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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陶淵明 의 詠 貧士 (其四)

bizmoll 2013. 11. 11. 13:57

 

 

陶淵明 의   詠 貧士 (其四)

 

 

安貧守賤者  /  가난함에도 마음 편히 여기며  낮은 지위를 지켜낸 사람

自古有黔婁  /  자고로 검루(黔婁)라는 선비 있었네.

好爵吾不榮  /  높은 벼슬 지위도 영예로 생각하지 않고

厚饋吾不酬  /  많은 식량 선물도 받으려하지 않았다네.

一旦壽命盡  /  일단 수명이 다해서 죽어서도

弊服仍不周  /  낡은 옷자락으로도 몸을 가릴 수 없었다네.

豈不知其極  /  어찌 가난한 선비생활의 말로를 알지 못했으랴만

非道故無憂  /  바른 길 아니었기 걱정 없었다네.

從來將千載  /  이후 천년 가까운 세월 지났어도

未復見斯儔  /  그런 사람 다시 볼 수 없다네.

朝與仁義生  /  아침에 인의 있게 살았다면

夕死復何求  /  저녁에 죽는다 한들 다시 뭘 바랄 것인가?


**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벼슬자리를 박차고 시골집으로 돌아가 종신토록 가난

한 전원생활을 한 도연명(陶淵明)의 오언고시로 가난한 선비생활을 주제로 읊은

<詠 貧士> 라는 제목의 七首 連作詩 중 4번째 작품.

 

오직 올바른 길만 걸으며 무관의 가난한 선비생활을 마다하지 아니한 춘추전국 시절 노(魯)

나라의 선비 검루(黔婁)를 칭송한 시이다. 

제3, 4 句에서 나(吾)라고 표현한 것은 도연명 자신이 검루(黔婁)의 입장에서 쓴 것임.

 

  후세 문인 중에 소동파(蘇東坡) 등 그런 도연명(陶淵明)을 좋지 않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금전만능 세상이 된 지금, 한번쯤 음미해볼만한 시라고 생각된다.

 


** 검루(黔婁)는 노(魯)나라 사람인데 현자(賢者)로 소문이 나서 나라에서 宰相으로 삼으

려 했지만 사양했고, 30 종(鍾 : 약 1500 리터 정도)의 양곡을 주려했는데도 이를 마다하고

 태연히 은자(隱者) 생활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가 죽은 후에는 시신을 덮을만한 천도 없어서 네모난 낡은 천 조각으로 덮었는데,

몸 전체를 가릴 수 없어서  머리부분을 가리려고 하면 발이 나오고 다리부분을 가리려고 끌어내리면 머리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부인도 그와 같은 인품의 소유자였던 듯.  마침 부음(訃音)을 듣고 문상하러 온 증자(曾子)가 시신도 제대로 덮지 못한 그 광경을 보고 미망인에게 그 네모난 천을 비스듬하게 세워서 덮으면 시신이 모두 가려질 것 같다고 얘기했단다.

  그랬더니 그 부인 왈 :

비스듬히 해서 몸 전체를 가리기 보다는 좀 모자라더라도 똑바로 덮는 편이 좋습니다.  평생 비뚤어진 것을 싫어하던 고인도 비스듬히 덥혀지는 걸 싫어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000 여년 지난 지금 후세까지 빛나는 유학자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 증자(曾子)였지만, 검루(黔婁) 부인 앞에서는 망신을 당한 셈이다.

 

  가난하면서도 벼슬하지 않고 기꺼이 춥고 배고픈 선비생활을 하다가 저세상으로 간

검루(黔婁)에 대한 추모의 글은 도연명(陶淵明) 자신의 자서전 격인 오류선생(五柳先生)이란

 글에도 나올 정도로 매우 흠모했던 것 같다.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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