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 (동양 화)

[스크랩] 풍속화가 "이서지"님의 봄이 느껴지는 풍경

bizmoll 2011. 4. 3. 18:27

풍속화가 "이서지"의 봄이 느껴지는 풍경

 

 

< 나물 캐는 처녀들 / 43 x 43cm >

 

 

 

< 이슬비 / 43 x 43cm >

 

 

 

< 입춘대길 / 43 x 43cm >

 

 

 

< 감자깎기 / 48 x 37cm >

 

 

 

< 적선 / 48 x 37cm >

 

 

 

< 시주 / 48 x 37cm >

 

 

 

< 버들피리 / 43 x 43cm >

 

 

 

< 제비집 / 43 x 43cm >

 

 

 

< 물레방아간 / 43 x 43cm >

 

 

 

< 각설이 / 48 x 37cm >

 

 


           



 





 과천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선바위 미술관에서는 현재 한 노화가의 미학적 실험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바로 한국 풍속화의 대표 화가 중 한 사람인 이서지의 <새로운 그림 세계展>(4월 30일까지)이 그것이다.

 

이서지는 삼십대 후반인 1970년대부터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의 정서가 깃든 해학적이면서도 하나의 역사적 기록으로 봐도 무방할 풍속화들을 그려왔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세시 풍속은 물론이고, 장터 풍경과 어머니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모두 이 계열에 속한다. 또 작년 2006년에는 <새벽 길>이라는 제목하에서 개최된 전시회에서 ‘한국 기독교사’를 모두 풍속화로 선보이는 엄청난 일을 해내기도 했다.

 

1972년 신세계 화랑에서의 첫 전시를 시작으로 막이 오른 그의 이러한 일관된 풍속화는 한국방송공사 등의 후원으로 한국에서 열린 많은 전시회는 물론이고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도 여러 번의 개인전을 통해 그의 풍속화가로서의 집념과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런 이서지가 최근 10여 년 간 확연히 다른 조형적 실험을 선보이고 있어 그를 아는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특히 아직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그의 대작인 <농무>를 비롯해 이번 <새로운 그림 세계展>에 나온 작품들은 고희를 넘긴 백발의 노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솟구치는 강렬한 리듬과 단순화된 인물들로 가득한 화면이 그림을 보는 이들을 압도해 온다. 어느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늙기까지 시를 쓰다니…” 이서지의 그림을 대하면 그림 앞에서 “늙기까지 그림을 그리다니…”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서지는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고, 여전히 변화를 꿈꾸고 있는 아마도 거의 유일한 화가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이 변화를 화두로 삼아 감상해야 할 것이다.정작 중요한 변화는 1990년대 들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화려한 색을 멀리하고 황토색 계열의 바탕에 검은 윤곽선으로 극히 단순화된 인물과 사물들의 형상을 묘사해 온 <낚시꾼>, <실내악>, <새> 등 1990년대 초, 중반에 그려진 그림들은 피카소의 반추상화를 연상시키면서도 한국화 특유의 투박한 질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배경에 등장하는 한글과 한자들은 암각화를 연상시키며 그림을 보는 이들을 태고의 먼 기억 속으로 인도해 간다. 화가는 어쩌면 이 일련의 그림들 속에서 글과 그림이라는 서로 다른 두 언어의 차이점을 궁금해 했는지도 모르고, 나아가서는 그 두 언어 너머에 있을 법한 보편적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상에 새겨진 무수한 글자들 위를 나는 새는 이런 화가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 다소 어둡고 묵직했던 그림들은 이후 마치 어떤 색의 계시라도 받은 듯이, 밝고 화려한 그림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급작스러운 것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그가 오랜 세월 매진해 온 삶의 세세한 풍경을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묘사한 풍속화 속에도 사물들의 외관을 뚫고 들어가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가로가 긴 풍속화에서는 이런 우리네 삶이 갖고 있는 외관만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적 세계와 연결시키려는 집념이 서려 있었다. 어느 그림이든 그가 그린 풍속화 양 끝에는 거의 언제나 산수화가 자리잡고 있고 그 산수화 속에는 구름이나 농무에 감싸인 선경이 묘사되어 있다.

 

풍속화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 선경이 풍속화 속에 등장한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것은 화가 이서지가 늘 삶과 사물들의 외관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해 관심을 열어 놓고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열리고 있는 <새로운 그림 세계展>은? 평범한 전시회 제목과는 달리 이러한 화가의 풍속화가로서의 면모, 현실과 사물 너머의 세계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조형 언어의 탐구 등이 종합적으로 구현된 일련의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다.


 주제는 결코 새로워지지 않았다. 십장생, 맹호도에 등장하는 호랑이, 까치, 절의 목어, 굿 등 민속적이고 민화적 주제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주제는 전혀 다른 화법으로 표현되었다.

 

<십장생>은 전통적인 10개 생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과장된 채 서로 혼융되어 그 변형과 움직임 자체로 생명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그림에 다른 이름을 붙여도 무방하다. 가령 <생명>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좋을 것이다. <맹호도>의 맹호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단청이나 색동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색들은 ‘호랑이’라는 모티브를 빌렸을 뿐, 그림은 색과 선의 향연 그 자체다.

 

마치 붓놀림이 서툰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형상들과 사물들의 어눌하기만 한 배치는 그의 다른 그림들인 <무당>, <목어> 등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옛날의 풍속화에 보이던 해학과 민중에 대한 애정이 여전히 그의 붓끝에서 사라지지 않고 추상화 속에 그대로 이어져 흐르고 있는 것이다. 사물들은 원근법을 무시한 채 언뜻 아무렇게나 배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니다. 작가는 지금 사물들의 다른 질서를 찾고 있는 것이다. 먼 기억과 그 기억 끝에서 언제나 화가를 지배하고 있는 원초적인 생명의 형상들과 색들, 화가는 그것들에게 자유를 주어 한지 위에 마음대로 풀어놓으려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그림들을 보면서 혹자는 몽환적인 샤갈의 그림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스페인 화가 호안 미로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연이 아니다. 대가들은 모두 늙기까지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들 속에는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순진함이 모든 구속을 벗어나 자유자재로 형태와 색들의 축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 최대 걸작은 <농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연상시키는 역동성, 마티스의 <춤>을 떠올리게 하는 군무의 원시성은 이 <농무> 앞에 오래 서 있게 한다. 남자가 아닌 ‘수컷’으로서의 그리고 여자가 아닌 ‘암컷’으로서의 생명을 억압당한 채 그날 그날의 일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서지의 <농무>는 농악과 사물놀이의 굉음을 힘차게 울려준다. 백발이 성성한 한 노화가가 지금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자신보다 더 젊은 우리들을 향해 큰 소리로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다. “어울려 함께 노래하자. 모두 함께 춤추자”고.




글_정장진(문학평론가, 고려대 강사) 자료제공_선바위 미술관(02-507-8588)




 

 봄 - 산사의 명상음악


 

 

  
2008. 3.9.carlas 
 
출처 : 백합 정원
글쓴이 : lil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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