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양 화 (명화)

[스크랩] 빈센트 반 고흐 - 삶과 인생

bizmoll 2013. 8. 24. 10:27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한적한 시골 마을인 그로트 춘데르트라는마을에서 태어나 37세의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에 이룩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가 남긴 작품의 수는 방대하다. 고흐의 작품 활동은 1880년부터 1890년까지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도 다작의 시기는 후기 5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 5년 동안 무려 800점에 가까운 작품을 완성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정신적 착란 상태에도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고흐의 삶 - 출생에서 청년기까지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1853년에 태어나 자랐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1873~75년 5월까지는 런던에서,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일했다.

날마다 예술 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874년 런던 태생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진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트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정통교리의 접근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지나친 질투심"을 이유로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 사업을 하러 떠났다.


1879~80년 겨울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그가 순간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 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맥주잔과 과일이 있는 정물 (1881. 12, 이튼)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고흐의 삶 - 화가로서의 삶의 선택

고흐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먼저 브뤼셀 아카데미에 데생을 공부하러 갔다가 1881년 네덜란드 에텐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열심히 체계적으로 공부했지만, 곧 독학의 어려움을 느끼고 좀 더 경험이 많은 예술가의 지도를 받고자 했다.

1881년 말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와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고,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과 자주 만나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혔으며,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다. 이 때 그는 심한 사랑의 열병도 앓는다.


시엔을 사랑한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편지로 보낸다.

 

고흐의 사랑, 시엔


1883년 자연 속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과 농부들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모베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찾아가는 네덜란드 북부의 황량한 드렌테 지역으로 떠나 3개월을 지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이때 브라반트의 누에넨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4)


 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누에넨에서 보냈으며, 이시기에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 풍경, 인물을 그렸는데,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탄광 지역을 다룬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제르미날 Germinal'(1885)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많은 그림, 예를 들면 '베짜는 사람들'과 '감자먹는 사람들, 1885'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라 크로의 추수 (1886. 6)


 고흐의 삶 - 파리에서의 화가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 방법,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같은 시기에 고흐는 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했다.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워프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워프를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던 반 고흐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고갱 등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을 통하여 당시 프랑스 회화가 이룩한 발전에 눈을 떴다. 또한 테오는 구필 화랑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피사로와 쇠라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 무렵에는 고흐도 인상파의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탕귀영감의 초상 1887년 가을, 파리


몽마르트를 그린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색상은 마침내 다채로워졌고, 시각도 전통적인 시각에서 더욱 많이 벗어났으며 색조도 밝아졌다. 1888년 초 파리 교외를 그린 몇 점의 풍경화 및 '탕기 영감의 초상'과 '이젤 앞에 선 자화상' 같은 걸작에서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양식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2년 뒤 고흐는 도시생활에 싫증이 나고 육체적으로도 기진맥진하여, 좀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느끼고 그리는 방식'과 '색채의 완전한 효과'에 열중해 있었고 결국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알제리의 병사

 

고흐의 삶 - 화가로서의 전성기

그후 12개월 동안 (첫번째 전성기)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 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마을과 그 주변풍경,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집의 안팎, 해바라기 연작, '별이 흐르는 밤' 등이다.

 

Cafe Terrace at Night, 1888 9월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해바라기,1888년 8월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고갱과의 격렬한 언쟁끝에 반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파이프를 물고 귀를 싸맨 자화상(1889. 1)


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 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흐의 삶 - 셍 레미의 화가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알피유 가족', 의사 가제트 초상화,  브란트, 들라크루아, 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아이리스 (붓꽃) 1889년 5월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별이 흐르는 밤, 1889년 6월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의 초상) (1890. 2)


고흐의 삶 - 마지막 이야기..그러나 끝나지 않은..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 지방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나흘 뒤,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세잔의 친구인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가셰가 사는 오베르로 갔다.

 

측백나무와 별이 있는 길, 1890 5월


 4년전 누에넨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 마을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년 7월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동생 테오(그는 결혼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음) 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고독은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엔 세상을 떠났다.


형이 죽은 지 6개월 뒤 (1891. 1. 25) 테오도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다 죽어버렸다.

고흐의 막내동생이었던 코르는 1900년 서른 둘의 나이로 자살했다.

또 빈센트의 여동생 빌은 41세의 나이로 정신병원에 수용되다..


 나의 형이 위대한 천재이고

 언젠가 베토벤 같은 인물과 비교되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 테오도뤼스 반 고흐 -


 

 

 

 

 

 

 

 

 

 

 

출처 : Free As The Wind. (바람처럼 자유로이...)
글쓴이 : 강병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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