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도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마야고가 갈기갈기 찢어 날려버린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흰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風蘭)으로 되살아 났는데, 특히 지리산의 풍란은 마야고의 전설로 환란(幻蘭)이라고 부른다. - [성모신 마야고] 설화 중에서
난초는 까탈스럽다. 조금만 무신경해도 금방 시들시들 죽어버리기 일쑤이다. 또 꽃 피우는 데는 왜 그리 인색한지, 비위가 틀리면 몇 년 동안 꽃망울 한번 보기 힘들다. 사군자 중 대나무가 남성이라면 난초는 여성, 그것도 귀녀(貴女)와 미녀(美女)를 상징하는데 이를 따라 왕비의 궁전은 난전(蘭殿), 미인의 침실은 난방(蘭房)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심지어 중국의 「회남자(淮南子)」에는 남성이 키운 난초는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적혀있다. 그만큼 난초는 남성보다는 여성적 성격을 가진 식물로 여겨져왔다.
까다로운 성격 탓인지 난초는 주로 여유있는 사대부들이 향유하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때문에 난초 문양도 여성을 상징한다기보다는, 군자의 기상을 나타내는 사군자의 하나로 많이 사용된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 내내 사랑받아온 묵란도(墨蘭圖)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묵란도에는 벽사의 의미도 숨어 있다. 난잎이 해충을 쫓는 사마귀와 번식력이 강한 쥐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난을 치는 행위가 악한 것을 내몰고 가문을 번창케 하는 효과가 있다고 믿은 것이다. 특히 보랏빛 꽃을 피우는 손(蓀)이라는 난의 경우 그 음이 자손을 뜻하는 손(孫)과 같아 자손이 번창함을 뜻하기도 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번창한 청자와 백자에도 난초 문양이 많이 나타난다. 고려 말에 만들어진 회청자나 유병(油甁) 등에는 민화풍의 난초가 등장하고, 조선시대 각종 백자와 문방구류 등은 세련되면서도 소박한 난초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한편 조선 말기에는 난초를 비롯한 사군자를 치는 행위 자체가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민영환은 뿌리가 드러난 난초, 즉 ‘노근란(露根蘭)’을 통해 흔들리는 국권을 암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