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폴 세잔 - 고독과 자연을 사랑한 화가
폴 세잔 - 고독과 자연을 사랑한 화가
아버지의 뜻대로 법 공부를 하던 세잔은 그의 손에서 붓 또한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그림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게 되고 아버지는 그의 그림 공부를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리로 올라간 이 화가지망생의 생활은 결코 순탄치 못했습니다.
세잔은 '에꼴 데 보자르'에 들어가는 시험에도 계속 미역국을 먹었고, 살롱전에도 낙선만을 거듭했습니다
살롱전에서 낙선한 사람들끼리 열게 된 전시회에는 평소 교류를 하던 모네, 피사로, 마네 등과 함께 세잔도 참석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세잔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은 “임산부와 함께 그 전시회를 가신다면 세잔씨의 그림은 빨리 지나치세요. 그 그림 속 인물의 색은 너무 기괴하여 임신부에게 큰 충격을 줄 겁니다.”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지나치는 누군가가 팔만 닿아도 벼락같은 화를 내기도 하고 같은 인상파 화가이자 파리지앵인 모네에게도 악수조차 하지 않을 만큼 세잔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당연히 파리의 기성화단과 평론가에 대한 적개심과 불화는 상당했죠.
하지만 소년시절부터 함께하고 세잔에게 화가의 길을 시작하게 한 소설<목로주점>의 작가 '에밀 졸라'와의 우정은 유명합니다.
또한 그의 정신적 스승인 피사로 그리고 몇몇 지원자들 덕분에 가난하고 힘든 화가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습니다.
세잔은 17년 동안 동거를 하고, 아들까지 있었는데도 모델이자 그의 연인인 '오르탕스'를 엄격하신 아버지에게 소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잔의 아버지는 임종 직전 손자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아들의 결혼식을 허락하였습니다.
세잔의 부인
아들 폴
세잔은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에도 불구하고 다른 화가들과 다르게 여행도 별로 하지 않고 고향의 작은 집에 틀어박혀 작품 활동에만 몰두하였다. 부인과 아들은 파리에 남겨두고요. 다행히도 아름다운 주변의 풍광들이 그의 작품을 위해 존재해 주었습니다.
엑상 프로방스의 산
30년 지기 친구가 새로 쓴 소설 속에 실패한 화가로 세잔을 표현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결국 1886년 에밀 졸라와 우정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작품에만 전념하던 세잔은 1906년 10월 15일 폭풍우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던 중 쓰러지게 되고, 폐렴으로 전이되어 10월 22일에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당시 마네를 비롯해 대부분의 화가들이 매독 또는 술병으로 죽었는데, 세잔은 그래도 얌전하게 죽은 편이죠^^)
외로웠던 그의 생애가 끝나자 그의 작품들은 고갱과 같은 화가들의 주요 수집품이 되고 상징주의 화가 모리스 드니가 <세잔에게 경의를> 이란 그림을 그릴 정도로 위대한 화가로 칭송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의 미술세계는 후기 인상주의를 비롯하여 입체파와 야수파, 상징주의 등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되고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모리스 드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가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가 뉴턴의 사과이며, 셋째가 세잔의 사과이다. 평범한 화가의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
사과가 있는 정물화
지독히 내성적이었던 세잔은 늘 고독했습니다. 어쩌면 그가 선택한 고독이었을 겁니다. 왜냐면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죠.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고, 그 또한 어느 누구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친구도, 가족도 함께 하지 못한 채 자신 안으로 들어가 버린 세잔의 자아에 대한 사랑 또한 그의 작품 세계만큼이나 독특하고도 철저합니다.
세잔의 인생 속에 등장하는 사랑의 대상은 아버지, 친구 그리고 자기 자신 정도 일겁니다. 선천적으로 여자를 꺼려했던 그였지만 물론 아내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요.
서른 살의 세잔은 지나치게 밝아, 다소 경박스럽기까지 한 열 아홉 살의 모델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17년간 동거를 한 뒤 결혼도 합니다. 그의 인생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자이자 공식적인 아내였지요.
초록 모자를 쓴 세잔 부인 (1894)
그러나 그녀에 대한 세잔의 사랑은 의구심이 듭니다. 그들은 자주 떨어져 살았을 뿐 아니라, 부부라기보다는 친구와 같은 사이였다고 보여지니까요. 그리고 세잔은 죽을 때 한푼의 유산도 그녀에게 남기지 않았고, 그녀 또한 세잔의 임종 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세잔에게 있어 부인 오르탕스는 전속 모델이자 그의 아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만 남았을 뿐입니다.
세잔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아버지와 친구인 '에밀 졸라'였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생활을 하던 유약한 화가 세잔은 늘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습니다. 세잔이 그림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아버지는 법관이 아닌 화가로서의 아들을 어렵게나마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죄스러움과 그림에 대한 자신의 열망 사이에서 갈등하곤 했지요.
지나치게 소심했던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를 그림에 담아 내면서도 늘 불안해 했습니다.
(The Card Player) 1890~95
세잔의 친구 에밀 졸라는 당대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비평가였습니다. 과잉보호를 받고 자랐던 세잔과 힘든 가정환경 탓에 조숙했던 졸라는 어린 시절을 함께 지내면서 예술과 문학에 대한 소양들도 함께 키워나갔습니다. 세잔이 화가로서의 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졸라는 강력하게 그 길을 걷도록 종용하기도 했지요. 세잔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졸라는 세잔의 능력을 인정했지만그의 우유부단함을 알았기에 늘 충고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같은 화가 드니에 의해 <세잔에게 경의를>이란 작품이 제작될 정도로 당시의 화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는 세잔이었고, 피카소 조차 자신의 유일한 스승은 세잔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지만, 대중들이나 비평가들은 그를 외면했었습니다.
게다가 그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친구였던 졸라마저도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실패한 천재 화가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세잔을 가장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해하더라도, 가장 신뢰하는 사람의 이해가 없다면 그것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없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기대하면 할수록 더욱 외로워지는 것이니까요. 세잔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친구 졸라의 이해만 있더라도 세잔의 삶이 그렇게 고독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세잔은 늘 홀로 있길 원했습니다.
자신의 전시회를 할 때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림을 팔기 위해 화상을 만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림을 시작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찾아왔으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고, 그들과 친밀한 교류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연을 바라고 그리며 그 속에서 은둔자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림으로 자신을 보이길 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완벽한 화가로서의 세잔이었지요.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사랑하고 꿈꾸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세상을 떠난 후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