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미켈란젤로..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ment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이탈리아의 조각가, 건축가, 화가, 시인
세상에는 많고 많은 그림들이 있다. 재능을 가진 수많은 화가들이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 인구에 회자되고 하지만, 그런 산고의 고통과도 같은 작가의 그림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이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는 것이 있다.
바로 미케란젤로의 벽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아닐까 한다.
종교를 떠나 그의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열정과 천재성에 찬사를 감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The Last Judgment (최후의 심판)
1534~1541년. Fresco. 13.7×12.2cm
The Sistine Chapel. Roma
이 거대하고 짜임새 있는 그림 앞에서는 압도되는 느낌 외에는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종교가 없는 나에게 마저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그림이었다.
Interior of The Sistine Chapel
1533년 중순, 당시의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위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러나 1534년 교황의 사망으로 이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다가, 일명 '속치마 추기경'인 알렉산드로가 교황 바오로 3세로 취임 후 다시 이 그림을 의뢰함으로써 작업이 다시 재개되었다.
그리하여 1541년 가을, 면적 200m2의 벽면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모습을 한 총 391명의 인물상이 드러났다.
공식적인 낙성식이 거행된 1541년 만성절.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었다.
1512년 이곳의 천장 프레스코를 완성하고 서른 해 남짓. 예순 여섯의 늙은 예술가에게도 감회가 밀려왔다.
베일이 벗겨지고 천일 하에 모습을 들어 낸 이 그림을 보고 경악과 찬사가 어울린 놀람이 로마를 가득 채웠다.
미켈란젤로는 이날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최후의 심판>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직자와 교황청 관료들,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모두 한편이 되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유는? 한 마디로 "이단"이라는 것이다. 왜?
성자들 뒤통수에 후광이 없고 천사가 날개가 없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예수 얼굴을 수염 없는 애송이로 그려놓았으니 교회의 권위를 어디서 찾느냐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자와 성녀들을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빨간 알몸으로 벗겨놓은 게 탈이었다.
의전관 체세나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음탕한 그림을 교황 예배소에 버젓이 그려두었으니 자칫 목욕탕이나 술집에 온 줄 착각하겠다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심지어 십자가를 모신 제단 바로 위에 악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걸 보고 이건 예배소에 모인 사람들더러 곧장 지옥불로 직행하라는 이야기라고 수군댔다.
더군다나 명부의 뱃사공 카론이 베드로의 고깃배에 타고 노를 휘두르는 판이니.. 배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오른쪽 윗부분)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두둔하다가 `이처럼 저질스럽고 음란한 장소에서 어떻게 기도와 찬양이 나오느냐'고 막말을 듣기도 했다.
뒤이어 성좌에 오른 네 명의 교황들은 제단 프레스코에 대해서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전면 철거냐, 부분 개작이냐를 두고 안팎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오른쪽 중간/아래 부분)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반향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그 양반이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고집만큼 타인이 작품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하는 것 자체를 용납치 않는 철저한 프로였다.
그 타인이 교황이든, 황제든 누구든 간에..
몇몇 교황이 그 동안 미켈란젤로의 눈치를 보며 옹호하다가도, 여론에 밀려 은근슬쩍 수정을 권유하다기다 했지만,,씨알이나 먹힐 일인가..
화가의 고집은 나이가 들수록 더해가기만 한다. 이런 일도 있다.
여론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바오로 4세는 `그림을 바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시종장의 전언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교황 성하께 먼저 세상을 바로 잡으시라고 전하게. 그러면 그까짓 그림 따위야 저절로 바로 잡힐 테니.”
그러나 뒤를 이은 피우스 4세에게는 그런 발뺌이 통하지 않았다. 교회의 권위는 그림 수정을 결의한다.
1564년 1월 21일 트렌티노 공의회의 결정은 미켈란젤로가 여든 아홉 나이로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에 내려졌다.
(오른쪽 맨 아래 부분)
수정 작업을 그의 제자 볼테라가 맡은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스승의 뜻을 크게 다치지 않고 최소한의 가리개만 씌우는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다만 엉덩이를 흔들어댄다고 비난을 모았던 성녀 카테리나는 본격적으로 손보았다.
성자들의 부끄러운 곳을 덮는 가리개는 회벽을 파내고 젖은 석회를 새로 바른 뒤에 물감을 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볼테라는 이후 `브라게토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가리개 귀신'이란 뜻이다.
(왼쪽 맨위 부분)
(왼쪽 중앙 부분)
그의 작품에 토를 달거나 그의 기분을 언짢게 한 자는 상대가 누구였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대상 중 한명이 비아지노 다 체세나(iagimo da Cesema)라는 추기경인데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작업 현장을 방문한 추기경이 벌거벗은 인물들에 대해 "시스틴 채플 천장화의 나체들은 거룩한 장소에 적절하지 못하며 홍등가에나 어울릴 것"이라고 비평해 미켈란젤로의 분노를 샀다.
미켈란젤로는 그를 단테의 지옥편에 나오는 지옥의 심판자 미노스로 분장시키고 뱀에 몸이 칭칭 감긴 채 성기까기 물리게 만들어 버렸다...(위 그림)
살가죽에 미켈란젤로 자화상
성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순교를 당했다. 십자가에 매달거나, 돌로 쳐죽이거나, 자루에 넣고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단검으로 발라낸 성자의 껍질에다 자신의 자화상을 새겼다. 이로써 육신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 예술의 고귀한 유령이 깃들게 되었다.
최후의 심판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미켈란젤로는 제 얼굴을 그리면서 두 눈을 후벼팠다. 실명의 달콤한 유혹이 그의 붓을 이끌었다.
또 그의 표정은 젖은 걸레처럼 일그러졌다(위그림). 무슨 심사였을까? 성 바르톨로메오 말고도 살껍질을 벗겨서 죽은 인물이 또 있었다.
마르시아스. 반인반수의 괴물이었으나 아폴론의 키타라를 능가하는 피리 솜씨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르네상스 이후 예술의 순교자로 추앙 받았던 신화 속의 존재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도 예술의 순교를 꿈꾸었을까?
(카론 부분)
(왼쪽 하단 부분)
시인 아레티노는 탁월한 미술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에게는 간지러운 아부를 서슴지 않았으나 그와 적대관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에게는 주특기인 독설을 쏟아냈다.
<최후의 심판>을 보고 나서 1545년 일흔 먹은 미켈란젤로에게 쓴 편지다.
“천사와 성인들은 지극히 고귀한 소재입니다. 그런데 당신 그림을 보면 지상의 진지함이나 천상의 엄숙함을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군요.
알만한 예술가라면 디아나에게 옷을 챙겨주는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베누스도 손으로 가릴 곳을 가리게 하지 않나요?
그런데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그대가 예술을 구실 삼아 신앙을 깔보는군요.
순교자와 성스런 처녀들이 창피한 줄 모르고 넋빠진 자세로 저마다 성기를 드러내고 있으니,
설령 유곽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쳐도 도저히 눈뜨고 못 볼 희한한 볼거리가 되겠군요.
이 그림은 교황의 성스러운 예배소보다 고급 목욕탕에 갖다 두면 어울리겠습니다.”
참고 글 : 노성두의 고전미술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