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림 과 명 화

[스크랩] 슬픈 사랑의 시인 모딜리아니

bizmoll 2009. 1. 19. 14:41

짧더라도 강렬한 인생을 살고 싶다.’

  

  폐결핵을 앓던 미남의 청년화가, 열네 살이나 어린 학생과의 결혼, 그리고 죽음, 만삭의 몸으로 남편을 뒤따른 어린 아내.......  모딜리아니의 슬픈 사랑 이야기입니다. 

  

  시와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진지하면서도 솔직한 성품, 기품을 잃지 않는 자세, 게다가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 뺨칠만한 미남 청년.......  1906년, 파리에 처음 도착한 모딜리아니는 주위의 여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멋진 재킷에 화려한 스카프를 두르고 챙 넓은 모자를 눌러 쓴 이 멋쟁이 미남 청년은 조국 이탈리아의 고전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 정도의 실력이라면 파리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거야.  이래 뵈도 이탈리아에서는 미술 신동으로 꽤나 인정을 받던 몸 아닌가?’ 

  모딜리아니 역시 피카소처럼 어린 시절부터 대단한 그림 실력을 가진 천재 소년이었습니다.  고전 화법에 능통한 그는 파리에서의 성공을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튼 몽마르트르의 분위기는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술과 담배. 마약에 찌들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주정뱅이들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고전의 거장들은 웃음거리도 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조각과 일본의 판화에 열광하며 새로운 미술 운동에 삶을 불사르고 있었습니다. 

 ‘나의 저주받은 이탈리아의 눈은 파리의 햇빛에 익숙해지지 않는구나......“

  단테나 니체, 스피노자의 철학도 와일드의 미학도 이젠 책꽂이 속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러운 부르주아의 유치한 싸구려 그림들 같으니라고......’

  그는 스스로의 그림들을 마구 찢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고전의 양식은 후에 그만의 독특한 회화 영역을 구축하는 자양분이 됩니다.  몽마르트르 거리를 온통 휘저어 놓은 거센 회화 운동에 휩쓸리지 않은 그의 단아한 그림에서 어딘지 모르게 고전의 내음이 품어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는 원래 조각가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잦던 그는 당시에는 치료할 수 없었던 폐병환자의 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돌덩이를 쪼아대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날리는 돌가루에 그의 폐는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비싼 재료비를 대기도 어려운데다가 작품이 팔린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돈과 병 때문에 좋아하는 조각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술과 약물에 의지하는 삶이 계속 되었습니다. 

  몇 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사와는 담을 쌓고 살아가던 파리의 자유인들에게도 전쟁의 그림자는 검게 드리웠습니다.   그는 군 입대에 불합격 판정을 받고 파리에 남아, 친구와 동료의 죽음을 지켜만 볼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때 만난 여인이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였습니다.  그들은 정렬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신경질적인 베아트리스는 모딜리아니와 다툼이 잦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돈을 흥청망청 쓰기 좋아하고 무절제한 생활에 익숙해 있어서 애초부터 두 사람의 결합은 무리였습니다. 

  베아트리스와 헤어진 모딜리아니는 점점 더 술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 앞에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가 그입니다.  그는 모딜리아니의 예술 세계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아파트를 내 주고는 친형제 이상의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이 ‘저주받은 천재’에게 그는 절대적인 보호자이자 유일한 고객이었습니다.  술집에 쓰러져 있는 그를 작업실로 데려오는 것도, 비평가와 수집가들에게 소개시켜주는 것도 그의 일이었습니다.  비난과 악평에 그를 보호하는 것도, 모델을 세워주고 전시회를 열어주는 것도 그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모딜리아니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역시 모딜리아니를 위해서라면 흔쾌히 누드  모델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즈보로프스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919 켄버스에 유채 100x65cm 상 파울로 미술관

 

  모딜리아니가 서른세 살이 되던 해에 미술공부를 하던 어린 소녀를 만납니다.  열아홉 살의 어린 소녀 잔느 에뷔테른느는 오직 모딜리아니만을 위해 태어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집안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즈보로프스키의 도움으로 집을 얻어 살림을 차렸습니다.  잔느를 만난 뒤,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꺼져가는 생을 다 바쳐 작품에 매달립니다.  그의 그림은 하루가 다르게 풍요롭게 농익어 갔습니다.   색채는 더욱 더 밝아지고 투명해졌습니다. 

  이듬해 그들은 첫 딸을 얻게 됩니다.  딸의 이름도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과 같이 잔느라고 지었습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미술 사학자가 되어 아버지의 세계를 정리한  ‘모딜리아니: 인간과 신화’ 라는 책을 씁니다. 

  그 즈음에 모딜리아니는 점차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즈보로프스키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비평가들의 평가도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애호가들도 나타났습니다.    

  금전적인 안정과 예술적 성숙에도 불구하고, 병마는 그를 절망으로 몰아갔습니다.  그의 생활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림과 술이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잔느 에뷔테른느>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919 켄버스에 유채 55x38cm 개인 소장

 

   그는 죽음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점차로 술에 취해 쓰러지는 횟수가 잦았습니다. 

  그 즈음, 화실을 찾아온 친구들은 서글픈 장면을 보게 됩니다.  모딜리아니는 피를 토하며 침대에 쓰러져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옆에는 임신 9개월의 잔느가 부른 배를 움켜쥐고 앉아서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위에는 빈 술병들과 먹다 남은 통조림 깡통만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인 1920년 1월24일 밤, ‘저주받은 천재화가’는 서른 다섯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생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묘지에 묻혔습니다.  피카소, 수틴, 레제, 유트릴로등 파리의 거의 모든 화가들과 시인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다음날 아침, ‘오직 그만을 위해 살아온’  어린 아내 잔느는 부모님이 사시는 6층 건물에서 몸을 던져 사랑하는 남편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녀는 천국에서도 모딜리아니의 모델이 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들의 아이와 함께 말입니다. 

  

         

                                                               잔느 에뷔테른느   

 
오보에와 첼로, 오르간과 현을위한 아다지오 /도메니코 지폴리
출처 : 쥬얼리같은 우리삶
글쓴이 : 목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