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인상주의를 예고한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Rodrguez de Silva Velazquez, 1599.06.06~1660.08.06 )
벨라스케스는 17세기 스페인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서
전 세계적으로도 위대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6세기 베테치아 회화를 연구하면서 자연주의 양식으로
인물과 정물작품들의 특성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시로서는 독특하게도 시각적 인상을 강조한 걸작들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로 인해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의 주요선구자가 되었다.
The Waterseller of Seville, 1619
런던 웰링턴 박물관
그가 위 그림을 그린 것은 20세도되기 전이었는데,
이 그림에 나타난 구도·색채·명암의 조절과
인물 및 그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의 자연스로움,
사실적인 정물 묘사는 이미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붓놀림을 보여주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양식에서 볼 수 있는 단단한 모델링과
뚜렷한 명암 대비는 이탈리아의 화가인 카라바조(1573~1610)가
혁신한 것들 중 하나인 테너브리즘이라는 극적인 명암법과 매우 비슷하다.
Old Woman Frying Eggs, 1618
벨라스케스의 초기 주제들은 주로 종교적이거나 풍속적(일상생활의 장면들)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회화에서 '보데곤'(bodegón:17세기 스페인의 정물화 양식,
또는 보테고네스 Bodegones)이라는 새로운 구성 양식을 널리 퍼뜨렸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정물이 있는 부엌 장면을 그린 위 작품이다.
그의 극도로 자유로운 양식은 후일 수많은 후배 화가들에게
17세기 위대한 천재로서 영감을 주게 된다.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618
The Feast of Bacchus. 1629
당시 신화를 주제로 다룬 화가들이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경건한 분위기를 추구했던 것과 달리,
벨라스케스는 직설적이고 단순하며
약간은 딱딱해 보이는 사실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초기작으로 작품이 완성된 시기는 그가 1628년 마드리드에서
루벤스를 만나 함께 이태리를 여행하던 때쯤이다.
어쨋든 이 작품은 주신인 바쿠스를 신적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하층민에 속한 인물처럼 묘사하고 있다.
쾌활한 주정뱅이들의 모습이 카라바조의 작품을 연상시키며
일상의 인물들이 등장한 것 같은 장면은 플랑드르의 장르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에서 태어나
화가인 프란시스코 에레라(1576경~1656)에게 미술수업을 받았다.
1611년 그는 공식적으로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도제가 되었으며
1618년에 그의 딸과 혼인했다. 파체코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5년 동안 그에게 교육과 수련을 시킨 뒤
그의 미덕과 성실성, 훌륭한 자질에 감동받아
그의 기질과 뛰어난 재능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를 나의 딸과 혼인시켰다."
Don Luis de Gongora y Argote
1622, 캔버스에 유채
MOA Museum of Art, Japan
세상에 많은 종류의 초상화가 있지만
이 그림처럼 강한 인상을 남기는 초상화는 드물듯 하다.
벨라스케스는1622년 마드리드 여행을 하던 중
파첸코의 부탁으로 펠리페 3세의 전속 신부이자 시인이었던 이 사람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을 본 필리페 4세(16살 나이로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됨)는
그를 불러들여서 궁중화가로 임명하게 된다.
Philip IV in Brown and Silver
1631-32. Oil on canvas, 200 x 113 cm
National Gallery, London
1623년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평생 왕의 예우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궁정의 요직까지 맡았다.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가 아니면
절대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그가 그린 왕족, 신하 그리고 광대들의 초상화는
그를 미술 역사상 최고의 초상화가로 만들어 준다.
Queen Isabel, Standing
1631-32. Oil on canvas, 207 x 119 cm
Private collection
1628년의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베네치아파의 영향으로,
밝고 선명한 색조와 경묘한 필치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왕족·신하 그리고 궁정의 어릿광대·난쟁이 등을 그린 다수의 초상화는,
그를 미술사상 초상화가의 대가로 만들었다.
Philip III on Horseback
1634-35. Oil on canvas, 305 x 320 cm
Museo del Prado, Madrid
Philip IV on Horseback
1634-35. Oil on canvas, 304 x 317 cm
Museo del Prado, Madrid
The Surrender of Breda (Las Lanzas)
1634-35. Oil on canvas, 307 x 367 cm
Museo del Prado, Madrid
<브레다의 항복 The Surrender of Breda〉은 부엔레티로 궁전의 알현실을 장식하기 위해
일련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여 그려진 유명한 그림으로,
역사적인 주제를 다룬 그의 그림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의 정교한 구도는 루벤스의 회화 양식에 기초를 두었지만,
그는 세부의 정확한 정밀 묘사와 주요 인물들의 살아 있는 듯한
묘사를 통해 생생한 실재감을 전달하고 있다.
그 후 두 번째 이탈리아에 체류(1649∼1651)하는 동안
장기간 연찬을 거듭하여 기법상의 혁신이 완성되었다.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이 시기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다시 초상화가로서 중요한 직무를 맡았으며,
때때로 왕의 방들을 신화적인 주제의 그림들로 장식하도록 의뢰받았다.
그 이후 그의 종교적인 작품들은 대단히 훌륭하고 독특한 성향을 띠고 있다.
Portrait of Innocent X
1650. Oil on canvas, 141 x 119 cm
Galleria Doria-Pamphilj, Rome
벨라스케스는 1640년대 후반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과
단 한 점뿐인 여성누드 <거울 앞에 선 비너스>를 그렸다.
Venus at Her Mirror (The Rokeby Venus)
1644~48년경, 캔버스에 유채, 122 * 177cm
모나리자 만큼 유명한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벨라스케스는
로마에 체류하고 있던 중 당시 20살이었던 정부 플라미니아 트리바에게
실제로 관능적인 포즈를 요구했다.
플라미니아 트리바는 로마의 상류층 여인으로
벨라스케스의 아이를 낳기도 했던 여인이다.
이 작품은 관능성으로 인해 1914년 한 여권 운동가에 의해 난도질 당하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그림은 처음에
에스파냐 국무대신의 아들인' 카르피오'를 위해 그려졌다고 한다.
운 좋게도 이 비너스는 벨라스케스의 누드 그림 가운데
유일하게 불타버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철저한 카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에서 이교도의 신을
그것도 나체로 그린다는 것은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킬만한 사건이었다.
당시 나체화를 그리는 것만으로도 화가를 1년간 유배형에 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왕이 이 그림을 너무나 사랑했던 탓인지 어쨌든 이 비너스는
그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을 무사히 피해
오늘날 우리 눈앞에 아름다운 자신의 뒷모습을 뽐내고 있다.
Infanta María Teresa
1651-52
Oil on canvas, 34,3 x 40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Menippus
1639-41. Oil on canvas, 179 x 94 cm
Museo del Prado, Madrid
벨라스케스가 초상화의 대가로 칭송받는 이유는
그가 인물의 모습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내면의 심리상태, 성격 등을
그림 속에 고스란히 반영했다는 데에 있다.
Mars, God of War
1640. Oil on canvas, 179 x 95 cm
Museo del Prado, Madrid
Arachne
1644-48. Oil on canvas, 64 x 58 cm
Meadows Museum, Dallas
The Needlewoman
1640. Oil on canvas, 74 x 60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Juan de Pareja 1650
후안드 빠레야라는 이 그림속의 남자는 벨라스케스의 노예였다.
그는 또한 재능 있는 화가였고 곧 벨라스케스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
둘은 신분과 나이와 지위를 뛰어넘어 우정을 쌓았고
결국 후안은 노예에서 해방,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벨라스케스는 인상주의를 예고한 화가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네의 작품이 연상된다.
Las Meninas or The Family of Philip IV
1656-57. Oil on canvas, 318 x 276 cm
Museo del Prado, Madrid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2층 중앙홀에 걸려있는
금세기 최고의 명화로 꼽히는 '벨라스케스'의 '라스메니나스'는
'필리페 4세'의 개인 사무실에 걸려 있을 만큼 그가 아꼈던 그림이다.
배경은 죽은 왕자 발타사 카로스의 침실이었던 마드리드 알카자르 궁전이다.
그림의 중앙에는 마르가리타 공주가 있다.
그녀 옆에는 하녀가 쟁반에 마실 것을 들고 무릎을 꿇고 있는데
공주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밖을 바라본다.
왼쪽에는 그림을 그리는 벨라스케스 자신의 모습이 있고
오른쪽에는 두 난쟁이와 조용히 엎드린 커다란 개가 있다.
뒤쪽의 거울에는 그녀의 부모인 펠리페 4세와 마리아가 비친다.
또 벽 밑의 창문에는 귀족인 듯한 한 남자의 모습도 보인다.
Queen Doña Mariana of Austria
1652-53. Oil on canvas, 231 x 131 cm
Museo del Prado, Madrid
1651년 펠리페 4세는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아와 재혼하고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서 펠리페 4세의 젊은 왕비와 그 자녀들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 1656
벨라스케스의 마지막 작품은 1660년 봄에 왕과 왕실을 따라 프랑스 국경으로 가서,
루이 14세와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혼인식을
거행할 스페인풍의 파빌리언을 장식한 것이었다.
그는 마드리드에 돌아온 뒤 곧 병에 걸려 1660년 8월 6일에 죽었다.
벨라스케스는 학생이나 직계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서 19세기초 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외국(주로 영국)의 수집가들은
그가 세비야에서 그린 초기 그림들의 대부분을 입수했다.
그가 후기에 그린 공식적인 작품들의 대부분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Self-Portrait
1640. Oil on canvas, 46 x 38 cm
Museo de Bellas Artes, Valencia
디에고 로드리게스 벨라스케스는 독특하게 시각적 인상을 강조하면서
화려하고 다양한 붓놀림과 미묘한 색의 조화를 이용하여
형태, 질감, 공간, 빛, 분위기의 효과를 내는 데 성공한 화가이다.
그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힘과 직관, 그리고 뛰어난 기법은
마네와 들라크루아, 피카소와 베이컨 등 후대 화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스페인의 화폐 50 pesetas 속의 벨라스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