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서체(漢文書體)의 종류
한자의 경우는 고대 한자의 서체인 전서(篆書)를 비롯하여, 중국 한나라 때의 예서(隸書), 한자의 일점·일획을 정확히 독립시켜 쓰는 해서(楷書), 해서를 약간 흘림글씨로 쓰는 행서(行書), 그리고 이들 글자의 일부 자획을 생략하여 흘림글씨로 쓰는 초서체(草書體) 등을 가리킨다.
전서는 진한 이전의 여러 서체를 통칭하는 말이다. 전서는 크게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나누고, 100년전에 발굴된 은상 시대의 복사문(卜辭文)도 대전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시기에는 거북, 동물의 뼈등에 새긴 복사문 이외에도 청동기에 새기기도 하였는데 이를 금문(金文) 또는 종정문(鐘鼎文)이라고 부른다. 또한 대전은 주문이라고도 하는데 주나라 때 사주(史주)가 문자의 짜임을 실용적으로 간소화시켰으므로 붙여졌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주대의 석고문(石鼓文)이 있다. 소전은 진시황(B.C. 246-210)이 중원을 통일하였을 때 승상 이사(李斯)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새로운 모양으로 정리한 것이다. 대전이 자연스럽고 질박하다면 소전은 반듯하고 중후한 감을 준다. 소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진시황의 공적을 기록한 태산각석, 낭야대각석, 역산비가 있다. 소전은 모두가 원필이며 자형이 아래위로 길다.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 금문은 청동기 시대의 산물로 그 대부분이 종정(種鼎) 곧 종이나 솥 따위에 주각(鑄刻)하였으므로 종정문이라고 부른다. 그릇, 무기, 거울, 도장, 돈 같은 것에서도 발견된다. 동기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은 상(商에서 한(漢)대에까지 이른다. 상대의 것은 그림문자도 많으며, 대개의 금문은 갑골문을 계승하고 진(秦)대의 소전(小篆)에 이어지는 대전(大篆)이다. 석고문(石鼓文)
석고문은 4언구로 현재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전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냥을 하는 것과 영토의 개척으로 도읍을 세운 것, 제사에 관한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석고문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자체는 대체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태산각석(泰山刻石)
낭아대각석(瑯牙臺刻石) 진시황제는 태산각석을 세운 해에 산동의 낭아에 올라가 제대를 쌓고 돌에 각하여 진의 덕을 기리었다. 이 각석의 글자는 뭉개지고 떨어져나가 겨우 탁본으로 10행정도 전해지고 있다. 이 비석의 패석은 북경 박물관에 일부 소장되어 있다. 이사의 서(書)로 전해지며, 태산각석이 정제된데 비해 용필이 좀 부드럽고 좌우 상칭의 균제가 잘 잡힌 힘찬 표현의 장중감을 준다.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뒤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공문서 등이 증가하면서 전서를 간략하게 만든 새로운 서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 만들어 진 것이 예서이다. 예서는 한나라로 그대로 이어지면서, 해서, 행서, 초서 등 여러 서체로 다시 분화 발전하였다. 예서는 1cm정도의 폭을 갖는 죽간(竹簡)에 쓰였던 초기에는 세로로 긴 형태였으나 목판과 비석으로 옮겨가면서 점차 가로로 충분한 길이를 갖게 되었고, 이때 파책의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파책은 빈 공간을 조형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로써 예서는 나름대로 조형성을 갖게 되었고, 후대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전서는 대칭을 맞추어야 하고 곡선이기 때문에 쓰기에 불편하다. 그리하여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고 원필도 방필로 많이 바꾸고, 필획도 줄여서 쉽게 쓰게 한 것이 예서(隸書)이다. 기록에 보면 예서는 장막(程邈)이 만들었다. 그가 죄를 지어 감옥에 있을 때 십 년을 연구하여 예서 삼천자를 지어 진상하였는데 진시황이 좋게 여겨 어사를 시켰다. 예서란 말은 진대의 복역수를 도예(徒隸)라 하였는데 정막이 그러했으므로 예(隸)자를 따서 지었다. 예서에서 파책(波 )이 없는, 곧 전서와 근접한 것을 고예(古隸)라 하고 파책이 있는 것을 팔분(八分)이라 한다. 예서는 전한과 후한에 걸쳐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조전비와 예기비 같은 유려형(流麗型), 장천비 같은 방정형(方整型), 하승비(夏承碑)같은 기고형(奇古型)들로 분리되며, 그 수많은 서적(書蹟)은 이루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예서의 자형은 납작한 것이 보통이다. 예기비(禮器碑)
을영비(乙瑛碑) 후한의 환제(桓帝)때에 노나라의 재상 을영의 신청에 의하여 공자묘에 묘를 관리하는 사람을 두게 한 것을 기술하고, 을영 이 하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문은 18행,각 행에 14자로 되어 있다. 결구가 잘 맞춰져 있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조전비에서처럼 중심으로 밀집시키고 좌우 양면으로 세를 확장시켜 내는 결구 도 아니며, 장천비처럼 방형안에 필획을 제한시키는 결구형식도 아니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소박하면서도 경부 한 느낌을 주지 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한 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사신비(史晨碑)
서협송(西狹頌)
조전비(曺全碑)
장천비(張遷碑)
해서는 문자의 부호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쓴 형태를 말하며, 이런 까닭에 정서(正書)라고도 불린다. 예서가 더 실용적으로 변모하면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와서 해서의 특유한 풍격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볼때 동한 말에 이르러 해서보다는 행초서가 널리 유행하였다. 그러나 행초서가 다시 해서화를 추구하게 되는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기에 만들어진 이른바 북위(北魏)의 해서와 이를 더욱 단아하게 만든 수당(隋唐)시기의 해서가 그것이다. 북위의 해서는 예각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날카로운 획과 비대칭의 조형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수당의 해서는 직각을 사용하여 대칭의 안정된 조형을 추구한다. 수당 초기의 구양순 등이 북위에서 수당으로 옮겨오는 역할을 하였다면, 뒤에 오는 안진경은 대칭의 미학을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종요와 왕희지를 거쳐 초당의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이 북위서를 계승하고 왕희지법을 더하여 방필에 원필을 가미한 완미(完美)에 가까운 체계를 이루었고 그 후 안진경이 출현하여 거의 원필을 이용하여 웅장한 남성적인 해서를 완성하였다. 해서의 자형은 정방형에 가깝다. 안근례비(顔勤禮碑)
비가 세워진 연도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비문 중에 기재된 사실을 감안해 입비(立碑)는 안진경의 말기의 글씨로 추정되어 진다. 비는 사면각이나 셋째 면은 갈아 없어졌고, 약 1천 6백 여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안근례비는 비의 자획이 온전하며 특히 삼면의 글씨는 원필이며 강, 유가 잘 조화되어 있다. 또한, 장봉의 표현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의 해서 중에서 가장 우수한 기교 표현 작품이라 한다. 안진경의 필법은 구양순의 경우와 다른 바 없으나 구법(歐法)보다도 약간 붓을 세우며, 안서(顔書)의 가로획은 우상향세(右上向勢:손에 쥔 붓을 그대로 댄 후 일단 조금 띄웠다 오른 쪽으로 그음)의 수법을 사용한다. 구(歐)의 배세(背勢), 안(顔)의 향세(向勢)라고 부르는 이 상대적인 조형수법은 해서 기법의 양극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의 내용은 안진경이 그의 증조부인 안근례의 일대기를 써 놓은 것이다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天銘)
해서를 쓰는데 있어서 정통이라 할 수 있으나, 너무도 정제된 필획의 구성을 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형태만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기 쉽다. 장맹룡비(張孟龍碑)
장맹룡비는 북위서 가 유행하던 때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용문(龍門)의 강함과 예리함, 정도소(鄭道昭)의 온화함, 고정비의 완성된 계획성 등이 함축되어 있는 훌륭한 유산으로 여겨진다. 비면은 해서로 26행, 한 행에 24자씩 새겨져 있고, 비음은 이 비를 세움에 있어서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의 관위 성명을 연서한 것이 10여단 있다. 이 비의 비액에서 '청송(淸頌:덕을 칭송한다)'으로 표현 되는 바와 같이 송덕비이다. 장맹룡은 당시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지만,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깊이 믿는 유교를 선양하였다. 그 공적 이 컸기 때문에 향당(鄕黨)들이 이에 감탄하여서 장맹룡의 덕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고, 그의 일대기에 관한 것과 칭송이 그 내용이다. 고정비(高貞碑) 당의 구양순과 더불어 이지파(理智派)의 대표격으로 이 비석을 꼽을 수 있다. 이렇듯 고정비는 구양순의 비와 쌍벽을 이룰 만한 해서의 비문이다. 이 비문의 작자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 출토 시기도 얼마되지 않아서,이 서체에 관해 논의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비를 수록한 책도 그리 많지 않다. 한 책에 의하면 고정이라는 사람은 비서랑의 벼슬을 지냈고 나이 26세에 죽었다고 한다. 이 비는 그가 죽은 지 9년이 지나고서 세워졌다고 한다. 이 비에서 그려지고 있는 고정이 명족 (名族)이었고 게다가 외척(外戚)이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비를 쓴 사람은 당시 제일의 명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비는 구양순의 비와 마찬가지로 필의 기수(起收)가 매우 자연스럽고 형태의 조합이 합리적이어서 비난할 여지가 없는 구조를 이 루고 있다. 더불어 전서의 균형감과 통일성을 갖추고 있어서 회화적인 미가 뛰어나다.
행서는 초서와 해서의 중간 형태로 아마 해서와 거의 동시에 생겨나서 발전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書)는 고금에 빛나며 그 후 당의 저수량과 안진경을 거쳐 청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해서, 행서, 초서가 널리 쓰이면서 당 이후에는 전서와 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청나라 초기와 중기에 비학의 풍토가 일어나면서 다시 문인 묵객의 작품에 전서와 예서가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작품에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난정서(蘭亭敍)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집자성교서는 변이나 방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 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奬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을 이루고 있다. 30행에 각 행마다 80 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이 성교서는 당대(塘代)의 모본이기는 하나 왕희지 행서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와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틀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틀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 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의 시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이단본(已斷本) 이라 구분해 부른다.
한나라 때 예서가 주로 쓰였지만 초서의 기원이라 볼 수 있는 특유한 서체가 대나무나 나무 조각에 쓴 편지글 등에서 나타났는데 그것이 곧 장초(章草)이다. 장초는 획이 예서와 비슷하나 글씨의 짜임은 초서에 가깝다. 장초의 장(章)은 사유(史游)가 지은 급취장(急就章)의 서체에서 이름 붙여졌다. 장초는 그 뒤에도 계속 발달하여 왕희지에 이르러 초서의 완전한 체계를 굳히게 되었다. 십칠첩 이 법첩 첫머리에 십칠일선서(十七日先書)가 나오므로 법첩 전체를 십칠첩으로 일컬었다. 옛날부터 초서(草書)의 전형으로 존중되었으며, 왕희지 초서 연구에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자료이다.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은 왕희지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그 수집에 전력을 다하였고, 그는 왕희지의 글씨 3,000여 장을 모아 이를 분류 정리하여 80첩을 만들었다. 십칠첩은 그 중의 하나로, 일민첩(逸民帖)을 비롯, 29점이 수록되어 있다. 행초서(行草書) 행서는 문자의 부호를 있는 그대로 갖추고 있으면서 동적인 형태로 만든 서체이다. 초서는 부호를 생략하여 동적인 형태로 만든 것이다. 이 둘은 동적인 흐름을 같이 보여주기 때문에 서로 어울려 많이 쓰이고 있다. 획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형태를 만들어내는 행초서는 쓰는 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수많은 자연스런 형상은 서예를 문자의 기록보다는 회화로 까지 인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런 이유로 행초서는 서예가 뿐만 아니라 화가들도 반드시 익혀야 되는 필수과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
<출처;yahoo 크늘채 (dongbee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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