야기   <수유리 가는 길>  

2004-11-19 11:18:57                                         

 -박  헌  수-

민족혼의 화가, 박생광 이야기는

이영미술관 관장 김이환님의 <수유리 가는 길>이라는 책의 핵심 내용이다.

이영미술관은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에 있는 돼지우리를 리모델링하여 개관한 미술관이며,

저자는 1977년 마흔셋의 나이로 일흔넷의 화가 내고(乃古) 박생광(朴生光)을 수유리에서 만나,

1985년 여든한 살로 세상을 뜬 박화백과의 8년간의 그림 이야기를 담대히 적어 나가고 있다.

첫 대면에서 내고는 김이환에게 이르기를

“김선생, 내가 인자부터 기리고 싶은 기림이 있소. 후학들이 그 기림을 좀 봐야 해.

그랄라믄 전시회도 해야하고.

날 좀 도와주겠나?” 라고 하였고,

며칠을 생각한 후의 김이환의 대답은 “제 형편껏 해보겠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싶은 대로 한번 해보시지요”였다.
한 예술가를 8년 동안 물심으로 지원함이 쉬운 일이던가?
그때가 평론가들이 내고 예술이 만개한 시기라고 일컫는 시간이었으면,

예술가를 시중드는 저자 김이환의 인간적 고민과 경제적 어려움이 얼마나 컸고,

또한 무심한 사회의 말장난 속에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다행인 점은 예술가 내고의 고뇌와 환희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느끼고 목도함으로써,

<수유리 가는 길>이라는 한권의 서사시적 서정적 기록을 남기는 뿌리가 되었음도

저자와 박생광의 범연치 않은 전생의 인연이리라.
박생광미술의 도반이었으리라.

화가 박생광은 누구인가?


1904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여 1985년 수유리에서 타계하기 까지,

25년 동안 일본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활동하였으며,

1945년 41살의 나이로 귀국하여 진주에서 무명화가로 살아 가다가

1968년 64살의 나이에 홍익대학 동양학과에 출강을 계기로 서울로 이사하여

본격적인 자신의 미술세계에 몰입하여

[무녀] [무속] [토함산 해돋이] [혜초 스님] [명성 황후] [청담 스님]등의 대작을 남겼다.
내고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파란색의 명도가 높아 일본풍의 그림이라는 비평을 받았으며,

색의 대중화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하였다고 보여진다.
박생광의 작품 앞에 서면, 우선 보는 사람이 그림보다 작아졌다가,

화가의 강렬한 개성에 빠져들어,

단청색의 화려함과 노랑색의 고고함에 자기를 뺏기게 되는 착각에 혼란스럽다.
혼란은 우리에게 흥분과 미래의 희망을 준다.


운명하기 일주일전 떨리는 손으로 써 내려간 마지막 절언은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은 그 민족 전통위에 있다”

저자 김이환은 누구인가?
1935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서 스무해 넘게 공직에 있었고,

대기업의 임원으로 봉직하다가,

예순의 나이에 일본 와세다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공부하였다.
화가 박생광과의 인연을 기초로 그의 그림을 중심으로,

2001년 용인시 기흥읍에 이영미술관을 설립하여 부인 신영숙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영미술관(031-213-8223)은 잘생긴 돼지우리에서 의미있는 미술관으로 바뀌었으며,

약 일천평의 전시실을 자랑하는 자연의 바람소리 멍석 장독 맷돌의 맛있는 찻집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기쁘고 슬프고.. 돈이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일상을 잠시 잊어야 함이 당신의 과제라면 미련없이 이영미술관에 다녀오라.
박생광의 명성황후, 한용진의 야외조각, 문미애 전혁림 정상화의 작품을 생긴대로 감상하라.
덤으로 소나무를 좋아해서,

몸뚱아리가 잔털 없이 깨끗하고 벌건 적송을 삼백여 그루 어렵게 구해서 심고 살려 놓은

김이환관장의 어리석음도 함께 감상하라.
허허 그님이 올해 연세가 일흔이시네. 

 

 

사찰의 탱화나 단청처럼 빨간색, 파란색이 보색대비를 이루며 눈을 찌를 듯한

'토함산 해돋이' ' 무속' '옛' 등 화가 박생광의 20여 작품

 

이름: 강동욱 2004/12/29(수)

진주의 화가 박생광 100년 기념전  

 

‘진주의 화가 박생광’전이

오는 30일부터 내년 1월 30일까지 경남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열린다.

‘박생광 화백 탄생 100주년 및 작고 20주기 기념전시회’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진주 MBC와 경남문화예술회관 주관, 진주시 주최로 마련된 것이다.
이번 전시는 박생광 화백의 유족 및 개인 소장품들을 중심으로

 회화 90여점, 화도 10여점, 스케치 50여점, 유품 50여점 등 총 200여점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박생광 화백의 생애 및 작품 세계를 알기 쉽게 조명할 수 있도록

유품과 대표 작품을 시대별 유형별로 구분해 전시하는데 있다.

즉 1982년 이전의 작품은 박생광 화백의 모색및 전개시기로,

1982년~1985년까지는 ‘그대로風’의 절정시기로 나누어 전시를 하고

유품 스케치 에스키스 등은 작품감상의 이해를 돕도록 전시한다는 것이다.
박생광 화백의 작품세계는 적 청 황 녹색 등의 색의 의미와 변화를 통해

‘그대로 풍’의 독창적인 세계를 개척했으며,

토속적인 문양을 바탕으로 샤머니즘적 무속의 세계와 더불어

불교적 색채가 짙은 부처의 모습을 유동적이며

자유로운 구성으로 펼쳐보였다고 할 수있다.

또한 고구려 벽화, 조선의 민화, 불교 회화에서 나타나는

채색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작가만의 독특한 발묵법과 채색기법을 이용하여

계승 발전 시킴으로써 한국화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데도 의의가 있다.
미술평론가들은 그를 스스로 영원한 야인으로 살다간 나그네였다고 했으며,

일본 미술에 영향을 받았으나

그것을 뛰어넘어 아시아성과 범세계성을 추구했으며,

‘한국 그림, 우리 그림’을 일궈 내겠다는 그의 꿈은

현란한 색채 속에 진홍빛 불꽃으로 타올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번 ‘박생광 진주전’을 준비한 진주 MBC 관계자는

“올 한해동안 내고 탄생 100년을 맞이해

서울 용인 부산, 도립미술관 등지 에서 이미 많은 작품 전시회가 있었다.

전봉준 명성왕후 청담대종사 등 내고의 대작들이 공개돼

많은 호응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번 진주전은 내고의 고향에서 하는 탄생 100주년 마지막 전시회라는데 의의가 있다.

내고가 진주에서 활동할 시기의 작품부터 말년 작품까지

그의 미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 될 수 있다”며

많은 시민들과 미술애호가들의 관람을 바랐다.
한편, 진주 MBC에서는 이번 전시회와 함께 다양한 부대행사도 마련하는데,

 1월 중 장사익 초청공연, 세미나 등을 개최한다.

1월 18일에는 박생광 화백의 일대기를 다큐형식으로 제작해 방영할 계획으로 있다.

 

 

박생광, 샤갈과의 만남…생전의 꿈 이루다
[중앙일보]
부산시립미술관 함께 전시회 …
사후 20년만에 작품으로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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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한국화가 박생광(1904~85.사진 (左))은 생전에 소원 하나가 있었다.

러시아 출신의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을 한번 만나는 일이었다.

빨강과 파랑 등 원색의 색채화가라는 점에서 샤갈과 공통점이 있었던

그는 평소에 그림이 뜻대로 된다 싶으면 "샤갈이 내 적수가 될까?"

한마디 하고는 흔쾌하게 웃곤 했다고 전해진다. 꿈은 이뤄질 뻔했다.

1985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국미술특별전'에 초대받은 박생광을

샤갈이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이 두 화가를 갈라놓았다.

샤갈이 85년 3월 28일 먼저 세상을 떴고 박생광도 뒤따르듯 7월 18일 타계했다.

샤갈의 죽음을 듣고 박생광은 "저승에 가면 만날 수 있겠지"하며 담담해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지금 20년 만에 작품으로 만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관장 김용대)에서 특별기획전으로 열리고 있는

'박생광 전'(2005년 2월 15일까지)과 '마르크 샤갈 전'(2005년 1월 16일까지)이다.

미술관 3층 전시실에서 마주보고 있는 두 화가의 초상화 옆에는

'생전의 약속, 사후의 만남'이란 글 한 줄이 붙었다.

박생광은 85년작 '전봉준' 등 80년대에 그린 대표작 16점을,

샤갈은 39년작 '굿모닝 파리' 등 114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김용대 관장은

"샤갈이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등 전위적인 미술사조를 자기화하면서

서정적인 개인주의 쪽으로 흘렀다면,

 박생광은 사회와 역사를 끌어들여 현대적 어법으로 해석하면서

서사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뤄냈다"고 설명했다.

김 관장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샤갈이 박생광에게 밀린다'는 평을 내놓고 있어 흥미롭다"고 전했다.

051-740-4241.

정재숙 기자2004.12.14 17:14 입력 / 2004.12.15 08:19 수정

 

 

신록의 달 수놓는 ‘한국화의 맥’

 

 [문화일보] 2007년 05월 02일(수) 오후 03:02

 

이응노부터 박생광 박래현 장우성 천경자 그리고 허건 이종상까지, 대가들의 작품을 통해

현대 한국화의 흐름을 짚어본다. 미술시장이 활기를 되찾으면서

한국화 분야의 기획전도 활기를 띠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한국화 1953~2007’전을 열고,

덕수궁미술관에선 호남화단의 거목 남농 허건 20주기 기념전이 펼쳐진다. 

 

◆ 서울시립미술관 ‘한국화 1953~2007’= 본관 1,2층에서 27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1950년대 초반 이후 현재까지 현대한국화를 미술사조와 작가별로 점검해보는 기획이다.

서구의 추상적 조형기법이 도입된 이후

한국화단의 변혁을 이응노 박래현 박생광 천경자 장우성 권영우 서세옥 박노수 등

작가 80여명의 200여점을 통해 살펴본다.

‘추상의 유입과 실험’ ‘전통산수의 재인식과 현대적 변용’

‘서구 모더니즘에서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채색의 맥’

‘한국화의 시야를 넘어’ 등 5가지 주제별로 한국화를 정리한다.

인물화 특별전도 마련한다.

전시작 중 입체파 양식을 시도한 박래현의 ‘노점A’ ‘정물B’,

화단의 아웃사이더였던 권영우의 ‘조소실’ ‘화실별견’이나

안상철의 ‘몽몽춘’ ‘영 62-2’ 외에

박생광이 타계하기 1, 2년 전에 제작한 ‘무속’ ‘토함산 해돋이’와

천경자의 ‘초혼’ ‘여인의 시’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현재 한국화단의 원로인 서세옥 민경갑 정탁영 안동숙 전영화 송영방 씨 등이

1960년대 국전에 반해 새로운 한국화를 내세운 묵림회 회원으로서

40년 전에 발표한 전위적인 초기작품도 만날 수 있다. 02-2124-8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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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ila Ryan /Evening Bell
Thomas Moore, between (1819-1853)
 
Those ev'ning bells those ev'ning bells,
How many a tale their music tells
Of youth and home and that sweet time,
When last I heard their soothing chime.
 
Those joyous hours are past away,
And many a heart that then was gay
Within the tomb now darkly dwells
And hears no more these ev'ning bells.
 
And so 'twill be when I am gone,
That tunefull peal will still ring on
While other bards will walk these dells
And sing your praise sweet ev'ning bells.

 

 

 

출처: htt/blog.naver.com/km3821

출처 : 꿈 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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