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림 과 명 화

[스크랩] 단원 김홍도

bizmoll 2009. 1. 14. 11:21

 

 

 

 

 



 단원 김홍도ㅡ원행을 묘정리의 궤

 

 

 

김홍도는 1745년(영조 21년)태어나, 정조 재위 24년을 거쳐 순조 6년 1806년경까지 62년을 살았다. 일곱 살 전후의 어린 나이에 강세황에게서 화법을 배웠다.

이후 행적은 1765년 그의 나이 21살 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경현당수작도>를 제작한 것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화원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정조 원년인 1777년(33살)때부터 국왕으로부터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규장각 화원과는 달리 대조화원, 즉 국왕 직속의 특급화원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발달하여 기예를 사소한 것으로 여겼으며, 화원도 중인들의 직종으로 가장 높아야 종6품에 불과하였다.

29세, 37세, 47세 세 차례에 거쳐 화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국왕의 초상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44세 때에는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절경을 제작하였으며, 46세에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원 용주사의 후탱불을 주관하였다.

1791년 연풍현감에 제수되었지만 불미스럽게 파직되어 1795년 한양으로 돌아와 그림에 전념하게 되었다. 51세에는 임금의 화성(수원) 행차를 그린 <화성원행의궤도>와 수원의 경관을 담은 <화성춘추팔경도> 16폭 병풍을 진상하였다.

52세(1796년) 때에는 전체 20폭으로 구성된, 단원 예술혼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단원절세보첩>을 완성하였다. 빛났던 장년 때와는 달리 노년은 허망하게 보냈다. 순조 때인 1804년에는 규장각 화원으로 소속되어 젊은 화원들과 시험을 보기도 하는 등 처량한 신세가 된다.

1805년 가을에는 신병으로 화원을 그만 두게 되었고 그해 말 그린 <추성부도>는 허망한 인생에 대한 쓸쓸함을 읽을 수 있게 하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



그가 살았던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는 성군절대주의하의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세월은 태평무사하였고, 나라 살림도 넉넉하였으며, 병란이 없던 좋은 시절이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도 낙천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인간과 자연을 순리대로 바라보고, 여기에서 우러나는 가장 평범한 도덕적 요구를 실천하자는 성리학 사상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자연히 그림들도 장식이나 과장이 적고 자연스러운 성격을 띠게 되었다.


홍도(弘道): 홍도는 해석하면 '도를 넓힌다"라는 뜻으로 논어의 위령공편에 '사람이 능히 도를 크게하지 도가 사람을 크게 하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사능(士能): 그의 자 사능은 맹자에 '일정한 재산이 없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오직 선비에게서만 가능하다(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에서 유래한 것으로 물질에 좌우되지 않는 참다운 선비, 곧 뛰어난 인격자가 되라는 뜻이다.

함장(含章): 그의 또 다른 자인 함장은 '미를 속으로 품는다'  '덕을 안에 감춘다'라는 뜻으로 주역에서 취한 것이다.

단원(檀園): 그의 호 단원은 명나라의 문인화가인 단원 이유방(1575-1629)의 고상한 인품을 사모하여 그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노년에는 단로(檀老), 단옹(檀翁)으로 응용하여 사용하였다.

서호(西湖): 초년시절의 호로 중국의 아름다운 호수이기도 하며, 지금의 용산, 마포, 밤섬, 노량진 주변을 칭하기도 하는데, 당시 매우 경치가 좋았다고 한다.

취화사(醉畵史)라는 호는 '술취한 환쟁이', 접취옹(접醉翁)이라는 호는 '곧 취하는 늙은이'이라는 뜻이며, 고면거사(高眠居士)라는 호는 '베개를 높이 하고 편히 자는 거사' 라고 하여 세상에 구애됨이 없이 살고자 하였다.

노년에는 단구(丹丘) 또는 단구(丹邱)라는 호를 사용하였는데, '선인이 머물며 밤낮으로 늘 밝은 곳'이라는 뜻이다. 그밖에도 농한(農漢, 농사 짓는 사내), 농사옹(農社翁, 농사 짓는 늙은이), 대우암(對右菴, 존중함을 마주 한다), 오수당(午睡堂, 낮잠자는 집) 등이 있다.


김홍도는 백석미남으로 풍채가 마치 신선같았다고 하며 키가 훤칠한 헌헌장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술과 해학을 무척 즐겼으며, 취중에 그린 작품도 남아 있다. 그의 편지를 살펴보면 그의 성격이 무던하면서도 붙임성이 있고 또 정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던 듯 싶다. 또 독실한 불교신자로 추정된다.

 

 

 

청계천 벽에 그려져있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正祖大王 陵幸 班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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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오주석씨의 단원 김홍도에 대한 전기집이다.
1995년 국내의 내노라하는 세 미술관인 국립중앙박물관,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이 공동으로 개최한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전시회를 위해 오주석씨가 작성한 논고들을 모아 한 권으로 엮었다고 한다.
기존의 오주석씨의 저작들이 조선 시대 회화에 포괄적 접근이었다면, 이 책은 조선 시대의 한 화원 김홍도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김홍도의 삶과 예술>에 대한 고찰과 <편년으로 본 김홍도의 생애>를 통해 단원이라는 특별한 천재에 대한 이해를 두텁게 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단원 김홍도는 그야말로 천재였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송하맹호도>의 극사실주의 풍, 조선의 산수를 담아내는 남종화들, <마상청앵도>에 보이는 조화로운 캘리그라피(calligraphy), <주상관매도>에 보이는 여백의 아름다움, 당시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풍속화들, 어진의 용체 등 어떤 그림이라도 주제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그의 능력은 천재의 정의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런데, 천재라는 희소하고 거만한 능력에 어울리지 않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단원은 무척 매력적이다. 특히, 그의 그림 중 <포의풍류도>, <단원도>, <추성부도> 등은 단원을 바로 옆에서 대하는 듯 도탑고 살가우며, 늙그막의 그에 대한 짠함을 불러 일으킨다.
 (저자는 여러 정황을 들어 과정된 이야기라고 일축하고 있는데) 집안에 먹을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그림 한 점 그려주고 받은 돈으로 매화 나무 한 그루 사고, 그거 보면서 술 한 잔 하자고 친구들 불러서 즐길 줄 아는 원조 지름쟁이로 기억되기도 하는 김홍도의 매력을 한 껏 볼 수 있다.
그런데, 저자가 책에서 몇 번이고 강조하는 김홍도는 춘화를 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다소 억지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그 근거가 단원은 왕의 총애를 받았고, 좋은 그림 그리느라고 눈코뜰새 없이 바빳을 터인데, 그런 추접한 춘화를 그렸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정황상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게 확실한 논리적 연결고리는 아니니까 굳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춘화를 그렸건 일본으로 첩자로 갔건 그의 다른 그림들이나 그의 본질이 흐려지는 건 아니니까.


 
참고로 이것이 바로 <포의풍류도>이다. 그리고 단원유묵첩에 실린 시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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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세상을 놀라게 한들 다만 누가 될 뿐이오
부귀가 하늘에 닿아도 역시 그저 수고로울 분
어찌 산창의 고요한 밤에
향 피우고 말없이 앉아 솔바람에 귀기울임만 하리오

옛 먹을 가볍게 가니 책상 가득 향내 나고
벼루 골에 물 부으니 얼굴이 비치도다

산새가 날마다 오나 기약 있어서가 아니오
들꽃은 심지 않았어도 절로 향을 내도다
단원 늙은이

문득 찬 매화나무를 보니
한수 강변에 꽃을 피웠네
봄색 이른 줄 알지 못했더니
구슬 희롱하는 미인과 같네

푸른 산 그늘 속에 누구 기약으로 바삐 가나?

 

 

 

 


 
 


 

 

 

 

출처 : Time Box
글쓴이 : 풍경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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