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 (동양 화)

[스크랩] `투전`. 성협(成夾).김득신(金得臣).김준근(金俊根) / 강병관

bizmoll 2013. 7. 3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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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과 투전

 

 

 

 

 

도박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박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확률은 대단히 낮지만 말이다. 최소 투자에 대한 최대 이익이란 원칙만 성립하면, 어떤 것도 도박이 될 수 있다. 하다못해 가위 바위 보로도 수억 원의 재산을 걸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스릴 넘치는 종목은 따로 있는 법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역시 고스톱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에서 조선후기에 가장 유행하던 도박 여섯 가지를 꼽고 있다. 바둑 장기 쌍륙 투전 골패 윷놀이가 그것이다. 이 중 골패와 투전은 도박성이 매우 강하여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다시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투전일 수밖에 없다.

 

숙종 때 장희빈의 당숙인 역관 장현(張炫)이 중국에서 가져 왔던 투전은 금방 조선사회에 퍼졌고, 20세기 초까지 성행했다. 투전의 조선 사람의 일상사가 되었고, 이런 이유로 해서 투전판을 그린 풍속화는 여럿이 남아 있다. 여기서는 성협(成夾)의 「투전판」(그림 1)과 김득신(金得臣)의 「투전판」(그림 2)을 보겠다.

 

그림(1)은 투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판이다. 등잔불 왼쪽에 앉은 사내는 투전 쪽을 들어 내리치고 있다. 요즘 화투판에서 화투를 세게 내려치는 것과 같은 포즈다.

이 사내 아래쪽에 있는 두 사내 중 한 사내는 등만 보이지만, 오른쪽의 사내는 투전을 부챗살처럼 펴서 족보를 따지고 있는 참이다. 표범가죽으로 배자를 해 입은 그 오른쪽의 사내는 등이라도 긁는지 오른손을 뒤집고 있고, 그 위의 사내는 패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좋은 패라서 여유를 부리는 것인지 패를 바닥에 엎어 놓고 등잔에 담뱃불을 댕기고 있다. 그림 맨 왼쪽에는 밤새도록 한 놀음에 지친 사내가 이불에 기대어 선잠을 자고 있다. 요즘의 놀음판과 다를 게 전혀 없다.

 

 

 

 

그림(2)에서도 투전이 한창이다. 망건을 쓴 점잖은 양반들이 돈주머니를 차고 투전 쪽을 부챗살처럼 펼쳐 들고 족보를 맞추는 중이다. 안경을 쓴 사내는 자신이 갖고 있던 투전 쪽 하나를 내밀고 있고, 오른쪽 바깥의 사내는 패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두 손으로 투전 쪽을 뭉쳐 쥐고 있다.

이 사내의 오른쪽에 놓인 요강과 타구, 그리고 위쪽의 술상은 오로지 투전에 몰입하기 위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다.

 

투전은 사회문제가 되었다. 정조 15년(1791) 9월 16일 신기경(愼基慶)이란 사람은 상소를 올려, 잡기(雜技, 도박) 중 투전의 폐해가 가장 커서 위로는 사대부의 자제들로부터 아래로는 항간의 서민들까지 집과 토지를 팔고 재산을 털어 바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투전으로 인하여 끝내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게 되고 도둑의 심보가 자라나게 된다면서, 투전을 금하고, 투전을 판매해 이익을 취하는 자 역시 엄격히 처벌할 것을 건의한다. 당연히 투전에 대한 금령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투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투전은 19세기에도 여전히 유행했다. 김준근(金俊根, 19세기 말)의 「투전」(그림 3)에도 사내 넷이 등불 아래서 투전에 골몰하고 있다. 김준근은 19세기 말 사람이니, 투전은 그때까지 여전히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영웅의 소설 『분례기』를 보면, 똥례의 남편 애꾸눈 도박꾼 영철은 어느 날 노름판에서 엄청나게 큰 돈을 따고는 돌아와 도박에서 영영 손을 씻을 것이라면서, 돈을 똥례에게 맡긴다. 하지만 도박하는 습관이 그렇게 쉽게 고쳐지던가. 마약보다 더 심한 중독이 도박중독이다.

어느 날 심심풀이 판에 끼인 영철은 돈을 잃자 눈이 뒤집혀 집으로 돌아와 붙잡는 똥례를 뿌리치고 돈을 가지고 가서 몽땅 잃고 만다. 도박꾼의 말로다. 부모와 아내, 자식도 말릴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투전보다 더 강력한 도박이 있다. 흔히 투자란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지만, 돈을 크게 불려준다고 선전하는 증권이니 부동산이니 하는 것은 사실상 도박이 아닌가?

작은 도박은 기를 쓰면서 잡아들이지만, 더 큰 도박은 권장하니,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다.

 

 

 

 

 

 

 

 

 

 

 

 

 

 

 

작 가 : 성협
제 작 연 대 : 연대미상
소 장 처 : 국립중앙박물관
재 료ㆍ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20.8×28.3㎝

 

성협이 그린 풍속화첩 중의 <투전>이다. 이 풍속화첩은 당시의 여러 풍속장면을 비교적 세밀한 필선으로 짜임새있게표현하였다. 인물들이 방 안에 둥글게 앉아 노름에 열중하고 있다.

한쪽에는 술상이 있고, 한 사람은 이불에 기댄 채 고 있어 이미 밤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전경에는 촛불과 함께 요강도 있어 이들이 노름에 여념이 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화면 좌측 상단에는 노름의 병폐를 지적한 다음과 같은 제시가 적혀있다.

 

"노름하는 재주가 많기도 하네.
쌍륙이니 골패니 교묘하고 까다롭다.
투전판은 해로움이 가장 심하니
앉은자리 오른편에 그림 그려놓고 교훈으로 삼으리라."

 

/ 문화콘텐츠닷컴

 

 

 

 

그런, 우리말은 없다

개평

 

‘개평’은 ‘상평통보(常平通寶)’와는 무관하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 중에는 ‘투전’이나 ‘골패’를 주제로 한 그림이 적지 않다. 김득신이나 김양기의 ‘투전도’, 성협의 ‘투전’, 김춘근의 ‘골패놀이’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림의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

남정네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투전이나 골패에 몰두하고 있으며, 한두 사람은 피곤한 듯 이불을 베개 삼아 누워 있다. 그리고 옆에는 어김없이 술상이 놓여 있다. 이불까지 갖추어진 것을 보면 밤을 새워가며 도박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술상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면 도박판이 주로 기방(妓房)이나 술집에서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투전이나 골패를 주제로 한 그림이 여럿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조선 후기에 도박이 얼마나 성행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에 유행한 도박은 ‘투전’이었다. ‘땡’이니 ‘장땡’이니 ‘가보’니 하는 투전 용어가 지금 화투 용어로 전용되어 쓰이고 있는데, 이로써도 ‘투전’이 크게 성행하던 도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양반, 상놈 가릴 것 없이 ‘투전’ 노름에 날 새는 줄 몰랐다. 심지어 최상류 계층까지 ‘투전’ 노름을 일삼아 심각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재상, 명사들과 승지 및 옥당 관원들도 이것으로 소일하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소나 돼지 치는 자들의 놀이가 조정에까지 밀려 올라왔으니 역시 한심한 일이다”라 꼬집고 있다.

‘재상(宰相)’은 2품 이상의 벼슬아치이고, ‘승지(承旨)’는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3품의 당상관인데, 이들 고위관료까지 ‘투전’을 일삼았으니 나랏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이 망한 원인 중의 하나가 상층부의 도박 병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하다.

 

투전꾼들이 투전판에 하나둘씩 모여들면 ‘투전’ 노름이 시작된다. 도박에 빠지면 그야말로 밤낮이 없다. 하루 이틀 날을 새다 보면, 시뻘건 눈에 봉두난발(蓬頭亂髮)하여 영락없는 귀신 몰골이다. 더욱이 돈이라도 잃게 되면 제정신이 아니다.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떼이면 고리(高利)로 돈을 빌린다.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땅 문서까지 잡히게 되는데, 이쯤 되면 집안이나 문중이 결딴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무일푼 알거지 신세가 되어 남이 딴 몫에서 조금 얻어 가지는 공것이 ‘개평’이다.

돈을 딴 사람이 순순히 개평을 떼어 주는 경우도 있지만, 억지를 써야 주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개평을 뜯을 수밖에 없다. ‘개평을 뜯다’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개평꾼’들이 많으면 ‘개평’을 뜯어 가기도 어렵다.

 

‘개평꾼’은 돈을 떼인 사람만이 아니다. 도박판을 운영하는 사람, 도박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 심지어 구경꾼도 ‘개평꾼’에 속한다.

특히 노름판에서 자리를 빌려준 집주인에 떼어주는 돈을 ‘불전(-錢) 개평’이라 한다.

그럼, 이 ‘개평’이라는 말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이것이 ‘투전’ 노름과 관련된 노름 용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어원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일설에는 ‘개’를 한자 ‘個(개)’로, ‘평’을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통용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에 쓰인 한자 ‘平(평)’으로 보고, ‘낱개의 돈’ 곧 ‘낱돈(돈머리를 이루지 못한 한 푼 한 푼의 돈)’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개평’이 큰돈이 아닌 얼마 되지 않는 푼돈이라는 점에 토대를 둔 해석이다. 하지만 ‘낱돈’ 설은 의미만을 고려하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것이 ‘個平(개평)’이라는 한자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개평’이 20세기 초의 『조선어사전』(1920) 및 『조선어사전』(1938)에는 ‘가평(놀음판에서 구경꾼에게 주는 돈이나 물건)’으로 나온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두 사전에는 ‘개평꾼’도 ‘가평ㅅ군’과 ‘가평군’으로, ‘개평떼다’도 ‘가평다’와 ‘가평떼다’로 나온다. 이 두 사전에 ‘개평’은 나오지 않는다. 이로 보면 ‘개평’은 ‘가평’에서 변한 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個平(개평)’ 설은 더더욱 인정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가평’의 어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조선말큰사전』(1947)에서는 앞의 두 사전과는 달리 ‘개평’을 표준어로 삼고 ‘가평’을 사투리로 처리하고 있다. 이는 최근의 사전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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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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