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양 미 술 자 료

[스크랩] 黃鳥歌 / 곳고리 노래

bizmoll 2013. 11. 11. 13:38

 

 펄펄 나는 저 꾀꼬리 (翩翩黃鳥)

 암수 서로 정다운데  (雌雄相依)

 외로울 사 이내 몸은 (念我之獨)

 뉘와 함께 돌아갈꼬  (誰其與歸)

 

이 서글픈 사랑의 노래..........

우리는 유리왕 3년에 유리왕이 지었다고 한다.


 

황조가도 여느 고대가요가 그러하듯이

1, 작자문제 2, 연대문제 3, 성격문제의 기본적인 쟁점을 갖고 있다.

 

 三年秋七月 作離宮於鶻川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以繼室 一曰禾姬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不相和 王於凉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爭鬪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二年 가을 칠월에,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三年 가을 칠월에 골천에 離宮을 지었다. 이해 겨울 十月에 왕비 송씨가 돌아갔다.

왕은 다시 두 女子를 繼室로 얻었는데 하나는 禾姬로 골천 사람의 딸이고, 하나는 雉姬로 漢人의 딸이었다. 두 여자는 총애를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였다.

왕은 양곡의 동서에 二宮을 짓고 각각 두었다 뒷날 왕은 기산에 전렵을 나가서 칠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자는 서로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漢家의 婢妾으로 어찌 무례함이 심한가?‘ 하니 치희는 부끄러워하면서 원한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은 그 일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며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왕은 일찍이 나무 밑에서 쉬면서 꾀꼬리들이 날아 모여드는 것을 보고 이에 느끼어 노래하기를 꾀꼬리는 오락가락 암놈 숫놈 즐기는데 외로울 사 이내 몸은 뉘와 같이 돌아갈꼬?'라고 했다.


누구나 다 풀이하는 그대로이다. (사실 작자도 연대도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

 어쨌거나  이 중에 연대와 작자의 핵심이 되는 것은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왕은 일찍이 나무 밑에서 쉬면서 꾀꼬리들이 날아 모여드는 것을 보고 이에 느끼어 노래하기를.... 이라는 구절이다.


1, 연대문제

嘗은 “일찍이 ---한 적이 있다”는. 과거 경험의 완료이다. 아래 따로 설명... 

적어도 문맥으로 보면 물론 유리왕 3년 가을 전의 일이 된다. 

그러므로 3년 봄에 불렀다고 할 수도 있지만 (꾀꼬리는 봄에 우는 새이므로)

 

3년 봄은 유리왕이 2년 가을 7월에 왕비 송씨와 결혼하고 있으므로 1년도 채 안되는 새신랑이

여자없는 설음을 불렀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좀 우습게 되어버린다.

또한 기록하고 있는 꾀꼬리를 부러워하는 장면과도 합당치 않다.

(息을 모두 休息으로 풀이하고 있으나 嘆息으로도 풀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것이 더 선명해진다고 보여진다. 그래야만 뒤의 感而歌와 호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리왕이 感而歌한 연대는 태어나고부터 유리왕 2년 여름전의 어느 때까지로 한정이 되는 것이다.(3년에 지었다고 하는 논리에 따르자면, 유리왕 3년 겨울 시월 이후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렇다면 그해 꾀꼬리는 겨울에도 울어야만 했다.) 여담으로 추리를 발전시켜 보면, 유리왕 2년 봄이 가장 합리적일 것 같다. 총각말년 때이기 때문이다.

(유리왕3년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꾀꼬리 우는 시절을 간과했거나 줄거리를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2, 작자문제

感而歌 느끼어 노래하기를, 혹은 노래 부르기를 의 구절이다.

여기서 유리왕이 지어불렀다고 하는 것은 感而歌를 感而作歌로 해석한 것이다.

감이가의 의미는 감정을 실어 노래부르다. 혹은 감정이 느껴져서 노래하다일 뿐이지

노래를 지어부르다고 해석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의적인 해석인 것이다.

적어도 그 노래를 유리왕이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유리왕이 지어 불렀다고도

단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꼭같은 오류가 원왕생가에서도 발생했다.

德嘗有歌云 광덕이 일찍이 노래 부르기를....

이것도 德嘗作歌로 읽어 광덕이 일찍이 지어 부르기를 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해석은 광덕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해석자가 지어 붙인 것이 되는 것이다.

일연스님께서 作자를 몰라서 안썼겠는가? (저작권에 관계된 문제이기 떄문이다. ㅡ..ㅡ)

 

有는 허사로도 쓰이고 실사로도 쓰이지만

(여기서 有는 문장을 고르기 위한 허사로 보아야한다. 실사로 보아도 광덕에게 일찍이 부르던 노래가 있어 이르기를...이 되어 마찬가지다.)

 

 허사던 실사던 有와 作은 출신 성분부터 달라서 오용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일연스님도 作자를 알고 있다는 것은 다음에서 확인된다.

월명사조에 

明又嘗爲亡妹營齋, 作鄕歌祭之,

월명사가 또한 일찍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를 올린 일이 있는데 향가를 지어 그것으로 제사지냈다.


그러면 또, 유행가라 한다해도 이 때든 그 때든 그 유행가를 유리왕이 지었느냐는 문제가 남게 된다.

그런데 이 문제 또한 역으로 이때든 그때든 유리왕이 지어 부른 유행가였다해도 感而作歌로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므로 이 노래는 그 시절에 유행하던 작자 미상의 유행가 일 수 밖에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3, 그리움의 대상에 대해

치희다 송씨다 견해가 있지만 앞서 유행가라고 얘기가 되었기 때문에 유리왕이 누구를 염두에 두고 불렀던 간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본질적으로  치희도 송씨도 될 수 없는 것이 송씨가 죽은 것이나 치희가 노하여 돌아간 것은 유리왕 3년 겨울 이후의 일이므로 2년 여름 이전에 불리어졌다는 결론에서 보면  (3년이라해도 마찬가지) 어불성설이 되고 , 설령 2년 봄에 불렀다해도  왕비 송씨는 노래 부른 이후(즉 2년 여름이후)  

가을에 결혼했으므로 송씨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 2년 여름에 송씨를 그리워하며 불렀을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냐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겟지만, 문맥을 벗어난 추리이기 때문에 재고의 여지가 없다. 즉 감이가를 감이작가로 해석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된다 .  

 

이런 이유에서 보면, 즉 치희도 송씨도 연모대상이 아니라면 유리왕이 한숨쉬며 서글픈 노래 를 짓는다거나 노래부를 이유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 되어  

황조가 노래와 그를 둘러싼 여인들과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성립이 되지 않아 작자나 연대가  전혀 쟁점화 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이 기사가 있게 되는가?


가만 살펴보면, 이 유리왕 3년조 기사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즉 숲속을 벗어나 숲 전체로 보자면,

이 기사는 왕비 송씨가 죽은 일과 더불어 유리왕이 여자 복이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골천에 이궁을 지은 사실, 두 첩을 들인 사실, 전렵나간 사실, 이것들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사실들이 유리왕의 여자들 총애를 다투는 얘기에 들러리로 들어앉아 주객전도되어 있을 만큼 주제는 '이첩쟁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 눈을 돌려보면 마지막의 황조가 기사 자체,  王嘗....이하의 문장은 에피소드로 낑겨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즉. 김부식이 왕이 노래 부른 것도 역사적 사실이라하여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핵심은 유리왕이 왕비도 1년만에 죽고 계비들도 1년도 못되 티걱태걱 여자 복이 없었던 사실에 주목하고 그것에 대한 효과장치로 황조가를 끌어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오류는 바로 嘗에서 출발한다.

왜냐면 이 嘗을 바로 위의 이첩쟁총 기사와 연관시키려하다보니 2년이다,  3년이다 말하지만

그러나 王嘗...이하는 이첩쟁총 기사와 전혀 상관없는 문장이다

(솔직히 이 문장을 두고 이년 삼년 혹은 치희 송씨...라고 갑론을박하는 것에 대해서 그야말로....뭐 무슨 말을 못하겠다......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책임있는 고전국역하는데에서 머리 굴린답시고 嘗을 '어느날'로 번역해 놓았다. 정말로 어느 날에.....물론 어느 날이 꼭히 틀린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해도 오히려 더 문맥을 호도할 염려가 있다. ). 

 

노파심에 얘기해보자면, 과연 그럼 왕비 송씨가 겨울 10월에 죽었는데 송씨를 장사지내고 

계실 둘을 들이고 전렵을 나가고 그 둘이 싸우고 또 쫓아가서 실패하고 돌아오다가 노래를 읊는 일

이 모든 사건들이 불과  두 달 사이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는가?)

 

嘗으로 시작되는 문장은 별다른 과거 경험의 삽입문장으로 쓰이는 것으로 

 A라는 사건이 있는데 A와는 관계없이 과거에 일찍이 B라는 사건 경험이 있었다.는 의미로 쓰인다.  

 

바로 위의 월명사조의 쓰임에서처럼. 이 嘗의 용례는 바로 삼국사기에도 무더기로 나온다.

관계없이 일어난 일의 의미가 들어가야 한다...월명사가 왕과 조우하게 된 것과 제망매가를 지은 일은 전혀 관계가 없다. 만나고 보니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던 사람이더라....

이것을 유리왕에 적용시키면 유리왕이 여자복이 없었는데 옛날에 그런 노래를 (즐겨) 불렀던 사람이더라...인 것이다.)

 

이 모두를 종합해보면

유리왕이 총각 때(유리왕2년 여름 이전에) 외로운 나머지 한숨 쉬며 나무아래 꾀꼬리들을 보고 유행가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송씨와 결혼하고 송씨가 1년만에 죽고 두 계실을 데려왔으나 둘이 다투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즉 (노래 내용대로) 유리왕이 여자 복이 없었다. 라거나

 

유리왕은 총각시절때 황조가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유리왕이 여자 복이 없었던 것은 그 노래가 예고한 것은 아닐까..혹은 유리왕은 그 노래가사처럼 여자 복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김부식은 유리왕의 자료를 놓고 이런 느낌에서 황조가 삽화를 끼워 넣은 것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4, 요약하자면, 

황조가는 작자미상의 그 당시 유행하던 노래로 유리왕이 (즐겨) 불렀는데 과연 그 노래 내용대로 여자 복이 없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문장은 王嘗息 樹下見 黃鳥飛集 乃感而歌曰로 풀어지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息은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한숨 쉬는 것으로 보아야 다음의 感이라는 말과 자연스럽게 호응되기 때문이다. 또한 見을 자동사로 보면 문법적인 오류도 아니다.)

즉 왕이 나무 아래로 꾀꼬리들이 날아 모이는 것이 보이기에 탄식하며 느끼어 노래 불러 본 적이 있었다 (그 가사에) 이르기를.....

 

*************초벌

 

이건 뭐 아무도 주목한 사람이 없어 애기 꺼내면 미친넘 소리 듣겠지만  행여 알아 줄 사람 잇을까 싶어 부기해 본다. 삼국사기 유리왕 첫머리 기사는 이러하다

 

○<瑠璃明王>立. 諱<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初, <朱蒙>在<扶餘>, 娶<禮>氏女有娠.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 幼年, 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頑如此."

 

유리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리인데, 혹은 유류라고도 하였다. 그는 주몽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씨이다. 예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녀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녀는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였다. 유리가 어렸을 때,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애비가 없어서 이렇게 논다"라고 하였다..  .

 

이 풀이는 출처를 잘 모르겟는데 무슨 직지 프로젝트인가 고전국역을 기치로 삼는 것 같은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문장 중에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의 풀이는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였다' 라고 되어 있는데 내 생각엔 이것은 "주몽이 떠난 뒤에 태어났다고 해서 유리라고 했다." 는 풀이가 맞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왜냐면 뒤 이어서 여자 물동이를 깨는 등 애비없는 버릇없는 자식의 행실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애가 애비 없으니 이렇게 버릇이 없지.  此兒無父, 故頑如此 )..

 

주몽은 왜 주몽인가? 활 잘 쏘는이를 주몽이라 했다.

그럼 유리는 왜 유리인가? 쉽게 얘기하자면 애비없는 자식을 유리라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 이름들이 그렇다고 들었다....무슨 사나운 매...라든가 지금 우리네가 별명으로 불리어지는 뚱띠, 쫌팽이 뭐 이런 단어들이 옛날엔 이름이 되어 있던 것이 아닌가. 작명법이없는 옛날엔 그 사람의 특징적인 것으로 이름 삼지 않았겠는가.)

이로서 본다면 瑠璃나 類利, 或은 孺留는 애비없는 자식을 뜻하는 말인 것같기도 하다. 

 

그런데 남북조시대 육기의 <모시소>에는

 

<시경 주남 갈담>에 꾀꼬리가 난다고 하였는데 육기의 <모시초목조수충어소>에서 황조는 황이류 또느 황율류라고 한다. 유주사람들은 황앵이라고 하고 창경이라고도 하고 상경이라고도하고 이황이라고도 하고 초작이라고도한다. 제나라사람들은 단서라 한다 오디가 익을때와서 뽕나무 사이에 있다 그러므로 마을 속담에 꾀꼬리가 우리의 보리가 누렇고 오디가 익었는지를 보는가라고 한다. 역시 절기에 응하고 계절에 따라서 오는 새이다.

 

 <詩, 周南>云, "黃鳥于飛." 陸璣『疏』云:"黃鳥, 黃이留也. 或謂之黃栗留. 幽州人謂之黃鶯. 一名倉庚, 一名商庚, 一名이黃, 一名楚雀  齊人謂之摶黍 當孰時來在桑間 故里語曰 黃栗留看我麥黃熟不 亦是應節趨時之鳥也   라고 했고,

 

 산해경의 멋진 주를 붙인 곽박도  세상에서는 황이류라 하며 또한 단서라고도 부른다

 (郭云:"俗呼黃離留, 亦名摶黍.) 라고 했다.

 

이렇게 놓고보면 예사롭지가 않다.

유리(유류)왕이 꾀꼬리 노래를 불렀는데 중국에서는 꾀꼬리를 이류 율류라고 한다.

그런데 유리(유류)는 애비없는 자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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