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르네상스 미술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미술
14세기 중반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배경을 보면
첫 번째, 이탈리아에선 귀족계급과 부유한 부르조아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두 번째,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는 등 고전시대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 번째,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의 기회가 많았다는 것등이다.
특별히 지옷토와 단테의 출생지였던 부유한 상업도시 피렌체에선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흐름이 강하게 나타났다. 피렌체는 새로운 아테네로 부상될 만큼 시민예술의 야심찬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예술가를 엘리트 집단 으로 인정하는 등 미술가의 지위가 향상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들 수 있으며 그는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자기식대로 결합, 표현하였으며 원근법, 소실점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를 뒤이어 알베르티가 건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그는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가 권장한 고전형식을 절충하여 개인 주택에 적용하는 건축기술을 보여 주었다.
15세기 최고의 조각가 도나텔로는 로마의 유적을 제계적으로 연구한 르네상스의 아버지이다. <성지오르지오>나 <죽코네> 모두 고전 예술에 있어서의 균형 잡힌 움직임의 의미가 회복되었으며 고대 로마 조각을 재현, 새로운 도상으로 재창조하였다.
플랑드르 화가들의 나체상이 '발가벗겨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 반해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나체상은 고대 조각의 이상을 추구하여 인간의 상체를 구조체로 다루었으며, 옷은 신체를 감싸는 듯하게 표현되었다.
경쾌한 아치 대열과 고린트식의 기둥이 잘 표현된 천국의 문,<야곱과 이삭의 얘기>의 기베르티는 선명하고 수학적으로 정확한 원근법 을 구사하였으며, 테라코타에 전념한 롭비아와 로마조각보다 더 개성적인 대리석 조각가 롯셀리노 도 유명하다.
GHIBERTI, Lorenzo
Eastern Door of the Baptistry
1425-52
Bronze
Baptistry, Florence
다빈치의 스승인 베록키오는 사방으로 뻗쳐 있으나 우아하고 연속적인 동작을 보여주는 <돌고래를 안은 동자>를 조각했다. 베록키오는 어떤 의미에서 도나텔로의 폭넓은 세계와 대담한 예술적 야망에 필적했던 작가였다.
1. 회화
피렌체 회화는 격렬한 동세와 떨림이 강한 윤곽선을 유지하였으며 많은 작품이 고전 작품에의 제재를 따온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15세기 말에 유행된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짐작할 수 있는 데, 그들은 고전고대를 연구하면서 종교를 인간적인 것으로 해것하였으며 그리스, 로마의 예술,철학,종교 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융합을 꾀하였다.
마사치오는 26살에 요절했으나 15세기 회화 분야에 있어 경탄할 만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는 섬세한 우아함이 아니라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 건장하고 모가 진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성모와 성요한이 있는 성삼위일체>는 지옷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나텔로처럼 의복 보다는 육체를 더 중시한 르네상스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부르넬레스키의 고전적 건축과 과학적 원근법의 완벽한 응용이 잘 나타나 있다.
마사치오의 <삼위일체>와 흡사한 <성모자와 성자들> 을 그린 베네치아노는 색채구사에 있어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하였다. <성십자가>의 피에로 델라 프란 테스카는 빛을 이용하여 깊이감을 표현하였으며, 마사치오를 연상시키는 엄격한 자세의 인물상과 자신의 그림세계의 object를 기하학적 개념(구, 원통, 원추)으로 파악하여, 현대 추상화가들 의 정신적 지도자로 칭해질 수 있다.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보티첼리는 이교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영성이라는 공통분모의 발견으로 높은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였는 데, 이 작품으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다.
Botticelli.
Birth of Venus1485
Tempera on canvas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Italy
마사치오로부터 이어지는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화가로 만테냐를 들 수 있는 데, 그는 이야기의 내면적 의미를 중시한 지옷토에 비해 외부적인 형태에 관심을 나타냈었다. 만테냐의 <형장을 끌려가는 성야곱>은 앙각시의 원근법으로 나타내었으며 프레스코 벽화 중 가장 극적 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로마풍의 건축과 의상, 장신구에서 "엄격한 단순성과 장대함"을 엿볼 수 있으며 긴장되고 완강한 모습의 인물상은 도나텔로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특별히 나체상으로 소묘한 만테냐의 소묘로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밑그림은 나체상으로 구성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벨리냐의 <법열에 잠긴 성프란체스코>에서 웅대한 자연경관과 부드러운 색채를 볼 수 있으며, 부조 처럼 윤곽선으로 표현한 카스타뇨의 가죽그림<다윗>은 동세와 동작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프라 안젤리코처럼 일부러 근대적 표현법을 회피한 작가도 있다.
파올로 우첼로는 원근법과 단축법을 많이 사용하고 조각된 것처럼 공간에 돌출되어 보이는 <산로마노의 대승>을 그렸고, 메노초 고촐리는 아름다운 장신구와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는 <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동방박사들>을 그렸는데, 이 들의 작품들은 모두 상류계층이 작가들에게 원하는 요구에 부응할 만하다.
2. 르네상스의 주체
중세의 인간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에서 그리스도교가 자리답고 있었던 시대의 모든 미술이 창작은 종교에 묶인 채 그 나래를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생각이 확대되어 나가는 시대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하였다. 급속한 기술과 발달은 인간의 시각 확장을 가져다 주었다. 이에 영향받은 것은 단지 사회에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미술에 있어서도 둣치오, 지옷토, 로렌쳇티 형제와 같은 화가들에 의한 시각 예술의 융성, 단테와 페트라르카, 복카치오와 같은 문학가들에 의한 문학등의 발전드오가 같같은 전반적인 문화의 융성이 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자신들의 세기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여명기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자아에 대한 보다 진보적인 노력들이 연결되었다.
위와 같이 신에게로 쏠렸던 시선이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지게 되자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각이 도래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대규모적인 고대 문예의 부흥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고대문예의 부흥은 특히 시각예술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르네상스를 주도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인들 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대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따른 것이 아닌, 고전적 전통을 그리스도교와 융합 시켜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하던 사람들이었다.
브루넬레스키 Brunelleschi, Filippo (1377~1446.4.15)
이탈리아의 건축가·조각가. 피렌체 출생.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양식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차남인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하는 대신 금속 공예의 기술을 익혀 조각가가 되려고 하였다.
1401년 피렌체세례당 출입문의 양각(陽刻) 콩쿠르에 응모하여 L.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과 끝까지 경쟁한 결과, 결국 그가 사퇴함으로써 기베르티가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당시 시작품(試作品) 《이삭의 희생》(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은 하나하나의 조각상이 매스로서 정확하게 파악되어 있고, 또 그것들이 극적으로 힘차게 구성되어 있어서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의 목각상 《그리스도의 책형(刑)》(1409?)과 더불어 조각가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콩쿠르 이후에 주로 건축가로서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첫 업적에는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대성당의 커다란 돔(36 낙성식)이 있으며,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架構)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새로운 구성미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또 피렌체의 첫 사회시설인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고아양육원:21∼44)에서는 9단의 계단 위에 연속된 아케이드의 전망 효과를 노리고 있으며, 명쾌하고 새로운 율동감을 주고 있다.
또한 산로렌초성당(18 이후)과 산토 스피리토성당(36 이후)에서는 저마다 질서 있고 지적(知的)인 공간구성이 특색이다. 후자의 본당에서는 집중식 형태에 대한 관심이 엿보이는데 이는 산로렌초성당의 성기실(聖器室:1428), 파치가(家)의 예배당(29 기공),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성당(34 기공) 등에서 실현되고 있다.
특히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성당은 순전히 집중식 형태를 노려서 건립된 것으로 그의 건축양식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37년에 공사가 중지되어 지금은 1층 벽면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위대성은 전통에서 계승한 구조방식을 여러 군데에 수시로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구축(構築)의 미적 법칙을 거기에서 이끌어내고 실현한 점에 있다. 투시도법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12.13)
이탈리아의 조각가. 본명은 도나토(Donato di Niccol?di Betto Bardi). 피렌체 출생.
F.브루넬레스키의 건축, 마사초의 회화와 더불어 조각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이다.
니콜로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평생 청빈한 가운데 독신으로 지냈다.
초기의 수업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1403년 말에 피렌체대성당의 문을 제작 중이던 기베르티의 조수로 일하였다.
후기 고딕에서 초기 르네상스에 걸친 과도기에서의 그의 활동은 대체로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405∼32년으로 피렌체대성당을 위한 두 예언자상(1408)을 비롯하여, 웅대한 《복음서기자(福音書記者) 요한상》(15), 병기 제조업조합의 의뢰로 제작된 오르 산 미켈레성당의 《성 조르조》(16:원작의 대리석상은 피렌체의 발제로미술관 소장), 길드 조합을 위한 《성 마르코상》, 피렌체의 문장(紋章)이 있는 방패를 들고 있는 《사자상》, 산타크로체성당을 위한 목각 《그리스도의 책형(刑)》 등을 제작하여, 고딕의 작풍을 남기면서도 이미 르네상스의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여, 분석적인 사실을 억제하고 종합적인 장엄함으로 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 조르조》는 그때까지 건축의 질서를 따르고 있던 조각을 3차원의 공간에서 독립시켜, 범할 수 없는 위용과 고전적인 격조를 보였다.
제2기는 32년 그가 로마를 방문하여 고대유적 연구에 열중한 이후의 10년간으로, 발제로미술관의 청동상 《다비데》(33)는 젊음이 넘치는 육체의 표현에 고전미를 풍기게 한다. 대리석조각도 이 즈음엔 사실기교의 극치에 이르러, 발제로미술관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박진감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 밖에 그의 명성을 떨치게 한 결정적인 것으로 산타크로체성당의 부조(浮彫) 《수태고지(受胎告知)》, 산로렌초성당 설교단의 부조 《강가(降架)》 등이 있다.
제3기는 43년 파도바에게 초대되어 그곳에 머물렀던 10년간으로, 《가타멜라타 장군기마상》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대변하는 걸작임과 동시에, 르네상스 주조기술의 한 정점을 나타낸다.
제4기는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만년의 피렌체시대로, 사실적 기법은 더 세련되고 전부터 조금씩 보였던 그의 괴기취향과 비극적인 표현이 강조되었다. 베키오궁전 앞에 있는 《유디트와 홀로펠네스》 청동상과 피렌체성당의 《막달라의 마리아》 등이 있다. 대리석·청동·목재·테라코타 등 온갖 재질을 썼던 그의 전작품에 일관되어 풍기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육박해오는 투철한 르네상스적인 리얼리즘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고대의 단순한 모방에서 탈피하였으며, 조각을 회화화한 기베르티의 고딕적인 작풍과도 대결할 수 있었고, 조각을 원래의 정도로 되돌림으로써 베로키오나 미켈란젤로에게 영향을 끼쳐 근대조각으로 발전할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3. 후기 고딕 회화
1420년 경 북유럽의 화가들과 이탈리아 화가들은 국제양식의 한계를 넘어 대담하게 전진해 갔다.
그러나 북유럽의 화가들은 과거의 전통을 고수해 나가는 경향을 고수하였는 데, 이에는 상당히 비슷한 경향이 동시에 출현하게 되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구분하여 전자는 초기르네상스라고 부르고 후자를 후기 고딕양식이라고 부른다.
알프스 북부에 있어서의 예술의 경향은 기존의 경향을 고수하면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처럼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음악과 회화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회화에 있어서 소위 플레말레의 화가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의 노력이 확대되었다. 이것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원숙한 기법을 가진 자연으로의 회귀라 하여 그들을 찬양하였다.
에이크 Eyck, Hubert van (1370?~1426)
네덜란드의 화가. 플랑드르 화파의 기초를 닦고, 유화의 기법을 개량한 ‘에이크 형제’ 중의 형. 아우와 함께 부르고뉴공 필립[善公]을 섬겼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이 없어 경력은 불분명하다. 작품으로는 형제 합작의 서명이 있는 강(Gent)의 성요한성당의 제단화(祭壇畵)가 있는데, 그의 구상에 의해 착수되고, 그의 사후인 1432년 아우의 손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에이크 Eyck, Jan van (1395?~1441.7.9)
네덜란드의 화가. 형인 H.van 에이크와 플랑드르 화파의 기초를 닦고 유화의 기법을 개량하였다. 1422∼24년 헤이그의 바이에른후(侯) 요한의 궁정화가, 이어 25년 이래 부르고뉴공(公) 필립[善公]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한때 필립과 포르투갈의 왕녀 이사벨의 결혼을 위한 사절단과 함께 리스본에 간 일도 있다(1428∼29).
종래의 양식이나 구도(構圖)에 구애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자연 그대로의 리얼리즘(realism)을 주지(主旨)로 하였으며, 냉엄하고 신비적인 분위기로 종교적 경건과 신앙을 표현하였다. 또 플랑드르에 초상화 장르를 확립하였는데, 새로운 시야와 기교는 후세 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작품으로는 《무덤가의 세 마리아》 《젊은 남자의 초상》 《헨트 제단화》, 그리고 형제 합작인 강의 성요한성당의 제단화와 그 밖에 종교화·초상화 등이 많다.
로제르 반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
얀 아이크 형제와 더불어 플랑드르 화가 중 거장의 대열에 끼는 사람이 바로 로제르 반 데르 바이덴 이다. 그의 작품 중 십자가에서 내림은 모난 옷주름과 정확한 모델링으로 플레말레의 화가의 그림 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얀 반 아이크의 부드러운 음영과 풍성한 색채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있어서의 그림은 과거의 피에타상에서 볼 수 있었던 조소적인 비애가 각 인물의 표정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 될 수 있겠다. 로제의 회화 예술은 많은 추종자를 낳게 했는데, 이는 아비뇽의 피에타에 잘 나타나 있다.
보스 Bosch, Hieronymus (1450?~1516)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적으며, 연구자의 추정에 의하면 지금의 네덜란드 스헤르토헨보시에서 태어나 대부분 그곳에서 제작활동을 계속했을 것이라 한다.
작품은 후기고딕의 전통에서 출발한 초기의 그리스도 수난도(受難圖) 등 종교적 제재로부터 중기 이후에는 종교적·비유적 제재로 나아갔으며,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결부된 경이적 환상세계를 전개하였다. 이는 광기(狂氣)와 부조리(不條理)와 도착(倒錯)의 지옥도(地獄圖)이며, 합성·변모된 무수한 동물과 식물 비유기적(非有機的) 물체들로 화면을 꽉 메우고 날뛰는, 괴기하고 어두운 해학(諧謔)의 마술세계이다.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형태와 도상(圖像)은 전례가 없었으며, 20세기의 쉬르레알리슴의 선구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보스의 회화는 광기나 공상의 산물이 아니며, 당시의 신학 및 종교적 배경과 관련된 상징체계(象徵體系)를 내포하고 있다. 이 화가의 신앙고백의 기반에 관해서는 신비적인 아담파(派), 이와 대립하는 경건한 로이스브루크파(派), 금욕적인 반(反)종교개혁·인문주의의 경향에 두려는 여러 설이 있다. 그의 지옥도는 중세적인 신앙과 근대적 사상이 매혹적으로 뒤섞여 있으며, 플랑드르의 민속적 전승의 대지(大地) 위에 서서, 후일 브뤼겔이 계승하는 ‘속담’의 장르를 창시하였다.
그는 생기 있는 자연감정을 그려낸 풍경화가였으며, 그리자유(grisaille)와 브러시를 구사한 탁월한 기법가, 베네치아파(派)를 연상시키는 풍부한 색채가(色彩家)였다. 또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데생(dessin)은 그의 기법의 프로세스와 소묘가로서의 소질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작에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있는 대제단화(大祭壇畵) 《쾌락(快樂)의 동산》 《건초수레》 《동방박사의 경배》, 리스본국립고대미술관에 있는 《성(聖)안토니우스의 유혹)》 등이 있다.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
'재생'이라는 개념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였다.
서구에서 16세기 초엽은 서구 역사상 가장 혼란하고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앞선 시대, 즉 14,5세기의 발견들의 꼬리를 물고 인간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 사상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아메리카의 발견은 강대국으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게 했고, 이로 인한 식민지와 해상 무역을 위하여 힘의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전쟁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해 종교 전쟁이 잇따르게 되었다.
알프스 이북의 나라들에서 루터와 칼빈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이 나왔으며 대성당의 건축을 위하여 면죄부를 팔던 교황의 힘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서 교황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독자적인 그들만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노선을 가게 된 알프스 북부의 나라들은 르네상스의 양식이 더 늦게 수용된다. 이 지역 대표적 화가로는 뒤러와 홀바인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엄격한 궁정풍의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로 르네상스 예술이 처음으로 태동한 피렌체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나타내었으므로 르네상스로 같이 분류하지는 않는다.
초기 르네상스의 미술가들에게 있어 특히 가장 중요한 임무를 떠맡았던 건축가들을 고민스럽게 했던 것은 대성당의 건립이었다. 당시 시대를 움직였던 가장 기초 단위의 힘이 종교였으므로 성당 건축은 가장 중요한 미술의 한 영역이었다.
원근법, 소실점,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결합하는데 성공한 전시대의 브루넬리스키, 그 뒤를 이은 알베르티에 이어 16세기에 이르러 교황의 대성당을 건축하는 브라만테는 고전 건축의 이상과 기준을 흡수, 재현한다.
이들은 거의 제작소로부터 어려서부터 스승의 일을 도우며 기법을 익혔다.
다른 어떤 세기보다 많은 천재들이 나타났던 16세기-이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살펴보기로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h (1452 - 1519)
고대 그리이스의 고전 시대와 같은 영광의 시대인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기간이 그가 생존해 있던 때였다. 그는 역사상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만능의 천재였으며 자신이 예술가라는 데 자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 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 기체 역학, 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자연세계를 관찰하는 데 예술가의 눈이 가장 완벽한 기구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에게 자연을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의미하며 예술가만이 가장 휼륭한 과학자이며 예술가가 본 것을 생각하고 그림으로써 나타내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준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스승이었던 베록키오의 제작소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으며 근육과 혈관의 위치등 인간과 동물의 해부학 적 구도를 연구하였으며 근육과 혈관의 위치등 인간과 동물의 해부학적 구도를 연구하였으며 이는 그의 소묘와 글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르네상스의 가장 휼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은 이 위대한 대예술가의 손으로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된다.
후원자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고, 모든 방면에 능란한 전천후 예술가로서 다빈치는 당시 세도가였던 메디치가의 비현실적, 관념적인 지적 세계로부터도 자유로워 자신이 본 것을 오랫동안 숙고하여 그림에 옮기기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한 장면을 그리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을 소비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닌, 그의 사고 체계가 얼마만큼 풍부한 상상력으로 움직이며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를 대상으로 맞서 치열하게 한 인간으로서 살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살다가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의 이해 아래 살다가 삶을 마쳤다 한다. 그의 작품으로는 <동방박사의 예배>,<최후의 만찬>,<모나리자> 등이 있다. <동방박사의 예배>는 르네상스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지만 기존의 프레스코화가 아닌 그가 새롭게 시도한 유화템페라로 그린 것이다. 빛과 그림자의 표현이 뛰어나다. 전성기의 과도기적 작품이다. 전시대의 거장 만테냐의 작품과 비교하면 건물과 인간을 대치되게 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반면 레오나르도는 인물의 구도를 정하고 그다음 보조 역할로서의 건축의 모티브를 정하였다.
Leonardo da Vinci
after Leonardo's Last Supper.
Oil on canvas Da Vinci Museum,
Tongerio. Netherlands.
Leonardo da Vinci 17
Mona Lisa
(La Gioconda).1503
Oil on wood. Louvre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한 식당에 그려진 것인데, 이 그림이 수도원 식당에 걸렸을 때의 반응은 굉장한 것이었다 한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눈을 중심으로 원근법이 사용되었고,뒤로 상징적 건축은 구도의 완벽한 균형감과 안정감을 준다. 이 그림의 내용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그림으로 옮긴 것인데, 그는 가장 치밀한 계산아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한 무리의 군상을 목표로 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그림에 대한 확고한 생각은 가장 간결하게 그린 그림으로 나타낸 그의 <모나리자>에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 그림에 대한 논의는 끊임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그래서 이 그림에 대한 시대를 초월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 그림이 가진 놀라울 정도의 살아있는 느낌을 보는 사람이 갖는다는 것이다. 피렌체의 한 부인을 그린 이 그림은 당시로는 평범한 얼굴이 아니었을 이 작품을 유명하도록 만든 것은 스푸마토라는 특이한 채색법의 사용에 있다. 스푸마토란 한 형태와 다른 형태가 뒤섞여 들어가는 듯 한 채색법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상상할 거리를 남겨 놓는다.
다빈치는 이런 신비스런 미소를 눈과 입꼬리에 남겨 놓으므로서 보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의도이기도 하지만 그의 미술이 마침내 도달한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 - 1564)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는 대조적인 사람,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 화려하고 다채로운 생활을 반영해 주는 작품을 남긴 도메리코 키를란다요로부터 3년동안 도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그로부터 프레스코화의 확고한 테크닉과 소묘의 철저히 기초를 배우고 이 성공한 스승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당시 세도가였던 메디치가의 소장품들을 즉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조각들을 연구했다.
그는 이로부터 아름다운 인체를 묘사하는 고대의 스승의 비법을 알았으며 인체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연구, 인체 해부학을 탐구하였다. 그도 역시 다빈치처럼 화가인 동시에 조각가, 건축가, 시인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라고는 과학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빈치가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봤을 때, 미켈란젤로는 인간을 거의 신과 같은 독특한 존재로 보았다. 다빈치가 조용히 사색하는 과학자이자 예술가였다면 그에게 영감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으며 이런 영감은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예술가는 신과도 같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고가며 자신의 강한 개성과 끊임없이 싸웠던 그의 가장 뛰어난 역량은 그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그의 조각상에서 볼 수 있다.
프레스코화인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요청으로 그려진다. 그 성당은 그 전시대의 유명한 화가들 보티첼리, 그의 스승인 기를란디요 등의 거장들의 그림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궁형 천장만은 비어 있어 교황이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을 것을 제안함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 작업은 근 4년 동안 조수를 쓰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그렸다. 내용은 성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인데, 천장 복판에는 창세기와 노아의 이야기를, 창문 사이 벽에는 예언자와 많은 수의 성서 속의 인물들을 그려 넣었다. 그 중에서 성서 테마중 가장 뛰어난 부분은 천장의 중앙 부분에 그려진 아담의 창조이다. 여기서 전시대의 지옷토와 마사치오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전에 볼 수 없던 강렬한 감동이 있다. 최초의 인간아담이 잠에서 깨어난 듯 조물주 신의 손길을 느끼는 모습은 차�의 순간과 신의 전지전능함을 나타내 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그가 율리우스 2세의 묘비 건립의 일부분이었던 군상 중 하나인 빈사의 노예와 다윗상, 모세상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평소에 회화에서 보다 조각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한다. 격렬하고 뒤틀린 듯한 포즈,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듯한 자세 등은 아무리 자세가 복잡하더라도 하나의 통일감, 즉 전체적인 윤곽의 뚜렷함이나 단순하고 안정된 듯한 느낌이 있다. 이는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일 수 있는 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예술의 비밀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Michelangelo
Creation of Adam 1508-1512.
Fresco Sistine Chapel, Vatican
라파엘로 산티 Raffaello Santi (1483 - 1520)
르네상스의 3대 거장 가운데 가장 젊었으며 가장 까다롭지 않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의 요청대로 로마로 오기 전 다빈치의 많은 작품들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또 다른 그의 스승인 페루지노로부터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 공간의 깊이를 표현한 정돈되고 우아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서정성과 미켈란젤로의 극적이며 회화적인 풍요한 화풍을 결합한 견고한 미술을 창조했다. 그는 동 시대의 두 대가와는 다른 면을 보여주는 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순수함와 이상성에 있다 한다. 당시 자연의 충실한 재현을 중요시 하지 않았던 대로 그도 역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고대 고전시대의 이상미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가 성공한 것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잃기 쉬운 생명감과 성실성을 확보하므로 자신의 그림을 이상화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짧은 생을 살다 간 그는 벽화를 그린 벽화가이자 또 초상화가 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성모상의 원형이 된 그란두카의 성모와 고대 그리이스 아테네 학당, 교황 레오 10세 의 초상, 요정 갈라테아 등이 있다.
Raphael
School of Athens 1509. Fresco.
Vaticano, Stanza
della Segnatura, Rome
주) 스푸마토(공기원근법) : 연기라는 뜻의 이탈리아에서 유래. 회화에서 '공중에 사라지는 연기'같이 색깔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도록 부드럽게 옮아가게 하는 수법. 15세기 초 대사들의 특징인 지나치게 또렷하고 거친 윤곽선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하는 능력을 지닌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조르지오네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 기법이다.
지오르지오네 Giorgione (1478 - 1510)
지오반니 벨리니의 제자. <폭풍> 경치가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주제가 됨. 사물과 사람을 미리 그려 놓고 나중에 공간 속에 배열한 것이 아니라, 자연,땅,나무,빛,공기,구름 그리고 도시 풍경 및 나무들과 인간을 통틀어 하나로서 진정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이는 거의 원근법의 발명에 맞먹는 새로운 영격을 향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이 되었다.
Giorgione
The Tempest (폭풍) 1510
Oil on canvas
Galleria dell'Accademia
티치아노 Tiziano (1477 - 1576)
벨리니, 지오르지오네의 뒤를 잇는 베네치아의 대가. 색채를 다루는 데 뛰어났으며 초상화 작가로 유명했다. 세계를 빛과 색채의 구성이라고 보는 회화양식 이 근대 회화의 중심적 사고 방식이 되기도 했다.
Titian
Venus of Urbino
1538.Oil on canvas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Venice
북구의 르네상스 미술
후기고딕 성향의 알프스 북쪽의 미술가들은 1500년대를 전후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선다.
이태리 르네상스의 전사조와 후기고딕의 만남으로 그 경향은 매우 다양했으며 남부와 다른 북부지방 특유의 성격이 드러난다.
대체적인 경향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 차분하고 냉정한 빛깔, 공간미를 배제한 꽉 찬 구성,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가득찬 신비감, 판화의 대중적 성공과 전파도구로서의 보급과 발전등을 들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주도 세력국으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를 들 수 있다.
독일
독일은 뒤러(1471-1528)로부터 말할 수 있겠다.
그 선구적 역할은 숀가우어, 미하엘 파허에 연원하나 이탈리아 여행과 독일의 고딕 성향이 이상적으로 만나 이상적인 북구양식의 인체효현과 합리적 공간표현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뒤러가 단연 독일의 북구 르네상스인이랄 수 있겠다.
<자화상>, 1500년작, 에서 정면을 향한 엄숙한 자세나 그리스도를 닮은 이상화된 용모는 통상적인 자화상의 영역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는 권위와 예술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사명감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판화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목판화 기법에 이탈리아 동판기술을 도입하여 섬세하고 꼼꼼한 선묘가 돋보이는 명확한 표현을 한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까지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주요관심을 가졌던 것은 과학적인 원근법과 아름다운 인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해부학들이었다.
또, <멜랑꼴리아>, <네기질>등에서 보이는 함축적인 상징성은 북방 르네상스의 기질을 보이며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외에서 크라나하, 알트도르퍼, 그위네발트 등이 손꼽히는 독일 르네상스 예술가이다. "이겐하임 제단화", 그뤼네발트, 당시의 최대의 판화가로서 목판화와 동판화를 통해 16세기 미술에 광범위한 영향 끼침. 그의 작품 <수태고지>, <성모자를 위한 천사의 합주>, <부활>등은 모두 고통과 비탄에 빠져있는 인물들을 묘사하였고,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 중세적인 <그리스도의 책형>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동감으로 차있고, 원근법에 대한 지식이 적용되어 있어 르네상스적인 성향이 보인다.
"아담과 이브" 고딕미술의 세밀한 자연의 모방에 대한 관심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하여 우아한 신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지에서 남유럽의 이상을 북유럽에 이식시키려 하였다.
"병사와 죽음과 악마", 이탈리아 미술이 부여했던 조각처럼 균형잡힌 형태와 미적인 인물(기사)와 성도를 향해 신앙의 길을 후기고딕적 묘사, 꿋꿋이 나아가는 미덕을 함축하는 상징이 결합되어 독일 특유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뤼네 발트(Matthis Grunnewald)
세익스피어 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인 그뤼네발트는 후기 고딕양식의 원근법을 구사하여 완강하고 단단한 인물상을 그려냈다. 또한 그는 중세 미술의 목적인 설교를 위한 그림을 지향하는 데, 그런 그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걸작 <아이젠 하임 제단화>는 대단히 중세적이면서 초인적인 스타일로 표현된 "그리스도인의 책형"과 그 패널 안쪽의 , 생명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율동감의 "수태고지","합주하는 천사","성모자","부활"로 구성된다.
"그리스도의 책형"을 보면 인물상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데, 이는 그뤼네발트가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되어 온 근대 미술의 법칙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에 의도적으로 되돌아 간 것이 분명하다.
뒤러 (Albrecht Durer : 1471~1528)
25세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러는 이탈리아의 회화양식 뿐 아니라 미술가의 개념, 지위까지도 북부에 전하고자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그림은 소용돌이 치는 필세와 몸부림이 가득찬 환상적인 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판화 속 인물들은 만테냐의 판화에서 배운 것이고, 자화상등의 얼굴도 완벽한 균형의 이론에 의해서 구성했다.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에도 관심을 쏟은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체의 배율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려 인체를 왜곡하기도 하였다. 뒤러는 어떤 예술가보다 끈기있고 충실하게 자연을 묘사하였는 데, 이는 성경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틴 루터의 신봉자가 되어 새롭고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예술을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종교계 지도자에게로부터는 우상숭배의 위험 등의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뒤러의 <네사도>는 독일 회화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 1467~1543)
한스 홀바인은 영국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는 데, 그는 북부 유럽의 세부표현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성과 견실성을 교묘하게 조화시킨 초상화를 그렸다. <헨리8세>는 의상이나 보석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인물의 성격까지도 잘 드러나 있다.
한스 홀바인 2세의 <헨리 8세의 초상>, 1536년
나무 위에 유채, 28 x 19 cm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Albrecht Altdorfer : 1480~1538)
그는 산속을 헤매며 자연을 연구하였으며 그가 남긴 수채화와 동판화, 유화 몇 점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인물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작가가 느끼는 풍경만이 그려져 있다.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르네상스는 그 정신을 그대로 이었다고 말하거나 대표적인 작가를 내세우기가 모호하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에 이르는 네덜란드 풍경화, 플아드르 회화가 탄생하는데 전조를 마련한다. 즉 1500-1600년대에 이르러 풍속화, 정물화등이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15세기의 플랑드르 회화인 얀 반 아이크 형제, 플레말레의 화가에서 비롯하였으며 세속적인 풍경속에 품은 상징주의적인 종교화는 브뤼겔에 이르러 풍속화로서 자리잡고 우화, 속담을 담은 내용의 풍자등에서는 강한 사회성도 엿볼 수 있다.
농민생활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인문주의자로 서 실제 풍경을 스케치하고 이용하는 사생적인 면에서는 <사냥꾼들의 귀환>에서 전형적인 풍경의 경치를 볼 수 있다. <농부의 결혼식>에서는 소박하고 거칠은 농민들의 모습을 최소한의 모델링으로 간결한 색처리로 명료하게 하고 있다. 구도에 있어서도 철저히 계획된 일관 있는 연출을 하고 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에서는 교훈적인 내용의 성경구를 인용하여 여러 가지 풍자를 담고 있다.
전체적인 인물은 보슈의 영향을 받고 풍경이 주가 되는 과감한 공간구성의 풍경화에서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민들의 취향에 호응하는 일상생활을 묘사한 풍속화를 비롯하여 세속적인 모든 테마, 즉, 풍경화, 정물화가 1500년대에서 1600년대 사이에 그 윤곽을 드러낸다.
프랑스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왕실주도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특히 1494년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한 샤를르 8세 는 새로운 성을 건축하는데 이태리 양식을 활용하고 있다.
조각에 있어서는 체리니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한편 퐁텐블로파라는 일련의 작가 미상의 예술가들이 이태리 마니에리즘을 수용하여 궁정양식의 화려한 미술을 낳았고 바로크 시대의 회화에 곧바로 연결된다.
그 내용은 고대 신화와 우의를 다루며 관능적이고 기교적인 나부나 화려한 귀족들의 모습을그렸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궁정양식의 화려한 미술이 발달하였으며 이는 바로크 시대의 회화에 곧바로 연결된다.
마니에리즘 미술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경향들을 이르는데 흔히 평가절하되어 온 경향이기도 하다.
즉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형식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전대의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했다고 간주되어 창조성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 그 기교적인 면에서 오는 차가움과 건조함이 개인의 주관적 성향의 극대화 결과 전성기 르네상스와 다른 경향을 의도하고 자연과 고대형식의 주관적 이상화를 지닌 내적 통찰력 이 재평가 받고 있다.
전반적인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신비감,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에서 시대정신의 한 면의 표출로 보기도 한다.
특히 파르미지아노(1503-1540), 틴토렛토(1518-1594), 코렛지오(1489-1534), 엘 그렛코등이 대표적인 매너리즘 작가로 꼽히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후기작을 이 경향의 일부에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으나 매너리즘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고나점에서 자연미(이상미)가 아닌 세련미와 예술적 기교, 신비한 관념들을 추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양식적 특징으로는 콘트랍포스터의 극단적인 바른 포즈와 인체의 장신화, 차갑고 선명한 색조, 표면처리의 매끈함, 단축법과 원근법의 과장, 비논리적인 공간배치이다. 파르미지아노의 <목이 긴 성모>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의 인물묘사에서 나타나는 과장된 인체 비례, 틴토레토의 <최후의 심판, 만찬>은 그 이전의 <최후의 심판>과 비교하면 단번에 확인되는데 강한 불빛의 명암대비, 동세가 격한 인물들의 움직임고 불안정한 사선구도 등이 마이에리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엘 그레코와 코렛지오는 종교화를 그렸다. 특히 엘 그레코는 톤이 밝고 대담한 붓질과 신비스러운 종교화를 이루고, 반면 코렛지오는 스퓨마토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인체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그는 신화를 다른 내용에서도 환성적인 스퓨마토(공기원근법)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