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강지연의 그림읽기] <몸단장하는 젊은 여인><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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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연의 그림읽기]
거울 든 여인의 모습은 어떤 의미일까?
아름다운 여인은 언제나 화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최고의 모델이 돼왔다. 여인이 가진 매력은 외모뿐만 아니라 여성성이 대표하는 여러 속성에 기인한다. 아름다움과 부드러움, 상냥함과 현명함, 정숙함과 우아함, 때로는 관능미와 치명적인 팜므 파탈의 매력까지. 르누아르는 “신이 여성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내가 화가가 됐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인들이 가진 모델로서의 또 다른 장점이 있다면, 남성에 비해 소지품이 많다는 것이다. 여성의 장신구나 의상, 혹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자잘한 도구들은 그림에 숨겨진 의미를 부여하기에 좋은 장치가 된다. 나 또한 그림을 보며 여성들의 소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림 속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내는 재미 때문이었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몸단장하는 젊은 여인>(Young woman at her toilet), 1515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창가에 앉은 여인이 누드로 몸단장을 하고 있다. 여인이 앉아있는 벤치에 깔린 카펫이나 머리에 두르고 있는 천이 모두 고급스러운 것으로 보아 그녀는 어느 귀족 집안의 딸인 듯하다.
여인의 흰 살결 위에 드리워진 붉은빛 천은 그녀의 가슴과 음부를 살짝 가려주어 고전 회화에 흔히 사용된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정숙한 비너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여인의 오른손에는 작은 손거울이 들려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무척 진지해 보인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약간 풍만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몸매와 고운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 윤기 나는 머리결 등 그녀는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도취돼 있는 듯 보이기도 하다. 그녀의 뒤에는 또 다른 거울이 걸려있어 뒷모습까지 꼼꼼히 관찰하며 손을 들어 매만지고 단장할 수 있다.
거울은 흔히 여인과 함께 사용되는 모티브로 ‘속세의 허영’을 상징한다. 젊은 여인은 거울 속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나의 눈부신 젊음, 청춘의 아름다움이 영원히 지속됐으면 하는 바람.
지금 이 순간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며 집안의 부, 명예와 함께 그녀의 고귀한 생활도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법한 그녀.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여인의 미모는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하리라. 그녀는 젊은 날의 모습을 회상하며 영원할 것 같던 미모도 한때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화가인 조반니 벨리니는 유명한 화가였던 아버지 야고보 벨리니에게서 태어났으며 역시 화가인 젠틸레 벨리니의 동생이자 안드레아 만테냐의 매부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가 집안에서 자란 그의 작품은 따뜻하고 화사한 색채가 특징으로 당시 베네치아 화파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정확하고 사실적인 정물 묘사는 매부인 만테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 그림 속에서도 창가에 놓인 유리병이나 카펫 등의 묘사가 뛰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림 속 여인의 자세는 전체적 구도인 수평과 수직을 완성하며 창문과 함께 화면에 전체적인 안정감을 부여한다. 창문 너머로는 베네치아의 전형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어 그림에 깊이를 더해준다.
그는 주로 종교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 그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몸단장하는 젊은 여인>은 그가 죽기 1년 전인 85세에 그린 작품으로 유일무이한 누드화이기도 하다. 여인이 앉아있는 벤치 위에는 종이쪽지가 하나 놓여있는데 자세히 보면 벨리니의 서명이 담겨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속세의 허영>(The vanity of the world), 1515년, 뮌헨 알테피나코텍 소장
다른 그림을 하나 더 살펴보자. 작품명 자체가 <속세의 허영>이다. 화가인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커다란 거울을 들고 있는 여인을 통해 그가 그리고자 하는 주제를 정확하게 나타냈다. 푸른 옷을 입은 금발의 젊은 여인이 손에 거울을 든 채 측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가 보여주고자 하는 거울 속 풍경에는 온갖 진귀한 보석과 반짝이는 금화들이 있다. 이는 아마도 현재 젊은 여인이 가지고 있는 부귀영화를 표현한 것이리라. 여인의 표정은 자신감이 넘치며 약간 도도해보이기도 하다.
싱그러운 젊음과 넘치는 재물을 함께 가지고 있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자신감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거울 속 금은보화 뒤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그 어둠 속에는 한 노파가 꺼져가는 촛불을 들고 서있다.
꺼져가는 촛불은 소멸돼 가는 모든 것들을 나타낸다. 그녀의 젊음, 아름다움,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덧없이 사라져가는 촛불같이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티치아노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거울 속 풍경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거울은 원래 반영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면서 티치아노는 그가 나타내고자 했던 주제인 ‘허영’을 좀 더 우의(寓意)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거울 속 반영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그림을 수정했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초기작으로 그가 앞서 소개한 벨리니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벨리니의 작품과 티치아노의 이 작품이 모두 1515년에 제작된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 같다. 티치아노는 스승인 벨리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의 작품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거울은 예나 지금이나 여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도구다. 여인들은 젊고 아름다운 시기일수록 거울을 자주 보게 된다. 세월이 지나며 거울 보는 횟수는 점차 줄어들게 마련이다. 여인들의 욕망을 모두 다 허영으로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미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타인에게 보이는 아름다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는 삶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강지연의 그림읽기]
서로 대비돼 더욱 선명해지는 여인들의 매력
흔히 말하는 ‘타입(Type)’에 대해서 나는 어떤 타입의 사람인가, 스스로 생각한 적이 있는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워낙 복잡 미묘해서 한 가지 틀로 나를 규명한다는 건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받는 느낌이라는 건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싫든 좋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의 타입이란 건 대개 비슷한 경우가 많다. 보통 이상형을 이야기할 때 좋아하는 타입을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전혀 상반된 두 사람을 같이 보게 된다면 어떨까. 마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릿 오하라와 멜라니 윌크스를 함께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럴 때는 함께 있는 두 사람의 반대되는 매력이 합쳐져 극과 극으로 더 강하게 다가오곤 하는데 그림에서도 이와 같은 구도가 종종 사용됐다.
화가들은 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여성상’을 한 화폭에 담아내 최대의 시각적 효과를 얻고자 했다. 성녀와 요부의 이미지는 그중 가장 빈번하게 함께 사용돼 왔다.
앙리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
<독서>(The Reading), 1870년, 포르투갈 리스본 굴벵키앙 미술관 소장
그림은 실내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의 초상화다. 왼쪽 여인은 독서에 열중이다. 그녀의 시선은 책에 고정돼 있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꼼꼼하게 글을 읽고 있다. 아래로 내리깐 눈, 모노톤의 옷, 목 주변에 달린 브로치, 흐트러짐 없는 머리 모양 등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녀를 단정하고 현숙한 여인이라 생각하게 한다.
여인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자신이 몰두해 있는 세계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고 스스로를 단단히 동여매고 있는 듯하다. 갑자기 그녀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여인은 왼쪽 여인이 읽고 있는 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며 화가 혹은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파란 리본을 머리에 달고 있는 그녀. 선명한 빨간색 숄을 무릎 위에 내려놓은 채 여인의 손은 그 위에 모아져 있으나 한쪽은 장갑을 끼고 있고 다른 한쪽은 장갑을 벗고 있다.
마치 그녀가 두 세계에 양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현숙한 여인 옆에 얌전히 앉아 경청하고 있지만 실은 전혀 듣지 않고 그 밖의 세상으로 빠져나오려 한다. 그녀의 또렷한 이목구비와 직접적인 시선이 강인하면서도 야생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화가인 헨리 팡탱 라투르는 독서하는 여인을 즐겨 그렸다. 같은 주제와 제목, 그리고 구도를 여러 번 차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독서 시리즈들 중 이 그림은 가장 강렬한 대비를 보여준다. 그는 평소에 모델로 가족들을 즐겨 그렸는데 왼쪽의 현숙한 여인은 6년 뒤 화가의 아내가 될 빅토리아 뒤브르다.
그녀는 팡탱 라투르의 동료 화가였으며 당시 꽤 이름 있는 여류 화가였다. 오른쪽의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여인은 빅토리아의 동생인 샤를로트다. 화가의 처제가 되는 셈이다. 샤를로트는 대학교수였으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 두 사람은 이후 팡탱 라투르의 그림에 자주 등장했다. 같은 제목으로 두 사람을 그린 또 다른 그림은 프랑스 리옹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자매간의 대비는 서로의 심리적 거리로 나타나 그림의 분위기를 묘한 긴장감으로 이끌어 준다.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와 사실적인 묘사는 그가 추구하던 스타일의 화풍이기도 하다.
구스타브 보에스틴(Gustave van de Woestyne),
<두 여인>(The Two Springs), 1910년, 벨기에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소장
붉은색과 검은색의 강렬한 대비. 처음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Antwerp Koninklijk Museum)에서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두 여인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도시의 여인과 시골의 여인. 그들은 각자 그곳에서의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른편의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시골 여인이다. 그녀의 단정한 머리 모양과 단순한 옷, 그리고 뒤쪽으로 펼쳐진 전원 풍경은 여인이 사는 곳을 나타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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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수한 겉모습과 달리 그녀에게도 숨겨진 욕망이 있다는 것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꼭꼭 잠긴 단추 사이로 아주 살짝 드러난 가슴, 모양은 단순하지만 강렬한 붉은색의 옷이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삐져나온 정숙한 여인의 일탈하고픈 욕구를 말해주는 듯하다.
시골 여인의 등 뒤에 서있는 여자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붉은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와 베일을 쓰고 있다. 다소 경박해 보이는 그녀는 도시 여인이다.
등을 맞대고 있지만 고개를 살짝 돌려 이쪽을 넌지시 보고 있다.
도시 여인의 얼굴은 화려한 장식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보이는 건 붉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뿐이다. 마치 오늘날 도시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익명성처럼 그녀가 누구인지, 혹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흘낏 등 뒤를 돌아보는 모습에서 늘 다른 이들을 훔쳐보며 살아가는 관음적인 면도 엿보인다.
벨기에 화가인 구스타브 보에스틴은 이러한 선명한 대비 구도를 통해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형상화하는 상징주의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아버지는 작곡가였으며 동생은 시인이었던 그는 플랑드르의 옛 화가들, 특히 피터 브뤼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전원적인 풍경에 꿈이나 수수께끼 등이 혼합된 상징적인 그림들을 그리곤 했다. 주로 종교화나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 그림은 그의 전형적인 스타일이기도 하다.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 <마리아를 책망하는 마르다>(Martha reproving Mary), 1620년,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이탈리아의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강조하는 카라바조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그린 이 그림 역시 빛과 어두움이 드리워진 두 여인을 극명한 대비로 표현하고 있다. 주제는 신약성경의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였다. 이들의 집에 예수가 손님으로 오게 된다. 언니 마리아는 바빠 죽을 지경이다. 다른 손님도 아니고 예수가 오신다니 음식도 장만해야겠고 집 안도 깨끗이 치워야겠고.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도와줄 생각은커녕 예수의 발치에 앉아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마리아가 빈둥댄다고 생각한 마르다는 화가 나서 마리아를 야단친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는 오히려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며 마르다가 신경 쓰고 준비한 많은 일보다 마리아가 선택한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가 나타난 이야기다.
그림 속 왼편의 여인은 언니 마르다로 푸른 옷을 입고 숄과 베일을 두른 정숙한 여인이다. 그녀의 오른편에 앉아 거울을 들고 있는 여인은 동생 마리아다. 꽁꽁 싸맨 마르다의 옷차림에 비해 마리아는 가슴이 살짝 드러난 옷을 입고 머리는 풀어 헤쳤다.
그녀가 들고 있는 거울은 흔히 그림에서 ‘속세의 허영’을 상징하곤 하는데 이는 마리아의 옷차림과 더불어 그녀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이 그림 속 마리아와 마르다는 단지 성경 속 이야기처럼 손님 접대를 두고 다투는 자매가 아니라 당시의 기독교적 여성관을 상징한다.
실제로 이 그림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그림 속 마르다는 근면하고 정숙한 성녀의 이미지로, 마리아는 방탕하고 게으른 요부의 이미지로 표현됐다. 언니 마르다는 마리아가 들고 있는 거울을 가리키며 동생의 방탕한 생활과 허영심을 엄숙히 꾸짖고 있다.
그런데 그림 속 마리아의 표정을 보고 순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거울 속에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마르다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을까. 마리아는 오히려 언니인 마르다의 위선적인 면을 거울로 비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리아의 얼굴에 반성과 참회의 표정이 아닌 “마르다, 네 자신을 좀 봐” 라는 듯한 시선이 어려 있다고 생각한 건 지나친 비약일까.
강지연 _ 교사. <명화 속 비밀이야기>, <명화 읽어주는 엄마>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