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옥(李鈺)의 <俚諺>에 나타난 女性風俗 / 金文基
이옥(李鈺)의 <俚諺>에 나타난 女性風俗
金 文 基
<목 차>
Ⅰ.서 론
Ⅱ.이옥의 詩創作論과 <이언>
Ⅲ.<이언>에 나타난 여성 삶의 양상
1.화평과 여유
2.사치와 방종
3.방탕과 애환
4.원망과 저항
Ⅳ.결 론
Ⅰ. 서 론
임․병 양란을 거친 조선사회는 국가 재정의 황폐화와 관료간의 분열과 파쟁의 격화 등으로 사회는
극히 혼란스러웠고 상품과 화폐경제 및 수공업의 발달과 함께 신분과 계급의식이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봉건체제의 해체과정을 그치면서 양반의 무능은 드러나고 서민들은 각성하여 자아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아의식의 성장과 함께 실사구시의 실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실학은 우리 나라의 실정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세우기 위해 제기된 학풍이었기 때문에 민족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고유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 실학사상과 함께 18세기 이후, 예술분야에도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었다.
미술 분야에서는 전통화법을 지양한 眞景山水畵와 風俗畵가 성행하였고 음악 분야에서는 단가의 歌曲唱이 대중적인 時調唱으로 바뀌었으며 서민층이 참여한 판소리창이 완성되었다.
문학 분야에서는 사설시조, 서민가사, 잡가, 판소리, 서민소설, 위항문학 등 서민문학이 대두되어
사대부 문학을 압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후기 역사, 문화사적 배경 속에서 漢詩도 민요취향을 드러내게 되었고 朝鮮詩, 朝鮮風이 풍미하였다. 그리고 우리 고유의 풍속과 생활의 모습을 읊은 기속시가 족출하였다.
특히 崔成大(1691-1761), 申光洙(1712-1775), 李亮淵(1771-1842), 張之琬(1806-1856) 등은 여성풍속을
형상화한 여성 기속시를 창작하였는데1) 李鈺 또한 <俚諺>을 남김으로써 주요한 여성 기속시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옥(1760-1812)은 생존시에 집안이 한미하고 俚語를 위주한 稗官小品體를 씀으로써 과거의 길이
막혀 벼슬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근래에 주요한 傳文學 작가로 주목을 받으면서 그의 한시에 대한 연구도 뒤따르게 되었다.2)
본고는 <이언>을 통하여 이옥의 시창작론을 검토한 후에 女性 紀俗詩의 측면에서 李鈺의 <俚諺>에
나타난 여성풍속을 삶의 양상별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俚諺(이언) 항간에 퍼져 있는 속담(俗談) 가운데에서 주로 사물(事物)의 형용(形容)과 비유(比喩)에 쓰이는 형상적인 말.
俚 속될 이.㉠속되다 ㉡속요(속된 노래) ㉢의뢰
諺 언문 언/속담 언, 자랑할 안㉠언문 ㉡상말 ㉢속담 ㉣조문하다 ⓐ자랑하다 (안) ⓑ공손하지 못하다 (안) ⓒ강하고 억세다 (안)
稗官 (패관)①옛날 임금이 민간(民間)의 풍속(風俗)이나 정사를 살피기 위해 가설 항담을 모아 기록(記錄)시키던 벼슬아치 ②이야기를 짓는 사람
Ⅱ. 이옥의 詩創作論과 <이언>
이옥은 상업이 급격히 발달되고 봉건질서가 해체되어 가던 18세기 말엽에 태어나 正祖의 文體反正
운동에 정면으로 맞서 끝내 자기의 문학론을 현실시킨, 시대를 앞서가는 문학 이론가요 시인이었다.
당시 南公轍, 金祖淳 등 文體波動에 연루되었던 이들이 대부분 自訟文과 斥稗詩를 지어 올려 면책되었고 燕巖 朴趾源도 課農少抄를 지어 올려 면책되었으나3) 이옥은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수 차례의 停擧와 充軍을 당하여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창작활동으로 일생을 마쳤다.
이옥은 <俚諺>4)의 서두에 그의 詩創作論이라 할 수 있는 三難을 제시하였다. ‘一難’에서는 우선 “균천광악이 우레처럼 웅장하게 울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현악은 현악이고 관악은 관악이니 각각 자기의 색을 그 색으로 하고 자기의 음을 그 음으로 한다”5)라고 하여 만물의 독자성과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언>을 창작하게 된 이유가 시대와 지역에 맞는 시를 지으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시를 써야 한다는 새로운 시의식을 내세웠다고 볼 수 있다.
“30년이면 세대가 변하고 100리를 가면 풍속이 같지 않다.
어찌하여 大淸 乾隆年間에 태어나 조선 땅 한양에 살면서 어찌 감히 짧은 목을 길게 빼고 가는 눈을 억지로 길게 뜨고 망령되게 國風, 樂府, 詞曲 짓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가”6)
‘二難’에서는 시의 소재로서는 남녀간의 애정과 같은 본능적이고 감성적인 것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詩素材論을 제기하였다.
대저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은 사람을 관철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사람에 대한 관찰은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묘한 것이 없고 정에 대한 관찰은 남녀의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된 것이 없다.7)
이옥은 천지만물 가운데서 사람이 가장 크고 사람에게서는 정이 가장 묘하며 정 가운데는 남녀지정이 가장 진실된다고 하였는데 사람은 그 정을 가식할 수 있지만 남녀간에는 그 느끼는 정을 가장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진실된 것으로 본 것이었다.
따라서 진실된 男女之情 하나면 천지만물을 다 볼 수 있으므로 인생의 固然之事도 역시 天道 自然의 이치라고 볼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된 것이었다.8)
이옥의 이러한 의식 태도는 남녀지정을 비례라 하고 오직 윤기만이 천도라 인식했던 朱子主義的 觀念과는 달리 인간의 本能的 感性을 중시하는 기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三難’에서는 우리의 일상생활 용어인 俚語를 詩語로 쓰자는 詩文體論을 주장하였다.
이옥은 ‘물건의 이름을 본래대로 사용하지 않고 이언을 사용하여 鄕闇하다’는 지적에 대해 ‘우리가 남의 성이나 이름을 따라 쓰지 않고 고유의 성이나 이름을 쓰듯 물명도 고유의 이름을 그대로 써야 한다’고 주체의식을 분명히 드러내고 물명이나 생활용어에 우리 고유의 俚語를 사용해야 의사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鄕闇(향암) 시골 구석에 있으므로 모든 사리(事理)에 어둡고 매우 어리석음, 또는 그런 사람
옛날 어떤 원님이 아전에게 장에 가서 제수를 사오게 하였다. 아전이 장부에 의거하여 제수를 사 들였다. 다만 法油라는 것이 있는데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시험삼아 기름 파는 남자에게 물어 보았더니, 기름파는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에게는 참기름과 등잔기름 두가지 기름만 있을 뿐이다. 본래부터 이름이 법유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아전은 법유를 사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끝 내 법유가 등잔기름인 줄 몰랐다. 이것은 원님의 잘못이지 아전과 기름파는 남자의 잘못이 아니다9)
이와 같이 ‘등잔기름’을 ‘법유’라 하여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던 예와 ‘묵’을 ‘靑泡’라 하여 서울사람과 시골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겼다는 일화를 들어 바른 의사소통을 위해서 일상생활에 俚語를 사용해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시에서도 俚語를 사용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鐵雀’과 ‘接同’을 예로 들어 주장하였다.10) 그리고 요가와 金甁梅를 예로 들어 “한나라의 요가와 패설 금병매는 어찌하여 그 가락을 평순하게 하고 그 말을 전아하게 하여 후세의 다른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알기 쉽도록 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여 수용자의 편의를 고려해서라도 문학에 우리 고유의 생활용어를 써야 한고 주장하였다. 이는 바로 ‘조선시’, ‘조선풍’ 시창작론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이언>의 서문격인 ‘삼난’에 나타난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시의식론, 소재론, 문체론은 <이언>의 본문격인 아조, 염조, 탕조, 비조에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다. 따라서 <이언>은 이옥의 시창작론과 그 실제적인 전개라고 볼 때 이옥 문학의 핵심이요 결산이라 평가할 수 있다.
Ⅲ. <俚諺>에 나타난 여성 삶의 양상
李鈺의 작품으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文餘가 67편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傳l25편, 賦 18편, 雜題 17편, 記 13편이며 기타 書, 序, 跋, 論, 說, 解, 辨, 策, 俚諺, 東床記(戱曲)이 있다.
그런데 <俚諺>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옥의 詩創作論이라는 성격을 지닌 一難, 二難, 三難 등 ‘三難’과 雅調 17수, 艶調 18수, 宕調 15수, 悱調 16 등 총 66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 66수의 시가 바로 실질적인 <이언>이고 ‘三難’은 시 <이언>의 창작의도와 詩作原理를 밝힌 서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
아조는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여성의 혼인과 시집생활을,
염조는 여성의 사치스럽고 방종한 생활 모습을,
탕조는 기생의 방탕한 생활과 애환을,
비조는 여성의 원망과 저항을 형상화하고 있는 女性 紀俗詩이다.
그리하여 <이언>에 나타난 여성의 삶의 양상을 화평과 여유, 사치와 방종, 방탕과 애환, 원망과 저헝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宕 호탕할 탕.㉠호탕하다 ㉡방탕하다 ㉢탕건 ㉣돌에 뚫린 굴 ㉤석굴
悱 표현못할 비.㉠표현을 못하다 ㉡말 나오지 아니하다
1. 화평과 여유
雅調는 혼인과 시집생활을 영위하는 여성의 화평하고 여유로운 삶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조선조의 유교적 사회제도에서는 여성이 혼인하여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면서 남편을 恭敬하고 儉約한 생활을 하는 것을 婦道로 삼았는데 이 아조는 事親, 敬夫, 勤儉하는, 신부의 정상적이고 단아한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다.
대저 부인은 그 어버이를 사랑하고 그 지아비를 공경하며 집안 살림을 검소하게 하며 일을 부지 런히 함이 모두 천성의 항상적인 것이요 인도의 정당함이다. 고로 이편은 전적으로 사랑, 공경, 검 소, 근면의 일을 말했기 때문에 아조라고 이름하였다.11)
이 雅調는 17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 1, 2, 3 4 수는 혼례의 과정과 모습을 읊은 婚姻章, 제 5, 9, 12, 14 수는 남편을 공경하는 敬夫章, 제 3, 4, 6, 7, 10, 11 수는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愛親章이고 나머지 제 8, 13, 15, 16, 17수는 근면하고 검소한 시집생활을 읊은 勤儉章이라 할 수 있다.
婚姻이란 남녀가 서로 만나 百年偕老하며 평생 고락을 함께 하는 의식이다. 그래서 雅調 제 1, 2수에는 혼인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奠雁禮와 合巹禮의 과정과 화자의 所望을 女性 話者의 1인칭 視點으로 담담히 그리고 있다.
郞執木雕鴈 낭군은 나무 기러기 잡고
妾捧合乾雉 이 몸은 말린 꿩 받드네
雉鳴鴈高飛 그 꿩 울고 그 기러기 높이 날도록
兩情猶未已 두 사람의 정 다함이 없고지고 <雅調>1
福手紅絲盃 복스런 손으로 홍사배 들어
勸郞合歡酒 낭군께 권하네 합환주를
一盃生三子 한 잔 술에 아들 셋이오
三盃九十壽 세 잔 술에 구십 수라. <雅調>2
雕 독수리 조.㉠독수리 ㉡수리 ㉢시들다 ㉣새기다
乾雉 (건치) 말린 꿩의 고기. 신부가 처음으로 시부모에게 뵐 때 올리는 폐백의 한 가지
전안례는 대례를 치루는 첫 순서로 신랑을 신부집에서 맞아들이는 절차인데 신랑은 천상의 北斗九辰 중, 인간의 壽福을 관장하고 있는 紫微聖君에게 수절과 화목해로를 상징하는 기러기를 선물로 드리고 신부는 다산을 상징하는 꿩(근래에는 닭)을 드려 백년해로를 맹세하고 수복과 자손의 번영을 비는 의식이다. 위의 시에서도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고 합환주를 교환하면서 다남과 수복을 기원하고 있다. 서울 민요 <혼인요>12)에 비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지 않다. 함축적이고 절제된 표현은 오히려 가사의 혼인식 광경13)에 가깝다.
제 3, 4 수는 시집으로 떠날 때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라는 친정어머니의 당부와 친정을 떠나는 신부의 서운함이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표출되어 있다. 이 雅調의 화자는 친정과 시집이 각종 市廛이 늘어선 여항 市井인 ‘廣通橋’와 ‘壽進坊’이라 함을 볼 때 부유한 상인이나 중인 집안 여성임을 알 수 있다.14)
제 5수에서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같이 살자’고 맹세한 사이건만 3달이 다 지나도록 말도 마음대로 나누지 못하는 수줍음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정든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행주치마 입에물고/입만 방긋”하는 민요 정서와 방불하다. 그리고 제 9, 12, 14수에는 님의 옷과 주머니를 만들면서 가지는 아련하고 그윽한 사랑이 풍겨나고 있다.
草綠相思緞 초록 빛 상사단(相思緞)으로
雙針作耳囊 쌍침질하여 귀주머니 지었네
親結三層蝶 세 겹 나비 모양 손수 접어
倩手捧阿郞 손을 들어 낭군께 바친다 <雅調>12
包以日文袱 해 무늬 놓인 고운 보에 싸서
貯之皮竹箱 대나무 상자에 간직한다
夜剪阿郞衣 밤 깊도록 마른 낭군의 옷
手香衣亦香 손에도 향내 옷에도 향내로다 <雅調>14
緞 비단 단.
倩 남자의 미칭 천, 사위 청 ㉠남자의 미칭(美稱) ㉡예쁘다 ⓐ사위 (청) ⓑ고용하다 (청)
阿 언덕 아, 호칭 옥 ㉠언덕 ㉡물가 ㉢대답하는 소리 ㉣모퉁이 ㉤기슭 ㉥아름답다 ㉦의지하다 ⓐ호칭 (옥)
袱 보자기-복 부수: 衤 총획수: 11 .包袱。 - 보자기. 〔형태소〕 보자기.
皮竹 대의 겉껍질 剪 가위 전.㉠가위 ㉡베다
상사단으로 쌍침질하여 귀주머니를 만들고 세 겹 나비모양으로 접어 님에게 바치는 정성에서 남편을 공경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며 밤새도록 마름한 낭군의 옷과 자기의 손에서 난다는 ‘향내’에 시적 화자의 정서가 투영되어 있다.
제 6, 7 수에는 갓 시집온 새댁이 시부모를 모시는 정성과 고달픔, 제 10수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화합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四更起梳頭 사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五更候公姥 오경에 시부모께 문안하네
誓將歸家後 장차 친정에 돌아가선
不食眠日午 먹지 않고 한낮까지 잠만 자리 <雅調>7
阿姑賜禮物 시어머니께서 주신 패물
一雙玉童子 한 쌍의 귀한 옥동자라
未敢顯言佩 감히 차겠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結在流蘇裹 유소로 고이 싸서 넣어 두었네 <雅調>10
梳 얼레빗 소.㉠얼레빗(빗살이 굵고 성긴 큰 빗) ㉡빗다
候기후 후. ㉠기후 ㉡철 ㉢조짐 ㉣상태 ㉤염탐군, 망군 ㉥기다리다 ㉦묻다 ㉧염탐하다 ㉨맞다
姥 할미 모.㉠할미㉡늙은 여자㉢늙은 어머니㉣아내㉤유모㉥조산원㉦성(姓)의 하나
誓 맹세할 서.㉠맹세하다 ㉡경계하다 ㉢맹세코 ㉣반드시 ㉤맹세 ㉥경계
日午 한 낮. 정오
流蘇 기(期)나 승교(乘轎: 가마) 등에 다는 술
위의 제 6수에는 새색시의 才藝와 재치가 엿보일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의 며느리 사랑이 드러나고 있다. 규수로서 서예를 익혔으니 친정 가문이 상당했을 것이고 시어머니의 자애와 고부간의 화목한 분위기로 볼 때 시집 가문 또한 여유있는 집안으로 보인다. 제 7수에는 새벽에 일어나 몸단장하고 시부모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느라고 새벽잠마저 살쳐 친정에 가서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싶은 며느리의 심정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모진 시집살이의 모습이 아닌, 다소 행복한 고민으로 비춰지고 있다. 며느리가 언문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諺文女提學”이라 칭찬을 하는 시어머니의 인자함과 제 10수에 보이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쌍옥으로 된 童子像을 선물하는 넉넉한 마음씨가 더욱 돋보인다. 특히 이 제 6수와 10수에는 시어머니와 화합된 며느리의 화평한 삶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제 8수에는 취미 삼아 누에 기르는 모습을, 제 15수에는 시댁 제사 모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養蠶大如掌 누에 쳐 크기가 손바닥만하매
下階摘柔桑 문밖으로 나가 부드러운 뽕잎을 따네
非無東海紬 동해 비단 없는 건 아니지만
要驗趣味長 요는 취미 삼아 길러 본다네 <雅調>8
屢洗如玉手 옥 같은 손 거듭 씻고
微減似花粧 꽃과 같은 화장 약간 줄인다
舅家忌日在 시댁 제삿날 곧 있으매
薄言解紅裳 잠시 붉은 치마 벗어둔다네 <雅調>15
紬 명주 주,㉠명주 ㉡모으다 ㉢철하다 ㉣뽑다 ㉤뽑아내다 ㉥잣다
要 ㉠요긴하다 ㉡중요하다 ㉢모으다 ㉣요약하다 ㉤구하다 ㉥요하다 ㉦규찰하다 ㉧기다리다 ㉨막다 ㉩언약하다 ㉪으르다 ㉫꼭 ㉬반드시 ㉭요컨대 ㉭허리(=腰)
屢 여러 누.㉠여러 ㉡자주 ㉢(빛이 들어오는) 창 ㉣번거롭다 ㉤번잡하다
舅 시아비 구.㉠시아버지 ㉡장인 ㉢외숙, 외삼촌
薄 엷을 박.㉠엷다 ㉡적다 ㉢야박하다 ㉣싱겁다 ㉤맛없다 ㉥가벼이여기다 ㉦붙다 ㉧침로하다 ㉨숲 ㉩대그릇
제 8수에는 누에를 기르기 위해 문밖으로 나가지마는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취미로 하는 여유로움이, 제 15수에는 평소 손을 옥같이 다듬고 화장을 꽃같이 하다가 시댁의 제삿날에는 잠시 다홍치마를 벗어놓고 제수 장만하는, 화평한 삶을 누리는 모습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제 13수에는 옥룡비녀 아끼는 마음, 제 16, 17수에는 명주이불과 步兵衣를 애용하는 삶에 대해 읊고 있다. 제 13수에서는 이웃집 여성들은 가정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꼭꼭 맺힌 가슴을 풀기 위해 다투어 그네뛰기에 열중하는데 화자는 시집생활에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비녀가 떨어지는 것이 더 걱정스러워 그네뛰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분홍색 꽃무늬가 그려진 요에 아청색의 토산 명주이불을 덮고 자고, 다른 사람은 비단옷도 만족하지 못하는데 이 시의 화자는 굵고 거칠게 짠 무명옷을 즐겨 입는, 검약한 생활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위와 같이 雅調에서는 시정의 부유한 중인 집안 여성의 혼인, 애친, 경부, 근검하는 생활상을 통하여 화평스럽고 여유로운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대부 집안 여성들의 삶이 근엄하고 부자유스러운데 비해 雅調에는 화평하고 여유있는 시집생활을 영위하는 화자의 삶이 형상화되어 있다.
2. 사치와 방종
艶調에서는 都會 중인 여성들의 奢侈와 放縱한 생활상을 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염조편에서 다룬 내용은 대부분 여성의 驕慢과 奢侈, 浮薄함과 과한 治粧에 관련된 것들이다.15) 이 염조 18수 중, 제 3, 4, 5, 6, 8, 9, 11, 12, 14, 15, 17수 등은 사치스런 치장에 관하여 형상화하였고 제 1, 7, 10, 13, 16 등은 교만하거나 방종한 삶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常日天桃髻, 평소엔 천도 머리 틀어 올리느라
粧成腕爲酥. 몸단장 끝나면 팔이 파김치 되더니
今戴簇頭里, 지금 족두리 얹고 보니
脂粉却早塗. 연지분 도리어 일찍 바를 수 있다네 <艶調>6
髻 상투 계.㉠상투 ㉡부엌 귀신:
螺髻(나계)①소라 조개의 모양으로 틀어 짠 상투. 뜻이 바뀌어 청산(靑山)의 비유(比喩) ②나발(螺髮) . 腕 팔뚝 완.㉠팔뚝 ㉡팔목 ㉢재주 ㉣기량 ㉤팔
酥 연유 수.㉠연유 ㉡술의 딴 이름 ㉢깨끗하고 매끄러운 것의 비유로 쓰는 말
簇 가는대 족.㉠가는 대(조릿대) ㉡떼 ㉢무리 ㉣떨기 ㉤살촉 ㉥누에섶 ㉦모이다 ㉧찌푸리다
却 물리칠 각.㉠물리치다 ㉡물러나다 ㉢뒤집다 ㉣도리어 ㉤어조사 ㉥틈
細掃銀魚鬂 은어 같은 귀밑머리 고이 쓰다듬고
千回石鏡裏 수백 번 거울 속 들여다보네
還嫌齒太白 이빨 너무 흰 것 도리어 싫어
忙嗽澹墨水 재빨리 묽은 먹물 머금어본다네 <艶調>15
鬂 살쩍 빈.㉠살쩍(귀 앞에 난 머리털) ㉡귀밑털 ㉢빈모
裏속 리.㉠속(=裡) ㉡안쪽
嫌 싫어할 혐.㉠싫어하다 ㉡의심하다 ㉢혐의하다 ㉣미움
忙 바쁠 망.㉠바쁘다 ㉡빠르다 ㉢애타다 ㉣초조하다
嗽 기침할 수, 빨아들일 삭 ㉠기침하다 ㉡양치질하다(=漱 수 ) ⓐ빨아들이다 (삭)
澹맑을 담, 넉넉할 섬 ㉠맑다 ㉡싱겁다 ㉢담박하다 ㉣조용하다 ㉤안존하다 ㉥움직이다 ⓐ넉넉하다 (섬) ⓑ채우다 (섬) 墨水 먹물.
桃花猶是賤 복숭아꽃은 오히려 천박해 보이고
梨花太如霜 배꽃은 서리처럼 너무 차겁다네
停勻脂如粉 연지와 분 고르게 발라
儂作杏化粧 살구꽃 화장으로 내 얼굴 꾸며보네 <艶調>17
停 머무를 정.㉠머무르다 ㉡멈추다
勻 적을 균, 두루 미칠 윤 ㉠적다 ㉡흩어지다 ⓐ두루 미치다 (윤) ⓑ가지런하다 (윤)
脂 기름 지.㉠기름 ㉡비계 ㉢연지 ㉣진 ㉤기름을 바르다
儂 나 농,㉠나㉡저㉢당신㉣너㉤영감㉥민족의 이름.
杏 살구 행.㉠살구나무 ㉡살구
여성들이 치장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름다움이란 여성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지상 과제이며 여성 가치의 근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과시하여 주위의 시선을 끌고자 하였고 자기의 신분과 교양을 과시하려고 머리, 빗, 얼굴, 손가락, 신발 등의 치장으로부터 몸단장에 이르기까지 신체미화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위의 시들은 시적 화자의 얼굴화장에 관하여 묘사한 것이다.
제 8수에는 과도한 머리장식에 따른 폐단과 화장의 순서에 관한 문제가 토로되어 있고
제 15수에는 은어 빛 귀밑머리보다도 흰 이빨 색깔마저 신경이 쓰여 얼굴화장의 조화를 위해 먹물도 동원해 보는 기발함과 과민함이 엿보인다.
제 17수에는 복숭아꽃 색채는 너무 천박해 보이고 배꽃 같은 흰 색조는 너무 차거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연지와 분을 조화롭게 발라 살구빛 색깔이 되도록 얼굴 화장을 꾸미는 여성의 섬세함과 특유한 미감이 돋보인다.
頭上何所有 머리에는 무엇을 꽂았나
蝶飛竹節釵 나비가 나는 죽절 비녀라네
足下何所有 발엔 무엇을 신었나
花開錦草鞋 꽃이 핀 비단신이라네 <艶調>4
釵비녀 채, 비녀 차 ㉠비녀 ㉡인동덩굴 ⓐ비녀 (차)
錦草 비단풀. 鞋 신 혜.㉠신
未耐鳳仙花 봉숭아 꽃 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先試鳳仙葉 봉숭아 잎으로 먼저 물들여 보네
每恐爪甲靑 매양 손톱이 푸를까 염려했는데
猶作紅爪甲 오히려 더 붉은 손톱 되었네 <艶調>8
爪甲(조갑) 손톱과 발톱을 통틀어 이르는 말 지갑(指甲)
爪손톱 조.㉠손톱 ㉡깎지 ㉢할퀴다 ㉣긁다 .
제 4수는, 머리는 竹節 비녀로 장식하고 꽃을 수놓은 비단신을 신은 사치스런 모습을 묘사하였고
제 8수는 봉숭아 꽃이 피기를 기다릴 수 없어서 봉숭아 잎으로 물을 들이고 손톱이 늘 푸를까 염려하는 여심과 때 이른 화장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시정 여인의 호들갑과 조갑증이 표출되어 있다.
下裙紅杭羅 속치마는 붉은 항라요 亢羅
上裙藍方紗 겉치마는 남방사라 紡
琮琤行有聲 걸음마다 쟁그랑쟁그랑 하니
銀桃鬪香茄 은도와 향가가 부딪는 소리라네 <艶調>5
裙 치마 군.㉠치마 ㉡속옷
亢羅 (항라)[명사]명주, 모시, 무명실 따위로 짠 피륙의 하나. 씨를 세 올이나 다섯 올씩 걸러서 구멍이 송송 뚫어지게 짠 것으로 여름 옷감으로 적당하다. 치마저고리
杭 건널 항.㉠건너다 ㉡고을 이름 ㉢배 ㉣나룻배
藍紡紗 엷은 남빛의 무늬 없는 비단
琮琤 : 졸졸.[부] 1. 潺潺 [chán chán] 溪水琮琤。시냇물이 졸졸 흐른다.
琮 옥홀 종.㉠옥홀(玉笏: 제후가 조회할 때 천자가 지니던 옥으로 만든 홀)
琤 옥소리 쟁.㉠옥 소리 ㉡거문고 소리
琤琤(쟁쟁)쟁쟁(錚錚). ①옥이나 좋은 금속(金屬)의 울리는 소리사 매우 맑음 ②옥이나 좋은 금속(金屬)의 소리처럼, 소리가 매우 또렷하고 맑음 ③지나간 소리가 잊히지 않고(기억에 남아) 귀에 울리는 듯함 ④여럿 가운데에서 매우 훌륭하게 뛰어남
茄 연줄기 가.㉠연줄기 ㉡가지
纖纖白苧布 가늘고 고운 백저포
定是鎭安品 정녕 이는 진안 모시일세
裁成角岐衫 말아서 깨끼적삼 만드니
光彩似綾錦 광채가 능단같다네 <艶調>9
纖纖 가냘프고 여림. 연약(軟弱)하고 가냘픈 모양
白苧(백저) 뉘어서 빛깔이 하얗게 된 모시. 눈모시. 흰모시 苧 모시풀 저.
衫 적삼 삼.㉠적삼(윗도리에 입는 홑옷) ㉡옷(의복의 통칭)
깨끼적삼 [명사] 안팎 솔기를 발이 얇고 성긴 깁을 써서 곱솔로 박아 지은 적삼.
岐 갈림길 기.㉠갈림길 ㉡산 이름 ㉢높다 ㉣갈래지다
綾 비단 릉(능).㉠비단 ㉡무늬 있는 비단
儂有盈箱衣 상자 속 가득한 옷
個個紫繢粧 하나하나 자색 수로 꾸민 것
最愛兒時着 가장 아끼는 건 아이 적 입던 옷
蓮峰粉紅裳 연꽃 망울 분홍 치마라네 <艶調>11
繢 수놓을 궤, 토끝 회, 토끝 귀.㉠수놓다 ㉡채색하다(彩色--) ㉢수놓은 비단 ㉣무늬 ㉤그림 ㉥채색(彩色) ㉦끈 ㉧붉은 끈 ㉨토끝(베를 짠 끄트머리) ⓐ토끝 (회) ⓑ끈 (회) ⓒ그림 (회) ⓓ무늬 (회) ⓔ수놓은 비단 (회)
위의 제 5, 9, 11수는 옷치장에 관해 읊은 것이다.
도회의 시정 여성이 치마는 붉은 杭羅 비단으로, 겉치마는 藍方紗 비단으로 만들어 입고 銀桃와 香茄 같은 노리개 장식들을 화려하게 달고 다니는 모습이다.
여름에는 진안 모시로 깨끼적삼을 지어 입고 옷장에는 사치스런 옷이 가득하며 철마다 고급 비단 옷을 입으니 참빗 팔러온 방물장수가 재상집 마나님으로 착각할 만큼 호사스런 사치생활을 하는 것을 형상화하였다. 조선후기는 농업, 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의 발달로 화폐경제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시기였기 때문에 서울은 군사, 행정중심지에서 상업중심지로 크게 변하였기 때문에16)상업이나 무역에 종사한 역관이나 서리, 京衙前들은 재상집안 못지 않게 축재를 하여 그들 여성들은 화려한 화장은 물론이고17) 요사스럽고 호화로운 치장을 했었다.
京衙前(경아전)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중앙(中央) 관청(官廳)에 딸린 이속(吏屬).
중인 계급(階級)에 속(屬)하는 낮은 벼슬아치로서 원칙적(原則的)으로 품계(品階)를 갖지 않으며 녹사(錄事)ㆍ서리(書吏)ㆍ조례(皁隷)ㆍ나장(羅將) 등(等)으로 크게 구분(區分)됨
草草山中女 까칠까칠 산골 아낙네
生不識綺羅 태어난 후 비단옷 모른다네
富家黃楊Ꟃ 부잣집은 버들비녀 끼지만
貧家本無Ꟃ 가난한 집엔 본래 비녀란 없다네 <丹丘俚曲>1
草草 간략(簡略)한 모양(模樣). 바빠서 거친 모양(模樣)
綺羅(기라)곱고 아름다운 비단. 곱고 아름다운 비단옷
窄幅麻裙不掩褌 폭 좁은 삼베 치마 속곳도 못 가리지만
綰來髽髻態猶存 땋아 쪽진 머리 그런 대로 맵시 있네
生來自是櫻脣女 앵두같이 예쁜 입술 타고 난 여인
一陣風前蒜臭歕 한 줄기 바람 앞에 마늘 냄새 풍기네 <金官紀俗詩>22
窄 좁을 착.㉠좁다 ㉡닥치다
幅 폭 폭.행전 핍.㉠폭, 넓이 ㉡가장자리 ㉢포백(직물) ㉣족자 ⓐ행전(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 (핍)
掩 가릴 엄.㉠가리다 ㉡숨기다 ㉢닫다 ㉣엄습하다 ㉤비호하다
褌 잠방이 곤.㉠잠방이(가랑이가 짧은 홑고의) ㉡속옷
綰 얽을 관.㉠얽다㉡꿰뚫다㉢매다㉣곱지 않은 적색㉤올가미
髽 복머리 좌.髻 상투 계.
螺髻(나계)1 소라 껍데기 모양처럼 만든, 아이들의 북상투.나발(螺髮).
櫻脣(앵순) 앵두와 같이 고운 입술.
蒜 마늘 산, 마늘 선 ㉠마늘 ⓐ마늘 (선)
그러나 시골 여성들은 비단옷은 고사하고 비녀조차도 꽂지 않고 뙤약볕에서 일하느라고 피부마저 까맣게 그을려 있고 ‘속곳도 못 가리는 삼베 치마를 입고 입에서는 마늘 냄새가 확확 풍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볼품도 없고 냄새마저 풍기는 시골 여성들의 쪽진 머리는 나름대로 맵시가 나고, 그들은 앵두 같은 예쁜 입술을 타고났다고 하여 도시 여성의 인공적인 화려함보다는 시골 여성의 소박한 인정과 건강한 자연미가 더욱 값짐을 은근히 시사하고 있다.
극도의 사치는 방종을 낳기 마련인데 특히 <염조> 제 1, 16수에는 시정 여성의 교만함과 방종이 아주 잘 그려져 있다.
莫種鬱陵桃 울릉 도화 심지 말아요
不及儂新粧 내 새 단장에 미치지 못하잖아요
莫折渭城柳 위성 버들 꺾지 말아요
不及儂眉長 내 긴 눈썹에 미치지 못하잖아요 <艶調>1
渭城柳(위성류)위성류과에 딸린 갈잎 작은큰키나무. 키는 약 7m. 가지는 적갈색(赤葛色)이며, 늘어져서 잘게 갈라지며 잎은 가는 피침형이고 가지에 비늘 모양으로 돌라쌈. 여름에는 묵은 가지에 가을에는 풋가지에, 두 번에 걸쳐 연붉은빛의 작은 꽃이 총상 꽃차례로 배게 피며 열매는 삭과(蒴果)로서 두 번째 핀 꽃에서 결실(結實)함.
暫被阿郞罵 잠깐동안 낭군의 꾸중을 듣고
三日不肯飡 사흘동안 밥 한술 뜨지 않았네
儂佩靑玒刀 내 푸른 옥장도 차고 있으니
誰不愼儂言 뉘 다시 내 말 건드릴거나 <艶調>16
暫 잠깐 잠.㉠잠깐 ㉡잠시 ㉢별안간 ㉣졸지에
罵 꾸짖을 매.㉠꾸짖다 ㉡욕하다 ㉢욕(설)
肯 ㉠즐기다 ㉡옳이여기다 ㉢들어주다 ㉣뼈에 붙은 살 ㉤즐기어 하다 ㉥감히 ㉦수긍하다
飡 저녁밥 손.㉠저녁밥 ㉡(물, 국에) 말다 ㉢짓다 ㉣먹다
粧刀(장도)보통 장도칼이라고 하며 주머니 속에 넣거나 옷고름에 늘 차고 다닌다. 노리개로 차고 다니는 것을 패도(佩刀), 주머니 속에 지닌 것을 낭도(囊刀)라 한다. 장신구 겸 규방 부녀의 보신용, 일상의 실용으로 썼다. 칼자루와 칼집의 재료는 서각(犀角)·우골(牛骨)·흑각(黑角)·침향(沈香)·흑시(黑杮)·조목(棗木)·산호·금패(錦貝)·호박·대모(玳瑁)·비취·공작석·금강석·옥·밀화 등으로 만들어 장식하여 노리개용으로 하였고, 보통의 장도는 도금하거나 은·백동 등으로 만들었다.
위의 ‘염조‘1에서 시적 화자는 당시 시전에서 울릉도 산 복숭아가 최상품으로 거래되고 있지만
자신의 새 단장을 따를 수 없으므로 울릉도 복숭아는 심을 필요가 없다고 뽐내고
위성의 버들가지 자기 눈섭만 못하니 심지 말라고 교만을 떨고 있다.
울릉도 복숭아와 단장, 위성의 버들과 눈섭을 대비시키는 수사법을 통해 자신의 치장과 미모를 한층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염조16‘은 남편의 꾸중을 잠시 듣고 사흘 밥을 굶으며 저항하여 남편의 항복을 끌어 내려고 하고 심지어는 玉粧刀를 차고 있는데 감히 누가 내 말을 듣지 않고 거역할 것이냐고 오만을 떨고 있다.
유교 봉건제도 아래서는 상상하기 힘든 조선후기의 방종한 여성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艶調에는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화폐경제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조선후기 도회 여성의 과도한 사치풍조와 교만하고 방자한 삶의 양태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3. 방탕과 애환
宕調에는 방탕한 기녀의 생활과 그들의 즐거움 및 슬픔이 형상화되어 있다.
이옥은 “사람의 情理가 여기 이르면 일탈하여 금하거나 규제할 수 없으므로 宕이라 이름한다”18)고 詩經의 鄭風과 衛風에 비기고 있다.
우선 제 1, 15수에는 몸을 파는 娼妓들의 관능적인 유혹의 언사와 질탕하게 벌어지는 술자리 모습이 그려져 있다.
歡莫當儂髻, 서방님 내 머리에 대이지 말아요
衣沾冬柏油. 동백 기름 옷에 묻는다오
歎莫近儂脣, 서방님 내 입술 대지 말아요
紅脂軟欲流. 붉은 연지 흘러들어요 <宕調>1
歡 기쁠 환.㉠기쁘다 ㉡기뻐하다 ㉢사랑하다 ㉣좋아하다 ㉤기쁨 ㉥즐거움
沾 더할 첨, 엿볼 점, 경망할 접 ㉠더하다 ㉡젖다 ㉢첨가하다 ㉣강 이름 ⓐ엿보다 (점) ⓑ경망하다 (접)
軟 부드러울 연.㉠연하다 ㉡약하다 ㉢부드럽다
盤堆蕩平菜 상위엔 탕평채 쌓여 있고
席醉方文酒 자리엔 방문주 흥건하네
幾處貧士妻 많은 가난한 선비의 아내들
鐺飯不入口 누룽지 밥조차 입에 넣지 못하는데 <宕調>15
盤 소반 반.㉠소반 ㉡쟁반 ㉢받침 ㉣바탕 ㉤대야 ㉥넓고 큰 모양
堆 쌓을 퇴.㉠쌓다 ㉡쌓이다 ㉢놓다 ㉣그만두다 ㉤흙 무더기
蕩平菜 묵청포(-淸泡) 초나물에 녹두묵을 썰어 넣고 섞은 음식
醉 취할 취.㉠취하다 ㉡취하게 하다
鐺 쇠사슬 당.㉠쇠사슬 ㉡종고 소리 ㉢솥 ㉣노구솥(놋쇠로 만든 작은 솥)
‘탕조1‘에는 기녀와 손님이 희롱하는 모습이 농염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동백 기름을 반질반질 하게 바르고 입술에 붉은 연지를 짙게 바른 기녀, 이를 희롱하는 남성에게 오직 머리 기름과 연지 묻는 걱정만을 내세워 그 희롱을 슬며시 받아들이는 기녀의 노골적인 애정행각이 묘사되어 있다.
‘탕조15‘에는 方文酒라는 고급술과 蕩平菜라는 고급안주를 흥건히 차려놓고 질탕하게 벌어진 술자리, 그리고 이런 술자리를 보면서 누룽지 밥조차 먹지 못하는 가난한 선비들의 아내를 생각하는 시적 화자의 양심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拍碎端午扇 단오선을 탁탁 치며
低唱界面調 나직히 계면조로 부르니
一時知我者 일시에 나를 아는 이들
齊稱竗妙竗 하나같이 ‘묘하다 묘하다’ 하네 <宕調>6
拍 손뼉칠 박.㉠손뼉치다 ㉡박자 ㉢어깨죽지(=膊)
碎 부술 쇄.㉠부수다 ㉡부서지다 ㉢잘다 . 端午扇 단오부채.
竗 땅이름 묘.
妙 묘할 묘.㉠묘하다(妙--: 말할 수 없이 빼어나고 훌륭하다) ㉡예쁘다 ㉢젊다
歡吸煙草來 임은 담배를 피우며 오는데
手持東萊竹 손에는 동래죽을 쥐었네
未坐先奪藏 앉기도 전에 먼저 뺏어 감춤은
儂愛銀壽福 내가 은수복 사랑하기 때문이라네 <宕調>3
단오부채를 들어 춤추고 애잔한 계면조로 노래부르니 좌중의 손님들이 노래솜씨 기묘하다고
감탄하는 데서 받는 즐거움과(탕조6)과 함께 손님이 피우면서 오는 고급 동래죽을, 담배대에 새겨놓은 ‘壽福’이라는 글자를 사랑한다는 핑계로 빼앗아 슬쩍 감추어야 하는 기녀의 약삭바른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임은 나를 살려고 하는데 나는 오직 가난이 걱정이라”19) 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당시 色酒家를 찾는 손님들은 대개 捕校, 別監, 軍監 및 스님들이었다.
不知郞名字 손님의 이름자도 알지 못하는데
何由誦職啣 어찌 직함을 욀 수 있으리오
狹秞皆捕校 좁은 소매 차림은 다 포교들이요
紅衣定別監 붉은 옷 차림은 정히 별감이라네 <宕調>9
啣 재갈먹을 함.㉠재갈을 머금다 ㉡물다 ㉢직함 ㉣재갈
秞???? 袖 소매 수.
儂作社堂歌 내가 부른 사당가에
施主盡居士 시주하는 이 모두 스님들이네
唱到聲轉處 노래 소리 절정을 넘어갈 때
那無我愛美 스님들 나무아미타불 하네 <宕調>14
轉 구를 전.㉠구르다 ㉡옮기다 ㉢넘어지다 ㉣나부끼다 ㉤바꾸다 ㉥더욱
포교와 별감, 군감 등은 妓夫들이었는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영․정조 이후로는 특히 商人들과 譯官들이 환영을 받았다. <凝川敎坊竹枝詞>,20) <關西樂府>,21) 漢文短篇22) 등에도 기녀들의 고객으로 호남 모시 장사와 개성의 비단 장사가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기녀들을 놀리면서 값비싼 모시와 비단을 아끼지 않고 주었으며 개성 상인들이 다녀가고 燕京으로 사신간 역관들이 돌아오면 진귀한 외국산 물건을 얻기 위해 시샘들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녀들은 자기들을 ‘반무당’이라고 놀리면 좌중의 ‘영감들’을 ‘화랭이’ 또는 ‘거사’, ‘시주님’ 등으로 戱化해 부르면서 화대도 받아내었던 것이다.23)
이와 같이 宕調에는 기녀들의 관능적이고 濃艶한 사랑 행위가 관념적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의 기쁘고 슬픈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妓夫들은 포교, 별감, 군감과 같은 서리, 중인 및 승려들이었고 특히 상인과 역관들이 인기 있는 고객이었다는 것에서 시대상과 세태를 엿볼 수 있다.
4. 원망과 저항
悱調는 吏胥, 軍人, 譯官, 장사꾼, 난봉꾼 등 남성의 횡포에 대한 고발과 원망, 갈등과 저항을 직서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제 1-5수는 각기 이서의 아내, 군인의 아내, 역관의 아내, 장사꾼의 아내는 되지 말라고 하고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으며 제 6수 및 제 8-16수는 남성의 횡포에 대한 원망과 저항을 드러내고 있다.
吏胥(이서)각 관아(官衙)에 딸린 구실아치의 통틀어 일컬음
寧爲寒家婢 차라리 가난한 집 여종이 될지언정
莫作吏胥婦 이서의 아내는 되지 마소
纔歸巡邏頭 순라 시작할 무렵 겨우 돌아왔다가
旋去罷漏後 파루 치자 되돌아 간다네 <悱調>1
纔 겨우 재, 잿빛 삼.㉠겨우㉡조금ⓐ잿빛 (삼)ⓑ밤색 (삼)
巡邏(순라) ①순라군(巡邏軍) ②술래의 원말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도둑ㆍ화재(火災) 따위를 경계(警戒)하기 위하여 밤에 궁중(宮中)과 서울 둘레를 순시하던 군인. 2경(更)에서부터 5경(更)까지를 통행 금지(禁止) 시간(時間)으로 정하고 궁성 안은 오위장(五衛將)과 부장이 군사(軍士) 5명이 거느리어 순시하고, 궁성 밖은 훈련도감(訓鍊都監)ㆍ금위영(禁衛營)ㆍ어영청(御營廳)에서 군사(軍士)를 냄
旋 돌 선.㉠돌다 ㉡돌아오다 ㉢두르다 ㉣빠르다 ㉤오줌 ㉥조금
罷漏 오경삼점(五更三點)에 큰 쇠북을 삼십삼천(三十三天)의 뜻으로 서른 세 번 치던 일. 서울 도성(都城) 안에서 인정(人定) 이후(以後) 야행(夜行)을 금하였다가 파루를 치면 풀리었음. 바루
寧爲商賣妻 차라리 장사꾼의 아내 될지언정
莫作蕩子婦 난봉꾼 아내는 되지 마소
夜每何處去 밤마다 어딜 가는지
朝歸又使酒 아침에 돌아와 또 술타령이라네 <悱調>5
使酒 술을 마시고 그 기운(氣運)을 빌어서 기세(氣勢)를 부림
悱調 제 1수에서는 가난한 집 여종이 될지언정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가 새벽 일찍 출근하는 吏胥의 아내는 되지 말라,
제 2수에서는 이서의 아내가 될지언정 일년에 100일 정도 집을 비우는 군인의 아내는 되지 말라,
제 3수는 군인의 아내는 될지라도 외국 가서 오래 있다가 돌아와 비단 옷 사다주는 역관의 아내는 되지 말라,
제 4수는 역관의 아내는 될지라도 장사 갔다가 반년만에 돌아오는 장사꾼 아내는 되지 말라,
제 5수는 장사꾼 아내는 될지언정 밤을 새우고 아침에 돌아와 술타령하는 난봉꾼 아내는 되지 말라고 하였다.
남편으로 부적격자는 이서, 군인, 역관, 장사꾼, 난봉꾼임을 들고 이 중에서 남편으로 가장 기피할 인물은 난봉꾼이라 하였다. 이런 부정적인 군상의 아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가난한 집 여종이 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 하였다. 이들의 공통적인 남편으로서의 결격 요인은 여성들들로 하여금 장시간 또는 장기간 空房의 외로움을 초래시킨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상적인 남편의 기준은 남녀지정을 얼마나 충분히 나눌 수 있게 하느냐는 것이다.
유교 도덕과 봉건제도 아래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인간의 본능을 중시하는 용감한 주장이요 권리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역으로 살핀다면 그만큼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횡포가 심각했다는 증좌일 수도 있다. 어쨌든 조선후기 부정적인 남성의 횡포를 각 首의 意味構造의 반복과 漸層法을 통하여 신랄히 고발하고 이러한 남성들의 횡포에 시달렸던 여성들의 고난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悱調 제 6수부터는 주로 난봉꾼 남편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원망과 저항의식 등을 표출하고 있다.
謂君似羅海 당신을 사나이라 하여
女子是托身 여자 이 한 몸 맡겼는데
縱不可憐我 비록 날 어여삐 여기진 못할망정
如何虐我頻 어찌하여 번번이 날 구박한단 말인가 <悱調>6
托 맡길 탁.㉠맡기다 ㉡의지하다 ㉢받치다 ㉣열다 ㉤받침
縱 세로 종.㉠세로 ㉡발자취 ㉢늘어지다 ㉣놓아주다 ㉤놓다 ㉥부추기다 ㉦권하다 ㉧방종하다 ㉨비록
虐 모질 학.㉠모질다 ㉡사납다 ㉢혹독하다 ㉣몹시 굴다 ㉤해롭게 하다 ㉥재앙
頻 자주 빈.㉠자주 ㉡빈번히 ㉢급하다 ㉣찡그리다 ㉤물가
郎歸月落時 낭군은 달이 질 때야 돌아오네
先睡必生怒 먼저 잠들면 반드시 화내고
巡邏今散未 순라군들 지금쯤 흩어졌을까
不寐亦有疑 안 자고 있어도 또한 의심하네 <悱調>10
이 난봉꾼은 번번이 이유없이 구박하고, 부인의 옥비녀 훔쳐다 기녀에게 주고,24) 반찬 투정하며 살림살이 치고,25) 괜히 부인 의심하고, 구타하고,26) 마주칠 때마다 화내 등27) 갖은 행패를 부렸다. 시적 화자는 이런 남편의 부당한 처사와 횡포에 대해 원망하고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다홍치마를 남편의 투전빚을 갚기 위해 팔고 온 심정28)을 하소연하는 가운데 심각한 저항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早恨無子久 일찍이 자식 없다 한탄한 지 오래지만
無子返喜事 무자식 도리어 다행이라네
子若渠父肖 자식이 만약 지아비 닮는다면
殘年又此淚 남은 여생 또 이처럼 눈물 흘릴 테니 <悱調>12
渠 개천 거.㉠개천 ㉡도랑 ㉢크다 ㉣우두머리 ㉤그 ㉥어찌
肖 닮을 초/같을 초, 꺼질 소 .㉠닮다 ㉡작다 ㉢본받다 ⓐ꺼지다 (소) ⓑ쇠약하다 (소) ⓒ쇠하다 (소) ⓓ흩어지다 (소) ⓔ작다 (소)
夜汲槐下井 밤에 느티나무 밑 우물에서 물긷다가
輒自念悲苦 문득 스스로 섧고도 쓰라린 마음 가져보네
一身雖可樂 내 한 몸 비록 편해지겠지만
堂上有公姥 위로는 아직 시부모님 살아 계시는데 <悱調>16
汲 물길을 급.㉠물긷다 ㉡긷다 ㉢당기다
槐 회화나무 괴,㉠회화나무 ㉡삼공
輒 문득 첩.㉠문득 ㉡번번이 ㉢직립하다
위 ‘비조12’에는 자기 남편 같은 건달 자식을 낳을까 걱정되어 ‘無子息이 多幸’이라고 여기게 된 비참한 심정과 남편에 대한 반감이 내비치고 있으며
‘비조16’는 물을 긷다가 문득 죽음을 생각해 보고 시부모 때문에 주저하는, 여성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잠시나마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마음먹은 여성의 심리 묘사를 통하여 남성의 부당한 행패와 일방적인 횡포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노정시키고 있다.
이상과 같이 悱調는 남편의 부당한 행패에 대해 원망하고 일방적인 남성의 횡포에 대해 심리적으로 저항하는 조선후기 여성의 삶의 모습을 잘 표출하였다.
Ⅳ. 결 론
이옥은 俚語를 위주로 한 근대적인 문체를 구사함으로써 정조의 문체반정에 정면으로 맞서다가
停擧와 充軍으로 벼슬길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나 그의 시창작론과 이에 의거한 여성풍속을 시화한 <俚諺> 및 傳文學 등은 근대문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문학을 대표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고에서는 우선 <이언>의 서문격인 ‘三難’을 통하여 이옥의 시창작론을 분석하고 <이언>의 성격을 규명해 보았다. <이언>을 통해 볼 때, 이옥의 시창작론은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詩意識, 남녀애정을 중시하는 素材論, 俚語 중심의 文體論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시창작론을 적용하여 창작한 결과가 바로 <이언>이다. <이언>에는 주체적인 시의식에 의거하여 우리 나라 여성들의 고유한 삶의 모습을 남녀애정 중심으로 이언을 많이 사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雅調’에서는 주로 시집식구와 화합을 이루며 화평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도시 중인 집안 여성의 혼인과 신혼 살림살이의 모습과 풍습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 놓았다. ‘염조’에서는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화폐경제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조선후기 도회 여성의 과도한 사치풍조와 교만하고 방자한 삶의 양태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탕조’에는 기녀들의 관능적이고 농염한 사랑 행위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의 기쁘고 슬픈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비조’에서는 남편의 부당한 행패와 횡포에 대한 여성의 원망, 갈등, 저항하는 조선후기 여성의 삶의 모습과 풍속을 잘 그려 놓았다.
대부분의 여성 기속시들이 남성 작가들에 의하여 三人稱 視點으로 형상화되거나 서사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비해 <이언>은 여성의 삶과 풍속을 여성 화자가 一人稱 視點의 抒情詩로 표출한 점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토속적인 俚語와 대화체 수용,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 등으로 볼 때 朝鮮詩, 朝鮮風의 전형적인 작품이며 근대시의 성격에 근접한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 이옥(李鈺) 1760(영조 36)∼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매사(梅史)·매암(梅庵)·경금자(絅錦子)·화석자(花石子)·청화외사(靑華外史)·매화외사(梅花外史)·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등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다. 진사 이상오(李常五)의 4남 6녀 중 3남으로 태어나 20세에 해주 정씨(海州 鄭氏)와 혼인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1790년(정조 14) 증광(增廣)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1792년(정조 16) 국왕에게 올린 응제문(應製文)의 문체가 패관소설체(稗官小說體)로 지목되어 견책(譴責)을 받았고, 5년후인 1795년(정조 19) 경과(慶科)에 응시하였으나 다시 문체가 문제가 되어 과거 응시를 금지하는 정거(停擧)에 처해지고 충군(充軍)을 명 받았다.
1796년(정조 20) 별시 초시(初試)에서 방수(榜首)를 차지하였으나 역시 문체를 지적 받아 방말(榜末)에 붙여졌다. 그 뒤 1799년에 삼가현에 소환당하여 그곳에서 넉달 동안 머무른 후 본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으로 내려가 저작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停擧 유생(儒生)에게 얼마의 연한(年限) 동안 과거(科擧)를 보지 못하게 하는 벌(罰)
대표적인 저술은 시 창작론과 함께 남긴 이언(俚諺) 65수가 있다. 이밖에 가람본 『청구야담』에서는「동상기(東廂記)」를 그가 지었다고 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 격식을 거부하고 소품이라는 새로운 문체를 창안하여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희생물이 되었으나, 그가 남긴 산문과 시는 조선 후기 문학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경향을 대변한다는 면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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